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업무를 되돌아보게 하는 요즘입니다. 대통령이 300명이 넘는 목숨이 수장되는, 처참한 상황에서 출근조차 하지 않고 7시간 동안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 아닙니까. 그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 올림머리 하느라 또 1시간 이상 소비했다는 것 아닙니까. 사생활 운운할 수 있습니까. 참담하기만 합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지도자의 자세를 비춰보고 싶습니다. 하루 24시간 밤잠을 이루지 못한채 정사를 돌보고 독서를 하고, 전국 각지에서 보네온 장계를 읽었던, 그래서 건강까지 해쳤던 조선조 정조 임금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청나라 옹정제의 사례도 언급하렵니다. 물론 만기친람이라는 지적도 있었고, 때로는 각박한 정치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공과 과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조든, 옹정제든 그들의 정치 기저에 빠지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씨'였습니다. 답답하고 참담한 지금 이 순간, 과거의 이야기로 힐링하고자 합니다.
조선의 중흥군주인 정조 임금이 즐겨 찍은 도장(장서인) 가운데 ‘만기(萬機)’ 인장이 눈에 띈다.
‘만기’란 무엇인가. 예로부터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라 했다.(<서경> ‘고요모’) ‘
만기친람(萬機親覽)’이란 말도 거기서 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천명을 받은 몸이라지만 어찌 하루에 만가지 일을 하겠는가. 하나 정조 임금은 그랬다. 하루에 만가지 정사를 처리할만큼 지독한 일중독자였다.
■“자질구레한 일 그만하세요”
신하들은 오만가지 일에 일일이 처리하려 한 임금을 크게 걱정했다. 예컨대 1781년(정조 5년), 규장각 제학 김종수가 상소문으로 올린다.
“전하께서는 너무 작은 일에 너무 신경쓰십니다. 그러면 큰일에 소홀하기 마련입니다. 큰 일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눈 앞의 일만 신경쓰면 겉치레의 말단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가만 있지 않았다.
“작은 것을 통해야만 큰 것으로 나갈 수 있고 겉치레를 통해야만 실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법이네.”
김종수의 지적질은 이것이었다. 임금이 너무 세세한 것까지 챙기는 바람에 정작 큰 일에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지도자라는 존재는 큰 그림을 그려야지 너무 ‘디테일’에만 신경쓴다는 것이다. 정조의 만기친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홍재전서> <정조실록>)
그러나 정조는 “작은 것을 제대로 살펴야 거쳐 큰 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그것이 과인이 작은 것이나 살핀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눈 앞에 닥친 일부터 해나가려는 이유”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정조의 ‘일중독’은 정평이 나있다.
■침전에 걸린 재해대책본부 상황판
1783년(정조 7년), 재해가 나자 정조는 자신의 침실 동·서벽에 ‘상황판’을 걸어놓았다.
상황판에는 재해를 입은 각 도를 세 등급으로 나눴다. 그곳에 고을 및 수령 이름과, 세금경감과 구휼 조목 등을 죽 써놓고, 한가지 일을 처리할 때마다 기록했다.(<홍재전서> ‘일득록·정사 1’)
무슨 말인가. 재해대책본부를 침실에 차린 것이다. 정조는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라 했다.
“백성이 배고프면 내가 배고프고, 백성이 배부르면 나도 배부르다. 재해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백성의 목숨이 달려있는 사안이다. 중단할 수 없지 않은가.”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임금은 해마다 새해 첫날이면 한해 농사를 장려하는 ‘윤음’을 내렸다. 지금으로 치면 연두교서 같은 것이다.
그런데 1784년 새해에는 윤음을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 형식적인 윤음을 내린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윤음을 내렸지만 기근이 계속됐다. 윤음이란 형식일 뿐이다.”
정조는 차라리 밭갈고 김매는 시기를 잘 선택하는 것이 농사에는 더 좋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한채 뒤척이던 정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사, 정성을 바쳤는데 감동하지 않는 법이 없지 않은가. 정성껏 윤음을 내리는데 (하늘이) 응답을 해주지 않을까. 나는 내 정성만 다하면 된다.”
정조는 벌떡 일어나 일필휘지로 윤음을 작성했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이렇게 불러 쓰노니 관찰사와 수령들은 명심하기 바란다.”(1784년 농사권장 교서)
정조가 내린 어제 윤음. 1776년(정조 1) 홍인한·정후겸 등 벽파를 성토하여 죄를 주고, 그 사실을 국내에 널리 알린 윤음이다. 정조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윤음을 쓸 정도로 일중독에 걸렸다.
