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기행

고구려와 신라가 지하에서 만난 사연

 “(경북 영풍군) 순흥면 어딘가에 새로운 벽화고분이 있다던데….”
 1960년대 초반부터 대구·경북지역 골동품상 사이에 이런 말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러나 이 말을 발설한 사람이 정확한 지점을 잊었고, 그마저 몇 해가 지나는 사이 이 발설자가 타계하는 바람에 그 벽화고분을 찾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 격이 되고 말았다.
 진홍섭(당시 이화여대 박물관장)은 암중모색을 계속했다.
 “동네 사람들의 말을 참고하면서 도굴 갱이 있는 무덤이 있으면 무덤 속에 들어가 벽화의 유무를 확인하곤 했어요. 그러던 73년 영풍 순흥 태장리에서 어숙술간묘(於宿述干墓)를 발굴한 것입니다.”
 이 벽화 묘는 철저하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 1930년대만 해도 온전한 이 벽화 묘를 구경하기 위해 각지에서 200여명이나 몰려들었다는 마을 노인의 회고담이 떠돌았다.
 벽에 바른 횟가루를 뜯어먹으면 만병통치약이라는 소문이 돌아 구경꾼들이 마구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파헤쳐진 어숙묘. 그러나 이 ‘어숙지술간묘’는 최초로 발견된 고(古) 신라 벽화고분인데다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명문이 붙어있어 연대(595년 추정)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무덤이었다. 당연히 사적(238호)으로 지정됐다.
 그렇게 순흥면 일대의 벽화무덤 사연은 마무리된 것 같았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순흥읍내리 벽화를 복원한 모습. ‘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의 명문이 발견됐다. 

◇버려진 고분에서 발견한 신라벽화

1985년 1월29일, 이명식(대구대 교수)은 이른바 어숙묘에서 불과 900m 떨어진 순흥 읍내리 일대를 답사하고 있었다.
 “저는 해마다 방학 때만 되면 영천·청도 등 경북일원을 답사하고 다녔어요. 어숙묘 말고도 다른 벽화고분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이날도 버릇처럼 등산복 차림에 지표조사 도구와 카메라 등을 챙겨 새벽 첫 버스를 이용해 대구에서 순흥읍에 도착했어요. 해가 하늘 가운데 솟아있는 정오 무렵이었지요. 전날 저녁부터 아침까지 내린 눈으로 제가 답사할 비봉산(飛鳳山) 일대는 물론 산 아래 마을들도 온통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지요. 어쨌거나 눈 내린 설경은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답사하기에는 조건이 너무 나빴다. 답사예정이던 순흥 읍내리의 뒷산, 즉 눈 쌓인 비봉산 줄기를 더듬을 일이 까마득했다.
 ‘다시 (대구로) 돌아갈까. 아니야. 그래도 왔으니까 한번 둘러보고나 가자.’
 마음을 다잡은 이명식은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마을사람들은 눈 쌓인 산을 무작정 올라가려는 이명식을 보고는 ‘별 이상한 사람 다보겠다’는 듯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 뒤로 돌아 50m쯤 더 눈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이상한 무덤 하나를 발견한 거예요. 다른 폐 고분들은 다 눈으로 덮여있는데 유독 한 무덤에서만 눈이 쌓여있지 않고 흙빛 그대로 인 것을 본 거죠. 며칠 사이에 새 무덤을 조성한 것인가 하고 다가가보니 아니었습니다. 그건 막 도굴된 무덤이었어요. 무덤 동쪽부분에 나있는 도굴 구덩이를 발견했어요.”
 도굴구덩이는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이명식은 순간 뭔가 짜릿한 전율이 느꼈다. 그건 본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좁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우 몸을 비틀며 엉금엉금 들어가는 순간 뭔가 돌에 걸려 넘어졌지만 다치지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

 

