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에서 한성백제 시대 적석총이 확인됐습니다. 새삼 40여 년 전 ‘야만의 시간’을 되짚어봅니다. 1983년 개발의 광풍 속에서 포클레인 삽날에 백제인골이 찍혀나간 참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천인공노할 참상을 고발하고, 온몸으로 유적을 지켜낸 소장학자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촌동 고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당연히 한성백제 493년의 역사도 파괴되었을 겁니다.
더불어 최근의 발굴성과를 토대로 백제의 최전성기인 한성백제 시대를 되짚어보려 합니다. 백제 시조 온조왕이 지금의 송파구, 즉 예전의 광주평원에 둥지를 튼 이유는 무엇일까, 형인 비류는 지금의 인천(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다가 실패로 돌아갔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또하나, 한성백제의 도읍지는 과연 어떻게 구성돼 있었을까. 이와함께 당시 백제 임금과 왕족, 귀족이 묻힌 한성백제기의 공동묘지, 즉 ‘석촌동 고분의 어제 오늘’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①편은 ‘포클레인 삽날에 찍힌 석촌동 백제인골, 백제왕릉’, ②편은 ‘석촌동 3호분의 주인공은 근초고왕인가’입니다.|필자 주
옛 조상들은 마을 이름을 괜히 짓지 않았다. 그 유래를 파보면 뭔가 역사의 곡절을 담고 있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이라는 마을도 그렇다. 돌이 많은 고을이라 해서 석촌(石村)이라 했다. 실은 좀 이상하다. 지금의 송파구 일대는 원래 돌과는 별 관계가 없는 드넓은 충적평야였다.
경기 광주군 중대면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1963년 서울로 편입된 곳이다. 그래서 예전엔 이 일대를 광주평원이라 했다. 그런데 왜 ‘돌의 고을’이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더불어 석촌의 언덕배기를 오봉산(五峰山)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돌무더기가 5개의 작은 봉우리를 이룰 정도로 쌓였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5개의 큰 봉우리는 바로 백제 적석총이었다. 규모가 큰 것만 5개였다.
■버림받은 온조가 망명한 땅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89기(토총 66기, 적석총 22기)의 백제 고분이 표시돼있다.
이것을 토대로 1919~1920년 사이 정밀 조사해보니 석촌동, 방이동, 가락동 일대에 293기 이상의 백제고분이 분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석촌동을 포함한 이들 지역의 백제고분은 1970년대 초까지 방치되었다. 방치 정도가 아니라 ‘오봉’ 위에 무허가 민가들이 들어설 정도로 마구잡이로 훼손되었다. 오봉 중 하나는 완전히 사라졌고, 3호와 4호 고분도 곧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1974년 가을 김원룡 교수가 이끈 서울대박물관 발굴단이 3·4호분을 긴급 발굴조사했다.
그 결과는 국내성(환런·桓仁) 인근에 집중된 고구려 적석총과 유사한 백제 적석총의 구조와 축조양식을 확인했다.
고구려와 백제 임금의 조상은 같은 부여 출신이었으니 무덤 구조와 양식이 같을 수밖에…. <삼국사기>가 이를 확인해준다.
“온조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주몽)다. 북부여 출신인 추모는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추모는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과 혼인해서 아들 둘(비류와 온조)을 낳았다.(추모가 졸본부여의 과부인 소서노와 혼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서노에게는 이미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있었는데 추모는 마치 친자식처럼 여겼다고 한다.) 졸본부여왕이 죽자 추모는 왕위를 이었다. 추모는 비류를 태자로 염두에 두었다. 문제가 생겼다. 북부여 시절 추모가 조강지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유리)가 아버지를 찾아 나타난 것이다. 뛸 듯이 기뻐한 추모는 적장자인 유리를 태자로 세웠다. (후계 구도에서 밀린) 비류와 온조는 오간·마려 등 신하 10명과 함께 남한으로 망명했다. 기원전 18년이다.”
석촌동 3·4호분의 구조와 양식을 확인한 이병도·김원룡·김철준·이기백·최영희 등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총출동한 학술대회까지 열었다.
그들은 “백제 초기 지배층이 고구려 유민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이 맞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흥분에 걸맞은 후속조치는 없었다.
물론 정부는 이듬해(1975년) 3~5호 적석·봉토분 등 1513평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일제강점기의 조사를 감안한다면 훨씬 넓은 범위를 지정해야 했지만 너무 찔끔 보존한 것이다. 게다가 3호분의 윗부분에 들어선 10여 가구의 무허가 건물을 그대로 둔채 지정한 것이다.
