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부흥운동 거점 부안 우금산성 남문지 확인.’
올들어 두차례에 걸쳐 들어온 문화재청의 보도자료의 제목이다. 요컨대 ‘부안 우금산성은 백제부흥군의 최후 거점성’이라고 명시해놓은 것이다.
산성을 발굴한 전북문화재연구원은 더 나아가 “(몇몇 학자들이) 우금산성을 백제부흥군의 최후 거점성인 주류성이라고 주장했다”면서 산성조사의 경위와 목적을 밝혔다. 물론 학계에서도 우금산성을 백제부흥군(660~663)의 최후거점이자 임시수도로 보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핮
하지만 여러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어떤 확실한 유물이나 유구가 나온 적은 없다. 우금산성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문화재청이 우금산성과 관련된 보도자료를 내면서 ‘백제 부흥군의 최후 거점’ 운운하는 표현을 쓴 것은 잘못됐다.
국가기관이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한 주류성의 위치를 앞장서 보증해줄 필요가 있는 것일까.
하여간 내친 김에 백제부흥운동의 역사를 들춰보기로 했다.
■‘술을 따르라’고 의자왕을 욕보인 신라왕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신라 태종무열왕 7년) 7월13일 백제 의자왕이 최측근과 함께 야음을 틈타 웅진성(공주)에 숨은 뒤 셋째아들 부여융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이때 신라 김법민(훗날 문무왕)이 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였다. 그것이 천추에 한이 되어 마음이 아팠는데, 이제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됐구나.”
백제 부여융은 땅에 엎드린채 말이 없었다. 김법민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18년 전인 642년(백제 의자왕 2년, 신라 선덕여왕 11년) 백제는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킨 뒤 항복한 대야주 도독 김품석과 그의 아내인 고타소랑 등을 죽였다.
고타소랑은 김춘추(태종무열왕)의 딸이자 김법민(문무왕)의 누이동생이었다. 고타소랑의 부음을 듣자 아버지 김춘추는 “기둥에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앞을 지나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김춘추는 “반드시 백제의 원수를 갚는다”고 맹세했다. 누이동생을 잃은 김법민(문무왕)도 백제라면 이를 갈았을 것이다. 그랬으니 항복한 백제왕자 부여융의 면전에 침을 뱉은 것이다.
5일 뒤인 18일에는 의자왕마저 항복했고, 나당 연합군은 8월2일 정식으로 승전의식을 펼친다. 백제와 백제인들에게는 너무도 굴욕적인 항복의식이었다.
“당상에 앉은 신라 태종무열왕과 소정방은 항복한 백제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을 당하에 앉혔다. 어떤 자들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라’고 조롱했다. 이 모습을 본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흐느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
신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의자왕에게 한껏 모욕감을 주었으니 지극히 통쾌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백제인들로서는 패자에게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않은 나당연합군을 보며 원한을 품었을 것이다.
■복신·도침·흑치상지가 모여들다
당나라 소정방은 9월3일 의자왕과 왕족·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만2000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왕조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간 형국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당나라군이 철수하기도 전인 8월부터 남잠성·진현성(충남 대덕) 등지에 항거의 움직임이 일더니 전 좌평 정무가 두시원악(청양)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을 습격했다. 뭐니뭐니 해도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은 무왕(재위 600~642)의 조카인 복신이었다.
복신은 627년(무왕 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바 있고, 그 뒤 군대를 지휘한 경력도 있는 원로왕족이었다. 660년 9월초 복신은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에 나선다. <일본서기> ‘제명기’는 “660년 9월 복신 등이 드디어 같은 나라 사람들을 비둘기처럼 모아 함께 왕성을 보위했고…오직 복신만이 신무한 권세를 발휘하여 이미 망한 나라를 일으켰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복신은 이리저리 흩어진 군세를 모아 부흥군의 수장으로 거듭났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리려고 충남 부여군에 세운 <당유인원기공비>(보물 제21호)를 보면 “도침과 복신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했다. 이 비석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부흥군을 진압한 뒤에 세운 것이니 비문 내용은 사실에 부합되는 기록일 것이다.
거병초기에는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부흥군이 복신의 휘하로 결집되고 있었던 것이다. “흑치상지가 별부장 사타상여와 함께 험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에 호응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부흥군이 특히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던 임존성(충남 예산)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다. 부흥군이 임존성을 지켜내자 주변의 200여개 성이 호응했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나·당 연합군은 부흥군에 의해 고립되는 등 곤욕을 치렀다.