 ◇무덤 안에 희미한 그림, 그리고 글씨의 흔적

 어두운 무덤내부 공간. 처음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잠깐 후 어둠에 적응이 된 눈앞에는 놀라운 광경을 펼쳐지고 있었다.
 무덤은 돌방무덤(石室墳)이었다. 무엇보다도 도굴구덩이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비친 햇빛을 받은 북벽에 연꽃 그림과 함께 구름 그림이 보였다.
 “‘아 이거구나. 내가 신라 벽화고분을 발견 했구나’ 생각했어요.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빨리 봐야겠다는 생각에 허둥댔어요. 그런데 발에 걸리는 것이 있어 보았더니 인골이었어요. 인골이 쌓여있었습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어요.”
 이명식은 잠깐 망설였다. 내친 김에 더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는 마음도 들었지만 쌓인 인골이 부담스러웠고, 또 그 좁디좁은 도굴구멍으로 어떻게 들어왔을까, 다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일단 철수하기로 했다.
 무덤에서 나온 그는 한달음에 대구로 돌아왔다. 마을사람들이 그런 이명식을 수상쩍게 여겼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는 실내 조사를 위해 전등과 카메라 등 만반의 장비를 갖추고 조교 한사람을 데리고 3일 만에 다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2월2일이었습니다. 한결 마음에 여유가 생겨 실내를 세밀히 관찰하고 벽화를 촬영하기 시작했어요. 석실 내부 규모를 실측하고, 인골도 모두 확인했어요. 유물은 도굴 때문에 한 점도 보이지 않았어요. 순간 도굴꾼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석실내부로 들어가 조사를 마치고 대구로 돌아와 촬영한 필름을 인화한 그는 또 한 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을 보니 인물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벽화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러나 그건 양념에 불과했다. 널길이 있는 남벽을 보니, 무덤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간지(干支), 즉 ‘己未(기미)’라는 글자를 포함하여 판독이 쉽지 않은 9자의 글씨가 먹으로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이명식은 고민에 빠졌다.
 ‘그냥 언론에 터뜨릴까, 아니야 잘못하면 난장판이 돼.’
 고심 끝에 은사인 정영호(당시 단국대 박물관장)에게 연락해서 조언을 구했다. 2월13일 현장에 달려온 정영호도 “엄청난 발견”이라며 흥분했다.
 잇달아 조사를 벌이자 마을사람들이 구경나와 웅성웅성 거렸다. 이명식은 그들에게 금일봉을 건네면서 “무덤을 훼손하면 처벌받으니 마을사람들이 잘 지켜주기 바란다”고 신신당부했다. 물론 준비해온 비닐과 나뭇가지 등으로 도굴구덩이를 일단 메우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뒤처리 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영풍군청과 관계기관에 이 사실을 알렸으며 정식발굴조사를 문화재관리국에 요청하기로 했다. 그 유명한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은 이렇게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뱀 목부분을 잡고 있는 역사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서역인의 풍채다.

