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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판문점의 어제와 오늘…무슨 일이 일어났나

1951년 7월8일과 10일 유엔군과 공산군이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1년을 훌쩍 넘긴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회담을 시작된 것이다.
7월8일 열린 예비회담(광문동 민가)과 10일 본회담(내봉장)은 모두 개성에서 열렸다.
개성이 한국전쟁 전의 분단선인 38도선상의 도시라는 점이 감안됐다. 즉 1951년 6월30일과 7월1일 유엔군측이 “휴전을 위한 예비회담을 원산비행장이나 개성~임진강 사이의 국도상에서 개최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공산군측은 “그럼 회담장소를 38도선 상의 개성으로 하자”고 회답했다.
개성이 한국전쟁 이전에는 38도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회담장소로 낙점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성지역이 그 당시 공산군측의 치하에 속했다는 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1951년 11월9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 중 유엔군 소속 도널드 피커츠 일병과 공산군 소속 병사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전장에서는 총부리를 겨눈 사이지만 휴전회담이 벌어지던 판문점에서는 이렇게 피아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유치찬란한 휴전회담
예비회담에서부터 양측의 신경전은 유치하기 이를데 없었다. 남면(南面), 즉 남쪽을 향해 앉는 것이 승자가 패자, 혹은 황제가 제후를 거느릴 때의 자리 배치임을 간파한 유엔군 대표단이 먼저 회담장의 남쪽을 향해 앉아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자 북측은 승자의 하사품임을 암시하는 다과를 내놓았다. 물론 유엔군 대표단은 그 다과를 단 하나도 먹지 않았다. 10일의 본회담에서도 유치찬란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공산군측은 일부러 유엔군으로부터 노획한 총알자국과 핏자국이 묻은 낡은 지프를 유엔군 대표단에게 제공했다. 또한 ‘안전보장을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지프에 백기를 달게 했다. 또 북한군인을 태운 3대의 트럭이 아주 천천히 유엔군 대표단을 태운 지프행렬을 개성으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북한군은 ‘만세’를 연호하면서 유엔군 지프를 몰고 다니며 퍼레이드를 펼치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만세’를 연호하는 북한군과 백기를 게양한채 북한군의 인도를 받는 유엔군 지프행렬…. 여기에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는 공산군측 카메라맨…. 북한군은 개선장군처럼 시내를 퍼레이드 하고, 유엔군 대표단은 영락없이 항복회담에 임하는 모습이었다. 유엔군 측은 ‘뭔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양측은 회담장에서도 신경전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공산군측이 ‘남면’의 자리를 선점하자 유엔군측은 ‘승자가 먼저 발언한다’는 동양의 관습에 따라 개회사를 먼저 읽음으로서 반격했다.  
그러나 더 유치한 공산군측의 ‘공세 콤보’가 이어졌다. 유엔군측 대표가 자리에 앉았는데 이상하게도 유엔군측을 쳐다보는 공산군측 남일 대표의 시선이 높아보이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인가 봤더니 공산군측이 미리 유엔군 대표단의 의자를 4인치(10㎝)나 잘라 놓았던 것이다. 유엔군측은 “무슨 짓이냐. 의자를 빨리 바꾸라”고 항의했다. 공산군측은 “알았다”고 ‘쿨’하게 의자를 바꿨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공산측 사진기자가 ‘남면(南面)의 높은 의자에 앉아 패자를 깔보는’ 사진을 충분히 찍은 뒤였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모습. 왼쪽 책상에 앉은 이가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이고 오른쪽 책상에 앉은 이가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이다. 조인식장 건물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어 북한 측에 편입돼 있다. 지금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휴전협정 이후 새로 조성됐다.