■진퇴양난에 빠진 나당연합군
부흥군은 곳곳에서 진퇴를 거듭하며 나당연합군을 괴롭혔다. 특히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전쟁에 전념하고, 신라에게 평양행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기자 백제부흥군의 운신이 자유로워졌다. 급기야 661년 6월~662년 2월 사이 당나라군이 고구려와의 혈투에서 패하자 당나라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당나라 고종은 백제고토에서 부흥군에게 포위당해 있던 유인궤에게 “형편이 어려우니 신라땅으로 가든지, 아니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칙서를 내린다.
<구당서>는 “이 때 백제땅에 주둔하던 당나라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돌아가기를 바랐다”고 기록했다. 당나라가 아래로는 백제부흥군에 발목을 잡히고, 위로는 고구려군에 얼굴을 흠씬 두들겨 맞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웅진도독 유인궤는 끝까지 버텼다. “평양을 공격하던 군대가 철수했는데, 웅진의 군대마저 뽑아버리면 백제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는 언제 멸망시키겠느냐”는 논리였다. 또 “아무리 곤궁한 처지라도 신라땅에 의탁할 경우 바로 빌붙어먹은 나그네 신세가 되는 꼴”(<자치통감>)이라며 끝내 철군이나 신라 의탁을 거절했다.
이 무렵 부흥군 지도자인 도침은 유인궤가 보낸 사신에게 ‘신분이 낮아 만나 줄 수 없다’고 홀대했고, 복신은 당군 사령관 유인원에게 사람을 보내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전송헤주겠노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당나라의 기세는 이렇게 급전직하했다.
실제로 662년 7월 당시 당나라군이 장악한 백제의 고토라고 해봐야 웅진성 정도였다고 한다.
■풍왕의 즉위, 부활한 백제
반면 최전성기를 맞고 있던 백제부흥군은 이미 661년 9월부터 새로운 왕국의 면모를 갖췄다.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장)을 백제의 새 임금으로 옹립했다. 부여풍은 의자왕의 적자였기에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정통성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왜의 지원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했던 부흥군으로서는 부여풍 만한 인물이 없었다. 또한 오랫동안 타국에 머무르고 있던 부여풍의 국내기반은 미미했다. 따라서 복신 등이 이른바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기엔 적격인 인물이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복신은 이미 660년 10월 왜에 사신을 보내 지원군과 함께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한다.
“당나라 군대가 우리 영토를 뒤흔들어놓고 사직을 뒤엎었습니다. 부디 지원군과 함께 왕자 여풍장(부여풍)을 보내주십시요. 왕자 풍을 맞이하여 국주로 삼으려 합니다.”(<일본서기> ‘제명기’)
그렇지만 그로부터 1년이 흐른 661년 9월이 되어서야 귀국하여 백제의 새 임금으로 등극했다.
“661년 9월 (왜의 황태자가) 백제왕자 풍장에게 직권을 주고 다신장수의 누이를 아내로 삼게 했다. 군사 5000여기로 하여금 본국으로 호위해 보냈다. 복신이 풍장을 맞아 머리를 조아리고 조정을 받들어 맡겼다.”(<일본서기> ‘천지기’)
백제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지 1년 여만에 새로운 임금(풍왕)을 내세워 부활한 셈이다.
■도침의 피살…반목의 시작
그러나 풍왕의 등장으로 부흥백제의 정통성은 확립됐지만 내부분열을 촉진시켰다. 우선 부흥운동을 이끈 동지였던 복신과 도침이 반목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서로 협력하다가 이제는 풍왕의 신하가 되어 경쟁하는 사이가 됐다. <삼국사기>와 <당유인원기공비> 등의 기록을 보면 도침이 복신보다 먼저 기재되어 있다. 특히 <삼국사기>는 “영군장군 도침과 상잠장군 복신”이라 해서 도침이 오히려 복신보다 위의 계급임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일 때문인지 몰라도 복신은 먼저 손을 써서 도침을 죽이고는 도침의 군대까지 수중에 넣었다. 풍왕을 둘러싸고 벌인 권력암투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국가운영의 전권을 틀어쥔 복신은 풍왕에게는 나라의 제사만 관장하는 역할만 부여했다. 말 그대로 ‘꼭두각시 바지사장’으로 만든 것이다.