 
 ◇“대통령이 온다.” 호들갑에 난리 난 발굴현장

정식발굴은 6개월 뒤에야 시작됐다.
 최초 발견자 이명식이 소속된 대구대 박물관이 정밀발굴조사를 맡았으나 학교 사정상 방학기간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위원회는 6월28일 이 순흥리 고분이 학술적·역사적으로 남한지역에서 조사된 일이 없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판단했다.
 위원회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인력과 장비를 적극 지원 받아 정밀 발굴조사를 하도록 결정했다. 말하자면 조건부 허가를 결정했던 것이다.
 필자가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연구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대구대 이명식과 정밀 학술발굴조사에 따른 실무협의를 하게 되었다.
 국립기관인 문화재연구소가 사립대 박물관과 합동발굴조사를 실시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말하자면 발굴조사 비용, 조사단 구성, 보존과학적인 조사, 국립영화제작소의 기록화, 벽화묘사, 발굴조사 진행상 일어날 수 있는 제반 사항에 대한 문제 등이 협의 사항이었다.
 협의 결과 발굴조사에 따른 총지휘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인 김정기가 맡고 발굴단장은 대구대 교수인 이명식으로 하되 통상적인 발굴조사, 즉 무덤의 구조와 형식 그리고 벽화내용 및 유물조사에 따른 비용은 대구대가 부담하기로 했다.
 그리고 벽화보존에 따른 과학적인 조사와 묘사 및 보존문제에 대한 비용은 전적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담당하기로 결정했다. 발굴단이 구성되고, 발굴조사 기간은 여름방학을 이용 7월22일부터 실시하기로 했다.
 벽화무덤 발견사실에 대한 언론공개는 발견자인 이명식이 맡도록 했다. 발견자에 대한 예우였다. 그동안 보안이 유지됐던 벽화자료들은 7월10일 문화공보부 대회의실에서 공개됐다.
 한 가지 여담. 언론에서 ‘해방이후 5대 발굴이니 뭐니’하고 대서특별하면서 이 순흥 읍내리는 일약 각광을 받았다. 그러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유적의 중요성을 느꼈는지 유적방문을 결정한 것이다. 이명식의 말.
 “대통령 방문이 정해지자 공무원들이 총동원됐어요. 풍기~순흥 간 약 6㎞ 도로는 당시 비포장이었어요. 공무원들이 도로변을 꽃으로 장식하고, 물주고 난리를 떨었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도로변에 있는 모든 집들의 담장을 시멘트로 새 단장하는 촌극까지 빚었어요. 웃기는 건 정작 대통령이 방문을 취소했다는 겁니다.”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군사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씁쓸한 대목이다.
 각설하고 우여곡절 끝에 본격발굴이 시작됐다. 일단 벽화고분 보호용 가설 덧집을 마련했다. 덧집을 마련한 이유는 뭘까. 연도를 열고 내부조사를 하게 되면 태양 빛이 벽화에 쏘이게 되어 벽화의 탈색이 빨리 진행된다.
 때문에 이를 사전에 방비하고 석실내부의 온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가설 덧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사결과 도굴범들은 동쪽 벽을 일부 부수고 들어와 유물들을 남김없이 싹쓸이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세컨드(첩) 아닙니까?”

 다만 무덤의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인골, 그리고 벽화의 내용이 조사단을 한없이 행복하게 만들었다. 무덤의 구조는 널길인 연도를 갖춘 돌방무덤(石室墳).
 무덤 벽은 다듬은 돌을 여러 단으로 쌓아 만들었는데 규모는 무덤방(玄室)의 경우 동서 3.53m, 남북 2.02m, 높이 2.05m이었고 널길의 경우 높이 1.43m, 길이 91㎝, 너비 77㎝였다. 무덤 방 천장은 두 장의 편편한 화강석을 올렸고 연도는 한 장을 올려 마련했다. 이 무덤은 서쪽 편제의 소위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었다.
 벽화는 천장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묵선(墨線)으로 형태를 잡은 후 채색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노랑·빨강·검정·흰색의 안료를 써서 그렸다. 동벽에는 산악도(山岳圖)와 서조도(瑞鳥圖)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도굴로 인해 벽면이 일부 파손되고 벽화 역시 많이 떨어져 나가 전체적인 내용을 볼 수 없어 유감이었다.
 다만 서조도가 주작이나 아니면 봉황으로 판단되지만 사신도(四神圖)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서벽에 연결되는 널길 벽에는 뱀을 움켜잡은 역사도(力士圖)가 있는 반면 서벽에는 살림집과, 높게 그려진 나무들이 있었다. 남벽 역시 탈락이 심한 편이었다. 꽃밥과 수술이 있는 꽃 그림의 일부만 남아 있었다.
 남벽에 붙어 기다란 3지창(三枝槍)을 잡고 있는 널길 동벽의 역사상은 인상적이었다. 창(槍)에는 물고기 모양의 휘날리는 깃발이 널길의 이마돌(楣石) 위에 가득하게 그려져 있었다. 반면 삼지창 옆에는 두 줄로 간지가 있는 9자의 먹 글씨가 있었다. 북벽에는 산악과 구름·나는 새·꽃·연못과 연꽃 등 다양했다.
 전체적인 벽화의 내용을 보면 역시 고구려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고구려 사신도(四神圖) 벽화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유물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사람 뼈는 주인공이 묻혔던 위치에 3인의 것이, 그리고 별도로 마련된 곳에는 적어도 6인의 뼈가 모여 있었다. 무덤 내에 최소한 9인의 인골이 발견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40세 이상의 남자 주인공에 20세 이상의 여주인공이 묻혔다는 점이었다. 발굴단 사이에 농담이 터졌다.
 “세컨드(첩) 아니야?”
 나머지 뼈들은 대부분 17~21세 사이의 여성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이렇게 많은 사람의 뼈가 한 무덤 내에서 발견된 예는 이 벽화고분이 처음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벽화고분 조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과연 이 벽화가 언제 축조되었는 가이다. 