■눈싸움까지 벌인 회담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된 회담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리 만무했다.
8월10일 재개된 제20차 회담에서는 양측이 무려 2시간11분 동안 상대의 눈을 째려보는 ‘눈싸움’을 벌였다.
희대의 촌극이었다. 눈싸움 도중에 공산군측은 “제국주의자들의 심부름꾼(사신)은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는 문구까지 펼쳐보였다.
물론 희대의 눈싸움에서 패한 쪽은 유엔군측이었다.  
개성에서 벌어진 휴전 회담의 초기 쟁점은 군사분계선의 획정이었다.
공산군측은 전쟁 이전, 즉 38도선 분단 상태의 원상회복을 주장했다. 38도선을 양측의 군사분계선으로 획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휴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획정하는 모습. 군사분계선은 선의 개념이 아니라 말뚝의 개념이었다. 300~500미터 간격으로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까지 말뚝을 1292개 박아놓았다.

여기에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의 제공권은 물론 제해권까지 장악하고 있던 유엔군은 “웃기지 말라”고 일축했다. 유엔군은 1951년 7월 현재의 전선보다 오히려 30~50㎞ 북쪽에 군사분계선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군이 제공·제해권을 장악하고 있고, 마음대로 “당신네들(공산군측) 영토를 좌지우지 할 수 있으니 마땅히 지금의 전선보다 더 북쪽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양측의 주장 탓에 협상은 결국 파국을 맞았다.
공산군측은 8월22일 급기야 “유엔군 공군이 휴전회담이 열리는 개성의 중립지역을 폭격했다”면서 회담을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이후에도 “유엔군 항공기가 개성 중립지대에 조명탄을 투하했다”(8월29일), “유엔군이 개성을 또 폭격했다”(9월 1일)는 따위의 사건을 날조했다. 설상가상으로 9월10일에는 실제로 유엔 공군기 1대가 항로착오로 개성에 기총소사를 가하는 일과, 10월 10일 유엔 항공기가 중립지역을 오폭하는 사건까지 이어졌다.
개성은 이제 회담장소로 그 효용성을 잃었다.

1951년 휴전회담 초기에 유엔군이 제안한 군사분계선. 당시의 전선보다 30~50킬로미터 북상한 그림을 내놨다. 제공권과 재해권을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접촉선보다 훨씬 북쪽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옛 고려의 도읍인 개성을 포함한 서해지역을 확보했다.

■무미건조한 휴전회담 조인식장
양측은 옥신각신 끝에 “쌍방 접촉선의 중앙 부근에 개성·문산 사이의 중립지대인 판문점 근처가 적격”이라는 합의에 도달한다.
널빤지(板) 대문(門)으로 알려진 판문점(板門店)은 당시 보잘것없는 주막거리였다. 도로변에는 4채의 초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두 달 이상 중단된 휴전회담은 이곳 판문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재개됐다.
이후 양측의 팽팽한 공방 속에 159회의 회담과 575회의 공식회의를 열어 1800만 단어를 주고받은 끝에 1953년 7월27일 마무리됐다.
유엔·공산 양측이 1년7개월의 줄다리기 끝에 휴전협정에 서명한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의 판문점 풍경은 지극히 무미건조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3년 1개월 3일째 되며, 휴전회담을 시작한지 2년 18일째 되는 이날 판문점 일대의 하늘은 비가 어려는 듯 두툼한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먼곳에서 들려오는 포성은 전쟁이 아직 종언을 고하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었다”는 다소 감상적인 소감으로 시작된다.(<휴전사>)
조인식에서도 양측의 신경전은 이어졌다. 조인식장의 벽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두마리의 비둘기가 그려져 있었다.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의 초기 모습이다. 널빤지 대문이라는 뜻의 판문점에는 초가만 4채 정도 있었다.

