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부탁한 글씨를 지금 씁시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사형 집행장으로 나가기 직전 안중근 의사는 호송관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상등병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했다. 지바는 재판을 받던 안의사를 법정~감방 사이를 호송해온 헌병이었다. 얼마 전 안의사에게 “휘호 한 점을 받고 싶다”고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사형집행 당일까지 받지 못하고 있어서 체념하고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의 유묵 26점. 보물 569-1호부터 26호까지 지정됐다.(사진 외 맨왼쪽부터 1~26호) 안중근 의사는 사형언도부터 집행때까지 40여일간 200여 점의 휘호를 집중적으로 썼다.|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마지막 휘호
그런데 안의사(1879~1910)가 부동자세로 감방 앞에 서있던 지바를 보고 ‘얼마 전의 부탁’을 떠올린 것이다. 안의사는 급히 준비한 비단천과 필묵으로 단숨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즉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행서체 8자였다.
"안중근은 마지막으로 지바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다. 동양에 평화가 찾아오고 한·일간 우호가 회복되는 날 다시 태어나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는 '기념으로 남겨달라'는 일본인들의 청을 받고 이 글씨들을 써주었다.|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이 일화는 귀국 후 유묵을 제단에 걸어두고 향을 사르며 안의사의 명복을 빈 지바의 전언을 토대로 구성한 것이다. 지바가 묻힌 일본 미야자키현(宮崎縣) 와카야나기쵸(若柳町)의 대림사 주지인 사이토 타이켄(齊藤泰彦)의 단행본(<내 마음의 안중근>)에 나온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다. 사형장에 가는 그 순간까지 일개, 일본 헌병의 청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여 일필휘지의 글씨를 써줬다. 하기야 안의사는 사형집행 직전 남길 말이 없냐고 묻자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했으므로 형 집행 관리들도 한일 간의 화합으로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부탁한 분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는 독립전쟁의 일부로, 또 개인 자격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척살한 것”이라고 강조했으니 보통의 일본인에게 추호의 악감정도 없었다.
안중근 의사가 내건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중 하나가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가 아닌가. 따라서 안의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일본인의 양식을 일깨워 당신의 동양평화 의지를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왼쪽 아래사진)를 처단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안의사는 법정에서 이토의 15가지 죄악(왼쪽 위 사진)을 밝힌다. 마지막 15번째 죄악이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짓’이라 했다.|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개인 최다 26점 보물의 주인공
안의사 순국 후 지바 도시치는 자진 제대했으며, 그의 사후 부인 및 조카딸은 가보로 보관하던 유묵을 1980년 안중근의사 숭모회에 기증했다. 안의사의 마지막 유묵은 보물 제569-23호로 지정돼있다.
보물지정번호 ‘제569-23호’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제569-26호’까지 있으니 안중근 유묵이 26점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쓴 휘호의 숫자를 두고는 여러 설이 있다. <안중근전>을 쓴 박은식(1859~1925)은 <한국통사>(1914년)에서 “안의사가 200여 폭을 써주었다”고 기록했다.
그중 실물이나 사진으로 확인된 안중근 유묵은 50여점 정도인데, 국내에 소재한 것만 추려서 보물로 지정했다. 지금까지 한 개인의 작품 중 이처럼 많은 수가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된 경우는 없다.
재판에 참석한 안중근(맨오른쪽)과 우덕순·조도선·유동하 선생. |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의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에 어떤 매력이 있을까. 우선 안의사는 1909년 2월 7일 단지동맹 때의 혈서(‘대한독립·大韓獨立’) 등 극소수 외에는 사형언도를 받은 1910년 2월 14일부터 집행 때인 3월26일까지 40여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썼다. 유묵에는 어김없이 ‘경술(1910년) 2월’ 혹은 ‘경술 3월’의 간기가 적혀있다. 안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 저간의 사정이 담겨있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법원과 감옥의 일반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로써 필적을 기념하고자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으며 청구했다. 나는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매일 몇시간씩 글씨를 썼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안의사는 ‘사형언도’를 받은 2월14일부터 항소를 포기하고 도인의 심정으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및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 등을 저술하면서 함께 요청받은 글씨도 틈틈이 써준 것”이라고 말했다.
1910년 2월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의 안중근 의사 사형판결문. 판결문은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징역 1년6개월에 처한다’고 했다.|안중근 의사 기념관 제공
■일본인들에게 써준 유묵들
안의사의 글씨를 원했던 이들이 모두 지바와 같은 일본인이라는 것도 매우 특기할만한 일이다. 안의사를 뤼순(旅順) 옥중에서 취조한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 靜四朗) 검찰관의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와 다롄(大連)세관에서 근무한 가미무라 쥬덴(上村重傳)의 ‘인무원려 필유근우(人無遠慮 必有近憂·사람이 염려가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는 말)’ 등이 있다.
