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어수선합니다. 임기말에 대통령의 무능함과 무기력이 밝혀지고 시민들은 절망의 한숨을 쉽니다. 뭔가 푸닥거리라도 해야 할까요. 이럴 때면 나오는 푸념이 있습니다. 청와대 풍수가 좋지않은 건가. 풍수탓인가. 뭐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정말 풍수탓인지 한번 들여다봤습니다. 사실 청와대터는 고려때부터 천하제일의 복지로 평가된 것 같습니다. 고려의 삼경(三京)인 남경의 궁궐이 있었으니까요. 당시 청와대터에 궁궐을 지어 1년에 4개월씩 머물면 36국이 조회하는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라 했습니다. 정말 1990년 청와대 경내 북악산 기슭에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표석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요. 조선시대들어 청와대 터는 충성맹세의 장으로 변질됩니다.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충성을 다짐받는 '회맹식'을 벌였던 겁니다. 회맹단이 들어섰던 것입니다. 오로지 한사람을 위한 충성맹세를 행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사악한 전통이 이때부터 생겼던 걸까요. 여기에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관사를 세워 북악산-경복궁의 맥을 졸랐습니다. 북악산 자체가 풍수적으로 좋지않다는 이야기도 돌았습니다. 그러나 풍수란 무엇입니까. 결국 땅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 합니다. '천하제일복지'가 '맹목충성흉지'로 변하게 만든 것이 바로 사람이 아닙니까. 주인에 따라 땅의 기가 바뀐다고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풍수라 합니다. '청와대의 불행은 풍수 탓일까요. 사람 탓일까요. 하도 답답해서 한번 알아봤습니다.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1990년 청와대 경내의 북악산 기슭 암벽에서 흥미로운 표석이 발견됐다.
이곳이 천하제일의 명당이라는 것을 알리는 6글자가 화강암벽에 새겨져 있었다. 글자 왼편에는 ‘延陵 吳거’라고 쓴 일종의 낙관도 새겨져 있었다.
금석학의 권위자인 임창순은 당시 “글씨는 300~400년 전인 중국 청나라 시대의 서체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나중에는 이 글씨가 중국 남송(1127~1279)에 있던 연릉 지역의 오거라는 사람의 글씨를 집자(글자를 모아서 사용)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 표석이 발견된 곳은 청와대 본관에서 동북쪽으로 계곡을 지나 150m 정도 떨어진 가파른 지역이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앞쪽이 나무와 풀로 가려져 있었던 데다 길도 없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와대터는 천하제일복지였나
당시 청와대 경내에서는 1989년 8월부터 대대적인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전까지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관저와 집무실이 함께 있었는데, 그걸 분리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이 살던 공간을 해방 후 40년이 넘도록 집무실과 관저로 그대로 쓴다는 게 시대정신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공·사생활 공간의 구분이 어려웠던데다 너무 좁아서 외빈을 맞기가 어려웠다는 이유도 들었다.
그러나 실은 풍수의 의미가 컸다는게 지배적인 해석이다. 청와대의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파다했다. 12·12 사태와 광주 민주화 항쟁 등을 거치며 정권을 틀어쥔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 12월 서쪽을 향하던 현관을 남향으로 바꿨다. 서향의 현관으로 기(氣)가 빠져나간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전 전대통령은 “시골 면장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로는 ‘백담사행’이었다. 이 모습을 본 노태우 전 대통령은 현관문을 바꾸는 정도로는 불길한 풍수를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다. 아예 구 청와대 자리에서 서쪽 100미터 떨어진 곳에 청와대 집무실을 만들고, 생활 및 휴식공간인 관저도 따로 조성한 것이다. 당시 청와대 홈페이지에 소개됐다는 글을 보면 흥미롭다.
“총독관저 자리를 물색했던 조선의 풍수가들은 고의로 용맥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일제의 만행을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 때문인지 조선총독을 지낸 사람 뿐 아니라 대통령들까지 불행한 말년을 맞았다고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1990년 2월20일 대통령 관저 신축공사 중 ‘천하제일복지’라는 표석이 청와대 건물 뒤에서 발견됨으로써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풍수상 좋지 않은 곳에 있던 대통령의 공간을 옮기는 공사를 하던 중에 ‘천하제일복지’라는 표석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홈페이지는 그러면서 “청와대 본관은 1989년 7월22일 착공된지 만 2년만에 완공됐는데 옛 기맥을 되살린다는 뜻에서 북악산정(山頂)-경복궁-광화문-관악산을 잇는 축선에 세워졌다”고 친절하게 풀이했다.