그러나 출입구가 북쪽에 하나만 설치된 게 문제가 됐다. 유엔군측 일행이 출입하자면 부득이 공산군측 구역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군측의 의도를 간파한 유엔군측은 “비둘기 그림을 제거하라”고 요구하면서 “남쪽에도 출입구를 설치하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은 관철됐다.
식장의 한쪽 테이블에는 파란색 표지의 협정문서 사본 9통과 유엔기가, 다른 탁자에는 밤색 표지의 협정문서 사본 9통과 북한기가 놓여있었다.
9시 57분이 되자 휴전회담을 주관한 대표들이 입장했고, 정각 10시가 되자 쌍방의 수석대표들이 서로 반대쪽에서 입장하여 자기 자리에 앉았다.  
“한여름인데 냉랭한 분위기였다. 양측 수석대표는 인사도, 악수도 없이 휴전협정문에 서명하고 돌아섰다. 단 12분 만이었다.”(<휴전사>)
이 자리에는 한국 정부를 대표한 인사들은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 통일을 해야 하는데 무슨 휴전회담이냐’고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판문점은 쌍방이 공동으로 경비하는 회담장소로 유지됐다.

■자유로웠던 비무장지대 월경
반경 1000야드(914.4m)의 원형구역 안에서는 군사분계선 표시도 없었다.
쌍방 경비원들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다. 휴전 후 얼마간은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실수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경우가 제법 있었는 데도 무사히 돌아왔다. 예컨대 1953~54년 사이에는 65명의 한국군 유엔군 병사들이 넘어갔다가 3~4일 안으로 돌아왔다. 인수증도 필요 없었다.
1954년 2월5일 미군의 피터스 중령이 탄 군용비행기가 북한에 착륙했지만 몇 달 후 정전협정을 위반했다는 시인도 하지 않은채 인수증도 없이 기체와 함께 돌아왔다. 1955년 8월 번파스 공군 소위도 T-6 조종실수로 북한 영공을 침입했다가 격추됐다. 그러나 역시 4일 만에, 인수증 없이 돌아왔다.

유엔사가 문제가 된 판문점 내 미루나무를 잘라내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북한 김일석 주석은 인민군총사령관의 자격으로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난 데 대해 신속히 유감의 뜻을 표했다. 

■추석날의 비극
그러던 1962년 9월 5일 돌발사건이 벌어졌다.
추석을 맞이한 남북한 경비병들끼리 “우리끼리 재미있게 지내자”고 술판을 벌였다. 사실 남북한 병사들끼리 이런 조우는 가끔 있었다. 그러나 이날은 술판을 벌인게 문제가 됐다. 거나하게 취하자 병사들끼리 언쟁이 벌어졌고, 급기야 총격전으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북한군 사병 3명이 사망하고, 장교 2명이 다쳤다. 한국군 병사 몇명도 다친 것으로 보고됐다.
냉전이 계속되고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판문점은 휴전회담 때 같은 유치찬란한 경쟁의 무대로 변질됐다.
1961년 초 북한측이 아무런 사전통지 없이 비교적 큰 규모의 초소를 언덕 위에 세웠다. 400명의 공사인력이 투입됐지만 아무런 통보나 협의가 없었다. 1964년 10~11월 사이엔 이른바 ‘평화의 파고다’라 해서 파고다 모양의 휴게소까지 지었다. 그러자 유엔군측은 “북한의 파고다보다 훨씬 보기 좋은 시설을 세운다”는 목표아래 건물을 짓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의 집’이다. 1970년엔 북한측은 ‘파고다 공원’을 철거하고 그 언덕 위에 ‘판문각’을 세웠다. 일방이 건물을 지으면 상대방이 그것돠 비슷하거나 더 크고 높은 건물을 짓는 볼썽사나운 경쟁이 판문점에서 벌어진 것이다.     

