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당시 충주지청으로 발령받은 유창종(검사)과 장준식(당시 충주북여중 국사교사·현충청대 교수) 등 5명이 만든 답사모임이 있었다. 정식 이름도 없이 그저 기와를 주으러 다니는 모임 정도라고나 할까. 당시만 해도 기와는 문화재 축에도 끼지 못하고 천대받고 있었다. 다른 고미술을 사면 덤으로 끼워주는 게 바로 기와였으니까.
◇예성동호회의 잇단 쾌거
그런데 78년 9월5일 어느 날, 이 ‘기와를 줍는 모임’이 어느 식당에 들렀을 때였다.
“이거 이상한 돌이네요.”
식당에 디딤돌 같은 돌이 있었는데 그 돌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지 않은가. 연꽃무늬라.
사람들은 ‘고려사’ 기록을 언뜻 떠올렸다. 1277년 충렬왕 3년에 충주성을 개축하면서 성벽에 연화를 조각했다는 것, 그래서 ‘꽃술 蘂’ 자를 써서 충주를 예성(蘂城)으로 일컬었다는 것.
“아, 바로 그렇구나.” 사람들은 무릎을 탁 쳤다. 이 돌은 성을 쌓을 때 사용한 신방석(信防石·일종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이 발견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답사모임 이름이 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기와를 줍는 모임’ 사람들은 즉석에서 이름을 붙였다.
“그럼, 차제에 정식이름을 ‘예성동호회’라 하지.”
왜 갑자기 예성동호회 얘기를 하느냐. 단순히 기와를 줍는 답사모임으로 시작한 이 동호회가 1979년 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경위도 참 흥미롭다. 79년 2월 25일 토요일, 유창종이 의정부지청으로 발령받아 충주를 떠나게 되자 ‘예성동호회’ 회원들이 ‘환송모임’을 연다.
“그러고 보니 만날 다니기만 했지 변변한 사진 한 장 없네?”
답사는 여러 번 다녔지만 같이 사진을 찍은 경우가 없었으니 이 참에 기념사진이나 남겨두자는 것이었다. 동호회원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충주시 가금면 입석마을이라는 곳으로 갔다. 누군가 겸사겸사 입석리에 있는 백비(글자 없는 비석)을 둘러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한데 마을 입구에서 이상한 돌이 눈에 띄었다. 동네사람들은 빨래판으로 사용했고 잘 생각해봐야 ‘고인돌’로 여겼던 돌을 관찰한 회원들은 무슨 ‘國’자 ‘土’자 같은 글자를 보았다.
유창종의 말.
“크기만 작을 뿐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했고, 석양 빛에 글자 비슷한 인공 흔적이 역력했어요.”
동호회원들은 이 사실을 학계에 보고했고 이 비문을 조사한 단국대 박물관은 ‘고구려 장수왕 때 남한강 유역을 공략한 뒤 세운 기념비’로 추정했다. 남한에서는 유일한 고구려 석비이자 고구려 절정기의 국력을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였던 것이다.
예성동호회의 활약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81년 초봄, 동호회 소속 장준식과 김현길(충주대 교수) 등은 당시 충청일보 기자였던 이재준의 연락을 받는다.
“문숭리 절터에 가면 기와편이 많은데 한번 가보면 어떨까요?”
장준식의 회고.
“문숭리는 다른 이름으로 숭선 마을이라도 했어요. 이재준 기자와 함께 현장에 갔는데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흩어진 기와 편들은 마치 나무뿌리 같은 무늬(초문·草紋)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재준 기자가 무언가를 확인한 거예요.”
기와 편에 새겨진 글자는 분명 휘갈겨 쓴 ‘숭(崇)’자였고 다시 면밀히 확인해보니 ‘崇善’ ‘善寺’였다. 숭선 마을에는 예로부터 돌로 만든 당간지주 한쪽이 남아 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었으나 어느 절터였는지는 몰랐다. 한마디로 이 ‘숭선’명 기와발견은 이곳에 말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숭선사 였음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왕소(광종)와 33명의 형제·남매들=고려 왕건의 혼인정책=고려사 광종대 기록을 보면 “五年春 創崇善寺 追福先妣”라고 했다. 이는 광종 5년, 즉 954년 생모인 신명순성왕후 유(劉)씨(왕건의 셋째부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숭선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결국 숭선사는 국찰이었던 것이다. 절터의 중요성이 인식되자 이제 단순한 답사모임에서 학술단체로 거듭난 예성동호회가 1995년 대대적인 지표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절의 건물터와 축대 등의 흔적, 그리고 흩어져 있는 기와 편 가운데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여러 편 수집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大定二十二年 壬寅四月 日 □□□監役副都監大師性林?交 □□□□ 金堂改盖□□□’라고 새긴 기와조각과 ‘明昌三年 □□□’이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포함돼 있었다.