 ◇무덤의 조성시기는 539년?

 물론 도굴로 인해 출토유물의 비교검토를 통한 축조연대 추정은 어려웠다. 하지만 고분의 구조와 출토된 인골을 비롯하여 무엇보다도 먹으로 쓴 글 가운데 기미(己未)라는 간지가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이로써 축조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간지는 60년의 간격을 가지고 있다. 정확한 연대를 찾아내지 않으면 60년·120년·180년의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기 어려움이 있다. 
 최우선 과제는 이 벽화무덤의 주인공이 고구려인이냐, 신라인이냐를 밝히는데 있다. 벽화의 내용에 고구려적인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 무덤의 주인공이 고구려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반면 무덤의 위치가 신라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신라와의 관계를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최초 발견자인 이명식은 539년 설을 주장한다. 이 무덤의 피장자는 고구려가 파견한 지방통치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는 일단 삼국사기 지리지를 인용, 지금의 영풍군 순흥면은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고구려·백제의 국경선은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충북과 경북 경계에 해당하는 소백산맥 일대로 생각되고 있으나 그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소백산맥 남쪽까지 내려왔다고 본다.
 고구려가 광개토대왕때(399·400년) 신라를 사실상 예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구체화하면서 두 차례나 신라침공을 단행, 북변의 요새인 실직주성(悉直州城·삼척)을 빼앗았다. 그 후 고구려는 동쪽으로는 흥해(포항), 내륙으로는 청송, 안동, 예천, 문경, 서산, 당진까지 세력을 떨쳤다는 것이다.
 이명식은 고구려가 소백산맥 남쪽까지 지배력을 완전히 굳힌 것은 문자명왕(재위 492~519년), 즉 신라의 소지왕(재위 479~500년)때로 추정할 수 있으며 안장왕(519~531년)·안원왕(531~545년)을 거쳐 양원왕 7년(551년·진흥왕 12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순흥지역은 진흥왕이 551년 북진할 때까지 40여 년간 고구려 영토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식도 고구려 영토의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으며 단편적인 사료를 종합한 것임을 인정한다.

 

순흥 읍내리 벽화무덤.


 ◇그렇다면 왜 고구려 유물은 단 한 점도 없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순흥 주변에서 고구려적인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이 무덤이 신라무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미년의 실제 연대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9인이라는 많은 사람의 인골이 한꺼번에 묻혀 있는 것도 풀어야 할 수수께끼이다. 말하자면 주인공의 사후에 함께 묻히는 순장이냐, 아니면 가족 무덤이냐고 생각해 볼 문제이다.
 여기 함께 묻혀있는 인골이 모두 17세 이상 비슷한 나이의 여성인골이라는 점은 순장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가족장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간지에 나타난 기미년은 신라에서 순장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가 아닌가. 순장은 지증왕 3년, 즉 502년에 법으로 금지됐다.
 그렇다면 무덤의 조성 시기는 순장이 실시되고 있던 시기, 즉 539년이 아니라 479년이라는 얘기다. 삼불 김원룡은 이와 관련해서 순흥의 벽화무덤을 토착 신라인의 무덤이 아니라 고구려 출신 주민의 무덤으로 보았다. 기본적으로는 고구려계이면서 부득이 현지 양식화한, 말하자면 신라화한 고구려 계통의 벽화 분으로 해석한 것이다.
 ‘고구려 계통’이라는 배경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사정에 의해 소백산을 넘어 신라의 가장 북쪽 외곽지대인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고구려계 주민의 집단이거나 그 후예들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럴 경우 신라에 귀부한 고구려계 호족에게 신라정부가 관직을 주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근거로 김원룡은 고구려에서는 기년(紀年)에 반드시 연호를 쓰고 있지만 순흥의 두 무덤, 즉 어숙묘와 읍내리 고분의 명문은 모두 ‘간지’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고구려 영토 안에 있는 벽화고분은 주로 지안·평양 두 곳, 즉 수도에 국한돼있음도 주목한다. 그것은 벽화고분이 수도에 사는 중앙귀족에게만 허용된 묘제일 가능성이 크며, 더욱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순흥 고분이 고구려 고분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뜻이다.
 결국 신라영토 안의 고분이라는 게 김원룡의 견해이다.
 미술사학자 안휘준도 일단 벽화의 화풍이 고구려 고분벽화, 특히 초·중기 고분벽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은 인정한다. 산악도를 비롯, 그림의 내용이나 영식이 고구려 덕흥리 고분(408년), 무용총(5세기 후반)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대는 479년으로 본다.


