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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이미 131년전 한글 모음(ㅏㅗ ㅣ ㅜ)을 미국언론에 소개한 외국인 한글학자

“(한자 대신) 한글로 쓰면 선비와 백성, 남자와 여자 누구나 널리 보고 쉽게 알 수 있을 것인데, 사람들은 도리어 한글을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어째 글 내용이 심상치 않다. 꼭 훈민정음 서문의 느낌이 난다. 다음 내용을 보면 더욱 알쏭달쏭해진다.

“이런 이유로 필자가 비록 조선말과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어리석은 외국인이지만 부끄러움을 잊고 특별히 한글로 세계 각국의 지리와 풍속을 대강 기록하려 한다.”

호머 헐버트는 1889년 <뉴욕트리뷴>에 ‘한국어(Korean language)’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한글에 매료된 헐버트는 “한글의 모음은 하나 빼고 모두 짧은 수평, 수직의 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면서 기고문에 직접 ‘ㅏ ㅗ ㅣ ㅜ’를 그려 표현했다.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한글을 자모까지 그려가며 언어학적으로 분석·소개한 이가 바로 서양인 헐버트였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외국인이 쓴 순한글 세계지리서

보아하니 외국인이 세계지리서를 썼다는 얘기 같은데, 그런 어려운 책을 외국인이 ‘특별히’ 한글로 펴냈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도 한글을 업신여기는 풍토를 안타까워하면서 신분·성별의 구별없이 모든 백성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무엇보다 이 책의 제목이 심상찮다. ‘선비(士)와 백성(民)이 모두 반드시(必) 알아야 할 지식(知)’이라는 뜻의 <사민필지>(士民必知)이니 말이다. 영어로는 ‘Knowlege Necessary for All’이다. 

게다가 책이 출간된 것은 자그만치 129년 전인 1891년(고종 28년) 무렵이었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계승한 이 외국인의 이름은 당시 조선의 육영공원 교사였던 호머 헐버트(1863~1949)이다.

호머 헐버트가 펴낸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 <사민필지>(1891년). 헐버트는 배우기 쉬운 한글을 업신여기는 조선의 풍토를 안타까워하면서 각국의 지리 뿐 아니라 천문 지식은 물론 각국의 정부형태, 사회제도, 풍속, 산업, 교육, 군사력 등을 개괄한 세계지리서를 썼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놀랄 일은 또 있다. 외국인이 쓴 이 순한글 세계지리교과서는 최초의 순 한글신문인 ‘독립신문’보다도 5년 정도 앞서 발간됐다는 사실이다. 헐버트가 쓴 <사민필지>는 단순한 세계지리서가 아니다. 

각국의 지리 뿐 아니라 천문 지식은 물론 각국의 정부형태, 사회제도, 풍속, 산업, 교육, 군사력 등을 개괄했다. 태양계 그림, 세계전도, 대륙별 지도 등 총천연색 그림 및 지도가 9장 포함됐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도량형 표기를 조선식으로 표현했다. 리(거리)와 척(높이), 석(곡물), 원(화폐) 등이다. 서양의 신분 구조도 ‘양반과 선비, 백성’ 등으로 표기했다. 

1886년 고종이 세운 왕립육영공원의 초대 교사로 초빙된 호머 헐버트가 학생들에게 대수학을 가르치고 있다.|이돈수·이순우의 <꼬레아 꼬레아>(2009)에서

■“원주민 쫓아내고 세운 나라들” 소개

나라별 대륙별 풍속과 정치상황 등의 특징을 나름대로 콕 찝어내 설명했다.

예컨대 ‘400년 전에 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 땅에 들어가 원래 있던 사람들을 점점 쫓아내고 스스로 큰 나라를 세웠는데 지금의 미국’이라고 설명했다. 또 ‘호주에서는 80~90년전 유럽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땅에 들어가 원래 사람들을 점점 쫓아내고 살았다’고 했고, ‘아프리카 대륙은 50년 전부터 유럽인들이 해변을 빼앗아 살았고 피부가 검은 에티오피아 인종은 다 쫓겨나 내륙으로 들어가 살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영국이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을 두고 ‘세상이 이런 좋지 못한 일은 없을 것이며, 세계 각국이 매우 비판하여 오랑캐의 일이 됐다’고 꼬집었다. 또 ‘20년 전부터 영국말이 세계 각국에서 통하는 말이 됐다’고 소개했다. 영어가 세계공용어가 되었음을 설명한 것이다. 