■청와대터는 고려 남경이었다
지금 청와대 자리는 고려 때부터 풍수적으로 길지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통일신라 말 고려 초부터 산천의 기운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이른바 풍수지리가 각광을 받았다. 풍수지리는 특히 국가와 왕실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이른바 도참사상과 연결됐다.
왕실의 영속성을 위해 도읍지(개경)외에 삼경(三京)을 설치한 것이 바로 풍수지리의 영향이다. 1067년(고려 문종 21년) 서울(고려 때는 양주군에 소속)은 3경의 하나인 남경으로 발돋음했다. 40여 년 후인 1101년(숙종 6년) 삼각산 면악의 남쪽 땅을 궁궐터로 정한 뒤 숙종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
면악은 지금의 북악산을 지칭한다.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면악이란 이름을 얻었다. 당시 숙종은 직접 남경을 방문해서 지세를 살펴보았다.
이듬해인 1102년(숙종 7년) 중서문하성이 남경의 도시계획도를 완성했다. 즉 동쪽으로 대봉(낙산), 남쪽으로 사리(용산 한강대교 부근 사평도), 서쪽으로 기봉(무악재), 북쪽으로 면악(북악)에 이르렀다.
약 3년간의 공사 끝에 궁궐이 완공됐다. 1104년(숙종 9년) 임금은 대신·내관들을 대동하고 남경을 친히 찾아와 10여일 머물렀다. 정전(연흥전)에서 백관의 축하인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정식으로 천도는 하지 않았다.
■청와대의 ‘리즈’ 시절
왜 정식 천도를 하지 않았을까. 1096년(숙종 원년) 김위제가 올린 상소문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위제는 지리도참서인 <도선기>를 인용해서 “임금이 해마다 중경(개경)과 서경(평양), 그리고 남경(서울)에서 4개월씩 머물면 36국이 조회한다”고 아뢴바 있다.
김위제는 “고려를 개국한 뒤 160년 후에는 목멱양(남산 북쪽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1년에 4개월 동안 머무르시면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숙종은 김위제 등의 말에 따라 남경을 건설한 뒤 완전 천도하지 않고 이른바 순주(巡駐)하는 도읍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남경을 건설하면서 한가지 잊어서는 안될 원칙이 있었다. 중서문하성이 남경의 도시계획도를 만들면서 숙종에게 고한 내용을 들어보라.
“새로 남경을 만들려면 반드시 땅을 넓게 차지하게 됩니다. 그럴 경우 백성의 토지를 많이 빼앗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궁궐은 산을 따라서 지세대로 하거나, 혹은 물을 한계로 하여 지형을 정해야 합니다.”(<고려사절요>)
산과 물의 형세에 따라 동(낙산)-남(사리)-서(기봉)-북(면악)을 이어 도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풍수지리의 기본 정신이다. 무조건 크게, 장엄하게 건설한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것. 산수의 균형에 알맞는 규모의 도성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조건 초고층 건물을 짓는데 골몰하는 작금의 추세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 궁궐과 도성의 규모가 작다해서 위축될게 아니라는 점을 웅변해준다. 자연과의 조화, 인간의 배려가 알맞은 규모의 궁궐에 담겨있으니까….
남경의 궁궐터가 바로 지금의 청와대 부근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조선개국 후 천도를 위해 한양을 둘러본 권중화·정도전·심덕부 등이 태조 이성계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394년(태조 3년) 전조(고려) 숙종 때 경영했던 궁궐의 옛터가 너무 좁아 그 남쪽에…궁궐터(경복궁)를 정하고.…”(<태조실록>)
<고려사절요>와 <태조실록> 기록을 종합하면 남경의 궁궐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990년 구 청와대 관저 뒷편 산기슭에서 발견됐다는 ‘천하제일복지’ 글씨의 비밀을 짐작할 수 있을까. 남송 시대(1127~1279)에 활약한 중국 오거라는 인물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지 않은가. 아마도 고려 때 남경의 ‘리즈’ 시절을 반영하는 글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대 고려인들은 남경을 천하제일의 복지라고 여겼을 수도 있으니까….
