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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세종대왕이 18왕자를 2열횡대로 세웠다…숨어있던 19남 나타났다

얼마전 ‘인종대왕 태실’과, ‘장조(사도세자)·순조·헌종 태봉도’(3점)가 보물로 지정예고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왕실의 태를 묻은 태실(인종태실)과, 태실의 위치도를 그린 태봉도 3점(장조·순조·헌종)의 문화유산 가치를 평가한 건데요. 
태는 태아를 싸고 있는 조직입니다. 산모가 태아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태반과 탯줄’을 가리킵니다. 
궁금증이 생기죠. 아무리 왕실 자녀의 태라지만, 어떤 의미가 있기에 국가지정문화재로 대접해준단 말입니까.  

■“탯줄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
1570년(선조 3) 2월1일 <선조수정실록>을 볼까요. 
“태실을 조성하는 풍습은 신라와 고려 사이에 생겼는데, 예부터 중국에는 없었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595~673)의 태를 높은 산(충북 진천)에 묻었는데, 지금(고려)도 이 산을 태령산(胎靈山)이라 일컫는다”고 부연설명했는데요.

태를 묻는 풍습이 근 140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니구요. <고려사> ‘지리지·진주(진천)조’에는 “김유신의 태가 신령으로 변함에 따라 태를 묻은 산을 태령산이라 일컬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왜 이렇게 태를 신령한 존재로 여겼을까요. <세종실록> 1436년 8월8일자를 볼까요.

“사람이 태어나면 태로 인해 장성하게 되고 ‘현명할 지 어리석을 지(賢愚)’, ‘잘될 지 못될 지(盛衰)’가 모두 탯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는 신중히 다뤄야 합니다.”
<세종실록>은 이어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해져서 학문을 좋아하고 구경(九經·9개 유교경전)에 정통하며, 원만하고 마음이 밝고, 병이 없게 되며,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의 태도 길지를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들이 우러러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럼 길지(좋은 땅)이란 어디일까요. <세종실록>은 “길지란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바치는 듯 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왕자들의 태실과 떨어진 곳에 조성된 원손 단종의 태실에서는 “1441년 윤 12월26일 원손의 태를 묻었다”는 아기태비가 보였다. 1453년 즉위한 단종의 태실은 군주의 격식에 맞게 가봉된 뒤 인근 성주 법전리 법람산으로 이안됐다.

즉 젖무덤처럼 봉긋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를 가리키는데요. 이걸 ‘돌혈(突穴)’이라 합니다. 이런 곳을 찾아 태를 묻어야 남자나 여자나 반듯하고 예쁘게, 남들이 우러러보는 존재로 출세한다고 여긴 겁니다.
그후 잇단 정변(계유정난·1453년, 중종반정·1506년, 인조반정·1623년)의 패자(안평대군·연산군·광해군) 태실이 예외없이 파괴·혹은 훼손되는데요. 태실의 파괴는 곧 조상과 이어지는 핏줄을 끊는다는 뜻이죠. 태를 왕조의 혈통, 즉 정통성의 상징으로 여겼던 겁니다.

■아들들의 태를 2열 횡대로 모아둔 세종 
조선 개국 후 4대째인 세종이야말로 태실제도를 확립시킨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북 성주 선석산(해발 742.4m) 끝자락에 봉긋하게 솟아 오른 태봉(258.2m)이 있는데요. 풍수상 돌혈(突穴·돌출된 혈)이라 합니다. 태봉의 정상부 평탄지(남북 50m, 동서 20m)에 세종대왕의 아들(18명)과 원손(단종)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줄지어 있습니다. 사적 명칭은 ‘세종대왕자 태실’인데요. 원칙으로는 ‘세종대왕 왕자와 원손(단종) 태실’이라고 해야 맞겠죠.
아무튼 아들들 가운데 왕통을 이을 세자(문종·재위 1450~1453)의 태실만 경북 예천(명봉산)에 따로 조성했구요. 

세종대왕 왕자 태실에서 새롭게 확인된 세종의 ‘숨어있던’ 막내(19남)인 왕자 당. 1442년 7월24일 태어났고, 그해 10월23일 태를 묻었다는 사실이 아기비와 태지석에 새겨져있다.

