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게 뭔가요. 목간 같은데요.”
1974년 11월 어느 날, 경주 안압지 바닥을 조사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속 여성조사원이 윤근일 조사팀장에게 달려갔다. 뻘 속에 막 찾아낸 유물을 갖다준 것이다.
문제의 유물을 본 윤근일은 깜짝 놀랐다. 유물이 양물(陽物), 즉 목제 남근이었으니까…. 윤근일은 아무 소리하지 않고 여성조사원을 현장으로 돌려 보낸 뒤 깨끗이 세척했다.
맞았다. 1300여 년 동안 안압지 바닥의 뻘 속에 묻혀있던 남근 목제품이 현현한 것이다. 이 목제품의 길이는 17.5㎝에 달했다. 유물을 본 여성조사원들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안압지가 어떤 곳인가.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후반 문무왕 때 조성된 연못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674년(문무왕 14년)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길렀다.”
그러니까 1000년 왕국 신라의 궁원지로 각종 호화로운 연회가 펼쳐진 곳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왜 이곳 연못 안에 실물 크기의 남근 목제품이 남아있었을까. 이 남근의 쓰임새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남자
이쯤해서 ‘남근’과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이야기를 풀어보자. 신라의 역대임금 가운데 음경이 가장 컸던 이는 누구였을까.
“왕은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치가 되었다. 그래서 배필을 얻기 힘들었다.”
<삼국유사>에 나온 엄연한 역사기록인데, 기사의 주인공은 지증왕(지철로왕)이었다. 1자5치면 40㎝가 넘는다는 것이 아닌가.
기사는 왕의 ‘물건’이 너무 커서 배필을 구하기 힘들었던 사연을 전하고 있다.
“배필을 구하려 전국에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가 모량부 동노수 밑에 이르니 개 두마리가 북(鼓)만큼 큰 똥덩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었다. 사자가 ‘누구의 똥이냐’고 묻자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 하다가 숲 속에 숨어서 눈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집을 찾으니 여자의 키가 7척 5촌이나 됐다. 이 사실을 들은 지증왕은 수레를 보내 여자를 맞아 황후로 봉했다.”
지증왕도 지증왕이지만 북만한 똥을 누었던 황후도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증왕만큼은 아니지만 경덕왕의 옥경(玉莖·임금의 음경)도 만만치 않았다. 길이가 8치(약 20㎝)나 되었다니까…. 이 역시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보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크기는 랭킹 3위가 되는 것인가. 흥미로운 것은 문제의 목제남근이 처음 출토된 후 형태는 똑같지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남근이 2점 더 출토되었다.
■남근신앙의 시초
남근 신앙의 기원은 선사시대라 할 수 있겠다. 다신신앙시대(多神信仰時代)였던 신석기 시대 때 남근신앙은 많은 신격 중의 하나인 성신신앙(性神信仰)이었을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 바위를 보라. 그 바위에 새긴 암각화 가운데 커다란 남근을 노출시킨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요즘 같으면 변태성욕자로 지탄받을 남근노출증의 전형이다.
새겨진 위치가 가장 높은 위치이고 뭔가 주문(呪文)을 하는 모습에 고래·거북 등의 동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이다. 이것으로 신석기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변태성욕자가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생식본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심볼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근숭배 신앙의 예는 고구려에서도 보인다. 즉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 때 이 남근을 신좌(神坐)위에 놓는다고 했다.
남근신앙의 형태는 요즘까지도 면면이 이어진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에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실물크기 남근을 깎아 모신다.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영혼인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동양에서 숭배한 것은 언제나 자연계의 보편적인 생명력”이라면서 “자연계의 보편적인 생식력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암수 생식기의 형상으로 표현하고 숭배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녀의 생식기를 성스럽게 여긴 것은 고대 세계, 특히 동양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남근의 상징물은 새(鳥)라든가 뱀, 거북, 조롱박, 도마뱀, 호랑이, 들소, 산이었으며, 여성 생식기의 상징은 물고기, 개구리, 꽃무늬였다.