<사민필지>는 나라별 대륙별 역사와 풍속, 정치상황을 객관적으로 소개했다. 예컨대 아메리카에서 유럽인들이 ‘근본있는 사람들’(원주민)을 쫓아내고 세운 나라가 미국이며, 호주,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유럽인들이 붉은 피부 원주민(호주)과 에티오피아 검은 피부 원주민을 내륙으로 몰아내고 차지했다고 설명했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영국은 식민지에서 받는 세금이 1년에 20억원이나 된다고도 했다. 러시아를 두고는 ‘나라백성 중에는 국왕을 시해할 계교를 꾸미는 사람이 종종 있다’고 썼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1818~1881)이 혁명세력의 폭탄테러로 사망한 사건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이탈리아를 서술한 내용이 재미있다. ‘인체의 조각은 살아있는 사람 형상과 조금도 차이가 없어 도무지 당할 나라가 없다’고 했다. 

또한 ‘이 나라 국왕이 천주교 교황을 자주 구박해서 교황이 천주교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도 생각했다’고 전했다. 터키에 대해서는 ‘계급이 양반과 백성과 종으로 나뉘고 다른 나라에 많은 빚을 진채 갚지 못하고 있다’면서 ‘부인을 3~4명이나 둔다’고 소개했다. 

헐버트는 조국인 미국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미국은 작고 약한 나라라도 서로 조약을 맺었으면 그 나라가 평등한 국가가 됨을 분명히 알게 한다’고 했다. 

<사민필지>에 실린 유럽지도. 모두 8장의 천연색 지도가 실렸다.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헐버트는 필시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포함시킨 ‘조선과 미국 중 어느 일방이 부당하거나 강압적인 간섭을 받을 때 원만한 타결을 주선한다’는 이른바 ‘거중조정’ 조항을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직전 미국은 테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어 일본의 조선지배를 인정했다. 헐버트는 특사자격으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밝힌 고종의 친서를 들고 미국에 갔지만 홀대만 받았다. 미국은 을사늑약 체결 후 공사관을 가장 먼저 철수시킨 나라가 됐다. 

배신감을 느낀 헐버트는 훗날 “미국은 한국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삿말도 없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사민필지>에 소개된 세계각국의 상황. 이슬람국이던 터키는 일부다처제를, 영국은 20여년전에 영어가 세계공용어가 된 것을, 중국(청나라)은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패함에 따라 아편을 막지못한 사연을, 이탈리아는 국왕이 교황을 ‘구박’하여 교황이 도읍을 옮기려 한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세계지리서를 펴낸 이유

<사민필지>로 돌아가자. 두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헐버트는 왜 순한글로 세계지리서를 쓴 것일까. 또 순한글로 이런 교과서를 펴낼 만큼 헐버트가 한국어에 능통했던 것일까. 

헐버트는 1886년(고종 23년) 9월 고종이 설립한 왕립 영어교육기관(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조선땅을 밟은 3명 중 한사람이다. 헐버트는 한국말을, 육영공원의 조선학생 30명은 영어를 한마디로 못했다. 

그랬으니 영어 뿐 아니라 자연과학과 수학, 만국지리 등 다른 과목들도 모두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했다. 의도하지 않은 영어몰입식 교육이었다. 헐버트가 “학생들의 영어 구사 능력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극찬할만큼 조선인들의 학습열의는 뜨거웠다. 

하지만 헐버트에게는 뭔가 부족했다. 조선의 내로라는 지식인이라도 기껏해야 청·일·러 정도만 단편적으로 알고 그 세 나라가 세상의 전부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헐버트는 조국인 ‘미국은 작고 약한 나라라도 서로 조약을 맺었으면 그 나라가 평등한 국가가 됨을 분명히 알게 한다’고 썼다. 그러나 훗날 을사늑약 후 한국을 가장 먼저 저버린 미국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그렇지만 당시 조선땅을 밟았던 선교사들은 헐버트의 말마따나 ‘성서번역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다. 헐버트는 조선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서양에서 가르치는 보편적인 지식’이며, ‘그 지식을 담은 근대서적이 필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세계지리서를 편찬할 계획을 세웠다. 헐버트가 원한 것은 일반적인 지리책이 아니었다.

