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2008년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과 기자가 '고분 아파트'로 일컬어지는 나주 복암리 고분을 찾고서 쓴 것입니다. 상중하로 나누어 실고 있는데 이 글은 중(中)입니다.>
1996년 영산강 유역에 자리잡은 나주 복암리 3호분의 발굴성과는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럴 만했다. 3m에 가까운 대형옹관이 잇달아 출토되고(26기), 금동신발과 장식대도, 은제관식 등 영산강 유역과 백제·일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어디 유물만이랴.
“3호분 한 분구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들이 나왔지. 목관묘-옹관묘-석곽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곽묘, 뭐 이런 식으로 줄줄이 나왔어…. 어때요. 옛 사람들이 후손들을 생각해서 타임캡슐을 묻어둔 것 같지 않아?”(고고학자 조유전 선생)
그러고 보니 옹관의 생김새가 마치 캡슐 같기도 하다.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 무덤의 박물관
“전용옹관 발생단계인 3세기 옹관묘에서부터 7세기 백제의 전형적인 석실분까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한 집단이 400년에 걸쳐 조영한 것이잖아요. 가히 고분박물관이라 할 수 있어요.”(윤근일 당시 발굴단장)
“사실 우리 고대사에서 영산강 유역은 공지(空地)나 다름없어요. 삼국사기 등 어떤 사료에서도 이 지역에 대한 설명은 없거든….”(조유전 선생)
다만 이 일대는 마한의 영역이었고, 백제 근초고왕 때(369년) 병합되었을 것이라는 통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도 사료에 분명하게 나온 게 아니라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즉 “(왜가) 병사를 일으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枕彌多禮)를 없애고 백제에 주었고, 근초고왕 부자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를 맞이했다”는 기록이다. 두계 이병도는 왜의 기병(起兵) 기사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근초고왕 부자가 369년 전남지방을 원정, 마한의 잔존세력을 소탕했다는 부분은 사실로 보았으며, 이후 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남만의 침미다례’를 마한 연맹체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소국(해남 혹은 강진으로 추정)으로 본 것이다. 이 통설에 따라 5세기 말까지 이 지역만의 특징으로 남아 있는 대형 옹관묘도 백제 간접지배의 배경 아래 유지된 토착사회의 특징으로 해석됐다. 또한 5세기 말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석실분은 백제의 직접통치에 따라 파견된 백제관리의 묘제라는 것도 통설이었다.
■ 수수께끼로 가득찬 영산강 유역의 고대사
그런데 복암리 3호분과 영산강 유역의 수수께끼를 풀 때 빼놓아서는 안 될 두 가지 착안점이 있다. 우선 앞서 잠깐 언급했듯 3~5세기 말까지 영암·함평·무안 등 영산강을 따라 유행한 대형옹관고분이 첫번째 착안점이다. 특히 나주평야 한복판인 대안리·신촌리·덕산리 일대에 집중된 36기의 무덤군이 있는데, 이를 반남(潘南)고분군이라 한다.
특히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이 확인됐는데, 이 일대를 다스리던 수장이었음이 확실하다. 이런 금동제는 백제식이 분명하지만, 왜계와 가야계 유물도 엿보인다. 과연 반남고분군은 당대 국제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백제와의 관계는 어땠을까. 또 하나, 착안점은 대형옹관고분(반남고분 등)이 쇠퇴하는 5세기 말에 등장하는 초기 횡혈식 석실분이다. 이는 백제식 석실분과는 다소 다른, 일본 규슈지역의 무덤 양식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특히 5세기 말~6세기 초, 즉 갑자기 등장했다가 50년도 안 돼 홀연히 사라지는 전방후원분의 존재는 한·일 학계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고분이라고도 한다)이 무엇인가. 3세기 중엽 시작되어 5~6세기 때 절정에 이르며, 7세기 소멸하기까지 일본열도의 대표적인 묘제가 아닌가. 그런 일본식 묘제가 영산강 유역에서 지금까지 14기 정도가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이 묘제는 50년도 되지 않아 사라지고 만다. 수수께끼다. 영산강 유역에 무슨 일본식 묘제이며, 왜 단 50년도 안 돼 사라졌을까?