특히 새와 물고기는 남녀생식기의 대표격이었다. 중국의 시인이자 사학자인 곽말약(郭沫若·1892~1978년)은 “봉황이든 제비든 간에 이런 전설이 생식기를 상징한다고 믿는다. 새는 오늘날까지 생식기의 다른 이름이고, 알은 고환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곽말약의 말은 ‘현조(玄鳥)가 상나라를 낳았다(玄鳥生商)‘는 신화를 해석한 것이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안다면 “난 완전히 새됐어”하는 가요의 가사는 “난 완전히 X됐어”하는 큰일 날 욕이 되는 것이다. 남근의 상징성은 고대 중국의 5대 형벌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즉 묵형(墨刑), 의(의), 비(비), 궁(宮), 대벽(大피) 등이 5대 형벌이다. ‘묵’은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것, ‘의’는 코를 베는 것, ‘비’는 정강이뼈를 자르는 것, ‘궁’은 생식기를 자르는 것, ‘대벽’은 목을 자르는 것이다. 대벽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두말 할 것 없는 최악의 형벌이지만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고, 여성의 성기를 막는 궁형은 치욕의 극치였다.
<한서(漢書)> ‘형법지’는 “주나라에는 궁형에 해당되는 죄목이 500가지”라고 했다.
한나라 시대 흉노에 항복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궁형의 치욕을 받은 사마천의 회고를 들어보자.
“마음의 상처보다 더 아픈 고통은 없으며,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실은 없고, 궁형보다 더 치욕스런 것은 없습니다.”(사마천의 <보임안서(報任安書)>)
부모가 준 신체의 일부를 잘리는 아픔, 또한 자손번식 능력에다 성생활의 즐거움마저 영영 잃어버린 사마천은 “하루에도 내장이 아홉 번이나 뒤틀리는 아픔을 느끼고 이 수치심을 떠올릴 때마다 등골에 땀이 배어 옷을 적신다”고 피눈물을 흘렸다. 한나라 말기의 환관 진림(陳琳)은 “군더더기 살이 잘렸으니 대대로 욕보이는 구나”라고 한탄했다. 심볼이 잘리는 것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후손대대의 치욕으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신라의 개방적인 성문화
이야기를 좁혀 신라로 돌아가자.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기록을 보자.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어댄 일이 있었다. 왕은 급히 정병 2,000명을 뽑아 속히 서교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으니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군사 500명이 와서 숨어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이 때 신하들이 “백제가 여근곡에 있는지 어찌 알았냐”고 묻자 선덕여왕이 대답했다.
“개구리가 성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여자의 음부가 아닙니까. 여자는 음이요, 그 빛은 흰빛이니 흰빛은 곧 서쪽 방위입니다. 이로 인해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남자의 생식기가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곧 죽는 것이니 적병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여간 대단한 여왕님이시다. 아닌게 아니라 남근 목제품을 비롯한 각종 유물과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성에 관한한 신라인들의 사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개방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고(古)신라시대인 4~5세기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토우(土偶)들을 보라. 남녀의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대체로 2~3㎝정도이고, 커보았자 10㎝ 미만인데 토기항아리나 고배 뚜껑에 장식처럼 붙어있다. 이러한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공 역시 보통사람들의 무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지위가 높은 분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신라 시대 상류층의 성문화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신라에서는 왕족의 근친혼도 행해졌고 부인이 외간남자와 잠자리하다 발각되어도 관대했던 것이 처용설화에서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성 개방의 결과라 생각된다.
■유난히 많은 성 관련 유물들
681~687년 사이에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를 보라. <화랑세기>는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였던 풍월주 32명의 전기(540~681년)인데, 신라인들의 문란한 성생활이 적나라하게 표현돼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도 신라인들의 심상찮은 성문화를 살짝 언급해놓았다.
예컨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내물왕 즉위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은 사론을 펼쳐놓았다.
“아내를 맞이함에 있어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경우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할 뿐 아니라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를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습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고 하겠다. 흉노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상간하는 경우는 이보다 더욱 심하다.”(<삼국사기> ‘내물왕 즉위조’)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에도 야릇한 대목이 보인다. 즉 문무왕은 배다른 동생 차득공을 일종의 암행어사로 파견했다. 관리들의 청렴도를 잘 따져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차득공이 승복(僧服)을 입고, 무진주에 이르렀다. 무진주 관리 안길이 차득공을 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안길은 밤에 처첩 3명을 불러 말했다.
“오늘 밤 저 거사(居士) 손님을 모시고자 하는 자는 내가 죽는 날까지 함께 살 것이오.”