“보통의 지리책이 제공하지 않은 정부와 재정수입, 산업, 교육, 종교, 군사, 식민지 등을 넣었다. 독자들이 세계 각 국가가 이룩한 부, 문화, 힘의 정도 등을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헐버트의 <회고록>에서) 


■한문판으로 번역된 <사민필지>

여기서 헐버트의 진가가 발휘된다. “조선 문자로 책을 출판하여 조선인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폈다. 헐버트는 서양에서 출간된 각종 참고서를 축약하는 방식으로 1년 남짓에 <사민필지>를 편찬했다.(1891년 초 추정) 헐버트는 “이 책은 어떤 국가의 결점도 숨기지 않았고, 100% 사실을 기반으로 썼다. 상상력은 바탕에 둔 것이 없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초를 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민필지>는 이후 각 교육기관에서 인기교재로 쓰였고, 특히나 외국의 정보에 목말랐던 상류층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미 이민사를 연구한 미국인 대니얼 애덤스는 “헐버트의 <사민필지>를 읽고 서방세계에 눈을 뜬 한국인들이 하와이 이민의 결심을 굳히게 되는 주요 동기가 됐다”고 밝혔다.  

호머 헐버트가 1900년대 초 서울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둘째 딸 마들렌, 셋째 아들 레너드, 헐버트부인, 큰딸 헬렌, 둘째 아들 위리엄, 헐버트, 큰아들은 일찍 사망했다. |헐버트기념사업회 제공

흥미로운 것은 외국인 헐버트가 쓴 순한글 <사민필지>가 4년 뒤인 1895년 총리대신 김홍집(1842~1896)의 지시로 한문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갑오개혁(1894~96년)으로 ‘언문’이라는 한글의 명칭을 ‘국문’으로 바꾸고, 공식문서에서 한문을 폐지하고 국문(한글)으로 쓰게 했으면서 왜 한글판 <사민필지>를 한문으로 번역했을까. 퇴보가 아닌가. 그러나 좋게 해석하면 그만큼 <사민필지>가 사랑을 받았다는 방증일 수 있다. 

헐버트의 <사민필지>가 7~8세 어린아이부터 한글과 함께 세계지리를 아울러 배울 수 있는 교재였다면 한문판 <士民必知>는 한문에 익숙한 지식인층을 겨냥한 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03년 미국 스미소니언 협회의 연예보고서에 기고한 헐버트의 논문. 헐버트는 ‘한글은 대중의사소통의 매체로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강조했다.|헐버트기념사업회 제공

■한글과 사랑에 빠진 외국인

두번째 궁금증이 나온다. ‘한글로 책을 출간하겠다’는 의욕은 높이 살만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순한글 교과서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헐버트의 열정이 여기서 드러난다. 

헐버트는 처음에는 조선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를 배웠다. 자비를 들여 한국어 선생을 두번이 바꿨고, 호흡이 잘 맞는 세번째 선생과 함께 분투했다. 헐버트가 달걀을 들어올리면 영어를 모르는 선생은 ‘달걀’이라고 대답하고, 헐버트가 달걀 깨는 동작을 하면 그에 맞는 한국어로 표현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먼저 문장을 암송하고, 문장을 한국어 선생에게 반복적으로 사용한 뒤 자신의 한국어 구사에 대한 선생의 반응을 확인하는 이른바 3단계 공부였다. 그 결과 헐버트는 5개월 만에 한국말을 섞어 가르치기 시작했다. 2년째에는 동사 일람표를 만들 정도로 문법에도 정통해졌고, 한국말을 거리낌없이 구사할 정도가 됐다. 

<한국소식> 1898년 2월호에 기고한 논문 ‘이두’. 헐버트는 한문, 이두, 한글의 문자구조를 비교 설명했다.|헐버트기념사업회 제공 

가히 언어천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헐버트 본인은 ‘한글’에 그 공을 돌렸다. 한글이 워낙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배우기도 쉬운 문자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하기야 한글 창제 때 예조판서 정인지(1396~1478)가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이면,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깨우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외국인인 헐버트도 불과 4일 만에 한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가 있다니…. 

헐버트는 한국에 온지 불과 일주일 만에 “조선에 온지 일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얼마나 한글을 경시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고 밝혔다. 헐버트는 이렇게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과 사랑에 빠졌다. 


■미국 신문에 실린 한글 모음(ㅏㅗ ㅣ ㅜ)

내한한지 불과 3년 만인 1889년(고종 26년) 뉴욕에서 발행되는 <뉴욕트리뷴>에 ‘한국어(Korean language)’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은 읽으면 헐버트가 왜 한글에 매료되었는지 알 수 있다. 헐버트는 일단 “조선에는 각 소리를 고유의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진정한 소리글자(true alphabet)가 존재한다”면서 “모음은 하나 빼고 모두 짧은 수평, 수직의 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한글 조합의 과학성은 환상적이다”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기고문을 보면 깜짝 놀랄만한 부분이 눈에 띈다. 신문에 헐버트가 그려준 모음 ‘ㅏ ㅗ ㅣ ㅜ’가 그대로 실린 것이다. 헐버트는 그러면서 “글자구조로 볼 때 한글에 필적할만한 단순한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극찬했다.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한글을 자모까지 그려가며 언어학적으로 분석·소개한 이가 바로 서양인 헐버트였던 것이다. 