또 뤼순 감옥의 간수 시타라 마사오(設樂正雄), 감옥의 경관 야기(八木), 감옥에서 근무한 의사 오리타 다다쓰(折田督), 한국통감부 경시(총경)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감옥의 경수계장 나카무라(中村), 감옥을 찾은 경찰(맹경시), 감옥 간수 삼정덕일(三井德一), 뤼순 초교 교사 히시다 마사모토(菱田正基) 등도 안의사의 유묵을 다투어 받아갔다. 심지어는 사형수 신분인 안중근 의사의 교화를 담당한 승려(쓰다 가이준·津田海純)도 안의사의 유묵을 3점이나 신줏단지 모시듯 보관했다.
뤼순 감옥의 교도소장과 간수, 경찰, 검찰관, 통역, 세무관, 교사는 물론 심지어 교화승까지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했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에게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는 죄목을 덮어씌워야 했던 자들까지도 도리어 안의사의 편에 섰다.
1910년 3월9일 빌렘 신부(홍석구)와 정근·공근 등 두 동생에게 유언을 남기는 안중근 의사. 안의사는 처형 직전 남길 말이 없냐는 질문에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했으므로 형 집행 관리들도 한일 간의 화합으로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는 한마디만을 남겼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제공
■순국 전 40여일의 기록
안중근 의사의 삶과 학식, 철학을 알 수 있는 저술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갓 서른을 넘긴 나이에 순국했기에 많은 글을 남길 시간이 없었다. 다수의 저작과 글들은 수감 후 쏟아냈다. 1909년 12월13일 시작하여 순국 11일 전엔 1910년 3월15일에 탈고한 자서전(<안응칠 역사>)과, 1910년 2~3월 사이에 집필했지만 미완성으로 끝난 <동양평화론> 등이 있다. 그밖에 1909년 11월6일 뤼순 형무소 이감 직후 검찰관에게 제출한 ‘한국인 안응칠 소회’와, ‘이등박문 죄악 15개조’ 등의 글이 있다.
안의사는 3~4개월이라는 짧은 옥중 생활에서 자신의 삶과 사상, 철학을 불꽃처럼 쏟아냈다. 그 가운데 사형 언도 후 항소를 포기하고 사형집행까지 마지막 40여일간 붓을 휘둘러 써내려간 것이 바로 유묵이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이며 독립운동가인 조마리아 선생. 아들이 사형언도를 받자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나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는 편지를 썼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가 남긴 ‘마지막 40여일 기록’, 즉 유묵은 단순한 붓글씨가 아니다. 안의사의 삶과 학식, 정신, 사상을 오롯이 유묵에 담았다. 이동국씨는 이를 두고 “유묵 한 점 한 점이 안의사의 유언이자 분신이며, 그 자체가 또다른 <안응칠 역사>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옥중에 무슨 참고자료가 있었겠는가.
평소 갈고 닦은 학식을 바탕으로 각종 고금의 고전과 한시를 인용한 글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또 경세(經世)와 시국을 걱정하는 자작시도 다수 남겼다. 지금까지 확인된 50여 점의 글 중에서 같은 문장이 하나도 없다. 불과 32살에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깊고도 넓은 학문을 가늠할 수 있다.
안의사는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서 “평생 즐기던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친구와 의를 맺는 일(親友結義), 둘째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일(飮酒歌舞),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銃砲狩獵), 넷째는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駿馬騎馳)”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렇게 풍류만을 즐긴 것이 아니다.
그 사이 <조선역사>, <맹자>, <자치통감> 등과 같은 동양 고전을 체득했을 뿐 아니라 17세 때 프랑스 신부 빌렘으로부터 세례(세례명 안도마)를 받을 만큼 기독교 사상은 물론 서구문물에도 정통했다.
문과 무는 물론이고 동서의 사상을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형집행 직전 안중근의사로부터 휘호를 받은 지바 도시치 일본헌병. 치바는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면서 매일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사이토 타이켄의 <내 마음의 안중근>에서
■문과 무, 동서의 사상을 통찰한 안목
안의사가 인용한 중국 고전 중에는 공자의 <논어>를 인용한 작품이 유독 많다. 이중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더불어 논의할 수 없다(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는 유묵(569-4호·청와대·소재불명)은 <논어> ‘이인’에게서 인용했다.