다른 대군(7명)과 군(11명)의 태실이 2열 횡대로 서있습니다. 
사진상으로 앞줄은 진양대군(수양대군, 훗날 세조·1417~1468)~안평대군(1418~1453)~임영대군(1420~1469)~광평대군(1425~1444)~금성대군(1426~1457)~평원대군(1427~1445)~영흥대군(영응대군으로 개봉·1434~1467) 등의 순으로 조성했습니다. 뒷줄은 왼쪽부터 화의군(1424~?)~계양군(1427~1464)~의창군(1428~1460)~한남군(?~1459)~밀성군(1430~1479)~수춘군(1431~1455)~익현군(1431~1463)~영풍군(1434~1457)~영해군(1435~1477)~담양군(1439~1450)~왕자 당(1442~?) 순으로 배치했습니다.
앞줄은 정부인(소헌왕후·1395~1446)이 낳은 적자를, 뒷줄은 후궁들이 낳은 서자를 태어나는 순서대로 배치한 겁니다.
당시 원손(단종·1441~1457)의 아기태실은 영응대군 태실에서 서북쪽으로 11.2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를 묻은 선석산 태실에는 세조의 태실(아기태실+가봉태실)이 다른 형제들과 함께 그대로 남아있다. 즉위 후 ‘가봉(加封·군왕의 격에 맞도록 태실을 별도의 길지에 옮기고 치장)’ 태실을 조성해야 했지만 세조가 “ 임금의 격에 맞게 석물만 따로 만들고 태실을 옮기지는 마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세조는 “형제들의 태가 여기 있는데 굳이 따로 태실을 옮길 필요가 있느냐”면서 형제애를 나타냈다.

■세종의 숨겨진 아들, 19남이…
세종의 자녀가 18남 4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리겠네요. 
세자인 문종의 태실이 다른 곳에 조성되었다면 선석산의 왕자 태실에는 17기(단종의 아기태실 제외)만 남아 있어야 하죠. 그런데 왜 18기일까요. 선석산 태실의 배치도를 보면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세종대왕의 숨겨진 아들이 한 분 더 계시다는 겁니다. 그 분이 바로 ‘왕자 당(당)’입니다. 
‘왕자 당’의 아기비와 태지석에는 “1442년 7월24일 오전 3~5시 사이에 태어났고, 태는 그해 10월 23일 묻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왕실족보인 <선원보>에는 적·서자를 통틀어 ‘막내(18남)=담양군 거(1439년생)’라 했습니다. 
‘1442년생 당’은 왕실 족보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 18번째(문종 제외) 태실의 주인공인 ‘당’은 과연 누구일까요. 없는 자식의 태를 묻지 않았다면 자명해지죠. 
마지막 태실(18번째)의 주인공은 1442년에 태어난 세종대왕의 막내, 즉 19남(서자 11남)인 왕자 당(1442년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이 ‘왕자 장’은 왕실족보에 오르지 못했을까요. <세종실록> 1446년 3월 28일자를 봅시다.
세종은 부인(소헌왕후)이 승하했을 때 “겨우 8세인 담양군(이거·1439년생)은 가장 어리니 상복을 입지 말라”는 명을 내렸는데요. 그렇다면 담양군(18남)보다 3년 뒤에 태어났던 왕자 당은 1446년 이전에 죽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은 “5살도 채 안되어 죽은 왕자였기 때문에 왕실 족보에도 올라가지 않거나 누락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그게 맞다면 18남 4녀로 알려진 세종의 자녀는 19남 4녀로 고쳐야 할까요.
세종은 세자를 빼고도 아들 18명의 태가 묻힌 선석산을 생각하면 얼마나 흐뭇했을까요. 날로 번창해가는 왕실을 떠올렸겠죠.

세조는 ‘형제애’를 강조하며 즉위 후에도 선석산 태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 결과 계유정난(1453년)과 단종복위운동(1456년) 이후 죽이거나 쫓아낸 조카(단종) 및 형제들(안평대군·금성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과 600년 가까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한결같이 똘똘했던 세종의 자녀들
세종은 세자를 빼고도 아들 18명의 태가 묻힌 선석산을 생각하면 얼마나 흐뭇했을까요.

