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다윗과 골리앗간 ‘문화재 전쟁’을 아십니까. 그것도 한번도 아니라 3차례 전쟁을 벌였는데요.
골리앗은 일본 야마나카(山中) 상회라는 고미술 무역상이었습니다. 19세기 이후 미국 뉴욕·보스턴·시카고와 영국 런던, 중국 베이징(北京) 등에 지사를 둔 세계적인 골동품 거상이었는데요. 도자기류와 온갖 석물 등 엄청난 조선 문화재를 서구와 일본에 반출하기도 했죠. 상회를 이끈 이는 야마나카 사다지로(山中定次郞·1866~1936)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야마나카는 야마토(大和) 민족의 문화적 진출에 발군의 성적을 세운 걸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요. 그런 골리앗에게 도전장을 내민 다윗은 간송 전형필(1906~1962)선생이었습니다. 간송 역시 당대 한국에서 알아주는 부자였지만 세계적인 골동품상인 야마나카 상회와 비교할 수는 없었죠.
■다윗과 골리앗의 문화재 전쟁
그런 다윗(간송)이 골리앗(야나마카)과 처음 마주친 것은 1933년이었습니다.
간송은 일본 오사카의 야마나카 석조진열소에서 열린 경매에서 ‘불국사 전래’라는 출토지가 명시된 통일신라 3층 석탑을 낙찰받았습니다. 낙찰가는 기와집 6채값인 6000원이었는데요. 그러나 이 첫번째 대면은 결과적으로 간송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왜냐면 거액을 들여 낙찰받은 통일신라 3층 석탑이 훗날 고려시대 석탑으로 판명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격대결을 앞둔 상견례에 불과했습니다.
1년 뒤(1934년) 간송은 일본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책(<조선미술사>)에 실린 흑백도판에 푹 빠졌는데요.
훗날 ‘주유청강(舟遊淸江)’과 ‘상춘야흥(賞春野興)’이라는 이름이 붙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2점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포함해서 30점의 혜원 그림을 소장한 이는 다름아닌 야마나카 상회의 대표인 야마나카 사다지로였습니다.
간송은 오사카로 달려가 야마나카 사다지로를 대면하고 일단 혜원의 풍속도 30점을 확인했습니다.
과연 한 점 한 점이 담 안에 갇혀있던 여성들을 울타리 밖으로 해방시킨 놀라운 작품이자, 당대 양반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한 풍속도였습니다.
간송과 아마나카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입니다. 야마나카는 “멀리까지 왔으니 4만원까지 내려준다. 그 이하는 안된다”고 딱 잘라 제안합니다. 그러나 간송은 “2만원 이상은 안된다”고 고수합니다. 야마나카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간송은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인연이 없나 보네요. 섭섭하지만 직접 그림을 보았으니 눈이 호강한 것으로 만족하렵니다.”
간송이 작별인사를 고하자 야마나카가 여운을 남겼습니다.
“작년 석조물 경매 때 선생의 기개를 봤는데…. 이 화첩은 선생 것이라는 느낌이….”
야마나카의 말에 다시 흥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야마나카는 “만원씩 양보하자”고 했습니다. “3만원으로 하되, 1만원이 부담된다면 어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간송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집니다.
“전 외상은 싫습니다. 2만5000원에 합시다. 현금으로 지불하겠습니다.”
간송은 28살 젊은 소장가였고, 야마나카는 68살의 노회한 골동품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야마나카는 간송의 손을 쿨하게 잡았습니다. “내가 양보하겠소. 전 선생, 축하드립니다.”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혜원의 풍속도 30점이 조선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참기름병을 두고 벌인 자존심 싸움
간송과 야마나카의 2차전은 누가봐도 간송의 승리였습니다. 양측은 2년 뒤인 1936년 또 다시 불꽃튀기는 접전을 벌입니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대결의 시작은 1920년대초까지 올라갑니다.
참기름을 팔던 행상이 서울 황금정(을지로 1가)에 사는 단골 일본인 여성을 찾아갑니다.
“시골에서 방금 짜온 참기름이라 고소해요. 4원에 사세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죠. 일본인 여성의 남편은 골동품상(무라노·野村)이었습니다.