 ◇“무덤은 479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인의 것이 맞다”

 하지만 이 벽화는 묘주의 국적이 무엇이든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고신라의 것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를 악물고 뱀을 지닌 역사상의 경우 고구려 삼실총의 장사와 비교된다. 하지만 삼실총에 나타난 고구려의 장사는 고구려 옷을 입고 뱀을 목도리처럼 목에 건채 천장을 받쳐 든 모습을 하고 있다. 순흥 고분 역사와는 다른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경우 주인공의 삶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풍속화의 경향을 보이는 데 반해 이 순흥 벽화는 그렇지 않다. 
 또한 역사(力士)가 차고 있는 귀고리도 주목거리다. 고구려 역사상들은 옷과 신발을 갖추어 착용하지만 귀고리를 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삼국 가운데 신라인들은 적극적으로 귀고리를 애용했다. 따라서 역사상에까지 귀고리를 패용시킨 것도 아무래도 고구려보다는 신라적인 발상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실분 남쪽에서 발견된 묵서명의 정확한 판독은 무엇인가. 이 묵서명은 2행으로 되어 있었다. 1행에는 ‘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 2행은 ○○(판독불가)였다. 김창호(경주대 교수)는 “기미년에 묘상인명은 ‘○○…’이다”라고 해석했다.
 즉 여기서 묘(墓)자는 순흥의 벽화 고분 자체를 가리키므로 상(像)은 묘의 주인공을 지칭한다는 것.
 이렇게 간지만 확인되면 이의 실제 연대를 밝히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 해석하게 되면 바로 60년 또는 그 이상의 시기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벽화무덤 발굴조사에 있어서 몇 가지 특기할 사항이 있었다.
 가설 덧집을 마련한 것 외에 석실내부 조사를 하기 전 내부온도와 습도를 측정했고, 조사기간 내내 온습기와 대형 선풍기로 실내온도를 유지했다는 것. 또 먹으로 쓴 글씨에 대한 적외선 촬영을 직접 시도했다는 점도 특이사항이다.
 그리고 국립영화제작소 팀이 조사 진행 과정을 기록화 했다. 아울러 내부조사가 완료될 무렵 현장에서 지도위원들과 조사위원들의 연석회의를 열었다는 점도 전례 없던 일. 무덤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즉석 세미나였던 셈이다.
 이밖에 발굴조사가 완료되고 난 후 처음으로 벽화에 대한 모사, 즉 벽화를 그대로 그려서 복사하는 작업을 시도했다는 점을 예전에는 없던 일이다.
 그러나 무덤이 발굴조사 되고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보다 진전된 연구가 없다. 이는 발굴조사만이 능사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폐균에 감염된 허리 측만증에 걸린 주인공

발견된 인골의 상태로 주인공의 지병을 짐작할 수 있다. 

고고학자 최몽룡은 “묘 주인공은 40세 이상의 노년층이 분명하고 극심한 허리 측만증에 시달린 것 같다.”고 전했다. 수습당시 이 고분인 이미 도굴된 상태였고, 인골도 도굴범들의 훼손 때문에 무너져 장작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따라서 인골들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관대 위에 있는 인골은 4사람 분이었다. 주인공인 피장자 부부와 도굴시 보조관대 쪽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 분이었다. 다행히 주인공 부부의 뼈는 거의 대부분 남아있었다. 다른 인골들은 골반이나 대퇴골, 경골, 비골 편뿐이었다.