날로 번창해가는 왕실을 떠올렸겠죠.
아닌게 아니라 세종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총명했습니다. 간단히 거론해볼까요.
세자인 문종을 볼까요. 그 분의 치세는 짧았지만(2년3개월) 대리청정(8년)까지 포함하면 10년간 조선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구요. 재위기간 중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임금과 소통한 일)를 허락했습니다.

이민족과의 전쟁·전란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기도 했죠. 세자 시절인 측우기를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수양대군(세조) 역시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와 보급에 힘을 보탠 것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업적이죠. 부왕(세종)의 명을 받아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했구요. 
즉위해서는 토지와 인구 비례에 맞도록 군현제를 정비했고, 직전법 실시 등으로 토지 제도를 개혁했구요. 호패법을 강화했고,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냈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펴냈으며 불경과 역사 편찬에도 힘썼구요.
셋째인 안평대군은 서예와 시문, 그림, 가야금 등에 두루 능한 팔방미인이었죠. 중국을 방문한 조선 사신이 “좋은 글씨를 구할 수 있냐”고 물으면 중국인들이 “조선에 최고(안평대군)가 있는데 왜 멀리까지 와서 구하느냐”고 반문했다죠.

이분들 뿐입니까. 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 등도 뛰어난 왕자들이었습니다. 임영대군은 부왕(세종)의 명을 받아 총통(銃筒) 제작을 감독했고, 큰형(문종) 즉위 후에는 화차를 제작했구요.

광평대군은 사서삼경과 <국어>, <좌전> 등에 능통했고 음률과 산수에도 밝았답니다. 금성대군은 강직한 성품과 죽기를 각오한 충성심으로 이름을 남겼구요. 
평원대군은 어려서부터 시와 예, <대학연의> 등에 통달했고, 서예와 활쏘기, 말타기에도 능했답니다. 막내 영응대군은 당 현종(재위 712~756)의 이야기를 적고, 고금(古今)의 시를 덧붙여 엮은 <명황계감>을 한글로 번역했답니다. 사서에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군들의 능력 또한 이복 형제들과 다를바 없었을 겁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왕실의 태실을 조성하는 풍습은 신라~고려 사이에 시작됐고 중국에서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충북 진천 문봉리 태령산(해발 454m) 정상에 신라의 김유신 장군 태실이 자리잡고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에 “김유신의 태가 신령으로 변했기 때문에 산 이름을 태령산이라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악어의 눈물인가, 참회의 몸짓인가
선석산 태실에서는 또하나 흥미로운 관전포인트가 있습니다.
세조, 즉 진양대군(수양대군)의 태실입니다. 조카(단종)를 죽이고 등극한 세조라면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형(문종)처럼 태실을 따로 옮기고 화려하게 치장했을 것 같죠. 그런데 왜 그 자리에 서있을까요.
그렇지않아도 “빨리 태실을 옮기시라”는 주청이 있었는데요. 세조는 “가봉(加封·석물을 얹어 치장)은 하되 옮길 필요까지는 없다”(<세조실록> 1462년 9월 14일)고 손사래칩니다. 결국 세조의 명에 따라 가봉비만 세워 다른 왕자들의 태실과 구별짓는 것으로만 끝냈는데요. 세조의 한마디가 재미있습니다. 
“형제들의 태가 여기 같이 있는데 어찌 옮기겠는가. 다만 ‘수양대군(진양대군)의 비’라는 표석만 없애고 비석만 세워라.”

세종시대의 풍수가 정앙은 “사람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해져서 학문을 좋아하고 구경(九經·9개 유교경전)에 정통하며, 원만하고 마음이 밝고, 병이 없게 되며,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또 “여자의 태도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들이 우러러 보게 된다”고 했다. 세종은 풍수가 정앙의 글에 따라 길지를 골라 왕실 자녀들의 태를 묻기 시작했다. 정앙은 “길지란 젖무덤처럼 봉긋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를 가리킨다”고 덧붙였다. 이런 곳을 풍수상 ‘돌혈(突穴)’이라 한다.