■의종의 주색잡기 향연장
이후 고려의 예종과 인종은 이곳에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고 연회를 베풀었다.
1128년(인종 6년) 남경 궁궐에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있다.
주색잡기에 빠져 훗날(1170년) 무신란을 부른 의종은 자주 남경을 찾아왔다. 1150년(의종 4년)과 1167년(의종 21년) 남경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정치를 잘하려는 행차가 아니었다. 유흥을 위한 나들이였다.
“의종은 물놀이를 구경하고, 달밤에 사원을 미행하기도 하고 남경(서울)이나 서도(평양)에 갔다. 나다니는 것이 일정치 않아 하루에도 2~3차례 옮겨다녔다. 임금과 신하들은 아침부터 다음 날 샐 때까지 흠뻑 취해있었다. 몇 년 후에는 더욱 주색에 빠졌다.”(<고려사절요>)
이후 고려 조정은 원나라 간섭기에 강화로 천도했다. 1232년(고종 19년)의 일이다. 아마도 몽골의 침략 때 남경의 궁궐이 불에 탔거나 훼손됐을 가능성이 짙다.
고종은 임시로 세운 남경의 가궐에 왕의 옷과 허리띠를 봉안토록 했다.(1234년) 한 승려의 한마디 예언 때문이었다.
“1234년 7월 내시 이백전을 보내어 왕의 옷을 남경의 가궐에 봉안했다. 어떤 중이 도참에 의거하여 ‘만약 이 땅에 궁궐을 짓고 거처하면 나라의 운세가 800년까지 연장될 것’이라 했기 때문이다.”(<고려사절요>)
도참설에 의존한 이유는 뻔하다. 몽골의 침략으로 누란의 위기에 빠진 왕실을 살리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천하제일복지’라는 이곳에 궁궐을 짓고 거처한다면 나라의 운세가 800년 이상 이어진다는데 어떤 임금이 믿지 않겠는가.
고려는 이후 30여 년 간 저항하다가 1270년(원종 11년) 급기야 원(몽골)의 간섭을 받는 신세가 된다. 남경은 1308년 원의 간섭기인 충선왕 즉위후 한양부로 강등된다.
■고려 임금들의 남경 짝사랑
이후에도 공민왕과 우왕, 공양왕이 남경(한양) 천도를 계획했거나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공민왕은 왕사 보우의 건의에 따라 한양 천도를 적극 논의했지만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 포기했다. 우왕은 1382년 서둘러 남경 천도를 단행한다.
“1382년 8월 개경에서 괴변이 자주 나타나고, 야수가 도성 안에 들어오며, 우물물이 끓고, 물고기들이 싸우며, 까마귀떼가 궁중으로 날아들었다. 이인임 등이 불가하다고 고집했고, 9월 대간들이 반대했지만 임금은 최영의 천도계획에 따라 남경천도를 단행했다.”(<동사강목>)
그러나 이 때의 천도는 치밀한 준비없이 단 한 달 만에 단행된 것이었다. 우왕은 결국 이듬해 2월 개경으로 돌아왔다. 임금의 야심찬 천도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공양왕도 남경 천도로 쓰러져가는 고려왕실을 추스리려 안간힘을 썼다. “개경(송경)은 임금과 신하를 폐하고 축출하는 땅이니 빨리 천도해야 한다”는 도참설에 따른 것이었다.(<고려사절요>) 하지만 이 또한 무산됐다. 남경 궁궐의 관아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물어가고 고위관리에 대한 모해사건이 잇달았다. 공양왕도 천도 5개월 만에 다시 개경으로 복귀하고 만다.
■천하제일복지에서 충성맹세의 장으로
청와대터는 이렇듯 고려시대부터 ‘천하제일복지’였다.