앞의 명문을 보면 ‘大定(대정)’은 중국 금(金)나라의 연호로 금 세종 22년(서기 1182년)에 해당된다. 이 해는 고려 명종(明宗) 12년이며 그해 4월 법당의 지붕을 개수하여 덮었다는 것. 뒤의 명문 중 ‘明昌(명창)’은 중국 서하(西夏)의 연호로 서기 1192년, 즉 고려 명종 22년 3월에 해당된다.
그리고 ‘萬曆己卯(만력기묘)’라고 글자가 새겨진 암막새가 수습되었다. 만력(萬曆)은 중국 명(明) 신종(神宗)의 연호로 기묘(己卯)는 1579년, 즉 조선 선조(宣祖) 12년이다.
이와 같이 글자가 새겨진 기와 편을 통해 여러 차례 사찰에 변화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임진왜란(1592년) 이전에 사찰이 수리됐고, 임란 때 불탄 뒤 폐사(廢寺)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광종은 다 알다시피 고려 태조 왕건의 셋째아들인 왕소(王昭)이다. 고려 제4대 임금이 되어 재위 27년간 고려 왕권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불교신앙의 공간인 절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민심을 끌어들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태조 왕건 또한 오랜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어루만지기 위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절을 지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광종 역시 불교의 효용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광종 2년(951년)엔 송악성 남쪽에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창건, 태조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삼았다. 그런 다음 개경 동쪽에는 불일사(佛日寺)를 창건, 모후인 순명신성왕후를 기렸다.
대봉은사에 태조의 진영을 모셨으며 광종을 비롯한 역대 임금들은 해마다 6월 태조의 기일이 되면 이곳을 찾았다. 또 동쪽에 어머니를 기리는 절인 불일사를 세운 것도 따지고 보면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음을 나타내고, 광종 자신이 삼한통일을 이룩한 태조의 정통 후계자임을 만천하에 과시한 것이 아닐까.
주지하다시피 태조는 강력한 호족세력을 주무르기 위해 결혼동맹을 펼쳐 29명(혹은 30명)의 배우자 사이에 무려 34명의 자식(왕자 25명, 공주 9명)을 두었다. 그랬으니 후계자 문제는 골치 아픈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태조가 죽고 둘째왕후인 나주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인 혜종이 등극했지만 끓는 물처럼 불안했다. 나주 오씨의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혜종은 즉위 2년 만에 무너지고 정권은 왕요(정종)·왕소(광종) 형제로 넘어온다. 형제의 생모인 유(劉)씨는 중부내륙 호족인 유긍달(劉兢達)로 대표되는 충주 유씨(忠州 劉氏)의 딸.
형제는 외가인 충주세력은 물론 태조 왕건의 사촌동생이자 서경(평양)을 개척한 왕식렴과 막강한 평주 가문을 이끈 박수경 등의 도움을 받아 정권을 잡은 것이다.
배다른 형 혜종과 친 형 정종에 이어 고려 초 활화산 같던 정권다툼 와중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은 950년 등극한 광종, 즉 왕소였던 것이다. 그런 광종은 즉위 하자마자 잇달아 국찰을 세운 것이다.
◇“이제 나만의 나라를 세우겠다”며 국찰 청건한 광종
그런데 광종은 수도인 개경에도 어머니를 모시는 불일사를 세웠는데 왜 또 충주에도 어머니를 기리는 숭선사를 창건했을까. 사실은 ‘숭선명’ 기와가 충주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고려사에 나오는 숭선사의 위치가 개경 근처 어디쯤이라고 여겼다.
이유는 우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는 것. 광종은 어려서부터 신주출신인 신주원부인 강씨(왕건의 22번째 부인)의 양자가 되어 생모의 품을 떠나 있었다. 그런 만큼 생모에 대한 정이 사무쳤을 것이다.