<구당서> ‘유인궤전’은 복신과 풍왕의 사이를 “솔개가 날개를 펴서 처소를 함께하면 반드시 서로를 해치는 형국(치張共處 勢必相害)”이라 표현했다. 같은 하늘을 두고 같은 공간에서는 공존할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복신의 모반과 풍왕의 반격
복신은 결국 모반을 꾀한다. 하지만 군대를 동원하여 피를 흘리는 방법 대신 유인책을 써서 풍왕을 제거하겠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 속에 누어서 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였다. 그런 다음 고구려와 왜국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려 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
피를 흘리지 않고 풍왕을 잡겠다는 복신의 음모가 도리어 역습을 초래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약간 다르다.
“풍왕이 복신의 모반을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어 가죽으로 묶은 뒤 대신들에게 물었다. ‘복신을 참수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그러자 달솔 덕집득이 ‘악독한 역적은 풀어줄 수 없다’고 했다. 복신은 집득에게 ‘이 썩은 개와 같은 미치광이’라 욕하며 침을 뱉었다. 풍왕은 건강한 장정을 시켜 복신을 참수하고 머리를 소금에 절였다.”
<속일본기> 766년 6월조도 의자왕의 후손인 백제왕 경복의 졸기를 쓰면서 “풍왕이 참소 때문에 죄없는 복신을 죽였다”고 했다. <삼국사기> 기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어떻든 간에 풍왕과 복신의 불신이 그같은 비극을 낳은 것임은 분명하다.
■“주류성을 쳐라”
복신이 죽자 백제부흥군의 사기는 급전직하했다. 반면 나당 점령군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663년 8월 신라는 백제가 좋은 장수(복신)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백제국을 공격해서 주류성을 취하고자 했다.”(<일본서기> ‘천지기’)
당나라 유인궤와 유인원은 얼씨구나 하고 본국에 증원군 파병을 요구했다. 당나라는 곧 우위위장군 손인사에게 7000명을 주어 파견했고, 신라도 김유신 등 28명(혹은 30명)의 장수가 지휘하는 5만명의 정예병을 보냈다. 당나라군 사이에서는 “먼저 수륙의 요충인 가림성(부여 임천)을 쳐야 한다”고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웅진도독 유인궤는 “백제부흥군의 소굴이며 무리가 모여있는 주류성을 치면 나머지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신당서> ‘열전 유인궤전’)이라 했다. 주류성이 주 목표가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백제 풍왕도 분주히 움직였다.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 “도와달라”고 지원군을 요청했다.
고구려가 지원군을 파견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손인사가 7000명의 당군을 이끌고 건너오는 도중에 고구려군을 격파했다(<구당서> ‘열전·백제전’)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가 수군을 지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왜는 풍왕의 구원병 요청에 즉각 응했다. 장수 여원군신이 이끄는 병사 1만여명이 수송선 1000여척에 나눠타고 백제로 향했다.
■불바다가 된 동북아시아 국제전쟁
663년 8월 마침내 한반도 남부 서해안의 백강구(백촌강·백강)에서 백제-왜가 한편이 되고, 신라-당나라가 한편이 되어 치른 동북아시아 국제전의 서막이 올랐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 삼국의 역사서에서 서술한 백강구 전투는 한편의 서사시 같다. 먼저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라.
“당나라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쳤다. 8월27일 먼저 백촌강(백강구)에 도착한 일본군이 당나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패퇴했다. 8월28일 일본군과 백제부흥군이 날씨를 고려하지도 않고, 대오도 가다듬기도 전에 당나라군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오히려 당나라군이 아군의 배를 에워쌌다. 눈깜짝 할 사이에 아군이 패했다. 물속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배의 뒷부분)을 돌릴 수도 없었다.”
<일본서기>는 “이때 왜의 장수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 치노 타쿠츠)이 이를 갈며 분노하면서 당나라군 수십명을 죽이고 마침내 전사했다”고 자못 비감한 어조로 당시의 전투를 전했다. 아마도 왜의 수군은 바람을 이용한 당나라군의 화공 작전에 말렸고, 게다가 조수간만의 영향까지 받아 배를 돌리지도 못한채 우왕좌왕 전멸했을 것이다.
당나라 측의 사서인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했다.