■탐조등 사건의 촌극
그 사이 판문점 안은 삿대질과 욕설이 오가는 정치선전장으로 변질됐다.
1968년 11월28일 양측 비서장 회의에서는 아이들 장난같은 촌극이 빚어졌다.
당시 북한측은 “유엔사측의 판문점 기자 대기실 옥상에 설치된 탐조등이 북한 초소를 너무 환히 비춘다”면서 “즉시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유엔군측은 “탐조등은 유엔사 안보를 위해 꼭 필요한 설비”라 거부했다.
그러자 북한군 정치장교가 아주 강력한 빛을 발하는 탐조등을 가져와 유엔사 비서장인 루카스 대령을 비추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이리저리 피하자 북한의 한주경 대좌가 “이것봐라. 우리가 당신한테 이렇게 불을 비추면 견딜 수 있겠느냐”고 놀려대며 탐조등을 이리저리 들이댔다.
루카스 대령이 “어두운 밤은 도둑들에게 안전한 시간이며. 밝은 빛은 올바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고대 그리스 극작가 유리피데스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자 한주경은 “그렇게 밝은 빛을 좋아하면서 왜 대낮에 탐조등(등불)이 무서워 얼굴을 피하느냐”고 더욱 놀렸다.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은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를 태운 50대의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했다.

■도끼만행사건과 판문점 군사분계선
판문점을 반복과 갈등의 역사로 굳힌 결정타는 역시 1976년 8월18일 일어난 도끼만행사건이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인민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가장 빠른 방법으로 당신측(유엔군측) 총사령관에게 전해주기 바란다”면서 직접 유감의 뜻을 표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유감을 표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북한은 이 사건의 후속조치로 “재발방지를 위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도 군사분계선을 두자”고 제의한다.
 “현존하는 공동경비구역 안의 안전보장 질서로는 양측 군사인원의 충돌을 피하기 어렵다. 쌍방의 군사인원들의 충돌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면 쌍방의 경비인원들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격리시켜야….”  

■판문점 스트립쇼
이로써 이제는 판문점마저도 군사분계선 표시가 생겼다. 1978년 6월13일에도 희대의 촌극이 빚어졌다.
남으로 넘어온 북한 어부 8명이 송환되는 날이었다. 이들은 남측이 내준 신사복을 입고 큰 선물 보따리를 든채 한사람씩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이때 북한측 군정위 정치장교 한사람이 이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뭐라 지시했다.
그러자 해프닝이 벌어졌다. 어부들이 선물 보따리를 풀어 하나하나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던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시계를 풀어 던지고, 구두와 양복도 하나씩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맨발에 속옷차림으로 판문각 계단을 올라갔다.

■판문점을 뒤흔든 총격전
1984년 11월23일 구 소련인인 바실리 야코블레비치의 판문점 탈출 때는 쌍방이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즉 북한 경비원 옆에서 사진을 찍는 척하던 야코블레비치가 군정위 회의실 건물과 유엔사 공동일직장교 사무실 건물 사이로 죽을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50m 거리였으므로 쏜살같이 유엔사 경비병 옆으로 달려갔다. 북한 경비병이 “무슨 짓이냐”고 쫓아오면서 권총 2발을 발사했다. 야코블레비치는 모스크바 국제관계연구소 학생시절부터 미국 망명 기회를 노리다가 판문점에서 결행한 것이다. 순식간에 북한 경비병이 늘어났고, 이 중 3명은 군사분계선에서 150m나 넘어선 연못까지 내려와 68형 자동소총을 발사했다. 유엔군 역시 응사하면서 판문점 초유의 총격전으로 비화했다. 초기 교전에서 유엔사 소속 한국 경비병 1명이 전사했고, 미군 1명이 부상했다. 북한경비병은 17명까지 늘어나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격렬한 총격전 끝에 북한 경비병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휴전이후 정전위원회와 남북대화 회의장인 판문점에서 일어난 초유의 총격전이었다. 
        
■흑역사만 있지는 않았다.
물론 판문점에 늘 흑역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한을 방문한 임수경 학생과 문익현 신부가 귀환한 곳도(1989년),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 소떼를 이끌고 통과한 곳(1998년)도 판문점이었다. 27일 바로 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그동안 판문점이라 하면 분단과 냉전이 낳은 증오의 시작점으로 각인되었다. 이젠 달라야 한다. 판문점을 분단의 끝이자 평화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어떨까.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