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5월 어느 날.
제주도 서쪽 끝 마을인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 흙을 갈고 있던 마을주민 좌정인(左禎仁)씨가 돌 두 점을 주웠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고?”
고구마처럼 생긴 돌이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좌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돌 두 점을 집으로 가져갔다.
“(윤)덕중아, 이 돌들이 이상하게 생겼는데 한번 봐라.”
마을엔 제주대 사학과에 다니던 윤덕중이란 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 심상치 않은 돌을 보여준 것이다. 윤덕중 학생은 이 돌 두 점을 다시 스승인 이청규 제주대 교수(현 영남대)에게 보여주었다. 이 교수는 곧 돌을 수습한 현장에서 지표조사를 벌였다.
고산리에서 확인한 융기문토기. 토기는 신석기인들의 화폭이었고, 그들은 토기에 빼어난 예술성을 뽐냈다.
■농부가 찾은 1만년 전의 세계
좌씨가 주워온 것은 길이 8.5㎝, 촉 3㎝, 두께 1㎝나 되는 큰 석창(돌로 만든 창) 1점과 긁개 1점(길이 4.3㎝)이었다. 석창과 긁개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제작 기법인 잔잔한 눌러떼기 수법으로 성형했다. 지표조사 결과 마제석부(자갈들을 때려 다듬은 다음 날부분과 몸통부분을 부분적으로 간 것) 1점과 각편석기 1점을 추가로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후 7개월이 지난 88년 1월, 영남대 대학원생이던 강창화씨(현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가 다시 이곳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한번 조사해보고 싶었어요. 겨울 바람을 헤치고 이리저리 헤맸죠.”
그의 눈에 띈 곳은 수월봉(해발 65m)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국토방위군이 파놓은 참호였다. 그런데 참호의 단면 50㎝ 바닥 가까이에서 뭔가 이상한 징후가 포착되었다. 조심스레 파보니 그것은 융기문토기(隆起文·덧띠새김무늬)였다. 덧띠의 문양은 첫 줄은 수평을 이루지만, 둘째줄과 셋째줄은 일정한 간격마다 S자와 포물선으로 크게 휘어진 형상이었다.
“이런 석창과 긁개, 마제석부, 그리고 융기문 토기의 잇단 발견은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저 몇 점 수습했을 뿐인데, 후기 구석기 말~신석기로 이행하는 단계의 유물(석창과 긁개 등)과, 신석기 초기 유물(융기문 토기)가 나왔으니까요.”(강창화씨)
이렇게 뜻깊은 단서가 나오자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제주대박물관은 91~92년 겨울 약 6000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습했다. 이어 94년부터 98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이 벌어졌으며, 모두 10만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졌다.
■그들은 ‘맥가이버’였다
이쯤해서 조유전 선생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전환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말해 고산리 유적은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초기로 넘어가는 전환기, 즉 1만2000~1만년 전의 유적으로 각광받고 있어요. 물론 연대에 관해서는 다소간 논란은 있겠지만….”(조유전 선생)
고고학적인 설명을 가하자면 동북아 후기 구석기의 전형적인 문화는 이른바 세형돌날문화(좀돌날문화)이다. 작은 몸돌에서 눌러 떼어낸 아주 자그마한 돌날과 긁개, 조각도, 석촉, 창끝, 양면석기, 송곳 등 다양한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동북아 후기 구석기 사람들은 손재주가 기가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맥가이버’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5㎝가 될까 말까 한 몸돌에서 맥가이버처럼 아주 다양한 도구들을 척척 만들어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1만년 전을 전후로 구석기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정착을 하게 된 사람들은 농경생활을 하게 되고 곡식 등을 저장하는 도구, 즉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을 하게 된다.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농경과 간석기, 그리고 토기의 출현을 신석기혁명이라 하지. 그런 점에서 이 고산리에서 후기 구석기 최말기의 세형돌날 문화와 신석기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고토기(古土器)가 속출했고,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출현을 알리는 토기 즉 융기문 토기가 나왔다는 게 의미심장해요.”(조유전 선생)
부연 설명해보자. 고산리에서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 문화의 전통이 밴 세형몸돌, 세형돌날, 첨두기(尖頭器·끝이 뾰족한 도구), 양면 석촉(돌화살촉) 등이 속출했다. 또한 신석기의 여명을 알리는 고토기 조각도 2500여점이나 확인됐다.
