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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입니다'

 “고구려는 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정권입니다.”
 중국 지안(集安)의 광개토태왕릉 위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누구든 감상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그야말로 절대 넘을 수 없는 군사분계선 철책을 돌고 돌아 중국대륙으로 우회해서 온 길이 아닌가. 압록강엔 철책이 없다. 북한 땅, 북한 사람들이 손에 닿을듯, 마음에 닿을 듯 가깝다. 그러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릉을 내려와, 그 거대한 광개토대왕비를 바라보면 또 한 번 상념에 젖을 수밖에 없다. 7m에 가까운 비석에 새겨넣은 1800자에 이르는 명문….
 명문에 표현된 대로 비문의 주인공은 바로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廣開土) ‘왕중의 왕’(太王)이 아닌가. 압록강 이남 한반도로 쪼그라들고, 그 조차 군사분계선으로 양분된 영토를 지하에서 바라보는 광개토태왕의 심정은 어떨까. 이곳을 찾는 답사객들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애국자가 되어 고구려의 옛 영화를 떠올리며 비감(悲感)에 빠지게 된다.
 그것을 지나친 국수주의라 폄훼되어 손가락질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9월 24일, 이곳에 선 필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9월24일 장군총(장수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중국 지안(集安)의 이른바 고구려 28대왕 박람관 앞에 서있는 한글 안내판.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며. 당나라와의 내전 끝에 철저히 소멸됐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필자촬영

 ■고구려는 ‘철저히 사라졌다’
 왠지 ‘센치’ 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장군총(장수왕릉)까지 친견하고 내려오면 ‘비감’은 ‘비분강개’로 변한다.
 앞서 인용한 대로 ‘고구려 제28대왕 박람관’을 소개하는 안내문의 내용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가슴에 대못을 박듯이 ‘고구려는 역대로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었다’는 문구가 선명하니…. ‘2012년 6월28일 지안(集安) 고구려 민속문화연구 발전센터’ 명의로 된 안내판은 중국어와, 그 중국어를 번역한 ‘한글판’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14줄에 불과한 한글 안내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흥미로운 점을 간파할 수 있다.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정리한 ‘고구려사 인식’이 함축돼있으니 말이다. 우선 ‘고구려=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인식은 동북공정이 낳은 핵심 인식이다.
 그 뿐이 아니다. 안내문을 보면 ‘고구려 정권은 705년 동안 동북아 문명사의 눈부신 자태를 자랑했다’고 상찬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보라.
 “기원 668년 당나라에서 일어난 국내전쟁으로 고구려 정권은 철저히 소멸됐다”고 했다.
 그러니까 중국 동북의 소수 민족 정권인 고구려는 중앙의 당나라 정부와 내전을 벌였으며, 그 내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철저히’ 사라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안내문은 그것도 모자라 “고구려 정권의 발생이 필연적이지만, 그의 소망(消亡·소멸해서 멸망함)도 필연적이었다”고 못박고 있다.
 한마디로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정권인 고구려는 중앙정부(당나라)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철저히 멸망해서 사라졌는데, 그 멸망 또한 필연적인 수순이라고 강조점을 찍은 것이다.

광개토태왕릉 정상에서 바라본 압록강 너머 북한 땅. 손에 닿을 듯 지호지간이다.|필자촬영

 ■동북공정의 결과물
 그러니까 안내판이 주는 시사점은 대략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1)고구려=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점. 2)소수민족의 지방정권에 불과한 고구려가 중앙정부(당나라)와의 내전을 통해 완전히 멸망해서 소멸됐다는 점, 3)고구려의 멸망은 필연적인 역사의 순리라는 점 등이다. 여기서 중국이 2002년부터 추진했던 동북공정이 과연 무슨 프로젝트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동북공정을 한마디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공정)’이다.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여러 연구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즉 중국과 국경을 맞닿은 20여 개 소수민족의 통합을 겨냥한 정치공작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20여 개 민족은 조선족, 베트남족, 위구르족, 러시아족 같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를 가지고 있는 중국 내 소수민족을 뜻한다. 중국은 계층간·지역간·민족간 격차 등 갖가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공작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동북공정은 티벳을 겨냥한 서남공정, 위구르족을 겨냥한 서북공정과 함께 중국의 3대 공정 중 하나로 꼽힌다. 이밖에 미얀마·태국·라오스·베트남 국경을 겨냥한 ‘남방공정’, 몽골을 겨냥한 ‘북방공정’, 타이완·하이난(해남도)·오키나와·필리핀 등을 겨냥한 ‘해양변강공정’ 등 다양한 공정(프로젝트)의 이름들이 운위되고 추진됐다.
 이것은 “중국 내 56개 민족 간 분쟁이 일어나면 나라가 망한다”(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언급)는 초조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동북공정은 중국의 핵심지역으로 떠오른 동북 3성 지역의 역사, 그러니까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중국은 2001년 한국이 제중동포의 법적지위에 대한 특별법을 국회에 상정하고, 북한이 고구려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신청하자 동북공정을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받으면 중국은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인정할 명분을 잃게 된다. 중국으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멀게는 한반도 통일 이후 일어날 수도 있는 영토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뜻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한 이유가 된다. 