또 하나 광종의 정치적인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충주지역 호족세력을 위무하면서 혼자만이 외가의 후손을 대표한다는 뜻에서, 충주에도 어머니 명복을 비는 사찰을 건립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는 광종 스스로의 나라를 개척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숭선사 창건에 담겨있는 게 아닐까.
이 숭선사 절터는 예성동호회 등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그 성격을 밝혔으나 여전히 방치된 채 경작 등 인위적인 파손이 날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보존대책이 시급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관계당국에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충주시에서는 드디어 2000년에 들어와 숭선사의 원래 모습과 규모는 물론 그 성격을 밝히고 나아가 정비보존 대책을 세우기 위해 충청대 박물관에 정식 발굴조사를 의뢰하게 되었다.
2003년까지 3차에 걸쳐 조사된 결과, 고려 광종 5년(945년)에 창건됐을 당시에는 남쪽으로부터 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축 선상에 배치되고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삼국시대 사찰건물배치 형태였음을 확인했다.
1차 중건시기는 고려 명종 6년(1182년)때. 사찰의 건물배치가 남북축에서 동서축으로 변하고 있는데 새로운 배치 형태의 건물들이 대대적으로 증축됐다. 2차 중건시기는 조선 선조 12년(1579년)쯤 이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부터는 폐사된 것으로 확인됐다.
◇신비로운 출토유물들
흥미로운 출토유물이 많다.
우선 금동제 연봉 장식. 이 유물은 길이 33㎝, 폭 3~4㎝, 철정 지름 약 1㎝이고 형태는 마름모꼴이었다. 4엽의 연꽃잎은 겹꽃으로 표현됐는데 연봉 밑 부분은 철못 같은 형태이고 상단은 편편하게 잘라 마무리했는데 망치로 두드린 흔적이 있다.
발굴단장인 장준식은 “이는 지붕의 추녀 끝에 박은 것이며 통도사·전등사 등 조선시대 사찰에 사용했던 백자연봉의 전신”이라면서 “화려한 금동제 연봉을 사용한 것은 숭선사의 높은 위상을 입증한다”고 밝혔다. 광종의 카리스마를 알 수 있는 당대 최고의 건물이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미스터리 유물로는 땅 표면 20~30㎝ 밑에서 확인된 분청사기로 만든 장군(술이나 물 등 액체를 담은 그릇). 그런데 이 그릇은 밀랍 같은 것으로 바른 뒤 백자사발로 덮인 채 완전히 밀봉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2001년 7월 지도위원회 때 공개됐다. 필자를 비롯한 지도위원들은 “어디에서 나왔소?” “이게 뭐요?”하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발굴단은 이 액체에 대한 내용물에 대한 성분분석을 벌인 끝에 벌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지만 100% 확실한 것은 아니다. 무슨 용도였는지도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금동보살상. 이 보살상은 ‘고려의 미소’로 일컬어졌을 만큼 아리따웠다. 보살두 1점과 2개체분의 동체부로 떨어졌지만 얼굴형상이 원만하고, 눈은 살며시 내려감은 채 눈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간 것이 특징이다.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엷은 웃음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고려시대에는 금동불이 거의 없으며 철불이나 석불 등 투박한 기법의 불상을 만들었다.
이같은 불상의 대형화, 투박화는 귀족불교에서 민간불교로 전환되는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 시기엔 크기만 따질 뿐 조형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약 2년에 걸친 보존처리 끝에 2003년 9월 이 ‘고려의 미소’와 금동연봉을 완벽하게 복원해 놓았다. 이 금동보살상과 금동연봉은 성분분석결과 수은아말감에 의한 도금기법으로 제작됐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또한 숭선사의 위상을 입증해주는 사례이다.
◇밀봉된 그릇에 담긴 액체의 정체는 벌꿀?
한가지 신기한 일이 있다. 2001년 절터에서 발굴된 분청사기 그릇이다. 과연 무슨 그릇일까.
“신기한 일이었어요. 이 절터는 6.25전쟁 때 미군 공병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어요. 포크레인 등 중장비가 수없이 다녔을 텐데 땅 밑 20~30㎝에서 온전한 형태의 밀봉그릇이 나온 건 기적이라고 봐야죠. 처음엔 너무 묵직해서 무슨 흙이나 모래인줄 알았어요.”(장준식)
전문가들은 특히 그 속에 들어있는 액체에 비상한 관심을 두었다. 액체는 과연 무엇이고, 왜 땅에 묻어두었을까. 처음엔 결로현상 때문에 생긴 액체라는 의견이 강했다.
