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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강보에 싸인 두 병정아!"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

“선생님, 제가 채소바구니를 짊어지고 날마다 홍구(虹口·훙커우) 방면으로 다니는 이유가 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上海·상하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으니 선생님께서….”

1932년 4월1일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다. 충남 예산에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둔채 혈혈단신 상하이로 건너온 24살 청년 윤봉길(1908~1932)이었다.

청년은 피혁공장과 세탁소 등에서 일하다가 훙커우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고 있었다. 백범을 찾아온 용건은 “(이봉창 의사처럼) 제발 나를 독립운동 자원으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김구 선생은 허심탄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청년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끝에 ‘의로운 대장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요.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有志者 事竟成)는 말이 있지…. 사실 내가 요사이 연구하는 바가 있는데 마땅히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 참이었소.”

윤봉길 의사와 백범 김구 선생이 거사직전에 맞바꾸었던 회중 시계. 왼쪽 사진은 윤봉길 의사가 “저는 새 시계가 필요없다”면서 백범에게 건네준 시계(등록문화재 제441호)이다. 오른쪽 시계는 윤봉길 의사가 신상시계를 건네주고 백범으로부터 받은 낡은 시계(보물 제568-2호)이다.

■‘죽을 자리를 구하러 왔습니다.’
당시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내 한국독립운동의 입지는 매우 좁았다. 1931년 7월 일제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 지역에 이주한 한인과 현지 중국인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술책을 썼다.

일본 경찰이 개입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조선에서는 중국인을 배척하는 폭동까지 일어났다. 이른바 만보산 사건의 본질은 만주에 세력을 형성한 중국 민족운동 세력과 한인 세력의 반일 공동전선 투쟁을 막고 분열시키려는 일제의 음모였다.

일제의 이간책에 휘말리는 통에 중국 내에서도 한인에 대한 악감정이 커져만 갔다. 상하이 길거리에서조차 중국인과 한인 노동자간 충돌이 벌어졌다.

거사에 앞서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치른 윤봉길 의사

일제는 한발 더 나아가 1931년 9월 만주 사변과, 1932년 1월 상하이 사변을 잇달아 일으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됐고, 20년대 후반에는 해외동포들의 모금도 거의 중단됐다. 독립운동가들도 대부분 상하이를 떠났고, 소수의 임시정부 고수파만이 외롭게 간판을 지키고 있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가 이런 난국을 타개하려고 만든 단체가 바로 한인애국단이었다. "현단계에서 대대적인 군사작전은 어렵지만 테러공작, 즉 요인을 암살·파괴하는 공작을 펴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백범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공작에 사용하는 자금과 인물의 출처 등 전권을 백범에게 위임했다.

한인애국단의 첫번째 임무는 이봉창 의사의 ‘일왕 저격 미수 사건’(1932년 1월8일)이었다. 물론 이 사건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의 신성불가침인 일왕의 저격을 꾀함으로써 세계만방에 한인이 일본에 결코 동화되지 않았음을 과시한 사건’으로 평가됐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국민일보’의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지만 ‘불행히 명중시키지 못했다(不幸不中)’”는 기사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물통 및 도시락 폭탄을 제조한 까닭
각설하고 백범이 청년 윤봉길과 이야기하면서 떠올린 ‘요사이 연구하는 바가 있는 계획’이 무엇이었을까.

“왜놈이 (상하이 사변에서) 승전했다는 위세를 업고 4월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일왕의 천장절(생일) 경축식을 열 모양이오. 성대하게 거행해서 군사적 위세를 크게 과시할 것 같은데 윤군이 한번 일생의 대목적을 달성해봄이 어떻소?”(<백범일지>)

한인애국단 선서문.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봉길의 답변은 시원시원했다.
“예. 이제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때마침 일본 영사관은 ‘일일신문’을 통해 상하이 주재 일본인들에게 “식장에 참석하는 자는 물병 하나와 도시락, 일본 국기 하나씩 들고 오라”고 통보했다. 백범은 “이거야” 하고 무릎을 쳤다. 백범은 용의주도했다. 즉시 중국군 장교였던 김홍일(중국명 왕슝·王雄)과 상하이 병공창장인 송식표를 찾았다.

