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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동굴 속 한줄기 빛을 따라갔더니 신라 진흥왕의 낙서가 보였네

2015년 12월 6일 일요일 오전 11시 무렵이었습니다. 모처럼 가족여행 중이던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울진 성류굴에 잠시 들렀습니다. 

목적지인 봉화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일러서 따뜻한 동굴에서 시간을 보내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 동굴로 막 들어서려던 박관장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동굴의 왼쪽 벽면에서 심상치않은 글자들이 보인겁니다. ‘癸亥(계해)’로 시작되는 명문이었는데요. 박관장은 울진군 학예연구사인 심현용씨에게 발견사실을 신고했습니다. 
곧 본격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동굴 입구의 벽면에서는 이미 조선 후기(1857년)에 새겨놓은 명문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명문과 불과 1m도 채 안되는 곳에 ‘삼국시대 명문’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2019년 우연히 발견된 성류굴의 삼국시대 낙서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끌만한 것은 역시 ‘진흥왕이 경진년에 행차했다’는 명문이었다.

박홍국 관장의 ‘매의 눈’이 올린 개가였던 거죠. 본격 조사결과 명문은 39~40자(7행)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요. 대체로 ‘계해년에 대나마(17관등 중 10번째)이자 동굴관리자인 하지와 그 일행이 성류굴에 와서 쉬고 먹었던 사실을 기록한 낙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해년’은 어느 해일까요. 연구자들은 ‘대나마와 같이 ’대(大)’ 자가 앞에 붙는 관등은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한 520년 즈음부터 시작됐을 거라고 봅니다. 또 신라의 경우 계해년처럼 간지를 쓰는 관행이 6~7세기까지이며, 이후에는 중국연호로 바뀌는데요. 따라서 낙서의 연대는 ‘543년(진흥왕 4) 계해년’일 가능성이 높은데요. 학계에서는 603년(진평왕 25), 663년(문무왕 3), 723년(성덕왕 22) 등도 거론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연대를 두고는 아직 설왕설래 중입니다. 

■숨길 수 없었던 낙서의 본능
여기서 궁금증이 들죠. 성류굴이 어딥니까. 고생대(2억5000만년전)에 생성되어 온갖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 석주, 베이컨시트(삼겹살 닮은 종유석)와 동굴진주, 석화, 동굴산호, 동굴방패 등을 자랑하는 곳이죠. 예부터 ‘지하 금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곳을 찾은 시인 묵객들이 앞다퉈 기행문과 풍경화를 남겼습니다.
고려말 학자 이곡(1298~1351)의 성류굴 탐사기가 대표적인데요. 
“조물주의 묘한 솜씨는 헤아릴 수 없다. 자연스럽게 변화한 경치인가, 혹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인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틀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오묘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일부러 만든 것이라면, 천세·만세토록 귀신이 공력을 쏟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이곡의 ‘동유기’)
이후에도 김시습(1435~1493)과 성현(1439~1504), 이익(1681~1764) 등이 글과 시를 남겼고, 겸재 정선(1676~1759)과 단원 김홍도(1745~?) 등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뿐이 아니구요.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는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싶어하는 영역표시의 본능이 있죠. 그것이 낙서죠. 앞서 언급했던 동굴 입구에만 낙서를 했을까요. 
아닙니다. 동굴 안 벽면에도 그런 낙서가 숱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중 일부가 심현용 학예연구사가 펴낸 <울진의 금석문 Ⅰ·Ⅱ>에 실려있는데요. 그러나 그렇게 실린 것은 절대대수가 ‘조선시대 낙서들’이었습니다. 

■한줄기 빛 속에서 찾아낸 비밀통로 
2019년 3월21일 심현용 학예사가 이종희 한국동굴연구소 실장과 함께 성류굴의 제8광장을 찾았습니다. 
8광장은 심현용 학예사가 예전에 조선시대 낙서를 찾아낸 곳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한줄기 빛이 동굴안을 비췄습니다. 그 빛은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했습니다. 이때 동굴전문가 이종희 실장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각도가 달라 여기서는 작은 빛처럼 보이지만 저 곳에 사람 한명이 드나들 수 있는 입구가 있어요.”
심현용씨가 긴가민가해서 가보았더니 정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있었습니다. 입구를 지나 한 5m쯤 갔을까요. 
심현용 학예사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동굴 안 석주와 석순, 그리고 동굴벽면에서 다수의 글자를 발견한 겁니다. 두 사람은 바삐 글자를 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정원(貞元) 14년’이라는 명문 낙서 2개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분명 연대를 알 수 있는 연호였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벽면에서 화랑의 이름인 것 같은 ‘~랑(郞)’자가 여럿 보였습니다.
바위 틈에서는 완전히 탄 숯조각도 발견됐는데요. 이것은 옛 사람들이 동굴에 들어와 피운 불의 흔적이었습니다.