당시 발굴자인 김원룡 서울대박물관장은 “정부가 경주·부여의 고적보존에만 신경 쓸게 아니라 서울의 백제고분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만약 그때 지정영역을 넓혔다면 40여 년이 지난 지금 한성백제 시기의 고분군이 아쉬운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참혹한 한성백제의 파괴현장
좋은 기회를 놓친 석촌동 고분은 더욱 훼손의 나락에 빠진다. 1970년대 말부터 강남 개발의 광풍이 휘몰아쳤다.
급기야 1981년 석촌동 3호분과 4호분 사이를 관통하는 폭 35m의 도로공사가 확정됐다.
석촌로(백제고분로) 공사였다. 게다가 사적지정구역 1500여평 이외는 도시계획에 포함됐다.
바야흐로 석촌동 고분의 마구잡이 훼손이 시작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983년 봄부터 도로 확장 공사가 시행됐다.
1983년 5월 25일 이형구 한국정신문화원 교수가 석박사과정 학생 17명을 이끌고 현장을 찾았다.
그때였다. 학생들과 함께 3호분 동쪽 15m 지점에 있는 민가 주변을 살피던 이형구 교수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목격했다.
왕릉급 고분이 확실한 3호분의 기단부가 잘려나갔고, 무덤의 남쪽 석축 상당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약 10m 폭의 판축 흙을 불도저와 포클레인 삽날로 밀어버렸는데, 잘린 단면에서 처참한 광경이 목격됐다.
한성백제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옹관까지 잘려나간 흔적이 보인 것이다. 곁을 살피자 더 참혹한 광경이 나타났다.
“백제 고분이 3분의 2 가량 잘려나가면서 그 안에 안장돼있던 백제인의 유골들이 포클레인 날에 찍혀나간 흔적을 보았습니다. 잘려나간 판축에서 갈비뼈와 다리뼈가 보였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4호분을 돌아봤습니다. 고분의 판축이 역시 파괴되었습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묘도)과 무덤방(묘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분화구 같이 파였습니다.”
■기댈 곳은 언론밖에 없다
그 뿐이 아니었다.
1974년 서울대박물관의 발굴 때 확인된 백제시대 주거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천인공노할 짓이다.
가깝게는 수백년, 길게는 수천 수만년 동안 땅 속에 잠자고 있던 유물과 유적은 단 한순간의 실수로도 파괴될 수 있다. 그러면 끝장이다. 수백, 수천 아니 수만년의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고고학자라면 고고학 발굴조차 파괴행위라 여겨 발굴에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그러나 만약 개발에 눈이 멀게 되면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게 없다. 아무리 유적보존을 강조해도 소용없다.
이형구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개발에 눈이 먼 행정기관이나 주민들에게 이야기해봐야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묘책을 떠올렸다. 기댈 것은 언론 뿐이었다.
이튿날 밤 KBS 사회부 이명구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석촌동의 참상’을 알렸다. 백제시대 고분은 물론 백제 인골까지 무참하게 파괴된다는 소식처럼 좋은 취재거리는 없었다.
5월 27일 오전 KBS 카메라가 출동해서 옹관과 인골 등이 노출된 기막힌 현장을 찍었다. 이 사실이 그날 밤 KBS와 이튿날 경향신문 등 언론보도로 알려졌다.
그러자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반응을 보였다. 토요일인 5월28일 허문도 문화공보부 차관이 이형구 교수를 찾았다.
“허문도 차관의 고향이 경남 고성입니다. 게다가 허문도 차관이 조선일보 일본특파원 시절 임나일본부에 관심이 컸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경남 고성은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의 중심지 중 한 곳이니까. 그래 내가 ‘석촌동 백제고분을 제대로 복원하고 관리하는 것은 곧 일본의 임나일본부 주장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했죠.”
그러자 허문도는 “도와줄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교수는 “학술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학술대회를 열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형구 교수가 소속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정부출연기관이었다. 따라서 학술대회를 열려면 정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허문도 차관은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주최 학술대회는 7월6일로 예정돼 있었다. 그 사이 도로공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등의 소극적인 대처가 문제였다. 이형구 교수를 비롯한 몇몇이 나서 막아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어떤 문화재전문위원은 “찍혀나간 인골은 왕릉이 아니라 민묘에서 나온 것 아니냐”고 대수롭지 않은 듯 평가했다.