“어깨에 매는 물통과 도시락을 사서 보낼테니 3일 안에 그 속에 폭탄을 장치해서 보내주시오.”

폭탄제조를 맡은 중국인 기사 왕바이슈(王伯修) 등은 뇌관 20개를 실험해서 20개 모두 폭발성공을 마친 뒤에야 물통 및 도시락에 고성능 폭탄을 장착했다. 그것도 20개 모두 무료로 주었다. 이봉창 의사에게 건네주었던 폭탄의 능력이 미약해서 일왕을 폭살시키지 못했다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소중하게 만든 고성능 폭탄은 김홍일의 집에 운반되었다.

■최후의 조찬, 쇠고기 국밥
이제는 윤봉길 의사의 차례였다. 천장절 사흘 전인 4월26일 윤봉길은 한인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거행했다.

“나는 적성(赤誠·참된 정성)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왜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합니다.”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기념식. 일본 군대 1만명 등 모두 3만명에 이르는 일본인들이 대대적인 환영식을 열었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일으키기 직전의 단상 사진이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 상하이 주둔군사령관은 오른쪽에서 두번째에 서 있다. 

선서를 마친 윤봉길은 태극기 앞에서 임시정부 재무장인 김구 선생과 기념촬영을 했다. 백범은 윤봉길에게 거사비용 은화 200냥을 주었다. 윤봉길은 거사장에 입고들어갈 양복 한벌과 시계 등을 구입했다.

윤봉길은 이때 마련한 일본식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날마다 훙커우 공원을 답사했다. 식장을 설치하는 모습을 살펴보며 거사할 위치와 동선을 점검했다. 또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상하이 주둔군사령관(대장)을 비롯한 폭살 목표 요인들의 사진을 구하고 일장기를 마련했다.

거사당일인 29일 새벽 윤봉길은 백범과 함께 교포 김해산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백범은 김해산에게 미리 “쇠고기 국밥 좀 마련해달라”고 부탁해놓았다.

윤봉길의 마지막 식사 모습을 지켜보는 백범의 가슴은 찢어졌다. 당시 56살인 백범에게 이제 24살에 불과한 청년 윤봉길은 영락없는 아들뻘이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어른들 때문에 이 앞길 창창한 청년을 사지로 보내야 하다니…. 밥 먹는 윤봉길의 모습을 묘사한 <백범일지>를 보라.

“윤군의 기색을 보니 태연자약했다. 농부가 논밭에 나가려고 일찍 일어나 자던 입에 일부러 밥먹는 것을 보면 할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수 있다는데….”

윤봉길 의사의 격살 목표였던 시라카와 상하이 주둔군 사령관이 식장에 들어서는 모습. 윤의사의 폭탄을 맞은 지 28일만인 5월26일 사망했다. 일본은 일왕까지 나서 작위와 어주까지 내리고 욱일훈장까지 주는 등 쾌유를 빌었으나 결국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자 중국인들은 축포를 터뜨리며 환호했다.

■맞바꾼 회중시계와 탈탈 털어준 돈
아침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윤봉길이 품에 지니고 있던 회중(懷中, 품안에 넣는) 시계를 꺼냈다.

“선생님, 이 시계, 선생님 것과 바꾸시죠.”
윤봉길의 시계는 백범이 건네준 거사자금 중 6원을 주고 산 신제품이었다.

“보아하니 선생님의 시계는 낡았네요. 한 2원짜리 밖에 안될 것 같네요. 저에게는 1시간 밖에 소용없습니다.”

백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청년이 건네주는 시계 또한 마지막 기념품이 아닌가. 이렇게 백범의 시계와 윤봉길 의사의 시계가 맞교환됐다.

이 뿐이 아니었다.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로 향하는 자동차를 타다말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윤봉길 의사가 지니고 있던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 윤의사는 투척한 것은 물통 폭탄이었다.

“선생님, 이게 남은 돈인데요. 자동차 요금 주고도 5~6원 정도는 남을 것 같습니다. 제겐 필요없는 돈이니 선생님이 갖고 계십시요.”

“무슨 소리? 그래도 돈은 좀 갖고 있어야지.”