광개토태왕릉 원경. 영토를 개척한(광개토) 왕중의 왕(태왕)의 능이지만 국경선(압록강)에 막혀있는 형국이다.|필자촬영 

 

■고이족=고구려족
 이 공정은 학술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정부기관이 앞장서 추진하는 정치적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우려를 샀다.
 그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고구려와 발해가 어느 새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분야는 고구려사 연구였다.
 고구려를 한국·북한의 역사에서 단절시키고 중국의 소수정권으로 편입시켜야 그 뒤의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고구려의 기원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 중국의 고구려 기원연구는 예맥기원설과 부여기원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고이족(高夷族) 기원설과 상(商)족 기원설, 염제족 기원설, 다민족 기원설 등이 새롭게 개진됐지만 단편적인 연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갑자기 힘을 얻기 시작한 고이족 기원설은 동북공정 추진과 함께 더욱 활발하게 논의됐다.
 고이족 기원설이 무엇인가. 이 설은 4세기 진(晉)나라 공조(孔晁)가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에 보이는 고이(高夷)를 두고 주석을 단 것에 주목한 설이다.
 그렇다면 <일주서>란 어떤 책인가. 중국 주나라의 역사서가 <주서(周書)>인데, 원본은 유실되고(逸) 남은 편들로만 구성돼있다고 해서 <일주서>라 한다.
 <일주서> 가운데 ‘왕회해’는 고대소수민족의 분포도와 그들 민족과의 관계 등을 서술해놓았다.
 4세기 진나라 시대의 공조라는 인물이 고이족을 설명하면서 “고이는 동북이인 고구려다.(高夷東北夷高句麗)”라는 주석을 달아놓은 것이다.

 

 ■고구려는 중화민족의 한갈래
 이것이 단서가 된 것 같다.
 어떻게든 ‘중국=고구려’의 상관관계를 찾던 중국학계는 (고구려의 선조인) 고이족의 선대를 전설적인 인물인 전욱 고양씨와 연결시킨다.
 바로 고이족의 기원을 전욱 고양씨로 확정하고자 한 것이다. 전욱 고양씨가 누구인가. 그는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는 황제(黃帝)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설상의 인물이다. 중국학계는 ‘난생족 신화, 조우삽관(鳥羽揷冠)의 풍습 및 귀신숭배사상 등이 양국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다’면서 고구려를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학계가 인용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 <진서> ‘모용운재기(慕容雲載記)’가 있다. 즉 모용운(?~409)의 할아버지인 모용화가 고구려의 한 지파여서 스스로 고양씨의 후예를 자처하며 고(高)를 자신의 성(姓)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용운의 원래 이름은 고운이었지만 전연으로 끌려간 뒤 훗날 후연 왕을 죽이고 대연(大燕)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어떻든 중국학계 일각에서는 이같은 사례들을 묶어 ‘전욱고양씨→고이족→고구려족’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결국 고구려의 조상은 고이이며, 고이는 중화민족의 한 갈래인 전욱 고양씨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도 지안의 고구려 유적 안내판에 버젓이 나와있는 대로….

복원해놓은 지안 시내 한복판의 국내성. 그러나 아침이 되자 성 밖은 시장바닥으로 변해있었다.