어쨌든 일본인이 영산강 유역에 진출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임나일본부설도 모자라 이제는 영산강 유역까지 왜가 장악했다?
역사기록은 불충분한데 심상치 않은 고고학 자료는 나오고…. 논점은 백제의 영산강 유역 장악시기와, 이른바 마한 혹은 마한의 잔존세력이라 하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실체, 그리고 이 일대에서 등장하는 왜계의 무덤과 유물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 마한이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복암리 3호분이 발굴된 것이다.
“동일집단이 400년간 옹관묘(3세기 중엽~5세기 중엽·마한계)→초기 횡혈식 석실분(5세기 후엽~6세기 초·일본 규슈의 전방후원분과 유사)→백제 석실분(6세기 중엽~7세기)으로 이어지는 일목요연한 무덤을 구축했으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윤근일씨)
복암리 3호분 발견을 계기로 공지였던 영산강 유역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봇물을 이뤘다.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형국으로 쏟아놓은 연구성과인지라 들춰보면 볼수록 미궁에 빠질 지경이다. 곤혹스럽지만 한 번쯤 정리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선 임영진 전남대 교수는 영산강 유역의 토착세력이 백제식 석실분이 도입되는 6세기 중엽까지는 백제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독자세력의 역사적 실체는 ‘마한’이라는 것이다. 이는 AD 500년대까지 영산강 유역은 백제와는 관계없다는 것이며, 369년 근초고왕대의 마한 완전 합병이라는 통설을 깨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석실이 대부분 하천에 인접한 평지 혹은 저구릉상에 자리잡고 있고, 평면형태가 세장방형(가는 직사각형 형태)으로 변화하고 연도의 위치가 중앙에 자리잡으면서 문틀 같은 시설을 갖추는 것 등을 꼽는다. 그런데 이는 백제식이 아니라 북규슈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 세밀한 해석을 내린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백제의 마한 합병은 3차례에 걸쳐 이뤄진다고 봅니다. 3세기 후엽과 4세기 중엽, 6세기 중엽인데요. 이 과정에서 백제에 복속하지 않은 마한의 일부 세력이 일본(규슈)으로 망명했을 겁니다. 그런데 5세기 4·4분기에서 6세기 2·4분기의 일본 규슈지역에서는 정치적인 파동이 일어납니다.”
즉, 규슈지역에서 아리아케해(有明海) 일대에 존재하던 지쿠시군(筑紫郡) 세력이 북규슈로 세력을 확대했다가, 오사카·나라·교토를 중심으로 한 야마토(大和) 왕권에 통합되는 격동기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 백제의 핍박을 피해 망명했던 북규슈 지방의 마한인들이 본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U턴했다는 얘기다.
“백제의 압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마한인들은 같은 뿌리의 영산강 유역권의 마한세력과 지속적으로 인적·물적 교류를 유지했을 겁니다. 영산강 유역에 분포된 장고분(전방후원분)들은 바로 그런 망명 마한인들이 귀향해서 남긴 무덤이라고 봐야죠. 그러니 왜계 무덤을 썼던 거고.”(임영진 교수)
그런데 이 장고분들은 당시 영산강 유역의 중심권인 나주 반남에서 벗어난 외곽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또한 장고분은 단 50년가량만 유지된 채 소멸되고 만다.
“본향으로 돌아온 마한인들은 영산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토착세력의 승인을 받아 중심이 아닌 주변에 땅을 빌려 살았겠죠. 그러다 현지에 묻히고, 무덤도 1회성으로 끝나고….”
백제의 남하→마한세력 일부 규슈 망명→영산강 유역에는 여전히 마한 존재→규슈지역의 정치적 격동기 발생→망명한 마한 세력들 본향으로 귀향. 그럴듯한 해석이다.