“아닙니다. 전 필요 없습니다.”
백범이 돈을 돌려줄 사이도 없이 자동차가 미끄러져 갔다. 백범은 허공으로 팔을 내저으며 몇 걸음 자동차 뒤를 쫓아갔다.

“윤 군! 윤 동지!…나중에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 의사가 차창으로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무심한 자동차는 경적을 내며 훙커우 공원으로 내달렸다.

■무력시위에 나선 일본군
윤의사가 훙커우 공원에 도착한 것은 7시45분이었다.

천장절 행사는 상상 이상으로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기갑 및 보병 기마부대가 상하이의 온 시가를 누볐고, 행사장을 에워쌌다. 공중에서는 수십대의 비행기가 무력시위를 벌였다.

윤봉길 의사는 어깨에 물통을 메고 양손에 도시락과 일장기를 들고 입장해서 일반관람객 속에 자리를 잡았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후 아수라장이 된 천장절 식장. 중상자를 끌어내리는 장면이다.

식장은 발디딜 틈도 없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외국사절도 초청됐지만 절대 다수가 일본의 공·상업 각계인사와 상하이 거주 일본인 남녀노소였다. 무력시위에 나선 일본군 1만명을 포함해서 총 3만명의 일본인이 자리를 메웠다.(‘시보’ ‘시대신보’ 4월 30일자)

오전 9시가 되자 삼엄한 경비 속에 상하이 주둔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필두로 내·외빈이 줄줄이 입장했다. 단상에는 시라카와와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 제9사단장인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과 상하이 총영사인 무라이 쿠라마쓰(村井倉松), 일본공사인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와 일본 거류민 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 거류민단 서기장인 도모노 모리(友野盛) 등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공식 행사와 열병식은 2시간 30분간 이어졌다. 열병식 후 외빈들이 자리를 떠난 뒤 일본의 주요기관 인사와 일본교민들만이 참여하는 관민결합대회가 열렸다. 이때가 11시 30분이었다. 윤봉길 의사가 슬슬 움직일 시간이 되었다.

1932년 5월1일 일본 오사카아사히 신문 1면에 실린 윤봉길 의사 채포장면. 현장에서 구타당해서 파투성이가 되었다는 보도가 많았지만 이 사진에서 보이는 윤의사의 얼굴과 옷은 깨끗하다. 이 때문에 사진의 주인공이 윤의사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피바다가 된 사령대
일본 교민들이 부르던 기미가요(君が代)의 마지막 한 절이 끝나고 시간이 11시45~50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윤봉길 의사가 일어나 사령대 쪽으로 물통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시게미쓰와 노무라 우측, 우에다 좌측에 떨어졌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자 시라카와와 우에다가 ‘폭탄이다’라 외치며 10여 발자국 물러섰다. 잠시 뒤 폭탄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신보> <시보> 4월30일자)

같은 날짜인 5월1일자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호외 2면에는 피를 흘리는 윤봉길 의사의 사진이 실려있다. 아마도 격화된 반일감정에 불을 붙이지 않을까 두려워 한 일본 신문이 깨끗하게 처리한 1면 사진을 실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김상기의 '윤봉길의 상해의거에 대한 일본언론의 보도' 논문에서)

중국 신문들은 폭탄이 터진 뒤의 장면을 앞다튀 보도했다.

“가와바타는 내장이 모두 쏟아진채 경축단상에 꿇어앉아 ‘사람살리라’고 소리 질렀다. 시라카와는 왼뺨에 파편이 박혔다. 시게마쓰는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졸도했고, 노무라는 왼쪽 눈알이 튀어나왔다. 사령대가 질퍽하도록 피로 물들었다.”(신보 4월30일)

폭탄이 터진 사령대 바닥판은 산산조각났다.  
“보통의 수류탄이 아니다, 알루미늄제 군용보온병으로 위장된 특수폭탄이었다. 보온병 안에는 물대신 강력한 화약이 채워져 엄청난 위력을 보였다. 사령대를 크게 파손시켰다. 사령대 왼쪽 앞에는 직경이 1m 가까운 구덩이가 패였다. 화약을 담은 알루미늄통은 폭발과 함께 엄청난 파편이 되어 가공할 살상력을 보여주었다. 두께 2촌, 넓이 9촌 정도인 사령대 바닥판은 산산조각 났다.”(‘시보’ 4월30일)

봉길 의사에게는 아직 던지지 못한 도시락 폭탄이 남아있었다. 중국신문들은 “도시락 폭탄은 길이 8인치, 폭 3인치, 깊이 2인차 정도였고 안에는 폭약이 가득차 있었다”고 전했다.

