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이었다.
전남 나주시는 영산강 중류, 즉 나주 다시면 너른 들에 자리잡고 있는 복암리 고분군(당시 전라남도 기념물 136호)에 대한 정비복원을 계획했다. 특히 이 가운데 3호분은 어느 종가의 선산이었는데, 주변 경작으로 계속 분구가 유실되어 나가자 복원계획을 세운 것이다. 기초조사는 전남대 박물관이 맡았다.
“그때까지는 3호분을 비롯해 4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칠조산(七造山)이라고 했어요. 분구(봉분)가 7개가 있었다는 얘긴데, 3기는 1960~70년대 경지정리로 삭평된 상태였죠.”(임영진 전남대 교수)
■ ‘처녀분이다!’
그 해 11월27일부터 한 달간 실시된 당시의 조사(1, 2, 3호분)는 말 그대로 정비복원을 위한 기초조사였다. 정식발굴이 아니었으니 어쩌면 요식행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3기의 무덤 주변에서 무덤 주위를 두른 주구(周溝·묘역을 구분하거나 배수, 혹은 신성불가침의 상징으로 만든 도랑 같은 유구)가 계속 확인됐고, 고분과 고분 사이에서도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기초조사에 이렇듯 중요한 변수가 생기자 나주시와 시공업체도 당황했다.
“정비사업은 96년 말까지 마무리돼야 했는데 유물과 유구가 잇달아 나오고…. 법적으로는 정식발굴예산을 받을 수 없었고…. 시공업체도 저도 고민이었죠.”
임 교수가 묘안을 짜냈다.
“조사를 제대로 해보려면 시간과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래서 안절부절못하는 시공업체에 한 가지 제안을 했어요. ‘어차피 복원을 하려면 남은 분구(봉분)의 표토를 걷어내야 한다. 그러니까 나중에 해야 할 표토제거작업을 미리 하는 셈 치자’고….”
다행히 시공업체도 인력과 장비는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제거해야 할 표토였으므로 미리 파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남의 집 선산이었던 3호분 위에 있던 민묘들이 대거 이장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1996년 5월 어느 날, 현장에서 전남대 박물관 조교였던 조진선(현 전남대 교수)이 스승(임영진 교수)에게 달려왔다.
“3호분 남쪽 중앙부분에 베어낸 소나무들이 쌓여 있었어요. 포클레인이 그 나무들을 정리하면서 표토를 살짝 걷어냈는데 바로 큰 판석들이 보였어요. 포클레인 기사가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바로 물러났습니다. 천만다행이죠. 그런데 판석들 사이에 아귀가 맞지 않았는지, 그 틈 사이에 조그만 돌들을 끼워놓았어요. 그런데….”(조진선)
틈새에 박아놓은 조그만 돌이 포클레인 작업의 충격에 튕겨져 나가는 바람에 작은 틈이 보였다.
“주먹 두 개 크기의 틈이 노출됐습니다. 손전등으로 내부를 비춰봤는데 잘 안 보였어요. 그래서 함척(函尺·측량을 위해 쓰는 자)을 넣어 봤는데, 아 글쎄, 하염없이 들어가는 거예요. 깊이가 180㎝도 넘었습니다. 곧바로 임 선생님께 달려갔습니다.”
27살 박물관 조교가 감당할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부리나케 현장으로 뛰어 올라간 임영진 교수는 돌 틈 사이로 내부를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옹관인지, 뭔지 여하간에 유물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숨이 멎는 듯했다.
‘처녀분이다!’
임 교수는 첫눈에 이 석실분이 도굴되지 않은 ‘석실분’임을 직감했다.
“우선 어느 가문의 선산이잖아요. 가문이 제대로 관리해온 선산이었기에 도굴의 위험은 없다고 봐야죠. 그리고 토사가 퇴적된 상태에서 노출됐잖아요. 토사가 쌓여 있었으니 도굴은 없었다고 봐도 됩니다.”(임 교수)
임 교수는 흥분에 휩싸였다. 영산강 유역은 369년 근초고왕 때부터 백제에 병합되었고, 5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영향을 받은 석실분이 유행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따라서 석실분이 차지하는 의미는 컸다.
“우리 고대사에서 수수께끼의 영역이 워낙 많지만 특히나 영산강 유역은 공지나 다름없지. 삼국사기 같은 사료에서도 영산강 유역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지. 이 일대에 산포된 고분들만이 유일한 자료예요.”(조유전 선생)
“그것도 석실분의 경우 발굴을 통해 밝혀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함평 신덕고분이나 광주 월계동 고분, 해남 조산 고분 등 모든 고분들이 도굴로 파헤쳐진 상태여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었습니다.”(임 교수)
그런 상황에서 도굴되지 않은 석실분이 확인되었으므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자료가 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임영진 교수는 정식발굴을 위해 백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정비계획은 예정대로 96년 말까지 끝내야 한다고 하고…. 그러나 학자의 양심상 이 중요한 유적을 그냥 둘 수 없고…. 이미 노출된 유적이므로 도굴에 대한 보안대책도 세워야 하고….”
조바심이 난 그는 한병삼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위원장(작고)을 어렵사리 복암리 현장으로 ‘모셨다.’ 당시 한병삼은 “이런 유적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이 맡아야 한다”면서 국가 차원의 발굴을 강조했다.
이 조치로 7월8일부터 2개월 동안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박물관 합동조사가 시작되었다.
■ 금동신발의 출현
역시 큰 발굴은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전남대 박물관팀과 함께 문제의 석실분(96석실분이라 명명)을 조사한 당시 윤근일 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의 회고.
“임영진 교수가 확인한 문제의 96석실분을 조사하기 전이었는데, 갑자기 집중호우가 내려 돌 틈사이로 쏟아지는 거예요. 얼마나 진땀이 나던지….”