■“난 보고서 읽는게 취미거든.”
1784년(정조 8년) 도제조 서명선이 정조에게 신신당부했다.
“전하. 제발 건강 좀 챙기시옵소서.”
몸이 편치 않았던 정조가 아직 회복하지 않았는 데도 8도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친히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조의 대꾸가 걸작이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국사가 많이 지체되었음을 알게됐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보는 것이네.(不得不親覽矣) 나는 원체 업무 보고서 읽는 것을 좋아하네. 그러면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지.”
근자에 공개된 정조와 심환지 등이 나눈 편지를 보자.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면서도 ‘일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바빠서) 눈코 뜰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眼鼻莫開 苦事苦事·1797년 12월26일)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而民憂薰心 朝家關念 夜夜繞榻 日覺衰憊·1799년 1월20일)
“바빠서 틈내기 어렵다, 닭우는 소리 들으며 잠들었다가~비로소 밥 먹으니, 피로해진 정력이 갈수록 소모될 뿐….(疲鈍之精力 日益銷耗而已·1798년 10월7일)
“바쁜 틈에 윤음을 짓느라 며칠 째 밤을 새고, 닭울음을 듣는구나. 괴롭다‘!”(1798년 11월30일)
“책을 읽으면서 비점(批點·시문 등을 평론하며 찍는 붉은 점)과 권점(圈點·문장의 중요한 곳을 찍는 점) 등을 찍느라 밤잠을 못이루고, 온갖 문서를 보느라 심혈이 모두 메말랐구나.”(1799년 7월7일)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
정조는 ‘비밀편지’로 대신들과 소통했는데, 어느 때는 육두문자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대신들을 힐책했다. 당시 46살인 정조가 67세의 재상 심환지에게 ‘생각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욕하는 내용까지 보인다.
“나는 경(심환지)을 격의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조심 하지 않는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 매양 입조심 하지 않으니 경은 생각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하겠다. 너무도 답답하다.”(1797년 4월10일)
이밖에 “황인기와 김이수가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乃敢鼓吻耶)” “이 사람은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으니 안타까운 일이다.(可謂眞胡種子)”는 등의 욕설이 난무하고 있다.
■일중독. 스트레스가 승하의 원인?
이렇게 ‘일일만기’를 처리하고, 독서에 편지쓰기까지 밤을 꼴딱꼴딱 세웠으니 건강이 좋을 리 있었겠는가.
“열기가 치솟고 등은 뜸 뜨는 듯 하고 눈은 횃불 같아 헐떡일 뿐이다. 현기증이 심해서 독서에 전념할 수도 없다. 괴롭기만 하다.”(1799년 7월7일)
“요즘 시사(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구나. 마음 속에 불길만 치솟을 뿐…. 이 때문에 안화(眼花·눈이 어른거림)가 나을 기미가 없구나”(1798년 7월8일)
“뱃속의 화기가 내려가지 않는구나.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 장판에 등을 붙인채 뒤척이는 일이 모두 답답하다.”(1800년 6월15일)
정조는 등창이 난지 20여 일 만인 1800년 6월, 승하했다. 재위 24년(1776~1800)만에, 그것도 나이 48살의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마도 지독한 일중독증에 따른 스트레스가 간접 사인이 아니었을까.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씨
정조의 편지(어찰)와 <정조실록>, <홍재전서> 등에 보이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씨는 끔찍하다.
따뜻한 겨울이 계속돼 얼음이 얼지 않자 “과인이 모두 부덕한 탓이고, 죽고 싶은 심정”(<정조실록>이라고 토로한다.
또 “제주 백성들의 전복 채취하는 힘겨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전복 바치기를 전면 금한다.(<비변사등록>)
서북지방에 든 기근 때문에 유랑민 수백명이 서울로 몰려오자 친히 종로거리로 나가 이들을 접견했다.
그러면서….
“누더기 옷과 깡마른 얼굴을 보니 참담하구나. 비단옷과 보료를 준들 편안하겠는가. 세금을 면제하고 곡식과 옷가지를 줄테니 각자의 집으로 가라.”
정조는 명령만 내리고 가지 않았다. 하루종일 자리를 지키고 앉아 곡식과 옷이 제대로 분배되는 지를 감독했다.(<홍재전서> ‘일득록·정사’)
■만기친람의 후유증
너무 만기를 친람하다보니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1796년, 정조가 ‘담배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져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드는 법’을 묻는 책문을 내린 것이다.
책문은 신료들에게 국정 현안의 자문을 구하는 제도였다.