이형구 교수가 홀로 공사현장을 찾아 온몸으로 막아섰다. 이교수는 당시의 안타까웠던 하루하루를 복기해본다.
“도로공사가 강행됐습니다. 서울시가 주체가 된 개발계획이 쉽게 중단될 리 없었습니다. 제가 포클레인 앞을 막아서 공사를 저지했습니다. 그러나 소용없었습니다. 6월27일 야밤을 틈타 포장공사를 완료해버렸습니다.”
■기적적인 보존의 전말
그런 우여곡절 끝에 학술대회가 열리고, 참석한 30여 명이 건의문을 작성해서 청와대를 비롯한 관계기관에 보내자 상황이 달라졌다.
각 언론이 다투어 학술대회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백제 유적의 보전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이교수는 백제 왕릉급 고분인 3호분을 잘라내고 지나가는 석촌로(백제고분로)를 지하로 뚫자는 의견을 각계에 전했다.
지상은 3·4호분을 연결해서 이 일대 사방 1㎞를 백제유적보존지구로 설정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소장 학자의 몸을 던진 보존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문화재위원회가 사적의 지정면적을 기존 1513평에서 4928평으로 넓히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한술 더 떴다. 2년 뒤인 1985년 7월1일 정부는 석촌동 고분을 포함한 강남 일대의 ‘백제유적보존령’을 내렸다.
석촌동·방이동 고분군과 몽촌토성 등에 519억원을 들여 정비하고, 백제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고분군은 1513평의 사적면적을 10배가 넘는 1만7000평으로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유적지를 횡단한 35m 도로를 지하차도로 바꾸고, 갈라진 지상의 고분영역을 하나로 연결시켰다.
이것이 지금 석촌동 3호분의 밑 지하를 지나고 있는 백제고분로이다. 지하의 백제고분로 밑으로는 다시 지하철 9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당시 백제의 도성영역인 몽촌토성 역시 대대적인 보수에 나섰다.
1990년대 중후반까지 몽촌토성은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각광을 받았다. 반면 풍납토성은 석촌동·몽촌토성에 비해 ‘덜 급하다’는 이유로 5억원 보수정비에 그쳤다.
■불씨가 남다
이것이 훗날 또하나의 불씨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던 풍납토성이 13년 후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화려하게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도 이형구 교수가 다시 등장한다.
석촌동·몽촌토성에 비해 홀대받던 풍납토성 일대는 무분별한 개발붐에 나날이 훼손되고 있었다.
1996년 말 이형구 교수(당시 선문대)는 높은 방호벽을 치고 아파트 터파기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던 풍납토성 내 현대아파트 재개발 부지에 잠입한다.
이교수는 공사현장 지하 벽면에 백제토기 편들이 금맥이 터지듯 무수히 박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 놀라운 발견은 1997년 새해 벽두부터 언론 보도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13년 전 석촌동 고분의 도로공사 현장에서 옹관과 인골을 발견한 것과 어쩌면 그리 똑같은 상황인지….
훗날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으로 비정되기에 이른다.
왕성급에 걸맞은 유구와 유물들이 대거 쏟아져고, 토성 건설에 연인원 450만명에 이르는 백제민이 동원되었다는 증거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성백제 493년의 역사가 바로 소장학자의 가없는 열정과 끈기 덕택에 복원된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형구, <서울 백제고분의 보존과 발굴-석촌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동양고고학연구소, 2016
신희권, ‘개로왕대 한성의 도성 경관과 토목공사’, <제8회 쟁점 백제사 집중토론 학술회의-개로왕의 꿈, 대국 백제>, 한성백제박물관, 2016
정치영·최진석, ‘석촌동고분군 발굴의 최신성과’, <제1회 근초고왕과 석촌동 고분군 국제학술대회>, 한성백제박물관, 2016
임영진, ‘서울 석촌동 고분군의 구성과 변천-1~5호분의 쟁점을 중심으로’, <제1회 근초고왕과 석촌동 고분군 국제학술대회>, 한성백제박물관, 2016
한성백제박물관, <온조, 서울 역사를 열다>, 한성백제박물관 특별전, 2013
한성백제박물관, <한성백제의 왕궁은 어디에 있었나>,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2013
서점교, ‘백제의 요서진출설 소개 및 고찰’, <군사연구> 제124집,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2008
김성한, ‘백제의 요서 영유와 백제군’, <역사학연구> 제50호, 호남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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