동굴밖으로 나온 두사람은 심현용 학예사의 차에 있던 ‘동양연표’를 들춰보았습니다. 과연 ‘정원’이라는 연호가 있었습니다. 당나라 덕종의 연호(정원·785~805)였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동굴을 방문한 시기가 ‘정원 14년’, 즉 798년(원성왕 14년)이었던게 분명해졌습니다. 500원짜리 동전만한 한줄기 빛이 (통일)신라 시대로 들어가는 비밀통로였던 셈입니다.

한줄기 빛을 따라 들어간 통로의 벽면과 석순, 석주에서 다수의 글자가 확인됐다. 그중 ‘798년(원성왕 14)’임을 알리는 ‘정원(貞元)’ 연호가 눈길을 끌었다.

■“진흥왕 이곳에 행차하시다”
이후 성류굴 조사에서 삼국시대부터 현대 영어까지 1500년 동안 새겨졌거나 쓰여진 낙서들이 계속 확인됐습니다.
그중 가장 관심을 끌만한 명문은 ‘경진 6월일(庚辰六月日)/책작익부포(柵作(木+益)父飽)/여이교우신(女二交右伸)/진흥왕거(眞興王擧)/세익자오십인(世益者五十人)’ 등 25자였습니다.

이중 ‘진흥왕거’ 4자는 다른 글자보다 크게 써서 강조했는데요.
아무래도 진흥왕(재위 540~576)의 행차와 관련된 기록이니 큰 글자로 새겼겠죠. 그 의미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경진년(560년·진흥왕 21년) 6월○일, 잔교(柵)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 둘이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다. 진흥왕이 다녀가셨다(행차하셨다). 세상에 도움이 된 이(보좌한 이)가 50인이었다.”

잔교란 부두에서 선박에 닿을 수 있도록 놓은 다리 모양의 구조물입니다. 이상하죠.
진흥왕이 동굴을 탐사하는데 무슨 다리가 필요하고, 배가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래서 학계 일각에서는 진흥왕이 배를 타고 왕피천을 건너 성류굴까지 행차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동굴 안에도 깊이가 8m가 넘는 넓은 호수(제5광장)가 있습니다. 진흥왕이 이 호수를 지나기 위해 배를 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경진년 진흥왕거’ 명문은 제5광장을 지나 도달해야 하는 제8광장에 있습니다. 요즘의 카누 같은 배라면 아무리 동굴 입구가 좁다하더라도 통과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이 명문은 진흥왕의 행차와 관련해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아시다시피 진흥왕은 자신이 넓힌 영토를 순행하면서 척경·순수비(창녕비·북한산비·마운령비·황초령비) 등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런 진흥왕이 경진년(560년)에 울진 성류굴 일대를 행차했다는 사실은 어떤 문헌에서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 
<삼국사기> ‘진흥왕조’를 보면 559~561년 사이가 공백으로 남아있거든요. 아무튼 ‘경진년 진흥왕거’ 명문 하나만이라도 신라사를 새롭게 구성하고 당시의 정치·사회 변화상을 엿볼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임에 틀림없습니다. 

성류굴이 단체 여행의 단골코스였던 것 같다. 인도자(지도자)가 무리를 이끌고 왔다는 낙서들이 상당수 보인다. 심지어 일목이라는 인도자는 164명의 답사객과 함께 성류굴을 찾았다는 낙서를 남겼다.

■화랑들의 유람터이자 수련장소
임금만 성류굴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굴 안에서는 대나마(17관등 중 10관등)와 길사(14관등), 그리고 병부사(12~17관등이 취임하는 자리) 등 비교적 낮은 관등의 관리들도 개인적으로 성류굴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류굴 유람을 위해 관청에 휴가를 청하고 성류굴을 찾아 ‘내가 왔다 가노라!’하고 낙서를 새겼을 겁니다.
특히 심현용 학예사 등이 발견한 ‘정원 14년’ 낙서는 3종류가 있는데요. ‘범렴’과 ‘청충과 향달’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그중 범렴은 승려일 가능성이 높다네요.
낙서 가운데 특히 ‘~랑(郞)’ 이라고 새긴 이름이 다수 보이는데요. 아무래도 화랑이 아니었을까요. 등장하는 ‘~랑(郞)’은 정랑과 고랑(高郞), 임랑, 신양랑, 부문랑, 고랑(古郞), 원물랑, 상랑 등입니다. 
“신유년에 재석산, 본공랑, 차벌산 등이 와서 보았다.(辛酉年 見在石山 本共郞 叉伐山 得世)”
“양진 10량(또는 양진과 십량), 임랑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보았다.(良珍十刃 林郞訓見).”
“신(혹은 중)양랑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보았다. 선산녀, 범렴(伸(또는 仲)陽郞訓見 善山女(또는 文)/梵廉)”
“일목이 164명을 이끄록 다녀가다.(一目一百六十四幷)”
또한 낙서 중에는 ‘향도(香徒)’라는 단어가 두번 보이는데요. ‘향도’는 신앙집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김유신(595~673)의 ‘용화향도(龍華香徒)’ 처럼 화랑도의 별칭일 수도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성류굴은 화랑이나 승려 등이 찾아오는 유명한 명승지이자 수련장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다섯 오(五)자를 마치 모래시계처럼 쓴 낙서가 더러 보이는데, 이런 필체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 제작)의 ‘오(五)’자와 흡사했습니다. 낙서의 연대를 6세기 초반, 즉 삼국시대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겁니다. 