“(당나라) 손인사와 유인원, 신라 김법민(문무왕)이 육군을 거느리고, 유인궤가 수군 및 보급선을 거느리고 백강으로 들어갔다. 유인궤는 백강에서 왜병을 만나 4번이나 싸워 모두 이겼다. 왜선 400척을 모두 불태웠다.”
<자치통감>은 “배가 불타자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했다.
우리측 <삼국사기>는 신라군 역할을 특히 강조했다. 즉 훗날 문무왕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 보내는 편지에서 “신라군이 당나라군에 앞서 선봉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자찬했다.
“당나라 총관 손인사군이 왔을 때 신라군사 또한 진격해서 주류성 아래 이르렀다. 왜선 1000척은 백사(백강구)에 정박해 있었고. 백제의 정예기병은 언덕 위에서 지키고 있었다.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백제군 진지를 깨뜨리니….”
아무튼 백강구 전투의 결말은 백제-왜 연합군의 궤멸이었다. 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은 몇몇 측근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전의를 잃은 부흥군, 주류성을 잃다
이미 8월17일부터 주류성을 포위하고 있던 나당연합군에게 백촌강 대첩은 천군만마였다.
반대로 백제부흥군으로서는 패배도 패배지만 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의 고구려 망명 소식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결국 부여충승·충지(의자왕의 다른 아들들)가 지키던 주류성은 9월초 항복하고 말았다. 주변 두량윤성 등 여러 성도 줄줄이 손을 들었다. 부흥군 장수 지수신 만은 임존성을 근거로 마지막 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배신자가 된 흑치상지와 사탁상여의 공격으로 663년 11월 임존성마저 함락됐다. 지수신 역시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로써 3년 3개월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일본서기>를 보면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인들이 서로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주류성이 항복했구나. 돌이킬 수 없구나. 이제 백제의 이름이 끊기니 (조상의) 무덤을 어찌 가볼 수 있을 것인가.”(<일본서기> ‘천지기’)
■백제는 언제 멸망했을까
그러나 백제인의 독립 열망은 이후에도 식지않았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유민들의 항거는 최소한 671년까지 이어진다.
664년 3월에는 부흥군이 사비산성에 웅거하여 저항을 꾀한 일도 있었다. 참으로 끈질긴 독립투쟁이었다. 하지만 한번 빼앗긴 나라를 수복하기가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가 웅변해주고 있다. 다만 한가지 공식적으로 제기해야 할 의문이 있다. 백제의 멸망시기는 언제일까. 660년 7월 의자왕의 항복 때인가, 아니면 663년 9월 주류성 함락 때인가. 혹자의 견해대로 전한·후한, 서진·동진처럼 백제(기원전 18~기원후 660년)와 부흥백제국(661~663)으로 나눠야 할까.
■주류성은 어디일까
또하나 궁금증이 남는다. 백제유민들이 “주류성을 잃었네. 백제의 이름이 끊겼네”라고 피눈물을 흘렸다지 않던가.
주류성은 과연 어디일까. 노중국 계명대 교수 같은 이는 풍왕이 즉위한 661년 9월부터 663년 9월까지를 ‘부흥백제국’으로 이름지었다. 그렇다면 주류성은 부흥백제국의 도읍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는 설만 가득할뿐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부흥군의 거점성 중 임존성(충남 예산)과 가림성(충남 부여) 등은 위치가 분명하게 나와있다. 그러나 정작 주류성은 ‘이름은 있지만 위치가 어딘지 모르는 지역(三國有名未詳地分條)’으로 분류됐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정확한 위치를 두고 설왕설래 하고 있다.
충남 홍성 학성산성·한산 건지산성·연기 당산성·세종 운주산성, 전북 정읍의 두승산성 등도 부안의 우금산성(위금암산성)과 함께 주류성 후보지로 거론되었던 곳들이다. 상당 수의 학자들이 우금산성을 유력후보지로 꼽고는 있지만 그 역시 정답은 아니다. 증거불충분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역사가의 마음가짐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의심나는 것은 공백으로 남긴다.”(<논어>·위령공편)고 하지 않았던가.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누구도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노중국, <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2003
이기동, <백제의 역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역사문고 24, 주류성, 2006
정재윤, <사료를 보니 백제가 보인다(국외편)>, 백제문화개발연구운 역사문고 별책 2, 주류성,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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