“고산리에서는 특히 문양이 없는 원시 고토기 즉 식물성 섬유질이 혼입된 고토기가 전체 수량의 85% 이상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토기는 아무르강 유역의 세형돌날문화(1만1000~1만년 전)에서 보이는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 여명기에 출현하는 고토기와 흡사한 모습입니다.”(강창화씨)
이런 고토기는 인류가 토기라는 것을 처음 만들면서 450~600도에서 구운 저화질 토기이다. 구울 때 성형(成形)을 위한 보강재로 식물의 줄기를 섞었다. 연한 억새풀 같은 것을 짓이겨 썼다. 그런데 쉽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두개 있다. 우선 첫번째.
“희한한 것은 이런 고토기가 한반도 본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조유선 선생)
“예. 그래서 학술적으로 이 고토기를 ‘고산리식 토기’라 부르게 되었지요.”(강창화씨)
왜 한반도에는 보이지 않은 고토기가 제주도에서는 보일까. 두번째 수수께끼. 이런 고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8000년 전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구석기와 신석기에 넘나든 경계인
“제주도 유적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 세형돌날문화 석기들과 고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곳, 즉 1만1000~1만년 전의 유적은 고산리 한 곳밖에 없다는 겁니다.”(강창화씨)
반면 8000년 전부터로 편년되는 융기문(덧띠무늬) 토기문화가 제주도에서 성행한다는 것이다.
융기문 토기는 애월읍 고성리, 제주시 아라동, 구좌읍 대천리 등 해발 200~450m인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서 흔히 확인되는 유물이다. 또한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본향에서 흔히 확인되는 지(之)자문 토기(빗살무늬 토기)도 보인다.
지(之)자문 토기는 제주도 온평리 유적과 고산리 동굴유적에서 볼 수 있는데 모두 지그재그형의 사선으로 짧고 깊은 문양을 보인다.
기자는 이쯤해서 지난해 발해문명의 시원지, 즉 동이(東夷)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 유적을 비롯, 다링허(大凌河)·랴오허(遼河) 유역에서 기자의 손으로도 숱하게 수습할 수 있었던 융기문·빗살무늬 토기들을 떠올렸다.
또한 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확인된 강원 고성군 문암리와 양양 오산리 유적에서도….
“융기문 토기는 시대의 선후는 있을지언정 문암리·오산리 등 동해안뿐 아니라 남해안, 충청내륙, 남해안 도서지방에서도 확인되지.”(조유전 선생)
강창화씨는 특히 제주도산 태토로 만들어진 융기문 토기가 제주도와 가까운 여서도에서 확인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이 같은 문화권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융기문 토기와 지(之)자문 토기를 포함한 빗살무늬 토기는 발해문명, 즉 동이족의 문화라고 하지 않았나. 이쯤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고산리 유적에서 강(창화) 선생이 수습한 융기문 토기와 고산리식 토기는 어떤 관계가 있지 않나요.”
고산리에서 후기 구석기 최말기 문화인 세형몸날문화+고산리식 고토기와, 초기 신석기 문화의 지표유물인 융기문 토기가 함께 나왔다면 문화는 단절이 아니라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기자는 바로 그 점을 물은 것이다.
“제가 88년 1월 고산리 인근 참호에서 발견한 융기문 토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가 그곳에서 융기문 토기 1개체분을 확인한 뒤 무려 165㎡(50평) 이상을 더 팠습니다. 하지만 고산리식 토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떨어진 문화라는 뜻, 바로 융기문토기와 고산리식 고토기(식물성 고토기)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의미죠.”(강창화씨)
강씨는 제주도 삼양동 유적의 예를 든다. 즉 이곳에서는 신석기 초기의 토기인 세선(細線) 융기문토기(가는 선으로 덧띠를 만든 토기)와 함께 어로용 도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의 고성 문암리, 양양 오산리 유적과 닮은꼴이었다.
자, 다시 요약해보자. 지금으로부터 1만1000~1만년 전 중국 동북과 연해주 사이인 아무르 강에서 살던 사람들이 내려와 지금의 제주도에 정착했다고 치자. 그들은 세형돌날문화와 식물성 섬유질을 보강한 고토기를 사용한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의 여명기, 즉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를 풍미한 ‘경계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산리 문화를 창조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런 뒤 융기문과 지(之)자문 토기문화의 주인공들로 교체된다. 이때가 8000년 전 쯤이다. 이후 제주도는 광범위한 동이의 문화권이 되어 문화의 연속성이 이루어지고 지금에 이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2009년 6월 말, 기자는 숱한 호기심을 품고 조유전 선생과 함께 고산리 유적을 찾았다. 역시 제주도다웠다. 비바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셌다. 할 수 없이 철수하고 오후에 다시 찾아갔다. 우리를 안내한 탐라매장문화재연구원의 윤중현 연구원이 협재해수욕장 쪽에 있는 섬 하나를 가리켰다.