그러나 조선개국과 함께 천하제일복지가 임금을 위한 충성맹세의 장으로 변질된다. 청와대의 운명이 이때부터 길지에서 흉지로 뒤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즉 조선 개국과 함께 지금의 청와대 터는 정궁인 경복궁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1394년(태조 3년) 9월9일 권중화 등의 발언처럼 ‘청와대 터, 즉 남경 때의 궁궐터가 너무 좁아’ 약간 남쪽으로 궁궐터(경복궁)를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남경터, 즉 지금의 청와대 터는 어찌 됐는가. 회맹단이 설치됐다. 회맹이란 무엇인가. 임금이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들로부터 충성맹세를 받는 곳이다.
회맹단은 경복궁의 북문, 즉 신무문 너머 지금의 청와대 본관 자리에 해당된다. 회(會)는 공신과 공신 자손이 모이는 것을. 맹(盟)은 참석자들이 제물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의식을 일컫는다. 이를 삽혈이라 한다. 임금과 공신들은 피로 ‘배신을 하는 자는 반드시 응징 당한다’는 조약문을 작성했다.
피로 맺어진 혈맹(血盟)이 되는 것이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틀어쥔 태종은 여러차례 공신회맹을 통해 충성서약을 받았다. 개국공신(1392)은 물론 1·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정사공신(1398)과 좌명공신(1401)들이 5차례나 모여 충성을 다짐했다.
공신들의 도움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진 태종으로서는 그럴만도 했다. 따지고보면 언제 배신할 줄 모르는 안개정국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그들의 충성서약을 받음으로써 극도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고자 한 것이다.
1417년(태종 17년) 청와대터에서 거행한 회맹은 특별했다. 개국·정사·좌명공신들은 물론 그들의 적장자(아들)들까지 죄다 모여 충성서 다짐했다.
“만약 맹세를 바꾼다면 귀신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 자신 뿐 아니라 반드시 후손에게도 미칠 것이니….”
따지고 보면 혁명과 반란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바늘을 훔친 이는 주살되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문에 인의가 있다(竊鉤者誅 竊國者侯 侯之門仁義存).”(<사기> ‘유협전’)는 말이 있지 않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정권만 잡으면 인의(仁義)는 절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정변을 성공으로 이끈 이들이 모여 축배를 들고 주군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을 치른 곳…. 심지어 대를 이어 충성서약했던 저 회맹단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청와대 터였다. 모골이 송연하다. 지금도 오로지 한사람만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 국정을 농단하는 저 곳이 아닌가. 천하제일복지라는 이름이 무색해진 순간이다.
■연산군도 범하지 못한 청와대터
임금과 신하의 ‘성스런 의식(충성맹세)’이 열리던 청와대터는 신성시됐다.
심지어 황음무도한 연산군조차 회맹단을 후원의 놀이터로 만들지 않았다. 저간의 사정은 1680년(숙종 6년) 회맹단터를 찾은 임금에게 김수항이 아뢴 말에서 더듬어볼 수 있다.
“경복궁의 북문 밖은 회맹단입니다. 그곳은 삼청동과 가까워 수석이 아름다운데도 주색과 유람에 빠진 연산군 조차도 감히 후원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숙종실록>)
풍수상으로 봐도 청와대를 품에 안은 북악산(면악·백악) 일대는 인간이 절대 건드려서는 안되는 공간이었다. 풍수상 주산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조 세종·성종·문종·중종·선조는 한결같이 “백악(북악)에서는 돌도 캐지 마라”고 당부했다. 예컨대 세종은 1428년(세종 10년) 경복궁의 주산과 왼쪽 산맥에 소나무를 심고 근방의 인사를 모두 옮기라는 명을 내렸다. 성종 때 좌의정을 지낸 윤필상의 상소에도 나온다.(1481년)
“경복궁 주산에서 무식한 무리들이 집을 짓거나~ 나무를 베고 밭을 개간하고 우물을 파서 산의 맥을 손상시키니 마땅히 그 죄를 묻게 하소서.”(<성종실록>)
윤필상의 상소가 지목하고 있는 곳은 바로 청와대가 아닐까.
■청와대터는 용의 목
풍수학자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는 “청와대터가 경복궁의 내맥이 내려오는 길목이라 땅을 훼손하면 안된다는 뜻”이라 해석했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북악산-경복궁-광화문에 이르는 과정은 백두산의 정기를 서울에 불어넣는 용의 목과 머리에 해당된다.