성류굴 낙서에서는 오(五)자를 마치 모래시계(&#10710;)처럼 쓴 낙서가 더러 보인다. 오(五)자를 모래시계처럼 쓴 예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 제작)에서 보인다. 성류굴 낙서의 연대를 봉평비가 제작된 6세기초(524년)까지 올려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낙서하는 인류’
가만 생각해보면 옛 사람들의 낙서가 성류굴에만 있었겠습니까. 
1970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 발견된 천전리 각석(국보)에도 선사인들의 ‘알 수 없는’ 그림과 함께 신라 화랑들의 낙서가 어우져있는데요. 이중 선사인들은 기하학 문양과 각종 동물상을 바위면에 새겼죠. 
그런데 이 선사인들의 그림 위에 신라 화랑들의 낙서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 가운데 문첨랑, 영랑, 법민랑 등은 화랑 이름이 분명합니다. 그중 법민랑은 삼국을 통일한 김법민, 즉 문무왕(재위 661~681)의 화랑 시절 이름이죠. 이곳 역시 화랑들이 즐겨 찾던 명소이자 수련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낙서 중에 특히 두 문장이 흥미로운데요.

울주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선사시대~현대까지의 낙서들. 선사인들이 가하학 문양과 각종 동물상을 그렸다. 그 위에 신라 화랑들의 낙서도 새겨졌다. 특히 눈에 띄는 두 개의 글. 525년(법흥왕 12)과 14년 뒤인 539년(법흥왕 26년) 새겨진 글인데 두 글에 깊은 관련이 있다.

“을사년(525년)에 갈문왕이 놀러 와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함께 온 벗은 누이인, 아름다운 덕을 지닌 밝고 신묘한 ‘어사추여랑님’이다.”
“정사년(537년)에 갈문왕이 죽었다. 그 비 지소부인이 갈문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기미년(539년) 7월3일, 갈문왕과 누이(어사추여랑)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법흥왕비)와 사부지왕자(갈문왕의 아들·진흥왕)가 함께 왔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사롭지 않죠.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인데요. 

‘525년(법흥왕 12년) 낙서’는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이 누이이자 연인관계인 어사추여랑과 천전리 계곡을 놀어온 기념으로 새긴 낙서이다. 그런데 537년에 죽은 남편 갈문왕을 그리워하며 천전리 계곡을 찾아온 여인은 어사추여랑이 아니었다. 갈문왕의 부인이 된 지소부인이었다. 지소부인은 남편인 갈문왕의 조카(법흥왕의 딸)이었다. 갈문왕은 누이이자 연인이었던 어사추여랑이 아니라 조카(지소부인)와 혼인한 것이다. 525년과 539년 새겨진 두 낙서에는 갈문왕과 누이, 조카 등이 어우러진 근친간 사랑과 이별, 정략결혼 등 예사롭지 않은 사연이 응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갈문왕이 누이인 어사추여랑과 연인관계였다는거죠. 둘은 525년 천전리 계곡을 찾아 사랑을 약속했구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갈문왕은 어사추여랑과 백년가약을 맺지 못합니다. 갈문왕은 형님의 딸(법흥왕의 딸)이자 조카인 지소부인과 혼인하는데요. 그런데 갈문왕은 왕위를 잇지못한채 537년 죽고 맙니다. 
갈문왕의 부인은 죽은 남편을 기리며 생전에 남편이 어사추여랑과 천전리 계곡을 찾아와 새겨놓은 명문을 살펴보았다는 겁니다. 이 낙서에는 갈문왕과 누이, 조카 등이 어우러진 근친간 사랑과 정략결혼 등 예사롭지 않은 사연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관계는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없구요. 성류굴과 천전리 각석에서 보듯이 선사인이나 신라인이나 뭔가 공백이 있으면 끄적대고 싶은 본능은 감출 수 없었나 봅니다. ‘낙서하는 인류’라 표현해도 좋을 것 같아요.
성류굴의 조사는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류굴이 존재했고, 또 인류가 터전을 잡고 살았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안에는 당대의 삶을 응축해 표현한 낙서나 그림이 어두운 동굴안 아디엔가 남아 있겠죠.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손때가 묻은 자취를 일개 지자체에 맡겨서야 되겠습니까. 뜻있는 연구자들은 국가기관이 나서서 성류굴 종합조사를 해주길 바라고 있답니다.  경향신문 역사스토리텔러
(이 기사를 쓰는데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과 심현용 울진군청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