“비양도인데요. 제주도에서 가장 최근인 고려 목종 10년(1007년)에 화산폭발이 일어난 곳입니다.”
새삼 제주도가 화산섬이라는 느낌이 가슴에 와닿는다. 다시 찾은 고산리 현장. 비바람에 쫓긴 아침엔 몰랐는데, 현장은 한장밭이라 일컬어질 만큼 해발 고도 15~20m 가량의 평탄대지다.
“이런 평탄대지이니 삶의 터전을 마련했겠지. 예나 지금이나 좋은 터와 경관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가지인 거야.”(조유전 선생)
조 선생과 기자는 인근 수월봉을 찾아 유적의 경관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절경이죠. 저기 보이는 차귀도와 이곳 수월봉, 그리고 저쪽의 당산봉(해발 148m)은 이른바 기생화산(오름)인데요. 저기 당산봉에서는 날씨가 맑으면 중국의 상하이가 보인다고 할 정도로 중국과 가깝습니다. 이곳은 아직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제주도 절경 중 하나입니다.”(윤중현 연구원)
기생화산은 주로 10만년~2만5000년 전에 이뤄졌는데, 특히 고산리 현장을 품고 있는 수월봉 일대는 현무암 덩어리가 섞인 화산재로 이뤄졌다.
“얕은 바닷속에서 분출한 수중폭발화산이라 이런 모양입니다. 1000도가 넘는 뜨거운 용암이 물을 만나 폭발하는데, 물과 용암의 비율이 1 대 1이면 폭발이 가장 커서 경사가 거의 수평에 이르는 응회암(수월봉처럼)을 이룹니다. 성산일출봉과 비슷한 형상입니다.”(강창화씨)
그렇다면 1만1000~1만년 전 제주도에 닿은 인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절경을 찾았을까. 2000여년의 세월을 풍미한 그들은 왜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그리고 어떻게 융기문 토기문화를 지닌 동이의 문화가 제주도에 안착했을까. 그 미스터리의 역사를 재구성해보자.
■1만년전 땅을 밟고 내려와 온난화의 바다에 갇히다
1만1000~1만년 전 제주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후기 구석기 최말기(세형돌날문화)~신석기 여명기(고토기문화)를 산 경계인들이었다. 출발지는? 고산리 신석기 유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강창화(제주문화예술재단)는 지금의 아무르 강 유역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식물성 고토기의 모양이 아무르강 유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점을 꼽는다. 그들은 어떻게 이 머나먼 제주 땅까지 왔을까.
박용안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최종 빙하기의 해안선과 강줄기. 중국 대륙과 한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일단은 1만년 전의 기후나 지형을 한 번 살펴봐야겠지.”(조유전 선생)
“예, 그런 의미에서 당대의 기후와 해수면의 변화를 연구해봤습니다.”(강창화)
결론적으로 말해 1만년 전 이전엔 황해는 바다가 아니라 표고 20~30m 정도 되는 완만한 평원지대였으며, 랴오둥(遼東) 반도에서 흘러오는 여러 개의 강줄기가 주변 대지를 아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평원이나 혹은 강줄기를 따라 남으로 향해 제주도에 닿아 정착했다는 게 강창화의 결론이다.
“지금으로부터 2만~1만8000년 전이 마지막 빙하기의 최전성기였습니다. 서해안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150m 아래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즉 지금의 중국 동부해안과 서해안이 하나의 육지, 즉 황토층이었다는 것입니다.”(강창화)
“어디 황해뿐인가. 베링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시베리아 최동단 추코카(Chukotka) 반도와 알래스카의 최서단 스워드 반도가 서로 연육되었다잖아. 인류가 아메리카로 건너간 이곳을 베링육교라 하지.”(조 관장)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해수면은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한다.