중간수사발표와 함께 용의자의 사진을 게재한 ‘오사카 아사히 신문’ 5월7일자. 5월1일자 호외 1면에 썼던 사진을 얼굴만 따서 다시 게재했다. 만약 윤봉길 의사가 아니었다면 잘못된 사진을 중간수사발표 이후에도 그대로 재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차별 구타당한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당했다. 

“일본인들이 마구 구타했다.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피투성이가 됐고, 헌병대에서 그를 압송했다. …군중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피투성이인 상태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한 모습이었다.”(‘신보’ 4월30일)

‘대만보’는 서양인이 본 윤봉길 의사의 체포장면을 전하고 있다.

“사령대 옆의 사람이 난폭하게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제압하여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군중은 그 사람의 옷을 찢고 발로 차며 마침내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일본 헌병대가 끌어냈을 때는 얼굴부터 허리까지 선혈이 낭자한 모습이었다. 옷소매 사이로 연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냉소가 흘러나왔다.”(‘대만보’ 4월30일)

각 신문들의 보도를 보면 윤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를 당한 뒤 헌병대로 끌려갔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 체포사진은 조작되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오사카아사히 신문(大阪朝日新聞)’의 5월1일자 호외 1면 사진은 무엇인가. 그 사진을 보면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의 얼굴과 옷이 깨끗하다.

이 때문에 이 사진의 주인공이 윤봉길 의사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얼굴과 옷이 깨끗한 사진은 이것 뿐이다.

같은 날짜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호외 2면에는 ‘머리카락이 서있고, 얼굴에 핏자국이 보일 정도의 성처가 난 윤봉길 의사의 사진’을 실었다.

거사 후인 5월8일자 일본 '홋코쿠신문(北國新聞)에 실린 윤봉길 의사 가족사진. 왼쪽이 윤의사 아버지 윤황, 뒤에 아이를 보듬은 이가 윤의사 부인 배용순, 어린애는 윤의사의 자녀들이고, 오른쪽 3명은 윤의사 동생들로 추정된다.

즉 1면에는 깨끗한 사진을, 2면엔 피투성이 사진을 실은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발행되는 영자지인 ‘더 차이나 위클리 리뷰’  4월30일자와 '더 차이나 위클리 리뷰' 5월7일자 사진을 봐도 얼굴이 시커멓고. 코트에 진흙 같은 것이 묻은채 헌병에 의해 끌려가는 윤봉길 의사의 모습이 보인다.

세 커트의 사진을 보면 주인공은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호외 1면 사진만 깨끗할까.

혹시 ‘오사카아사히 신문’이 사진원판에 손을 댄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간다.

1면에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내면서 핏자국이 서명한 윤의사의 얼굴사진을 그냥 싣는다면 상하이 사변 이후 격화된 반일감정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를 당했지만 의연했다. 범인임을 숨기지도 않았고 혹독한 고민 속에서도 너무도 태연자약했다.

“체포 후에도 윤봉길은 전혀 긴장하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태연자약했다.”(‘대만보’ 4월30일)

“다급해진 일본헌병은 윤봉길의 입을 열게 하려고 온갖 가혹한 방법을 다 동원했다. 윤봉길은 만신창이가 됐다. 사람들은 밤낮으로 이어지는 고문에 윤봉길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믿고 있다.”(‘시사신보’ 5월3일)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마쓰 마모루. 훗날 외무대신이 된 그는 항복후인 1945년 9월2일 미주리 함상에서 열린 항복조인식에 나설 때도 무게 10kg의 의족에 의존했다.    

■다리를 절단한 미래의 외무대신

그렇다면 사령대(식단) 위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일본인 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지는 폭발 직후 내장에 쏟아져 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급히 후송되었지만 다음날 새벽(4월30일) 사망했다.