발굴된 인골. 인골을 분석한 결과 묘 주인공은 40세 이상이며. 허리측만증을 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골분석은 미 하버드대에서 형질인류학을 공부한 최몽룡이 맡았다.

최몽룡의 인골분석에 따라 1,500년 전 사람들의 몸 상태와 병력 등을 알아보자. 먼저 남녀 주인공의 몸 상태. TrotterGleser의 공식(2.39X경골+81.45±3.27)을 적용하면 남자 키는 165~169사이였고 여자는 162정도였다. 이 공식은 트로터와 글레서 등 두 학자가 6.25 전쟁 당시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미군 전사자들의 뼈를 토대로 만든 것이다.

분석결과 주인공 남자의 병은 노인성 질환이었다. 우선 척추가 구불구불하게 경사된 측만증이 심했다. 요추의 앞쪽 추체가 뒤쪽보다 훨씬 얇았으니 허리를 쓰지 못했으리라.

최몽룡은 허리가 90도 굽어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다니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요추가 폐결핵균 등에 의해 손상을 받아 붙어서 측만증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었다. 최교수는 주인공은 폐병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또한 척추에서 뼈가 밖으로 자라는 골증식증과 구멍이 많이 생기는 골다공증도 심했다.

모든 걸 종합해볼 때 이 주인공은 노인성 질환에 시달린 것이다. 사람의 뼈는 보통 40세를 전후해서 이른바 노년기로 넘어가는데 이때부터 골 밀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

최몽룡은 묘 주인공의 추정나이는 최고 80세까지로 볼 수 있으며 청동기 시대 평균수명이 대략 25~35세로 추정되는 만큼 굉장히 장수한 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20세 이상(21~25)으로 추정되는 여주인공의 상태는? 젊은 여자인 만큼 다른 병은 감지되지 않았고 이빨의 범랑질(enamel)이 심하게 마모됐으며, 치근과 법랑질 사이에 부패(치주염)가 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보통 범랑질은 40세 이후에나 벗겨지는데 이 젊은 여인은 20세 나이인데도 그렇게 됐다.

어쨌든 지금처럼 치약으로 이빨을 닦지 않았고 양치질 또한 제대로 하지 않았을 당대 사람들이고 보면 이빨이 빨리 손상된 것은 당연하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그랬듯 당대 사람들도 모래 같은 것으로 이빨을 닦았을까. 출토된 다른 젊은 여성의 이빨에서도 치주염과 감염에 의한 치아손상이 눈에 띄었다. 잇몸이 움푹 파인 증상이다. 또 하나 현실 내에서 류마치스 관절염에 걸렸거나, 혹은 선천성 기형이거나 한 척추 뼈가 눈에 띄었다.

발굴단(대구대) 보고서는 주인공 부부 말고 성별을 알 수 없는 뼈 가운데는 류마치스성 관절염에 걸린 것도 보인다고 밝혔다. 남자 주인공의 신장은 황석리 발굴 인골(174추정)을 제외한 다른 유적에서 발굴된 인골보다 2~10, 여자는 10~14정도나 컸다.

흩어진 뼈들을 분석하면 부부를 포함해서 6~10인이 묘에 함께 묻힌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남자 주인공이 죽자 첩과, 그리고 신분이 낮은 하인들이 순장의 형식으로 묻힌 것으로 볼 수 있다. 묻힌 이들이 거의 17~21세 사이의 여성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그걸 뒷받침해준다.

물론 가족묘의 개념을 배제할 수는 없다. 여자 주인공이 첩이 아니라 정실부인인데 남편보다 훨씬 먼저 죽어 이곳에 묻힌 뒤 훗날 남편이 죽자 합장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남자주인공이 묻힐 때 다른 곳에 묻혀있던 가족들의 뼈만 추려 이장했다는 말이 된다. 최몽룡도 순장에 무게를 두면서 키가 크고 영양상태가 좋은 것으로 보아 주인공 부부는 지배계층일 것이라고 추정했다경향신문 논설위원(이 글은 2004년에 쓰여진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