일본인 여성의 눈에 기름을 넣은 병이 밟혔답니다. 일본인 여성은 기름장수에게 병값을 1원 더 쳐주고 참기름과, 참기름을 담은 병까지 구입합니다. 기름병을 본 골동품상 남편은 아내의 안목에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보기에도 대단한 백자였습니다. 붉은 색 진사(辰砂)와 검은 색 철사(鐵砂), 푸른 색 청화(靑華) 등 3가지 안료를 함께 장식했습니다. 백자의 앞뒤 면에는 국화와 난초를 그렸으며, 벌과 나비들이 노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이 병은 18세기 전반 왕실의 도자기를 굽던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을 주민이 광주 분원의 가마터에 묻혀있던 백자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참기름을 넣어 내다팔았음이 분명합니다.
똘똘한 아내 덕분에 귀한 조선백자를 단돈 1원에 얻은 무라타는 다른 골동품상에게 60원을 받고 넘깁니다. 단번에 60배 남는 장사를 했지만, 이 또한 푼돈이었습니다.
1936년 11월 22일 이 백자는 두 사람의 손을 더 거치는 사이 3000원의 몸값을 자랑하면서 경성구락부 경매에 출품됩니다. 간송은 경매에서 현재 심사정(1707~1769)과 겸재 정선(1676~1759)의 폭포 그림을 ‘찍어’ 두고는 문제의 참기름병용 조선 백자에 눈길을 돌립니다.
간송은 경매에 직접 참여합니다. 반드시 낙찰받겠다는 의지를 보인겁니다. 일단 심사정과 정선의 작품 두 점은 별 어려움없이 낙찰받았습니다. 오후 경매에 문제의 백자가 탁자 위에 올랐습니다. 가격이 순식간에 ‘7000’으로 뛰어 올랐습니다. 경매사가 ‘이대로 낙찰이냐’는 듯 장내를 둘러보았을 때 간송의 대리인인 신보가 ‘8000!’을 불렀습니다.
경매사가 “자! 8000입니다. 더 없습니까. 8000….”이라고 하며 경매봉을 치려던 순간 ‘9000!’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나카 상회측이었습니다.
간송의 대리인(신보)이 곧바로 ‘1만!’을 불렀습니다. 이때부터 500원 단위의 싸움이 시작되고, 그렇게 ‘1만4500’이 되자 10원 단위로 올라갔습니다. 1만4510, 1만4520, 1만4530…. 자존심 싸움이 계속되더니 간송측이 ‘1만4580!’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야마나카 상회측이 침묵에 빠졌습니다. 항복을 선언한거죠.
전형필과 야마나카 사이에 펼쳐진 조선백자 경매사상 최고의 명승부는 이렇게 전형필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렇게 낙찰받은 조선백자는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국보)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전형필이 거대자본 야마나카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액수(1만4580원)은 당시 기와집 15채 가격이었습니다. 간송과 야마나카 간의 다윗과 골리앗의 문화재 전쟁은 다윗의 2승1패로 끝나고 맙니다.
■논 1만마지기 팔아 국보 8점 구입
비단 야마나카와의 맞대결 뿐이 아니구요.
간송이 구입 소장한 국보 보물급 유물 중에는 일본 도쿄에 살다가 귀국한 영국인 변호사(존 개스비)로부터 사들인 최고급 명품 청자 20점도 들어있습니다. 이 중 7점이 해방 이후에 국보와 보물이 되었는데요.
이 유물의 일괄가격이 40만원이었는데요. 당시 그만한 현금이 없던 간송이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팔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80㎏ 쌀 1만 가마니를 수확하는 논이었다는군요. 간송의 노모가 “사금파리 사려고 논을 파는 게 말이 되냐”고 기막혀 했다고 합니다. 간송은 그렇게 산 청자 20점을 포장한 오동나무 상자를 비행기 화물칸 아닌 좌석에 고이 모셔왔다고 하는데요.
제아무리 부자라도 문화재를 구입하는데 몇 천억원대의 재산을 던질 이가 지금 몇이나 되겠습니까.
간송의 업적 가운데 백미는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의 확보라 할 수 있죠.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우리말글 연구 교수인 고노 로쿠로(河野六郞·1912~1998)가 해방 후(194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1940년 당시 경성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원본을 볼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거든요.