임영진 교수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6세기 중엽까지 여전히 영산강 유역에 백제와는 ‘별도의 정치체’인 마한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5세기 말부터 유행한 왜계 횡혈식 석실분(전방후원분 등)은 백제의 남하에 망명한 일부 마한세력이 규슈지역의 정치적 격동기에 휘말려 다시 본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귀향함으로써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고고학 자료를 보면 분명 백제와는 다른 문화가 6세기 중엽(이때부터 백제의 직접통치가 시작됐다고 함)까지 이어진다는 것. 또 그 과정에서 왜계 성향의 묘제와 유물이 나온다는 점 때문에 임교수의 주장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 과연 백제는 없었을까
하지만 100% 옳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전문가들도 많다. 영산강 유역에서 왜계의 요소가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지역의 핵심요소인 백제의 영향과, 주변변수인 가야와 신라의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복암리 3호분에서 보듯 옹관묘를 쓰던 토착세력이 왜계 구조를 지닌 석실분(5세기 후엽)을 쓰고, 다시 백제석실분(6세기 중엽)을 씁니다. 그리고 일본식 묘제라는 전방후원분(장고분)에서도 백제의 요소가 분명히 보입니다. 나주 신촌리 9호분 단계(5세기)에도 금동관과 환두대도, 목관 같은 백제의 요소가 보이고 복암리 3호분 출토품인 금동관과, 전방후원분인 함평 신덕고분에서 보인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흔적, 그리고 월계동 1호분 출토 은피관정(머리를 은판으로 감싼 관못) 등도 역시 백제계입니다.”(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낙중 학예연구관)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은 형태만 전방후원분일 뿐 이른바 위세품(세력을 과시하는 물건)은 백제나 가야의 것이고, 일반유물은 토착세력의 사용품들입니다.”(이정호 동신대 교수)
“복암리 3호분을 봐요. 마한 옹관묘→왜계 석실분→백제 석실분 등으로 이어지는 무덤을 조성한 사람들은 동일집단, 즉 토착세력이라는 뜻이지. 3호분 96석실분처럼 왜계의 석실분인데 그 안에는 마한의 옹관묘를 썼고, 후에 백제식 석실분으로 바뀌었는 데도 그 안에는 옹관묘 전통인 다장(多葬·무덤에 시신을 여럿 안치하는 장례풍습)이잖아.”(조유전 선생)
영산강 유역의 문화를 이룬 사람들은 결국 백제의 영향을 받았고, 왜와 신라·가야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은 토착세력이지, 왜계의 묘제와 유물에만 너무 경도되어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2008년 7월 초. 조유전 관장과 기자는 남도의 폭염을 뚫고 타임머신을 탔다. 2000년 전 무역항(해남 군곡리)에서 출발한 여행은 1700년 전 마한계 수장의 무덤(반남고분군)을 지나,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은 장고분(전방후원분) 가운데 하나인 해남 용두리 고분을 거친 다음 1700년 전부터 400년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나주 복암리에서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다. 1996년 복암리에서 고대사의 블랙박스가 열렸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12년이 지났는 데도 뿌연 안개 속을 헤맬 뿐이다. 자칫하면 블랙박스를 연 것이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격이 될 수 있다. 온갖 설만이 난무하는….
“어렵지. 사료는 너무 없고, 학자들은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갖가지 주장을 펴고 있고…. 무엇보다 고고학 자료로 수수께끼로 가득찬 고대사를 과연 100%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게 어렵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돼요.”(조유전 선생)
과연 마한의 실체는 무엇일까. 마한이 일각의 주장대로 6세기 중엽까지 전남지역에서 백제와는 무관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백제는? 쉽지 않겠지만 영산강 유역 문화에 큰 파동이 일었던 5세기 후엽으로 되돌아가보자. 그리고 논란의 핵심에 놓인 마한의 역사에 대해 한번 더듬어보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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