금강경이나 법화경 같은 것을 그릇 안에 넣었으며 출렁이는 것은 밀봉상태에서 이슬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상상의 나래였다.
발견된 곳이 절터이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천마총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마총 항아리는 밀봉되지 않은 채 발견됐기에 비교대상에서 제외됐다. 어쨌든 14~16세기에 폭넓게 사용된 분청사기 그릇에 담긴 비밀은 과학적인 판단으로 풀 수밖에 없었다.
발굴단은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성분분석을 의뢰했다. 분석팀은 예민해졌다. 만약 술이나 약초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면 부패되거나 발효됐을 것이고, 그 안에는 수 백 년 동안 압축된 가스가 있을 것이다. 잘못 다루면 그릇이 터질 가능성이 있었다.
분석팀은 일단 영하 20도의 드라이아이스로 내용물을 얼렸다. 압축가스를 가라앉히는 방법이었다. 그런 다음 샘플채취용 주사기로 가스를 채집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릇 안에는 ‘염려하던’ 가스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주사기로 액체를 빼낼까. 그 또한 어려웠다. 액체가 너무 끈적끈적해서 주사기로 빼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뚜껑을 열 수밖에 없었다. 백자와 흙, 그리고 코르크 같은 나무로 똘똘 뭉쳐져 밀봉된 그릇의 주둥이를 열었다.
과연 점도가 높은 끈적끈적한 액체와 그 밑에는 고형화한 침전물이 확인됐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분석이 진행됐다. 그 결과 원래 어떤 종류의 식품이나 약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벌꿀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액체분석은 원래 2ℓ정도의 시료량이 필요하지만 부득이 25㎖의 내용물만 채취했으므로 100% 확신을 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연구원측은 술과 벌꿀, 한약재 등 3가지 가능성을 두고 분석했다. 우선 술일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민속주였다면 알코올이 10%정도는 들어있었을 것이고 보관 장소였던 구들장 근처에서 열을 받았다면 용기자체가 파괴되었을 것이다. 열을 받지 않았더라도 지속적인 발효현상으로 역시 용기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한약재였다면? 연구원은 만약 자소(紫蘇) 같은 한약재를 달인 액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국이 원산인 자소는 예로부터 식용, 혹은 약용으로 재배됐다. 잎과 종자 성분 중 페롤라알데히드가 50%이상 함유돼있고 독특한 향을 지닌 성분은 페릴라 케톤, 엘솔트지아 케톤, 나지나타 케톤, 이소고마 케톤으로 이뤄졌다.
흥분성 발한·진해·건위·이뇨약으로 이용되며 진정·진통제 혹은 뱀이나 개에 물렸을 때 독을 제거하는 데도 쓰인다. 또한 자실을 말려 음식물의 방부제로 이용되기도 한다.
결국 분석팀은 내용물이 변질돼 정확한 화학분석을 할 수는 없었지만 ‘벌꿀’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잠정결론에 도달했다. 시료채취 당시 침전된 물질은 요즘 벌꿀의 침전양상과 비슷하며 백색의 밀랍부분과 갈색부분이 분리되어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연구원은 시중 유통되는 벌꿀과 비교, 편광 현미경 실험을 했는데 황백색 시료는 시판 벌꿀 조직과 유사한 조직을 나타냈다. 육안관찰에서도 벌꿀의 점성 및 색깔, 침전특징 등이 유사했고, 현미경 분석결과에서도 시판벌꿀과 분청사기 내 물질의 조직상태가 비슷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숭선사 스님들은 이 액체가 담긴 그릇을 치밀하게 밀봉, 땅 속에 고이 묻어 두었을까. 스님이 꿀을 혼자만 먹기 위해 자신만의 은닉장소에 숨겨두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무슨 다른 연유가 있었던 것일까.
지질자원연구원은 최종결론은 유보했다. 현재까지의 기술로는 이것이 한계이며 앞으로 기술의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역사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산 도중 사망한 비운의 여인 미라(상) (0) | 2016.05.01 |
---|---|
고구려와 신라가 지하에서 만난 사연 (1) | 2016.04.05 |
감은사엔 문무왕의 사리가 있다 (1) | 2016.03.21 |
용이 되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문무왕 (0) | 2016.03.21 |
신라-당나라 국제회담장이 된 철옹성 (0) | 2016.0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