 ■중국사라면서 왜 동이열전에 넣었는가
 하지만 이같은 중국학계의 주장은 너무도 많은 허점이 있다.
 우선 고이족설에 힘을 실은 <일주서>가 믿을만한 역사서이며, 공조의 주석도 가치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깔고 있다.
 하지만 주변 소수민족의 이야기를 담은 <일주서> ‘왕회해’이 서주시대의 사실을 전하는 지는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예컨대 劉起오는 <일주서> ‘왕회해’는 전국~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성립됐다고 했다. 또 호념이(胡念貽)도 “왕회해편이 허구적인 내용이 많아 주 성왕 시대의 역사를 고증할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무엇보다 고이족과 고구려 사이에는 1000년 가까운 시차가 존재하는데다 고양씨의 고(高)로 고양씨·고이, 그리고 고구려를 연결시키는 것인 억측이 아닌가.
 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
 중국 위·촉·오의 역사를 다룬 <삼국지>를 보라. 그 가운데 위나라 역사를 다룬 ‘위서·오환선비동이전’에서 부여·고구려·동옥저·예·마한·진변·왜의 역사는 ‘동이전’에 포함돼 있다.
 무슨 뜻인가. 부여·고구려·동옥저·예·마한·변진·왜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동이의 역사라는 분명한 뜻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233~297)는 오환·선비·동이의 역사를 중국사가 아닌 다른 계통의 역사로 인식한 것이다.
 그 뿐인가. 당나라 때 지은 <주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이역열전(異域列傳)’에 기록했다. 이박에 <후한서>와 <수서>, <남사>, <북사> 등 중국의 정사(24사)를 보더라도 예외없이 ‘동이(열)전’에 고구려 등의 역사가 포함돼 있다. 부여·고구려·백제·신라 등이 중국 역사라면 왜 중국의 정사가 그 역사를 이민족의 역사로 표현했을까.
 이밖에 최광식 교수(고려대)는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등장하는 부여·고구려·예·삼한의 제천대회를 주목하고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삼한의 계절제는 모두 제천의례라는 것.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제천의례는 이 나라들이 제후국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체제였음을 웅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부식마저도…
 최교수는 <광개토대왕비문>의 ‘천제지자(天帝之子)’나, <모두루묘지명>의 ‘일월지자(日月之子)’ 등의 표현은 모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
 고구려는 또 신라를 동이(東夷)라 부르는 등(중원고구려비문), 신라와 백제를 제후로 삼고 천자의 역할을 했다는 점도 심상치않다. 이외에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영락(永樂)과 연가(延嘉)의 독자연호를 사용했다. 이 모두 고구려가 절대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뿐인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은 뒤 올린 이른바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를 보라.
 “오로지 해동의 삼국이 지나온 세월이 장구하니~ 신라·고구려·백제는 나라를 세워 솥발처럼 맞서서 능히 예로써 중국과 상통하였습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나 송기(宋祁)의 <당서>에 모두 (고구려 등을 다룬) 열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국내의 일은 자상하게 다루고 국외의 일은 허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갖추어 싣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에~”(<동문선> 제44권 ‘표전’)
 김부식이라면 사대주의 사관에 젖었다는 악평을 듣는 이가 아닌다.
 그런 김부식도 고구려·신라·백제를 ‘삼국’이라 하면서 “<후한서>나 <당서> 등 중국의 사서에서 소홀히 다룰 수밖에 없었던 외국(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온전히 다루려고 <삼국사기>를 편찬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장군총의 원경. 그런대로 정비된 모습이다.|필자촬영

 ■대조영은 말갈인?
 또 다른 한가지…. 고구려 유적의 안내판에 나오는대로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철저히 소멸됐고, 그것은 필연의 역사’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니 고구려에 이어 발해까지 ‘당나라의 지방정권인 (속말) 말갈의 정권이며, 당나라의 문물과 정체제도를 받아들여 해동성국이 됐다’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학계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일찍이 고구려의 통치에 예속됐던 속말말갈인 출신이라는 것. <구당서>는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구당서>)이라 했고, <신당서>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부속된 자이며 성이 대씨”라 한 내용을 풀이한 것이다. 물론 중국학계는 발해의 주민 대다수가 말갈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오랫동안 고구려에 부속됐던 속말말갈인이 민족융합을 통해 새로운 족, 즉 발해족을 형성하여 고구려족과는 다른 구성원이 됐음을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발해족에는 속말말갈인과 고구려인 뿐아니라 한족까지 유입된, 이른바 ‘한화(漢化)된 말갈족’으로 규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 ‘한화된 말갈족’ 즉 고구려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은 ‘발해족’이 차츰 한족에 흡수·소멸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흔적인 역사와 함께 철저히 소멸됐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최치원과 서희의 활약
 과연 그럴까. 
 해동성국인 발해가 존재했을 때의 인물인 신라 최치원의 글을 보면 적나라하게 나온다. 872년 최치원이 당나라 예부상서에게 발해를 욕하면서 보낸 상소문의 내용이다. 
 “고구려의 미친 바람이 잠잠해진 뒤 잔여세력이 나타나 남은 찌꺼기를 거두어 모아~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습니다.”(<고운집> ‘여예부배상서찬장·與禮部裴尙書瓚狀’)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다는 이 표현…. 당대의 말인 이 최치원의 표현을 뒤집을 수 있는 다른 증거들이 있는가.
 온통 발해를 욕하는 내용이지만 발해가 고구려를 이어받았음을 적나라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당대의 기록이므로 후대에 쓴 역사책 보다 훨씬 신뢰할만하다.
 또 하나, 중국학계는 고구려와 고려는 전혀 상관없는 나라라고 강변한다. 고(高)씨의 고구려와 왕(王)씨의 고려가 무슨 친연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을 보라.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있다.
 “대조(大朝·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희대의 외교관인 서희가 나서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 무슨 소리인가.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을 봐라.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고려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평양에 도읍을 둔 까닭이다. 또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침식하고 있다고? 아니다. 그 사이 여진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때문에 고려가 거란을 찾아 조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손녕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서희의 논리에 막혀 꼼짝도 못하고 이른바 강동 6주까지 내주고 만다.(<고려사절요>)
 지금와서 고구려와 고려는 전혀 관계없는 나라라고 강변한 중국의 논리라면 매우 중요한 모순을 낳는다.
 중국의 왕조는 한족과 북방민족이 교대로 번갈아가며 중원을 차지하면서 이어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송나라와 그 뒤를 이은 금나라, 명나라와 그 뒤를 이은 청나라는 과연 어떤 친연관계가 있고, 어떤 계승성이 있는 것인가.