“내장이 쏟아져 나온 가와바타는 새벽에 두 차례나 피를 토하고 거품을 뿜으며 기침을 그치지 않다가 결국 새벽 3시10분 사망했다.”(‘대만보’ 4월30일)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온몸에 64곳이나 파편이 박힌채 혼수상태로 이송됐다. 결국 일주일만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중국 신문들은 시게미쓰의 수술소식을 고소하다는 듯 아주 선정적인 필치로 전했다.

“수술용 톱으로 다리를 잘라낼 때 선혈이 사방으로 튀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잘라낸 다리 부위의 살과 근육이 한동안 꿈틀대는 모습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시보’ ‘시사신보’ 5월6일)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는 훗날 일본의 외무대신이 됐고 1945년 9월2일 미국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었다.

폭발 직후 눈알이 빠진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결국 실명하고 말았다. 제9사단장인 우에다 중장은 발가락 4개가 완전히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고, 상하이 총영사인 무라이와 거류민단 서기장인 도모노는 경상을 입었다.

시라카와가 죽은 뒤 시라카와의 부관이 피묻은 군복을 정리하고 있다. 

■술까지 마시다 사망한 사령관 시라카와 
그러나 관심의 초점은 역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자 육군대장인 시라카와였다.

윤봉길 의사의 타격목표가 바로 시라카와였기 때문이었다. 시라카와는 1925년 대장으로 승진한 이후 육사교장, 시베리아 파견군 사령관, 육군성 차관, 관동군 사령관 등을 거쳐 육군 대신을 지낸 일본 육군의 대표적인 지휘관이었다.

1928년 퇴직했지만 1932년 1월 29일 상하이 사변을 발발하자 다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복직됐다. 한마디로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을 상징하는 핵심인물이었다.

시라카와는 30여군데가 넘는 파편을 맞았지만 비교적 상태가 좋았다가 패혈증세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일왕이 남작의 작위와 욱일훈장까지 내리고, 사주(임금의 내리는 술)까지 하사했지만 사망했다.

그랬으니 중국신문들도 시라카와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실 의거 직후 시라카와의 용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왼쪽 뺨 7~8곳의 파편을 맞았고, 어깨와 복부 및 다리에 30여곳의 상처자국이 남아있었다. 일본 육군병원 측도 “출혈이 심하지 않아 4주 정도면 완치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시보’ 5월1일) 병세가 나날이 호전되어 병상에서 술을 마실 정도였다.

‘시사신보’는 “평소 술을 좋아한 시라카와가 브랜디를 찾고 있으며 문병 온 지인들과도 환담을 나눴다”(5월4일)고 전했다. 그러나 5월21일이 되자 시라카와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그동안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던 시라카와가 내장출혈로 인한 혈변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시사신보’ 5월21일)

23일 새벽 시라카와가 완전히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지자 일본 본토에서 일왕까지 나서 난리를 피웠다.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시라카와에게 ‘사주(賜酒·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리는 술)’와 함께 욱일 대훈장과 남작의 작위까지 내렸다. 5월24일 혼수상태에 빠진 시라카와의 병상에서 의식을 펼쳤다.

먼저 일왕의 칙어를 봉독하고 남작의 작위를 내리는 사실을 알렸으며, 사주인 백포도주를 시라카와의 입술에 적셔주었다.  

시라카와가 일본에게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왕까지 나서 쾌유를 빌고 별의별 수단을 썼지만 시라카와는 회복하지 못했다.

위장과 대장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감행했지만 5월26일 오전 11시 40분 사망했다.

중국 국민당 주석이었던 장제스(蔣介石) 전 대만 총통이 1969년 윤 의사를 기리며 쓴 헌시. 장 총통은 "살고 죽는 것을 알고 바른 기운을 세상에 남기고 천지 사이에 의리를 취하여 몸을 바쳐 어진 것을 이루었으니 업적이 길이 빛나리라"라고 윤봉길 의사를 칭송했다. 장제스는 의거 당시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칭찬한 바 있다.

■축포를 터뜨린 중국인들
중국인들은 시라카와가 사경을 헤맬 때부터 ‘이미 사망했다’는 소문까지 미리 퍼져 축포를 터뜨리며 환호했다.