1896년 헐버트가 서양악보로 처음 채보한 아리랑 악보. 헐버트는 “한국인에게 아리랑은 쌀과도 같은 존재”라 했다. | 문경 옛길박물관 

■한글창제 이후 한자를 내던졌다면…

시작에 불과했다. 한글을 국내외에 소개하는 헐버트의 눈부신 활약이 이어진다.

1892년 영문 월간지인 <한국소식(Korean Repository)>에 ‘한국의 글자’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헐버트는 논문에서 “조선은 오래된 관습을 털어내고 중국 것의 모방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관행을 세웠다”면서 “근검 및 애민·법치 정신으로 똘똘 뭉친 세종이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쉬운 한글을 창제했다”고 설명했다.

“한민족 스스로 문자를 발명했다. 한글이 그 어떤 문자보다 간단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명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면 완벽한 문자란 최대한 간단하고 광범위한 표음능력을 지닌 글자이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이 대목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조선인의 폐부를 찌르는 한마디를 던지며 아쉬워한다.

“조선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한자를 던지고 한글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에게는 무한한 축복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늦지 않았다”고 했다. “허물을 고치는데 너무 늦다는 이야기는 성립될 수 없다”면서 “이제라도 한글을 쓰라”고 호소했다. 헐버트는 이후에도 “영국인이 라틴어를 버린 것처럼 조선인들도 결국 한자를 버리리라 믿는다”고 기원했다.

헐버트는 그리피스가 <뉴잉글랜드> 잡지에 ‘한국, 난쟁이 제국’이라는 글을 기고하자 <한국평론> 1902년 7월호에 반박글을 실었다. 헐버트는 그리피스에게 “제발  한국을 방문한 뒤에 한국 관련 글을 쓰라”고 촉구했다.|헐버트기념사업회 제공 

■“세종은 카드머스 왕자와 동격”

어느덧 헐버트는 한글학자가 되었다. 1898년 <한국소식>에 이두를 분석한 논문 ‘이두(The ITU)’를 발표했다. 헐버트는 “한문 구문의 조잡함과 비효율성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두 같은 새로운 체계가 탄생했다”면서 “이두는 지식인 간의 의견교류에 한문이 부적격하다고 사실상 선고했다”고 이두의 의미를 설파했다.

헐버트는 자신이 창간한(1901년)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에 ‘한국어’를 발표하면서 “한국어는 대중연설언어로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설파했다. 헐버트는 이 논문을 스미소니언 협회 1903년 연례보고서의 학술지에 게재했다. 

같은 해(1903년) ‘훈민정음’ 서문을 영어로 옮기고 학술적으로 고찰했으며, 이듬해(1904년) 다시 <한국평론>에 ‘한글맞춤법 개정’을 발표해서 “소리 차이가 없는 ㅏ와 · 중 하나를 버리자”고 제안했다. 1905년 출간한 <한국사>에서는 “문자의 단순성과 발성의 힘에서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극찬했다. 헐버트는 나아가 “세종은 고대 페니키아 문자를 그리스에 전한 카드머스 왕자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면서 세종을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했다. 

헐버트가 1889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뉴욕트리뷴>에 ‘한국어’(Korean language)‘를 기고한 사연을 썼다. 김동진 헐버트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발굴한 자료다.|헐버트기념사업회 제공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 같은 존재”

헐버트의 한글사랑은 자연 한국 문화 탐구로 이어졌다.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 기간에 열린 국제설화 학술대회에 참가해서 단군신화 등 한국의 설화를 국제사회에 소개했다. 

또 ‘한국의 속담’ 123개와 ‘한국의 시’ 등을 발표(<한국소식> 1896·97년)하면서 “세상 어느 민족도 봄의 풋풋함을 한국인보다 더 만끽하지 못한다”고 찬탄했다. 

또하나의 업적은 1896년 <한국의 성악>을 발표하여 구전으로 전해지던 아리랑을 사상 처음으로 서양음계로 채보했다는 것이다. 헐버트는 이 책에서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존재”라면서 한국인의 음악적인 재능을 소개했다. “한국인이 아리랑을 노래하면 위즈워스(1770~1850) 같은 시인이 된다.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가 된다”고 찬양했다.

23살에 한국땅을 밟은 헐버트는 86살에 타계할 때까지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그리피스, 제발 조선에 와보고 책을 써라!”

헐버트는 <은둔의 나라(Hermit Nation)>(1882년)의 저자 윌리엄 그리피스(1843~1928)를 맹비난했다. 