드디어 석실을 열고 들어가자 윤근일을 비롯한 조사단은 깜짝 놀랐다.
“대형옹관이 앞뒤 2개씩 4개나 있잖아요. 옹관은 남은 길이 98~180㎝ 정도였어요. 옹관 안에는 6구의 인골이 확인되었고, 금은장삼엽환두도(金銀裝三葉環頭刀·금은으로 장식한 세 잎사귀 모양의 둥근고리칼)와 각종 토기류, 철대도·철촉 등 철기, 행엽(杏葉·말띠드리개)·재갈·호등(壺등·발걸이의 일종) 등 마구(馬具)가 쏟아졌어요.”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다. 무덤방의 앞쪽 오른쪽(연도 동쪽) 옹관 밑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가 포착된 것이다.
“진흙 속에 묻힌 유물이 노출됐는데, 그것이 금동신발임을 직감했어요. 이미 익산(입점리)에서도 비슷한 금동신발을 발굴해본 적이 있었으니까….”(윤근일)
하지만 큰 난관에 봉착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의 어느 신문 기자가 현장을 찾아와 ‘호시탐탐’ 특종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문화재 담당기자들의 취재경쟁은 대단했지. 예전에 천마총 발굴 때 일이었어요. 그렇게 보안을 지켰는데, 마치 현장중계하듯 발굴기사가 어느 신문에만 나갔잖아. 발굴단원끼리 서로 의심하는 사태에 이르렀는데, 아 글쎄 나중에 보니 경주 우체국교환실장이 그 신문기자의 부인이잖아요. 당시 발굴단이 문화재관리국에 전화로 보고할 때는 우체국 교환을 통해야 했으니까…. 그랬으니 발굴기사가 라이브로 신문에 중계됐지. 허허.”(조유전)
“맞습니다. (복암리 발굴 때도) ○기자가 얼마나 현장 앞을 서성대는지…. 살 수가 있어야죠. 석실 안에는 금동신발은 노출돼 있는데, 기자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요즘엔 특히 보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요.”(윤근일)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기자)
“한 가지 꾀를 냈지. 기자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랬지. ‘○기자, 더운데 뭐 그렇게 버티고 있어요. 아무것도 없으니 바람이나 좀 쐬고 와요’라고. 그러자 그 기자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자전거를 빌려 나주 시내로 바람 쐬러 나갔어요. 거짓말을 한 셈이니 미안한 일이었어요.”
기자를 따돌린 뒤 윤근일은 속전속결, 작전을 펼친다.
“함석판을 이용해서 금동신발이 묻힌 진흙을 고스란히 떠서 석실에서 나왔어요. 그러고는 렌터카를 불러 직원편으로 금동신발을 서울로 보냈어요. 바로 보존처리실로 직행했지.”(윤근일)
윤근일은 지금도 그 기자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그 외에도 에피소드는 줄을 잇는다.
96석실분에서 확인된 금동신발
■ 대형 옹관이 남긴 해프닝
“옹관의 경우 어떤 것은 하나의 옹관으로 된 단옹식(單甕式)이고, 어떤 것은 대옹과 소옹을 만들어 접합한 합구식(合口式)입니다. 합구식의 경우엔 밖에서 작은 옹관과 큰 옹관을 따로 만들어 무덤에 들어간 뒤에 하나로 맞춰 놓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물 수습단계에서는 이 두 옹관이 빠지지 않았어요. 얼마나 큰지. 그래서 한꺼번에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키가 170㎝이 넘는 옹관(대옹 98.2㎝, 소옹 72.2㎝)이 무덤길에 걸려 나오지 못했어요.”
발굴단은 하는 수 없이 나주의 석공(石工)을 불러 무덤길(羨道)에 조성된 기둥을 갈아서 길을 넓힌 후에야 옹관 4개를 무사히 빼낼 수 있었다. 96석실에서 발굴한 옹관 4기는 양념에 불과했다. 복암리 3호분 전체에서 대형옹관이 쉴 사이 없이 쏟아졌다.
“28기나 되는 대형옹관이 나왔어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합구식 옹관 중에는 3m에 가까운 경우(15호 옹관·284m, 대옹 152㎝ 소옹 136㎝)가 있었고, 단옹인데도 2m에 가까운 것(11호 옹관·194㎝)이 있었어요.”(윤근일)
대형옹관과 관련된 해프닝이 1998년 옹관의 복원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줄을 잇는다. 당시 현장책임자였던 김낙중(현 전북대 교수)의 회고.
“복암리 현장에서 복원작업을 벌였는데요. 옹관이 너무 크고, 또 수가 많아서 대형 컨테이너 두 대를 붙여 가설 사무실을 만들어 그 속에서 작업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복원한 뒤였다.
“11호 옹관(194㎝), 2호 옹관(190㎝) 같은 대형옹관(단옹)을 복원하기는 했는데, 아 글쎄, 이걸 밖으로 가져 나갈 수 없는 거예요. 컨테이너 문 높이가 180㎝밖에 되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고민 고민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죠.”
“그래서 기중기로 컨테이너를 통째로 들어 트레일러에 싣고 그대로 박물관으로 옮겨왔잖아. 허허.”(조유전)
“트레일러에 실을 때는 컨테이너를 다시 반으로 절개했어요. 어떤 옹관의 경우 무게가 400㎏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고, 그런 옹관을 28기나 복원했으니 무게가 어떻겠어요. 기중기로 옮길 때 컨테이너 밑이 빠질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김낙중)
이런 우여곡절, 천신만고를 겪은 끝에 이 복원옹관들은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 해프닝들은 그야말로 추임새에 불과했다. 복암리 3호분은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거대한 블랙박스였으니 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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