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감은사 동탑엔 문무왕의 사리가, 서탑엔 부처님의 사리가 각각 봉안됐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추정은 불교계를 뒤집어 놓았다. 우선 연구소 측의 주장.
문무왕은 처음으로 서역식 화장 장례를 도입한 ‘불심 깊은 왕’이었다. 왕을 화장했을 때 사리가 나왔다면 분명 그의 원찰인 감은사, 그것도 동탑에 봉안했을 것이다.
서탑의 경우 사리병 장식물이 부처님의 열반을 향연하는 주악(奏樂)의 천인(天人)들인 반면, 동탑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문무왕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호법신중(護法神衆)인 사천왕이 장식됐다.
문무왕은 재세기간동안 사천왕사를 건립했을 정도로 사천왕 사상과 관계가 깊었던 군주였다.
또 서탑엔 ‘봉황’이, 동탑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을 상징하는 ‘용’ 장식이 있다. 동탑의 방위가 동해구 문무대왕릉에 직접 연결된다는 점도 흥밋거리. 7~8세기 무렵 유행한 유마경(維摩經)이 주목거리다.
유마경은 4~7세기 무렵 중국은 물론 한국·일본에서도 읽혀졌다. 특히 원효와 의상대사가 고구려 승려 보덕에게 유마경의 가르침을 받았고, 751년에 조성된 석굴암 감실(龕室·신주를 모시는 장소)에 문수보살과 함께 유마상이 있다.
또한 솔거가 경남 진주 단속사에 유마상을 기록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7~8세기 신라에 유마경 사상이 폭넓게 퍼져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유마경의 주인공인 유마힐은 출가하지 않고 속세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을 얻은, 재가신도의 대표. 둔황석굴 제103굴, 제335굴에 그려진 ‘유마경 변상도’를 보면 ‘재가불자의 대표’ 유마힐 거사와 ‘석가모니가 파견한’ 문수보살이 대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림의 배치도 감은사 동(유마힐)·서(문수보살)탑의 배치와 같고 이 분들이 앉아있는 장상(帳上)의 가구배치와 천장의 장식모양도 동·서 탑의 사리함과 똑같다. 둔황 103굴, 335굴 등의 유마변상도를 보면 신라사신이 묘사돼 있다는 점도 주목거리다.
더욱이 동탑 사리기 기단부에는 유마거사가 신통력을 발휘해서 만들었다는 3만2천개의 사자좌를 상징하는 사자좌 장식물이 있다. 결국 삼국통일의 위업자 문무대왕은 재가불자의 상징인물이 된 ‘유마힐 거사’처럼 추앙된 게 아닐까.
그러니 죽어서도 그 사리가 호국사찰인 감은사 ‘동탑’ 사리함에 봉안되어 부처님의 사리(서탑)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나라를 지키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에 대해 미술사학자인 강우방과 문명대 등은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추정”이라고 일축했다.
“왕의 사리라는 것은 애시 당초 없으며 국가기관이 함부로 그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연구소의 발표에 힘을 실어준 이가 원로 불교미술사학자 황수영(전 동국대 총장).
그는 2002년 4월 ‘불교신문’ 연재물 ‘불적일화(佛跡逸話)’에서 “서탑의 사리 1과는 불사리(佛舍利)이고, 동탑에서 발견된 54과의 사리 중 일부는 문무왕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보스턴 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 사리기에서도 불사리와 더불어 지공·나옹 등의 승사리를 함께 봉안했다는 명문이 있다는 것이다.
황수영은 “혹자는 부도가 나타나는 것은 9세기대의 일이므로 7세기 때 문무왕 사리를 모셨다는 것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중국에서는 4~5세기대의 승려부도도 남아있다”고 밝혔다. 그는 “문무왕 사리는 불사리에 대한 폄훼가 아니라 오히려 불사리의 위의(威義)를 빌어 호국불교의 의미를 되새긴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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