그런데 일제는 용의 입에 해당하는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에 총독 집무실(구 국립박물관)을 조성했고, 목에 해당되는 회맹단터에 총독관저(청와대)를 지었다.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조르는 형국이다.
게다가 풍수상으로 볼 때 청와대·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은 규모는 작은 데도 독불장군형이다. 청와대 건물 뒤로 보이는 북악산의 모습은 배를 쑥 내민 상이다.
키도 작은데(해발 342m) 딱 버티고 있는 꼴이 거만하기 이를데 없다. 타협이라고는 모르는 고집불통 같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나와 광화문 네거리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면 사뭇 다르다. 중후함에 있어 인왕산(해발 337m)보다 못하다. 보잘것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풍수학자 최창조 교수는 흥미로운 해석을 해놓았다.
“청와대 주인들이 북악산을 닮아가지 않는가. 조금 떨어져서 보면 보잘 것 없는데 그 앞에서는 나홀로 우뚝 서있다는 자신감과 고집을 피우는 형상이 아닌가.”
게다가 조선조 무학대사가 했다는 말처럼 ‘북악산은 흙이 적고 뼈가 드러난 골산’이다. 무학대사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북악산 아래 궁터를 잡으면 골육상잔이 일어날 것이며, 200년이 지나지 않아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 경고했단다.(<오산설림>)
■배 내밀고 뼈만 앙상한 북악산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북악산을 바라보면 흥미롭다.
먼저 북악산의 골상은 상처투성이다. 뼈만 앙상하고 허연 바위가 널부러져 있다. 사람으로 치면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북악산은 엄지손가락을 곧추 세운듯 우뚝 솟아있지만 머리 부분은 동쪽으로 잔득 꼬고 있다. 경복궁과 청와대를 외면하고 있다. 그러니 결정적인 오류라는 것이다.
어머니(북악산)로부터 외면당하는 품안이니 편안할 수 있겠는가. 주산으로 버림받은 땅이니 결코 명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북악산과 인왕산을 잇는 곳은 움푹 들어가 있다.
자하문에서 평창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 고개를 일컫는다. 이를 두고 황천풍을 받는 곳이라는 해석이 있다. 황천풍은 저승에서 부는 바람이니 보통 흉한 징조가 아니다.
이밖에 광화문 4거리에서 청와대·경복궁을 보면 북악산 너머로 삼각산 보현봉이 보인다. 이것을 규봉(窺峰)이라 하는데 가까운 산 뒤로 또 다른 산이 고개만 살짝 내밀어 넘겨다보는 형국이다. 몰래 엿보면서 청와대와 경복궁의 기운을 빼앗아가니 불길하다는 것이다.
■백악관의 3.5배일 필요 있나
청와대의 공간과 건물이 부조화한데다 너무 크다는 점도 지적된다.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게 풍수지리의 기본인데 청와대 건물은 주변의 지형이나 경복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청와대 본관의 경우 지붕만 한옥의 모양이지 한옥도, 양옥도 아닌 얼치기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7만7000평에 이르는 청와대터는 미국의 백악관(2만2000평) 보다 3.5배가 크다. 게다가 청와대는 백악관보다 폐쇄적이다. 전통의 관념으로 사람이 사는 집에 발길이 끊어지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따라서 사대부집에서는 늘 대문을 열어놓고 거지가 찾아와도 문전박대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어떤가.
<청와대 풍수논쟁>이란 책을 펴낸 최세창의 말이 그럴 듯 하다. 저녁 직원들이 퇴근하고 야근요원만 남아있는 그 폐쇄적인 넓은 공간의 모습…. 집이 썰렁하면 귀신 나올 것 같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 않을까.
사람의 기가 큰 규모의 건물이나 공간에 압도당하지 않을까. 귀신은 사람의 기가 왕성할 때 범접을 못하지만 사람의 기가 약해지면 쉽게 접근한다는 것이다.
■안간힘을 썼지만
그렇다보니 경복궁과 청와대 주인의 불행한 운명이 늘상 도마 위에 오른다.