“고산리에 정착한 사람들은 육지였던 황해가 해수면 상승으로 물이 급속도로 불어나는 과정에서 막차를 탄 셈입니다.”(강창화)
“1만1000~1만년 전 사이, 즉 1000년 동안 해수면이 급속도로 상승했다는데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었을까요?”(기자)
“수렵채집생활을 했던 구석기인들은 사냥감을 찾아 하루에 최고 50㎞씩 이동했다는 분석도 있기는 해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는 얘기죠.”(조 선생)
“급속도로 해수면이 증가했다지만 1000년이라는 세월이잖아요. 하루 아침에 물이 불어나고 그러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물이 서서히 불어났을 겁니다.”(강창화)
■ 지구온난화가 낳은 승자와 패자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화산이 빚어낸 빼어난 절경의 제주 땅 고산리에 둥지를 튼다. 식물성 섬유질 토기와 세석기 같은 당시로서는 첨단도구를 사용하면서….
그러나 지구 온난화와, 그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제주땅은 외딴 섬으로 고립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환경변화로 인해 고산리 사람들의 삶도 정체되고 만다. 이윽고 2000여년이 지난 BC 6000년 쯤부터 섬이 된 제주도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생긴다.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땅을 밟기 시작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융기문 토기(덧띠무늬)와 지(之)자문 토기를 쓰는 사람들이며,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문명을 일구기 시작한 동이족의 후예였다.
“토기에 융기문, 빗살무늬 문양을 넣을 줄 안다는 것은 문화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죠. 토기의 표면을 화폭 삼아 다양한 무늬를 덧대거나 새기거나 그리지요.”(조 선생)
새로운 이주자가 도착하자 고산리 문화는 사라지고 만다. 이른바 고산리식 토기와 석기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것이다. 기자가 보기엔 지구온난화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그렇죠. 지구온난화의 산물이라 해석해도 되겠죠. 아직도 남는 수수께끼는 있어요. 고산리 사람들과 융기문 토기를 쓴 사람들은 과연 같은 조상을 둔 사람들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종족인지….”(강창화)
여하튼 절해고도가 된 제주땅을 차지한 융기문 토기인들은 왕성한 생명력과 활동력으로 제주땅을 풍미한다.
“그때부터 제주도는 한반도 출신 사람들의 문화가 이어집니다. 중산간지역에 폭넓게 발견되는 융기문 토기문화가 그 예입니다.”(강창화)
이후 한반도로부터 다양한 문화가 파상적으로 밀려들어온다.
지난 6월 말이었다. 조유전 관장과 기자는 제주 삼양동 유적(사적 416호)을 찾았다. 230여기 집자리가 확인됐고, 이른바 송국리형 주거지, 즉 뭍의 문화가 성행했음을 증거하는 마을유적이다. 부여 송국리에서 처음 확인되어 그 이름을 얻은 송국리형 주거지는 원형집자리 내부 중앙에 타원형의 구멍을 파고 기둥 두 개를 세우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주거형태이다. 강창화가 들려주는 여담 하나.
“원형 집자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예를 하나 들까요. 제주의 비바람은 유명하잖아요. 몇년 전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지붕까지 날릴 정도였는데…. 저희 재단(제주문화예술재단)이 무릉리 폐교 운동장에다 송국리형 집자리를 복원했는데, 월드컵경기장 지붕을 날린 비바람이 불어닥쳤을 때도 이 복원된 집자리는 끄떡없었습니다.”
2000년 전 기법대로 축조한 집자리는 끄떡없고 21세기 최첨단 시설물은 바람에 날아가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각설하고 제주의 송국리형 주거지는 BC 3세기를 상한으로 해서 기원전후를 중심연대로 갖고 있다. 그런데 삼양동 대형집자리에서는 옥환(玉環), 청동칼 조각, 유리환옥 등 중국 및 한반도산의 흔적이 보인다.
옥은 두말할 것 없는 발해연안 등에서 확인되는 동이문화의 원형이다. 또한 화폐도 엿보인다. 제주 산지항과 금성리 패총유적의 예를 보면 오수전(五銖錢·BC 118년부터 주조된 중국돈)과 화천(貨泉)·화포(貨布·기원 직후에 주조된 중국 돈) 등이 확인되었다.
이제 역사로 되돌아 가보자.
■ 탐라시대의 개막
“그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등장하는 ‘주호(州胡)’시대와 연결될 수 있을까요?”