“일본은 이번 전쟁이 황군의 위력을 떨쳐보인 승전이라 큰소리치고 있지만…전쟁통에 노무라와 우에다가 다치고 시라카와의 사망소식이 들려오자 상하이의 모든 시민은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했다.”(<상해보> 1932년 5월25일)

시라카와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무렵인 5월25일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파견 일본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아무리 군법회의였다지만 1월8일 일왕을 저격한 이봉창 의사가 9차례나 심문을 받고 9월30일 사형선고를 받은 것에 비하면 너무도 전격적인 재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상해보’는 “일본은 시라카와의 무덤에 윤봉길 의사를 순장시키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시라카와가 사망하자 일본정부는 윤봉길을 처형하여 시라카와를 따라 순장시키려 한다. 시라카와의 죽음에 대한 앙갚음으로 사형에 처해진다 해도 윤의사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상해보’ 5월 31일)
중국 신문은 “윤봉길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윤의사를 기리고 있다.

윤봉길 의사가 아들에게 남긴 친필 유언. 젖먹이 두 아들에게 ‘강보에 싸인 두 병정, 너희가 피가 있고 뼈가 있거든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라’고 당부하고 있다.

■훙커우 의거의 후폭풍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는 엄청난 후폭풍을 안겼다. 만보산 사건 이후 비등했던 중국내 반한 감정이 말끔히 해소됐다. 한술 더떠 중국과의 반일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중대 계기를 마련했다.

충격에 빠진 일본군은 확전을 단념하고 긴급히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주석은 “100만 중국군이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했다.

이후 중국 군관학교에 100여명의 한인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조선 의용대 및 한국광복군의 근간이 되었다. 임시정부 또한 침체기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국내외 동포의 재정적, 정신적인 지원까지 재개되면서 임시정부는 부흥의 전기를 마련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공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1932년 12월19일 일본 가네자와(金澤) 교외인 육군작업장에서 총살형을 당한 윤봉길 의사. 군법회의의 총살형은 일본역사상 3번째였다고 한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1949년 6월26일 오후 2시36분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진 백범 김구 선생의 유품은 모두 18점이었다.

그 중 10점은 피묻은 선생의 옷이었고, 5점은 도장이었다. 3점은 선생이 쓴 유묵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1점은 바로 윤봉길 의사와 맞바꾼 회중시계(등록문화재 제441호)였다.

그렇다면 백범이 윤봉길 의사에게 준 시계도 있을 것이 아닌가. 물론 있다. 윤봉길 의사가 간직하고 있던 백범의 시계는 지금 보물(568-2호)이다.

지금도 25살 윤봉길이 아버지뻘인 백범 선생과 주고받은 말이 귀에 쟁쟁하다.

“선생님, 저에게는 새 시계가 필요없습니다. 선생님이 필요할 것 같아요.”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행 자동차를 타면서 백범에게 주섬주섬 호주머니를 뒤져 남은 돈을 건네면서 했다는 말도….
“선생님 저에겐 돈이 필요없어요. 선생님이 쓰세요.”
달리기 시작하는 자동차를 따라 쫓아가던 백범이 했다는 말도 어떤가.
“윤군! 윤동지! 지하에서 봅시다.”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 또한 가슴 먹먹한 여운을 남긴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흐르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생각할수록 못난 나라다. 24살 앞날이 창창한 젊은 가장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니 말이다. 그뿐인가. 윤의사는 어리디 어린 젖먹이 두 아들에게까지 ‘강보에 싸인 두 병정’이라 하면서 ‘조국을 위한 용감한 투사가 되라’고 독려했다. 다시는 그런 못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스치듯 흘려보낸 4월29일의 역사를 다시 소환해보는 이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한시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2권 32호,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상기, ‘윤봉길 상해사변에 대한 일본언론의 보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2권 32호,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광재, ‘윤봉길의 상해의거와 중국측 역할’, <한국민족운동사 연구> 제33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2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2011
김광, <나의 친구 윤봉길>, 이민원·양수지 역주, 선인, 2017
임중빈, <윤봉길 의사 일대기>, 범우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