그러나 두 아내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남과 함께 잔단 말이냐”고 거절했다. 그러나 다른 아내 한 사람은 “그대가 몸을 마치도록 나와 함께 살겠다면 명령을 받들겠다”고 허락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라의 근친혼을 보여주는 가 하면, 출세를 위해 아내까지 바치는 신라인들의 사통·통정 관계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들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근친혼, 처첩관계, 통정·사통의 기록을 지금의 유교적인 관점,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화랑세기>는 특히 신라를 신국(神國)이라 했고, 신국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고 기록했다.
예컨대 진평왕과 보명 사이에 출생한 양명공주가 아비가 다른 자신의 아들 양도와 딸 보량을 혼인시킬 때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느냐”(<화랑세기> ‘22세 양도공조’)고 한 말은 김부식의 사론과 일맥상통한다.
■신라 최고의 요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라 최고의 요부가 있다. 바로 미실이다.
그녀는 신라왕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동륜),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무려 8명을 노리개로 삼으면서 왕실을 좌지우지했던 여인이었다.
<화랑세기>는 “백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는 기록으로 미실(549∼606)의 용모를 극찬했다.
대원신통(왕에게 색을 제공하는 전문 여성 집단)인 미실은 할머니 옥진으로부터 ‘남자를 죽이는’ 방사(房事)술을 배웠다. <화랑세기> ‘11세 풍월주 하종조’를 보자.
“(미실은)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으며,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았다. (할머니) 옥진이 ‘나의 아이는 오도를 부흥 시킬 만 하다’고 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미실의 정식 남편은 6세 풍월주인 세종이었다. 어찌나 천부적인 방사술로 세종을 혼내놨는지 <화랑세기>는 ‘세종이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미실은 태후의 명에 의해 쫓겨난다. 지소태후의 성난 한마디를 들어보라.
“너로 하여 전군을 받들게 한 것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인데 감히 사사로운 색사(色事)로 전군을 어지럽혔으니 용서할 수 없다.”
쫓겨난 미실은 사다함(5세 풍월주)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둘은 원래부터 사랑했으나 지소태후의 명으로 미실이 세종공에게 시집감으로써 헤어진 사이. 진정한 사랑도 잠깐. 사다함은 가야정벌에 나선다. 둘은 또 헤어진다.
미실은 다시 전남편인 세종의 품으로 돌아간다. 세종이 상사병에 걸리자 지소태후가 다시 미실을 부른 것이다. 세종은 기뻐 날뛰었다. 세종에게는 원래 융명이라는 정부인이 있었다.
■정절을 지킨 남자들
하지만 세종의 첩이 된 미실은 ‘원비의 첩’이 된 것을 부끄러이 여겨 색공에 응하지 않았다. 애가 단 세종은 태후에게 애원하여 미실을 부인으로, 본처인 융명을 차비로 삼았으며 결국 본처를 내쫓았다. 세종은 평생 미실에게 정조를 지킨다.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켰다. 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세종공은 황후의 아들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여인의 정조가 아니라 남자의 정조라니…. 그러나 왕실 여인들의 세력다툼에 밀린 미실은 궁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런데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떠난 것을 알고는 상심한 나머지 그만 상사병에 걸린다. 사다함은 결국 죽고 만다.
미실은 이때부터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아들인 동륜태자를 꾀어 아이를 임신했으며 진흥왕 마저 사랑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동생인 미생랑(10세 풍월주)과 설화랑(7세 풍월주)마저 성의 노리개로 만들었다. 미실이 설화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보종은 16세 풍월주였다.
미실은 개(犬)에게 물려 죽은 동륜태자의 뒤를 이어 태자가 된 금륜(훗날 진지왕·재위 576∼578년)과 정을 통했으며 진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진평왕(재위 578∼632년)에게도 이른바 신국의 도, 즉 성교육을 시켰다. ‘신라 여인천하의 상징’인 미실은 수기 700편을 남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였다. 전장으로 떠나는 애인 사다함을 위한 향가 ‘풍랑가(송출정가)’를 짓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전장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이미 다른 이(세종)의 아내가 된 미실을 기리며 청조가(靑鳥歌)를 짓는다.
결국 미실은 왕(진흥왕)이 문서를 참결할 때 반드시 곁에 둘 정도로 조야의 권세가 옥진궁에 모였다는 말을 들었다. 10세 풍월주 미생대에 나뉘었던 화랑도의 다섯 파벌 중 대원신통을 받드는 파를 만든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미실이야말로 1,000년 전통의 신라역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이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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