“담배가 출현한 것을 보니 천지의 마음을 읽기에 충분하다. 우리 강토의 백성들에게 (담배를) 베풀어 그 혜택을 나눠 주고 그 효과를 확산시켜 천지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한다.”(1796년 11월28일)
정조는 지독한 골초였다. “임금은 하늘을 도와 정치하는 사람이므로 하늘이 내린 담배의 혜택을 백성들에게 줘야할 의무가 있다”고 강변한 것이다.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든다고 했다니 참….
1790년 8월, 정조는 또 한 번 ‘만기친람’의 기질을 발휘한다. 살인사건의 판결문을 직접 쓴 것이다.
즉 전라도 장흥사람 신여척(申汝倜)이 이웃집 형제 간의 싸움을 보다 의분을 참지못하고 형제 중 한 사람을 발로 차 죽였다.
형조는 “고의성은 없지만 살인한 것은 사실이니 살인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형제간 싸움은 윤리의 변괴이며, 그런 형제들을 처단한 신여척은 기개있고 녹록치 않은 자”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정조는 특히 “신여척이라는 이름이 헛되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즉 신여척의 한자 이름, 즉 너 여(汝)와 기개있을 척(倜)을 떠올리며, ‘너는 기개있는 사람’이라 칭찬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흠흠신서>에 정조의 이 판결을 “의로운 판결”이라 찬동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살인은 살인이 아닌가. 어찌됐든 사람을 때려죽인 살인범에게 ‘의롭고 기개있다’며 무죄로 방면시킨 것은 좀….
정조는 심지어 “장악원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갈수록 번잡하고 빠르다”고 지적하면서 “하루빨리 고아한 음악을 되찾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
“줄을 번잡하게 튕기고 곡조를 빠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외떨어진 작은 나라의 소리다. 서로 화답하여 넉넉하게 여유로운 소리를 내는 음악이라야 잘 다스려진 세상의 모습이다.”(<홍재전서> ‘일득록·정사’)
임금이 백성에게 담배를 적극 권장하고, 살인사건의 판결까지 손수 내리고, 심지어는 유행음악이 빠르다고 빨리 바꾸라고 지적하는 일…. 오지랖이 넓다는 소리를 들을만 하다.
중국 시안 명마용에서 발견된 청동마차. 만기친람의 원조격인 진시황은 전국을 순회하는 순행정치로 만천하를 다스리렸다.
■옹정제의 만기친람
강희제의 35명 황자 가운데 4번째인 옹정제는 45살의 나이에 황제가 됐다. 그는 “정치는 천명을 받은 내게 모두 맡기라”고 선언했다.
정조가 비밀편지로 관리들과 소통했다면, 옹정제는 이른바 ‘주접(奏摺)’을 통해 중앙관리 및 지방관들과 소통했다.
주접은 공식절차가 아니라 황제와 일선 관리가 직접 주고받는 비밀문서(친필편지)를 말한다. 옹정제는 “사소한 정보까지 모든 사항을 빠짐없이 보고하라”고 명했다.
“정치가 잘 운영되는지, 관리가 근면한지, 태만한지, 윗사람은 공평한지, 누가 모자란지, 군대의 구율은 어떤지…. 무슨 일이든 좋다. 증거가 없어도 좋으니 빠뜨리지 마라. 단 증거와 풍문은 구분해서 보내고….”
중요한 것은 비밀이었다. 정조가 편지내용을 발설한 심환지를 두고 ‘입조심을 하지 않은 생각없는 늙은이’라 욕했다지만, 옹정제 또한 다르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은 관리들에게 마구 욕을 해댔다.
“바보는 고칠 수 없다(下愚不侈)는 말은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수라도 너보다는 낫겠다.” “양심을 뭉개버리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은 소인배.” “잘못 둔갑한 늙은 너구리.”
■“보고서 읽는 것이 너무 즐겁다”는 옹정제
‘일일만기’ 한다는 말은 정조 뿐 아니라 옹정제도 마찬가지였다.
옹정제는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역사실록과 제왕의 명령 및 가르침을 모은 조칙집, 그리고 보훈(寶訓)을 한권씩 읽으면서 일과를 시작했다.
관리들은 새벽 6시까지 입궐해야 했다. 하루종일 정무에 돌본 뒤 밤 7~8시면 일과가 끝났다. 그러나 옹정제의 하루는 이제부터가 또다른 시작이었다.
지방관들이 보낸 주접을 꺼내 읽고, 답장을 쓰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많을 때는 50~60통을 읽은 뒤 답장을 썼다니….