삼양동 유적과 관련, 이청규 영남대 교수에게 물었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진수(陳壽·233~297년)가 삼국지를 쓴 것이 AD 3세기잖아요. 삼국지에 쓰여진 내용은 저자인 진수보다 앞선 시기의 것일 가능성이 많으니까 삼양동 유적이 주호시대와 얼추 맞을 수도 있겠네요.”(이청규 교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자.
“ ‘주호’가 있는데,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韓中)’과 교역한다.”
제주도에는 BC 200~AD 200년 사이에 한반도 남부, 즉 해남 군곡리와 사천 늑도에서 확인되는 덧띠무늬와 마한계 토기들이 엿보인다. 이는 마한과의 교역상을 입증해주는 자료이다. 삼국사기에는 AD 5세기 말에 탐라국(耽羅國)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문주왕 2년(476년) 탐라국이 방물을 바쳤다.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恩率)로 임명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조)
탐라 사신이 받은 은솔 관직은 백제 16관등의 하나이며, 좌평(佐平)·달솔(達率)에 이어 세번째인 고위직이다.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지요. 백제의 위세가 당대 대단했으니 탐라가 백제의 조공국을 자청했다는 뜻도 되고…. 또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탐라가 조공을 자청하니 백제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었겠지요. 제3품 고위직을 내줄 정도로….”(조 선생)
백제와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보이는 사료는 동성왕 20년(498년)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동성)왕이 탐라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친히 치고자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백제본기 동성왕조)
동성왕이 군사를 이끌고 도착했다는 무진주는 오늘날의 광주 일대다. 이 또한 의미심장한 뜻을 안고 있는 기록이다. 즉 백제왕이 군사를 이끌고 광주에 이르렀다는 것은 백제의 영역이 확고하게 광주, 아니 전라도 남부까지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동시에 탐라가 문주왕 이래로 시세에 따라 조공을 잇고 끊고를 거듭하는, 이른바 밀고당기는 외교를 펼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국(백제)과 소국(탐라)의 관계였던 셈이죠.”(이청규 교수)
“탐라가 백제의 속국은 아니었던가요?”(기자)
“삼국사기 어디에도 탐라가 백제의 속국이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요.”(이 교수)
“그렇지요. 탐라국이 동성왕에 사죄했다는 것이 바로 속국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지요. 독립국의 위상을 갖고 있으면서 조공을 바치는 사이, 뭐 그런 정도가 아니었을까요?”(조관장)
이는 백제의 멸망(660년) 직후를 기록한 당나라 역사서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 소국의 생존전략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신라·백제·탐라·왜 등 4개국 사신을 거느리고 당으로 건너가~제사를 지냈다.”(당회요·唐會要)
이근우 부경대 교수는 이런 사료를 토대로 “당나라는 탐라의 사신을 초청할 정도로 독립된 정치체로 간주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 탐라는 백제멸망 후 2년 만인 신라 문무왕 2년(662년) 신라에 복속된다.
“탐라 국주(國主)인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항복했다. 탐라는 무덕(武德) 연간 이래 백제에 신속(臣屬)되었기에 좌평(佐平)의 이름을 삼았는데, 이제 우리(신라)의 속국이 되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무슨 말인고 하면 탐라는 무덕(당나라 고종의 연호) 연간(618~626년) 사이에 비로소 백제의 속국이 되었고, 탐라왕의 벼슬도 백제의 최고관등인 좌평을 받았는데, 백제멸망 후 2년 만에 신라에 항복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문무왕 19년(679년) 사신을 보내 탐라를 위무했으며, 애장왕 2년(801년) 탐라의 사신이 조공을 보냈다는 삼국사기 기사를 토대로 보자. 이것은 속국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기보다는 종주국과 조공국의 사이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탐라는 이후 고려중기까지도 독립국의 위상을 유지하다가 숙종 10년(1105년) 고려의 군으로 편입됩니다. 1만년 전부터 시작된 제주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셈입니다.”(강창화)
“고산리 유적이 담고 있는 함의는 크네요. 제주역사가 한낱 변방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 제주는 화산이 낳은 자연유산으로만 알려질 수 없다는 것…. 또 하나 무엇보다 지구 온난화라는 극적인 환경변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네요.”(조 선생)
조 선생의 말마따나 요즘의 지구온난화에 대비하려면 1만년 전 제주 고산리를 연구해보면 어떨까. 다만 1만년 전의 지구온난화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이었다면, 요즘의 지구온난화는 사람이 뿌린 불행의 씨앗이라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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