중국은 예로부터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이북은 오랑캐 땅,이남은 중국 중원이라 했다. 그러나 만리장성 이북에서 황허문명을 능가할 신석기 문명(훙산문화) 등이 등장한데다 동북공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만리장성의 길이를 늘리는 방법으로 대처했다.

 ■질질 늘인 만리장성
 중국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아서는 안될 착안점이 있다.
 바로 만리장성이다. 중국은 왜 춘추전국시대부터 만리장성을 쌓는데 골몰했을까.
 그것은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그 이북은 오랑캐의 땅, 그 이남은 한족(漢族)의 땅이라 분명히 선을 그은 것이다. 
 한족의 역사는 이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이민족과 벌인 처절한 혈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비슷한 의미로 천리장성을 쌓아 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로 삼고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런 마당에 장성 이북의 역사를 모두 중국의 역사라고 끌어들이니 무리한 왜곡과 과장의 역사가 남발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 만리장성의 길이를 만리장성 길이를 8800여㎞(약 2만2400리)로 늘렸다.(2009년) 고구려성이 분명한 박작성(泊灼城·압록강 하구에 있는 성)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2012년에는 더 화끈한 일을 저질렀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하미(哈密)~헤이룽장성 무단장(牧丹江)까지 만리장성의 길이가 2만1196㎞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부여나 발해, 혹은 금나라 때 쌓은 성까지 모두 장성이라고 한 것이다. 만리장성이 아니라 ‘사만리장성’, 아니 정확한 거리로 치면 ‘오만육천리장성’이라고 할 만 하다.

 

 ■저우언라이, ‘중국역사는 왜곡됐습니다.’
 이 대목에서 영원한 중국의 총리인 저우언라이(周恩來)의 통찰력있는 역사인식을 상기해보자. 
 1962년 북한이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겠다”면서 “중국 동북방에서 고고학과 발굴조사를 펼치겠다”고 제의했다.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원류를 찾겠다는 것이 아닌가. 외교적인 결례였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통큰 결단을 내린다. 조·중 합동발굴대의 구성을 허락한 것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저우언라이는 1963년 6월 28일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매우 중요한 발언록을 남긴다.(‘외사공작통보’)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그는 ‘조선’을 서술한 역사책과 역사관이 대중화(大中華)의 관점에서 왜곡되고 과장 혹은 축소됐음을 인정한 것이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에 살아왔다. 랴오허(遼河), 쑹화강(松花江)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저우언라이는 그 증거까지 내민다.
 “랴오허와 쑹화강, 두만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고,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징보호(鏡泊湖) 부근에 대진(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진의 수도(상경 용천부)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조선의 지파였다는 사실이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잦은 침략과 역사왜곡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중국은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 모욕하면서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진·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복했는데,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지만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진(발해)이 일어났다.”

 

 ■저우언라이, “두만강·압록강 서쪽은 중국땅이 아닙니다.”
 흥미로운 점은 저우언라이가 랴오허 유역을 중국의 ‘침략의 대상’, 즉 조선·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하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는 더 나아가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땅이었다든가, 심지어는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라고 했다. 만주 일대와 랴오허 유역은 결코 한족의 땅이 아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학자들의 붓 끝에서 나온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면서 “조·중 관계사를 공동으로 연구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공동조사를 끝낸 막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모든 학술조사는 중단됐으며 수정주의자, 주자파로 낙인 찍힌 지식분자들은 줄줄이 숙청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서 궁금한 대목 하나.
 저우언라이는 사해동포주의자인가. 아니었다. 그처럼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한 중화주의자도 없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국공내전 때 어느 기자가 그에게 “중국인과 공산당원이라는 신분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저우언라이는 한치의 망설임없이 “중국인이라는 신분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는 맹목적인 한족 중심의 대국주의와, 그를 위한 역사왜곡을 배격했다. 그것이 저우언라이가 중국을 사랑한 방식이었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