“웬일인지 짐은 어릴 적부터 밤만 되면 정신이 집중된다. 보고서가 아무리 길어도, 심지어 수천자가 넘어도 끝까지 다 읽는다. 유익한 보고서라면 읽는 것이 너무도 즐겁다.”
옹정제는 또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너무도 중대해서 이 한몸 아까워 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거실액자에 ‘위군난(爲君難)’, 즉 ‘군주가 되는 길은 어려운 것’이라는 세 글자를 써놓았다. 그리곤 양쪽 기둥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이다. 이 한 몸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原以一人治天下 不以天下奉一人)”
■워커홀릭 황제
옹정제와 정조가 흡사한 대목이 또 있다.
옹정제는 “주접에 짐을 두고 성인이니 뭐니 하면서 의례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가장 싫으니 쓸데없는 편지는 쓰지 마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황제에게 입에 발린 칭찬이나 한가득 쓰는 자들의 주접을 읽기가 매우 낯간지럽고 괴롭다는 뜻이다.
정조 역시 “장계에 임금을 찬양하는 습관을 고치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실제 정조는 임금찬양에 도에 지나쳤던 경상감사 이태영에게 감봉처분을 내렸다. 또 장계의 주제에 맞지 않은 ‘입에 발린 찬양’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전라감사 이득신을 추고(推考)하기도 했다.(1797년)
옹정제로 돌아가자면 160만 백성이 홍수에 휩쓸렸다는 소식을 듣자 “모든 책임은 짐에게 있다”고 자책했다. “모든 재해의 책임이 임금에 있다”는 정조의 한탄과 판에 박힌 듯 똑같다.
옹정제는 또 “바빠서 미치겠다”고 푸념하는 지방관에게 “웃기는 소리 마라”고 일갈한다.
“짐은 수천리 떨어진 지방 총독과 순무(巡撫·지방 파견 관리)의 사무를 도와주는데 소비하는 시간이 80~90%가 된다.”
일에 빠져 살았던 탓일까. 옹정제는 북경 근처의 ‘서산(西山) 별장’에 가끔씩 갔을 뿐 그 이상은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강희제(1661~1721)나 건륭제(1735~1795)가 이따끔씩 강남 유람에 나섰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일까.
옹정제의 치세는 13년에 그쳤다. 그 사이 황제는 자신을 위해서는 궁궐의 방한칸도 늘리지 않았다. 일중독에 빠진 ‘워커홀릭’ 황제는 차세대(건륭제)의 청왕조 전성기를 이루는데 밑바탕을 마련해주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만기친람의 원조는 따로있다.
사실 ‘일중독’의 원조라면 진시황(기원전 246~210)이 아닐까.
진시황 시대의 방술사인 후생은 노생과 대화를 나누며 진시황을 이렇게 비난했다.
“진시황은 예부터 자기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천하의 크고 작은 일이 모두 황제에 의해 결정됩니다.(天下之事 無小大皆決於上)”
노생은 특히 “진시황은 하루에 읽어야 할 결재문서의 중량을 저울질해서 처리하고 있다(上至以衡石量書)”고 고발한다.
“(진시황은) 처리해야 할 문서 정량(120석 분량이라 함)에 도달하지 못하면 전혀 쉬지를 않소.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 정도인데….”
노생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신들은 황제가 결정한 일만을 명령받고 있소이다. 모든 일은 황제에 의해서만 결정·처리되고 있다는 겁니다. 황제는 자신의 허물을 듣지 않고 날마다 교만해지며 아랫사람은 황제의 비위만 맞추고 있소. 황제의 허물을 직언하지 못하고….”(<사기> ‘진시황본기’)
흥미롭다. 같은 ‘일중독’이라도 정조·옹정제와 진시황은 왜 그리 상반된 평가를 받았을까. 결국 핵심은 백성이 아닐까.
백성을 위한 ‘일중독’이냐, 아니면 독재를 위한 ‘일중독’이냐. 노생의 주장처럼 권세를 탐하는 일중독은 결국 진시황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미우나고우나 진시황은 그래도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위대한 군주였다. 그 점은 평가해줘야 한다.
본분을 아예 잊고 비선실세의 품에 안겨 정사를 내팽기치고 백성의 안위를 나몰라라 한 지도자는 과연 어쩌라 말인가.
지난 7월 1일 당시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은 국회 청와대 업무보고 때 "대통령은 공식일정이 없으면 간저에서 휴식을 취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휴식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제가 보기에는 아마 주무시는 시간 제외하고는 100%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다음 오글거리는 한마디를 더했다.
"그분의 마음 속에는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민 외에는 없는 분으로 제가 압니다."
그야말로 닭살돋는 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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