또 유명한 ‘(일신상) 이익을 얻으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하면 목숨을 바친다(見利思義 見危授命)’는 글(569-6·동아대박물관 소장)은 <논어> ‘헌문’에서 따왔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유명한 ‘세한도’에도 인용된 ‘날이 추운 뒤에야 소나무·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不彫)’는 유묵(보물 569-10호·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장)의 출전은 <논어> ‘자한편’이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룰 수 없다(人無遠慮 難成大業)’(보물 제569-8호)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절제한다(博學於文 約之以禮)’(보물 569-13호·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장)도 <논어> ‘헌공’과 ‘안연’ 등을 인용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집필이 미완성으로 끝났다는 아쉬움과 함께 침략 야욕에 눈이 먼 일본을 비판한 유묵.(보물 569-5호)
<자치통감>과 같은 역사서와 당나라 이백(701~762)의 시는 물론이고, 심지어 중국 진(秦)나라 말 인물인 황석공의 병법서(<소서>)와 옛 선현의 구전 문장까지 두루 따왔다.
‘서툰 목수는 아름드리 좋은 목재를 다룰 수 없다(庸工難用 連抱奇材)’(<자치통감>·보물 569-7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오로봉을 붓으로, 삼상을 연지로 삼고, 푸른 하늘만한 큰 종이에 내 마음 속의 시를 쓰리라(五老峯爲筆 三湘作硯池 靑天一丈紙 寫我腹中詩)’(이백의 시·보물 569-9호·홍익대박물관 소장)는 유묵이 그것이다. 또 ‘홀로 자만하는 것보다 더한 외톨이는 없다(孤莫孤於自恃)’(<소서>·569-16호·남화진 소장), ‘백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함이 있다(百忍堂中有泰和)’(구전 문장·569-1호·강석주 소장) 등도 있다.
이밖에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는 유묵(569-2호·동국대박물관 소장)이다. ‘하루 독서는 천년의 보배요. 백년간 물질을 탐하는 것은 하루 아침의 티끌과도 같다(一日讀書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는 선현의 글귀가 있지만 안중근 의사의 글보다 함축적이지 않다.
■눈이 뚫어질 듯 나라를 걱정한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에는 우국충정이 절절이 배어난다.
‘천리밖 임(나라) 생각에 바라보는 이 눈 뚫어질 듯 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 표하니 행여 이 마음을 저버리지 말아달라(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보물 569-11호·오영욱 소장)와, ‘장부는 비록 죽을 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이 단단하고 의사(義士)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상은 구름같이 드높다(丈夫雖死 心如鐵 義士臨危 氣似雲)’(보물 569-12호·숭실대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는 유묵 등이다.
‘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노심초사한다(國家安危勞心焦思)’(보물 569-22호·안중근의사기념관)는 글도 심금을 울린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집행을 눈앞에 두고도 ‘눈이 뚫어질듯’ ‘노심초사’하며 풍전등화격인 나라를 걱정했음을 알 수 있다.
‘천리밖 임(나라) 생각에 바라보는 이 눈 뚫어질 듯 하다’고 우국충정을 드러낸 안중근 의사의 유묵.(보물 569-11호)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14일 사형언도를 받은 뒤 옥중에서 자신의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안의사는 원래 집필에 한 달 정도 걸릴 것이라고 여기고 항소할 마음을 품었다. 항소심을 진행하는 동안 책을 완성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 고등법원장이 “(집필 때까지) 몇개월이든 기다려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 게다가 모친(조마리아 선생·1862~1927)으로부터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나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는 편지를 받았다. 안의사는 결국 항소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변수가 생겼다.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결국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동양대세사묘현(東洋大勢思杳玄)…’ 유묵(보물 569-5호)은 <동양평화론> 집필이 미완성으로 끝났다는 아쉬움과 함께 침략 야욕에 눈이 먼 일본을 비판하고 있다.
‘동양의 대세 생각하면 아득하고 어두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구나. (동양)평화시국 이루지 못한게 개탄스럽기만 한데, (일본이) 정략(침략 정책)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엾도다.(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글씨에 담긴 안중근
그렇다면 궁금증이 든다. 서예의 측면에서 안중근 의사의 글씨는 어떤가. 안의사는 “필법도 능하지도 못하고 남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낮췄다. 하지만 이런 자세는 조선 선비 특유의 겸양과 절제가 체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인 퇴계 이황(1501~1570)도 “난 평소 시를 잘 짓지 못한다…남들에게 비웃음을 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어디 퇴계가 글을 못짓고, 글씨를 못써서 부끄러워 했겠는가. 겸손의 표시였겠지.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람을 전율시키는 송곳 같은 필획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보물569-24호)
안중근 의사의 글씨는 해서(정자체)와, 해서와 행서(흘림체)의 중간인 해행(楷行)이 주가 되고 있다. 이동국씨는 “특히 엄정하고 단아한 해서(정자체) 중에서도 필묵이 정확하고 법도가 엄격한 안진경(709~786)류의 필법을 구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붓을 곧게 들고 누르는 가운데 필압(붓을 누르는 힘)의 경중과 지속의 대비가 분명해서 작품의 긴장과 이완을 극대화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천여불수반수기앙이(天與不受反受其殃耳)’, 즉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뿐’이라는 유묵(보물 569-24호·김화자 소장)에서 보듯 사람을 전율시키는 송곳 같은 필획이 돋보인다. 안중근 의사의 성정·기질과 정신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동국씨는 “안의사의 글씨는 요즘의 프로작가가 쓴 순수예술지상주의 서예라기보다는 도학자인 선비로서 학문의 연장선상에서 쓴 서예”라고 규정한다. 즉 선비로서 글씨를 보는 관점은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사라진 안중근의 유묵
말이 나온 김에 거론하고 싶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있다. 바로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더불어 논의할 수 없다(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는 작품(보물 569-4호)이다.
