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몽골군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물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부족을 통합한 칭기즈칸(재위 1206~1227)이 ‘물이나 재에 방뇨하는 자는 사형이 처한다’(제4조), ‘물에 손 담그는 것을 금한다. 물은 반드시 그릇으로 떠야 한다’(제14조)는 법을 제정했을 정도였다. 물이 부족한 초원·사막지대에 사는 부족이었기에 당연했다.
몽골군의 침입에 맞서 도읍을 옮긴 고려가 쌓은 강화 중성의 흔적. 몽골의 압력으로 성을 폐쇄한 뒤 돌담장으로 메워버린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런 면에서 고려조정이 몽골군이 침입하자(1231년) 강화섬으로 피란처를 삼은 것은 신의 한수였다고 할 수 있다(1232년). 고려는 강화섬에 궁성에 해당되는 내성과 도성 격인 중성, 그리고 섬 전체를 아우르는 외성 등 3중 성벽을 쌓았다. 덕분에 모두 6차례의 몽골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았다.
1259년 몽골로서는 천신만고 끝에 고려와 화의를 맺으며 굴복시켰지만 강화섬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성벽을 전부 허물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에 따라 고려는 우선 내성을 허물었다.
“1259년(고종 49년) 6월 강화의 내성을 헐기 시작했다. 몽골 사신이 급하게 독촉하자 군사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성을 쌓지 말걸 그랬다’고 울며 하소연했다.”(<고려사>)
남한에서 유일하게 남은 고려시대 도성의 흔적. 1240년 쌓은 강화중성의 성문터가 확인됐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몽골로서는 내성 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몽골의 사신 주자와 도고는 “외성이 남아있는 한 진심으로 복종했다고 할 수 없다. 외성까지 모두 허물고 돌아가겠다”고 다그쳤다. <고려사>와 <고려시절요>는 “성이 허물어지는 소리에 거리의 아이들과 여염의 부녀자들이 슬피 울었다”고 전했다. 이후 강화섬에서는 지금까지도 내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외성의 경우도 고려시대 축조된 자취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던 2018년 강화 옥림리 주택신축부지를 조사하다가 중성의 흔적인 9기의 목책 구덩이가 확인됐다. 능선을 따라 1열을 이룬 목책구덩이는 성벽 외부로 돌출된 능선에 치를 만들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목책구덩이는 목책에 사용된 나무기둥을 뽑아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기둥자리를 파내고 흙을 다시 메운 상태로 노출됐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로 몽골과의 강화협정 후 몽골 사신의 감시아래 허물었던 성벽의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고려사> 기록대로 주민들이 흐느끼는 가운데 목책을 허물고 그 자리를 흙으로 메운 뼈아픈 역사의 현장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 강화 중성의 서쪽 성벽 구간을 대상으로 실시한 발굴 조사 결과 성문의 흔적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남한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 시대 도성유적인 인천 강화 남산리 일원의 강화중성에서 문지(門址)를 최초로 찾아냈다고 4일 밝혔다.
<고려사> 등에 따르면 강화중성은 몽골과의 항쟁 와중인 1240년(고종 27년)에 축조됐다. 성의 둘레는 2960칸이며, 17개의 크고 작은 성문이 있었다. 강화중성은 임시수도 강화를 ‘⊂’ 형태로 둘러싼 토성이며, 현재 확인된 길이는 총 11.39㎞이다. 그런데 이번에 노출된 성문의 흔적이 심상치 않다. 성문터가 돌로 쌓은 담장으로 막힌채 확인된 것이다. 이것은 성문을 허문 뒤 담장을 쌓아 폐쇄했음을 의미한다.
적석시설. 성 안쪽에서 성벽 경사면을 따라 성벽 위로 오를 수 있게 조성한 등성시설로 보인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문옥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몽골 사신의 감시아래 주민과 군인들이 울부짖으며 성을 허물고 돌담장으로 메워버린 뼈아픈 역사의 흔적일 가능성이 짙다”고 분석했다. <고려사> 등에는 중성의 폐기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발굴로 1259년 몽골과의 화의에 따라 외성과 내성을 훼철했을 때 중성도 같이 파괴됐다는 분석이 가능해졌다. 물론 11년 뒤인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했을 당시 폐기되었을 수도 있다. 성문터는 남산(해발 223m)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서 확인됐다. 강화도성 서쪽에서 능선을 따라 도성의 중심부인 강화읍 관청리 일대로 진입할 수 있는 교통로에 해당한다.
강화중성의 정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성문터는 너비 4.4m, 길이 5.3m 규모이며, 안쪽에는 성문이, 바깥쪽에는 보도시설이 설치됐다. 성문은 직사각형(장방형)의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4개의 기둥을 세워 시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 외곽에는 넓적하고 편평한 돌을 경사지게 깔아 보도를 조성했다. 문지 주변에서는 용머리 모양의 장식기와와 평기와, 장식철물, 철못 등 문과 지붕 부재로 추정되는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성벽 윗면에는 기둥목이 세워진 지점을 따라 석렬을 1열씩 설치했다. 성벽 안쪽에는 너비 4.4m, 길이 3.5m 규모의 돌로 쌓은 시설이 확인됐다. 이것은 성 안쪽에서 상부로 오를 수 있는 등성시설로 추정된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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