만약 해례본이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간송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수장가 등이 눈독을 들이던 국보 청자상금 운학문 매병을 2만원이라는 거금을 현금으로 주고 사들이기도 했다. 월탄 박종화(1901~1981)는 “간송은 막대한 돈을 들여 민족의 얼을 사들였다”고 했답니다.
■상속세 단 한푼도 낼 필요없는데…
그렇게 간송이 평생을 두고 수집해온 문화유물, 그것도 국보·보물들이 속속 경매에 출품되고 있는데요.
간송문화재단이 2020년 ‘보물’인 금동보살입상·금동여래입상을 내놓더니 이번에는 국보인 ‘계미명(癸未銘) 금동 삼존불 입상’과 ‘금동 삼존불감’을 경매에 출품했답니다. 지난해 시장에 나온 보물 두 점은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이 모두 구입했습니다. 이번에 나온 국보 두 점 역시 첫번째 경매에서 유찰됐습니다.
간송가에는 국보 12건, 보물 30건, 시도문화재 4건 등 모두 46건의 지정문화재가 남아있는데요.
간송가의 국보·보물 매각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우선 간송측이 문화재 상속세의 부담 때문에 국보·보물의 매각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닐겁니다. 간송측이 일정조건을 갖추고 있다면 지정이든 비지정이든 문화재에 관한 한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간송 소장 지정문화재는 ‘모든 지정문화재는 비과세되는 상속재산’이라고 규정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에 따라 상속세가 면제됩니다. 그럼 비지정문화재는 내야 할까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간송미술관이 국세청이 인정한 ‘성실한 공익법인’이라면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상속세 및 증여세법 16·48·49조)
그 뿐이 아닙니다. 만약 간송미술관이 박물관 및 미술진흥법(16조)에 따라 등록된 박물관(미술관)이라면 전시 혹은 보존 중인 문화재에 대해서는 상속세가 유예됩니다.(상속세 및 증여세법 74조) 간송이 이런 요건을 충족했다면 간송이 소장한 문화재는 지정이든 비지정이든 예외없이 상속세 면제 혹은 유예 대상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간송가가 국보·보물들을 잇달아 시장에 내놓는 것은 단순히 문화재에 붙는 상속세 때문이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물론 어떻든 간에 재단이 재정압박을 받으면 문화재 관리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니까 고육책으로 파는 거다 뭐 이렇게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간송컬렉션의 의미
또 문화재보호법상 해외반출이 아니라면 국보·보물도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운영해온 간송가의 소장품을 국립박물관 등이 확보해서 관리하는 편이 낫지 않느냐는 여론도 있습니다. ‘차라리 국가기관이 맡는게 낫다. 또한 간송이 일제강점기에 가산을 털어 사들인 문화유산이 아니냐. 그런 간송가가 어렵다는데 이제는 나라에서 걸맞은 값을 쳐주고 구입하는게 옳다’는 이야기도 나올 법합니다.
하지만 다른 여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간송측이 그동안 제대로 된 자구노력을 했는지 의심스럽다는 겁니다.
간송측은 ‘지원받으면 간섭도 받는다’는 이유로 미루던 ‘사립 미술관 등록’도 2019년 9월에야 마쳤습니다. 덕분에 국고지원도 상당합니다.
완공을 앞둔 새 수장고 건립에 국비와 지방비 등 78억원이 지원됐습니다. 2023년 7월 준공·하반기 개관을 목표로 한 대구간송미술관 역시 국비(30억원)와 대구시비(370억원)를 합해 4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입니다.
게다가 각종 법으로 문화재 상속세를 면제 혹은 유예해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국보·보물의 매각으로 차익을 얻으라는 것이 아니죠. 문화유산을 잘 관리하라는 차원에서 마련한 법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집·소장자의 정신입니다. 이른바 ‘컬렉션’이라는 것에는 문화재의 수집·소장가의 얼과 시대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온갖 어려움 끝에 한 점 한 점 모은 유물의 가치가 모여 간송컬렉션이 된 것이고, 나아가 2019년 특별전의 제목처럼 ‘대한 콜랙숀’이 된겁니다. 그런 컬렉션에서 한 두 점씩 골라 매각한다면 그것은 간송의 정신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 뭐 그런 여론도 있더라구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기사를 위해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충렬 ‘간송 전형필’ 전기작가 등의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이기환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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