비석의 내용도 의미심장합니다. “아아! 빛나는 오얏나무(李·이씨 왕조를 뜻함), 천 가지 만 잎사귀라…성태(세조의 태)를 옮기지 아니하니…검소한 덕이 더욱 빛난다”고 했습니다. 가히 눈물나는 형제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조의 형제애는 진심이었을까요.

세조가 형제애를 노래 부르기 4년 전인 1458년(세조 4) 7월 8일 실록기사를 볼까요.
“선석산에 주상(세조)의 태실이 봉안되어 있으나…그 중에 난신 이유(금성대군)의 태실이 섞여있고, 법림산(성주 가야산 기슭)에는 노산군(단종)의 태실까지 있습니다…유(금성대군)와 노산군(단종)의 태실을 철거하소서.”
무슨 말일까요. 원손 시절 단종의 아기태실이 세종의 아들(문종 제외 18명)과 함께 선석산에 묻혀 있잖아요. 
그런 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법림산에 따로 가봉태실을 꾸몄거든요. 그런데 1453년 일어난 계유정란에 안평대군이, 1455년 단종복위운동에 금성대군을 비롯해 화의군·한남군·영풍군 등이 연루돼죠.  

세종 때까지 왕자에게만 태실을 마련해주었지만 성종 때부터는 공주와 옹주들까지도 태실을 조성해준다.

역적죄를 뒤집어쓴 안평대군의 태실은 이미 훼손된 뒤였구요. 1458년의 실록은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금성대군 등 형제 4명의 태실까지 파괴했다”고 기록한 겁니다. 선석산에 조성되어있는 단종의 아기태실은 그냥 두었지만요. 인근 법람산(성주)에 따로 조성된 단종의 가봉태실은 그때 훼손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파괴된 선석산의 대군·군 태실 시설물들이 산 계곡 아래까지 굴러 떨어져 있었는데요. 1977년 대대적인 보수·정비 때 그중 일부가 수습되어 지금처럼 복원된 겁니다.

그런데도 세조는 ‘형제들과 함께 있겠다’고 형제애를 운운했군요. 
‘악어의 눈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달리 볼 수도 있겠죠. 조카와 동생들을 죽이거나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죄를 반성하고 뒤늦게나마 참회의 몸부림을 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종 이후 왕자와 공주 옹주가 태어날 때마다 1인당 1곳의 길지를 찾아 태실을 마련하는 풍습이 시작되면서 농번기 백성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왕실의 태실로 낙점되면 그 지점에 금표를 긋고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출입금지 거리는 300(임금)~100보(왕자)였다.게다가 산불을 차단한다면서 나무와 불을 불살라버리는 ‘화소지역’까지 두었다. 그것이 대략 200보였다. 그곳에서 벌목을 하거나 장례를 치르면 처벌을 받았다. .

■올림픽 성화봉송 같은 안태행렬의 폐단
세종 이후 왕실 자손의 태를 묻는 풍습은 성종(1469~1494) 때 그 범위가 공주까지 확대되는데요.
그러나 세종이 세운 원칙, 즉 왕실 자손들의 태실을 한 곳에 묻는 전통은 이어지지 못합니다. 길지 한 곳에 혈처 역시 단 한 곳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죠. 그래서 세종 이후 임금들은 대부분 왕자와 공주 한 사람 당 한 곳씩 태실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폐단이 말도 못하게 생겼죠. 왕자·공주가 태어날 때마다, 그들의 태를 묻는 안태행렬을 맞이해야 했던 농번기 백성들의 번거로움은 물론이구요. 어느날 갑자기 왕실의 태실로 낙점되면 주변 300~100보 거리의 사유지가 농사는커녕 출입도 불허되는 금단의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경북 예천 명봉리에 조성된 사도세자(장조)의 태실(복원). 사도세자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가봉태실(왕위를 이은 뒤 치장한 태실)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조가 ‘할아버지(영조)에서 곧바로 손자(정조)로 이어진 비정상적인 정권이양’이 아니라 아버지(사도세자)를 거친 정통성을 갖춘 승계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아버지 사도세지의 가봉태실을 마련해주었다.