왜냐. 문화재청의 문화재정보란에 이 유묵의 소재지가 ‘서울 종로 세종로 1 청와대’라고 되어있는데, 도난 문화재 정보란에 ‘도난 분실’로 표시되어 있다. 한마디로 청와대가 갖고있던 안중근 유묵이 사라져서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일까. 1972년 8월16일 보물로 지정된 이 유묵은 4년 뒤인 1976년 3월17일 당시 소유자인 이도영 홍익대 이사장이 청와대에 기증했다.
그런데 이 유묵은 어느 순간부터 감쪽같이 사라졌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분실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문화재청(옛 문화재관리국)은 청와대가 소장한 이 유묵을 관리할 엄두도 못냈고, 그저 있겠거니 하고 지레 짐작하고 30년이 넘도록 ‘소유자=청와대’로 표시해왔다. 일부 자료에서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소유자=박근혜’로 표기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2009년 9월 청와대로부터 ‘안중근 유묵이 없다’는 답변이 나왔고, 일부 자료에서 소유자로 표기된 박근혜 전대통령 측도 ‘있는 유물이라면 왜 없다고 하겠냐. 이 유묵을 소장하고 있지 않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청와대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안중근 의사의 유묵(보물 569-4호). 1980년대 중 후반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따라 문화재청은 ‘도난문화재 정보’ 항목에 ‘[도난] 안중근 의사 유묵 1점’을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이 유묵은 대체 언제, 누가 갖고 나간 것일까.
그저 청와대가 어수선할 때인 1979년 10·26 사태 이후나 1980년대 중후반 누군가가 슬쩍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1980년대에 이 사건을 내사한 바 있는 당시 문화재 사범 단속반 관계자는 “아마도 누군가 이 유물이 보물인지도 모르고 들고 나갔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족자 형태였던 안중근 유묵의 가치를 몰라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든 저렇든 도난문화재 항목에 오른 ‘안중근 유묵(569-4호)’는 시장에 나올 가능성이 전무하다. 사실상 공소시효가 없어진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이 유묵은 거래될 수 없다.
즉 문화재 사범의 공소시효는 10년이지만 도난신고된 문화재를 사고파는 행위는 처벌대상이 된다. 따라서 이미 ‘도난공고’가 난 ‘안중근 유묵’의 거래는 불법이 된다. 지금 청와대에서 사라진 안중근 유묵을 소장한 사람이라면 밤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공개할 수도, 팔 수도 없는 문화재를 갖고 있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방법이 있다. 문화재 사범 단속반에 ‘사라진 안중근 유묵, 내가 어디 있는 줄 안다’고 해놓고 지정해놓은 곳에 고이 갖다놓기 바란다. 재미있는 얘기지만 그렇게 도난문화재를 찾은 사례가 제법 된다. 도난 18년 만인 2018년 되찾은 익안대군(태조 이성계의 셋째아들 이방의·1360~1404)의 영정(충남 문화재자료 제329호)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 문화재는 도난-해외문화재세탁-국내반입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도난문화재의 매매가 원천봉쇄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영정 소지자가 제3자를 통해 반환했다.
청와대 분실 유묵을 갖고 있는 이는 도난문화재인줄도 모르고 구입했을 수도 있다. 부디 안중근 의사의 얼이 담긴 유묵을 돌려주기 바란다.(이주화 안중근의사기념관 학예팀장과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의 도움말과 자료제공이 기사작성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이동국, ‘필묵의 재구성-글씨로 보는 인간 안중근과 그의 사상’, <대한국인 안중근> 특별전 도록,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009
김재승, ‘안중근 의사의 유묵’ <실학사상 연구> 14권, 역사실학회, 2000
사이토 타이켄, <내 마음의 안중근>, 이송은 옮김, 집사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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