“한번도 조선에 와보지도 않고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 관련 책을 썼다”는 것이다. 헐버트는 “이 책은 너무 많은 오류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1902년 그리피스가 미국 동부에서 발행되는 <뉴잉글랜드>라는 잡지에 ‘한국, 난쟁이 제국(Korea, the Pigmy Empire)’이라는 글을 기고한 것에 분노했다.  

헐버트는 <한국평론> 1902년 7월호에 반박글을 써서 “미국인이 기고문을 읽으면 한국인이 마치 미개하고 지능이 낮은 열등민족으로 비춰질 것이 뻔하다”고 비판했다. 

“백두산 천지의 수원지를 압록강과 두만강이라 했다…조선을 chosen으로, 백제를 Hiaksi로 표기하는 등 많은 인·지명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했다.”

헐버트는 그러면서 “그리피스는 제발 한국에 와 보고 한국에 대한 글을 쓰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헐버트는 또 ‘은둔의 나라’라는 표현도 잘못이라고 했다. “한국이 개화기를 앞당기고 있고 정치형태도 바꾸고 있으니 더는 은둔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헐버트는 “그리피스가 영토도 프랑스만큼 크고, 인구도 스페인의 1.5배가 되는 한국을 아프리카 토인처럼 표현함으로써 업신여겼다”고 분개했다. 

또 하나 헐버트는 ‘조선(朝鮮)’을 ‘Morning calm’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선의 보빙사 안내를 맡은 퍼시벌 로웰(1855~1916)이 1885년 쓴 책 제목(‘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국호에 ‘아침 조(朝)’가 들어가니 ‘Morning’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밝다. 아름답다. 깨끗하다’는 뜻의 선(鮮)자를 왜 ‘조용하다’는 뜻의 ‘Calm’으로 해석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헐버트는 조선을 굳이 영어로 번역한다면 ‘고요한 아침’이 아니라 ‘서광이 비치는 아름다운 아침’이라는 뜻인 ‘Radiant Morning’이나 ‘Morning Radiance’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지금도 아무 생각없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어떻고, ‘은둔의 나라’가 어떻고 하면서 그리피스의 책을 즐겨 인용하는데…. 미국인 헐버트는 자그만치 120년 전에 ‘잘못됐다’고 지적하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지에 묻힌 호머 헐버트. 헐버트는 평소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누누이 밝혔다. 헐버트는 1949년 광복절을 앞두고 국빈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했다가 고령에 여독까지 겹쳐 내한 일주일만에 별세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웨스트민스터보다 한국땅”

정치·외교의 측면에서도 헐버트는 한국 근현대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된다. 헐버트는 세 번이나 고종의 비밀특사였다. 

1905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국가원수들을 방문하여 일제의 참략주의를 고발하며 도움을 청하는 임무를 잇달아 맡았다. 

또 1909년 상하이의 은행에 예치한 고종의 내탕금을 찾아오라는 특명도 받았다. 1907년 일본의 박해를 받아 귀국한 후에도 38년 동안 미국 내는 물론 전세계를 돌며 강연과 기고, 집회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헐버트는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했다. 헐버트는 1949년 광복절에 국빈으로 초청된다. 그러나 이미 86세의 고령이었던데다 한달여의 여행이 남긴 여독으로 인천땅에 밟은 지 일주일만에 별세한다. 하지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서 묻히기를 바란다’는 고인의 뜻은 이뤄진 셈이 됐다. 

사실 헐버트 박사의 삶 전체를 조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역불급이다. 필자는 최근 국립한글박물관이 펴낸 <사민필지>를 받아 보고 주로 한글과 관련된 헐버트 박사의 이야기만 뽑아 소개했다. 고백하건대 헐버트 박사의 이야기를 공부하는 내내 필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의 자료와 김동진 이사장의 단행본·논문 등이 이 기사를 작성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국립한글박물관도 귀한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동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한국 사랑 대서사시)>, 참좋은친구, 2019

국립한글박물관, <사민필지>(2020년 소장자료총서), 2020

김동진, ‘헐버트의 생애와 사민필지’, <사민필지>(2020년 소장자료총서 8), 국립한글박물관, 2020

안솔잎, ‘사민필지의 간행에 관한 연구’, <사민필지>(2020년 소장자료총서 8), 국립한글박물관, 2020

허재영, ‘사민필지의 국어사적 의미’, <사민필지>(2020년 소장자료총서 8), 국립한글박물관, 2020

함한희, ‘문화인류학자가 바라본 사민필지의 의미’, <사민필지>(2020년 소장자료총서 8), 국립한글박물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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