훗날 영조(1724~1776)가 나서서 “앞으로 하나의 태봉에서 위부터 아래까지 차례차례 묻으라”(1758년) “궁궐의 후원에 태를 묻어서 폐단을 없애라”(1765년)는 지시를 잇달아 내리는데요. 그러나 영조의 뜻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1776~1800)가 1785년(정조 9) 아버지(사도세자·1735~1762)를 위해 가봉태실을 조성함으로써 무너지고 맙니다. 사도세자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가봉태실(왕위를 이은 뒤 치장한 태실)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거든요. 
정조는 ‘할아버지(영조)에서 곧바로 손자(정조)로 이어진 비정상적인 정권이양’이 아니라 아버지(사도세자)를 거친 정통성을 갖춘 승계라는 점을 애써 강조하고 싶었을 겁니다.

전국 곳곳의 길지(명당)에 봉안되어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 54위(태항아리)는 일제 강점기(1929년 3월)에 경기 고양 서삼릉으로 집단 이주된다.

■‘날 일(日)’자로 꾸민 서삼릉 태실
이렇게 전국 곳곳의 길지(명당)에 봉안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태실은 국권침탈 후 일제에 의해 제자리를 잃고 맙니다.
1929년 전국의 태봉 39곳을 훼철한 뒤 그곳에 조성되어 있던 태실 54위(주로 태항아리)를 경기 고양 서삼릉에 집단 이주시킨 겁니다. 무엇보다 일제는 새롭게 조성한 왕과 왕자(공·옹주 포함)의 공간을 한 일(一)자 형태로 구분했다죠. 멀리서 보면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자 형태입니다. 지하도 원형의 시멘트 관에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묻고 그 위를 날 일(日)자 형태의 시멘트 덮개를 씌웠습니다. 

심현용 소장은 “조선 왕조의 만세안녕을 기원하며 봉안한 조선왕가의 태를 죽음의 공간인 무덤(서삼릉)에 묻어버린 셈”이라면서 “땅 위 뿐 아니라 땅 밑까지 조선왕실의 생명성을 상징하는 태를 일본 안에 가뒀다”고 해석했습니다. 
게중에는 이런 말도 나올 것 같아요. 세종대왕이 쓸데없이 풍수지리가 접목된 태실 제도를 만들어 갖가지 폐단을 야기한게 아니냐는 이야기 말입니다. 일리있는 비판 같아요. 
그러나 달리 생각할 필요도 있어요. 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태아와 엄마를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묶어준 매개체죠. 
한마디로 생명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자면 요즘 제대혈(탯줄혈액)을 보관하는 이들이 있다죠. 제대혈에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을 만드는 조혈모 세포가 풍부하고 연골·근육·뼈·신경 등을 만들 수 있는 간엽줄기세포가 다량 함유되어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제대혈 보관은 1400년 가까이 이어온 안태의식의 현대적 버전이 아닐른지요.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이 기사를 쓰는데 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의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박재관 성주군청 문화팀장이 좋은 사진을 보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심현용, ‘조선시대 태실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 강원대 박사논문, 2015
심현용, ‘성주 선석산 태실의 조성과 태실구조의 특징’, <영남학> 27호, 2015
심현용, ‘조선시대 태실 연구의 현황과 과제 발표’(경기도 태봉·태실의 가치 재발견 학술세미나), 경기문화재연구원, 2021
홍성익, ‘조선시대 태실의 역사고고학적 연구’, <영남학> 27호, 2015
김종헌, ‘2020년 경기도 태봉·태실 조사 성과와 과제 발표’(경기도 태봉·태실의 가치 재발견 학술세미나), 경기문화재연구원, 2021
이재완, ‘경북 예천 태실의 보존과 활용 사례 발표’(경기도 태봉·태실의 가치 재발견 학술세미나), 경기문화재연구원, 2021
김희정, ‘태실 문화유산의 활용방안 발표’(경기도 태봉·태실의 가치 재발견 학술세미나), 경기문화재연구원,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