1926년 총독 집무실을 지은 3·5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일본 총리가 되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결국 1936년 2·26사건으로 비참하게 피살된다. 4대총독인 아마나시 산조(山梨半造)는 뇌물을 밝힌다는 ‘배금(拜金)장군’의 오명을 벗지못한채 불명예 퇴진한다. 6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2차대전이 끝난 뒤 공직추방령으로 은퇴했다가 참의원에 당선됐지만 지병으로 의정활동도 하지 못한채 사망했다.
1937~39년 사이 지금의 청와대 터에 관사를 지은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2차대전 후 전범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1954년 질병으로 풀려났지만 이듬해 병으로 사망했다. 8대 구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는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9대 아베 노부유키(阿部伸行)는 미군 하지 중장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는 수모를 겪었다.
해방후에도 청와대의 주인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청와대의 주인들은 풍수를 의식한 탓에 갖가지 방책을 마련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조선 고종 때 인재등용의 요람이던 경무대를 계승해서 ‘경무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 이후 “(이승만)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 해서 이름을 바꿨다. 당시(1960년 12월30일) 본관 건물에 15만장의 청기와를 지붕에 얹었기에 청와대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풍수상 기가 서쪽에서 빠져나간다고 해서 현관문을 바꿔 달았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관저와 집무실을 새롭게 지은 뒤 떨어뜨려 놓았다. 하지만 이런 안간힘은 허사였음이 드러났다.
■주인 자격이 없으면 빨리 내려오라
하기야 청와대 주인의 운명이 전적으로 풍수로 갈리겠는가.
풍수가들도 “풍수가 진정 중시하는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여긴다. 풍수의 덕목은 사람의 적덕(積德)이라는 것이다. <역경> ‘문언전’에 나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한 집안에는 경사가 찾아오고 그렇지못한 집엔 재앙이 찾아온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그렇다면 땅은 무엇인가. 그저 무대일 뿐이다. 무대는 배우가 꾸며야 한다. 최창조 교수는 “무대가 아무리 좋다한들 배우가 엉망이면 좋은 연극이 나오겠냐”고 되묻는다.
가만보면 같은 궁궐에서 태어나 자랐어도 어떤 임금은 성군이 되고, 어떤 임금은 폭군이 됐다. 풍수를 문제삼는다면 5년간 잠시 머무는 터가 사람을 바꾼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몰랐던 그 인물의 위선이 그 터에서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터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예컨대 편리를 위해, 풍수를 위해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을 뚝 떨어뜨린 결과는 어떠했는가. 대면보고를 더욱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독한 불통의 정치를 낳았다.
풍수가 최창조 교수의 한마디를 언급한다. “명당은 찾아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만들어 가야 할 대상입니다. 명당은 당신 마음 속에 있습니다.”
오늘 읽어본 책(<청와대 풍수논쟁>)에서 좋은 구절이 있다. 지극히 풍수적인 말이다.
“청와대는 기가 센 터다. 그 터를 누를만한 기를 가진 사람이 살아야 한다. 그러나 청와대의 기에 압도되어 정신이 흐려지고 판단력을 잃게 되면 그 사람은 대통령의 그릇이 못된다. 하루빨리 그 자리를 내놓은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국민을 위해서나 좋은 일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최창조, <최창조의 새로운 풍수이론>, 민음사, 2009
<풍수잡설>, 모멘토, 2005
최세창, <청와대 풍수논쟁>, 돋을새김, 2007
지종학, ‘경복궁·청와대 입지의 비판적 분석과 대안모색에 관한 연구-풍수이론을 중심으로’, 광운대 석사논문, 2010
대통령경호실, <청와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통령경호실, 2007
조석원, ‘풍수지리 이론으로 분석한 교하지역의 수도입지 적정성 연구-광해군과 이의신의 천도론을 중심으로’, 서경대 석사논문, 2016
'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①포클레인 삽날에 찍힌 석촌동 백제왕릉 (0) | 2016.12.23 |
---|---|
백성을 사랑한 군주, 머리를 올린 대통령 (4) | 2016.12.16 |
"하늘이 버린 지도자는 죽여도 된다" (4) | 2016.11.25 |
석굴암 약탈사건의 전모 (4) | 2016.11.18 |
김대성은 석굴암 부실공사의 '원흉'이었다 (2) | 2016.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