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양, 마미군(말총 속치마), 하후상박 노출패션…’.
최근 ‘한복과 갓 등 한국의 복식(옷 꾸밈새) 문화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이 중국 온라인을 통해 확산된바 있다.
참일까, 거짓일까. 지난 21일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공동 개최한 학술대회(‘한국복식문화사-한국의 옷과 멋’)가 그 논쟁의 해법을 풀어보는 자리였다. 결론은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문화는 어느 한쪽의 일방통행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상호작용을 하면서 지역 특유의 정체성을 가진 새로운 버전으로 창조된다. 그와 같은 사실을 간파하면 굳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학술대회 발표문 중 ‘고려~구한말’ 원(몽골)-중국 대륙에 전파되고, 혹은 ‘비너스 보다 아름답다’는 찬사를 들은 고려~조선의 패션 아이템 셋이 눈에 띄었다. ‘고려양’(김윤정 서울시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 ‘마미군’(구도영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하후상박 패션’(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등이다.
■“어째서 오랑캐 예법이냐.”
“너는 어째서 호법(胡法·오랑캐의 예법)을 행하느냐.” 1330년(충혜왕 즉위년) 윤7월11일이었다.
왕위를 내놓은 충숙왕(재위 1313~1330, 복위 1332~1339)이 원나라로 가던중 즉위를 위해 귀국하는 충혜왕(1330~1332)를 황주에서 만났다. 이때 아들인 충혜왕이 아버지(충숙왕)에게 ‘호궤’(胡궤·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왼쪽 무릎을 세워 앉음)로 영접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노발대발했다.
“너는 부모가 모두 고려인인데, 어찌 나를 호궤(오랑캐 예법)으로 맞이하느냐. 그리고 의관이 너무 사치스럽다. 어찌 딴사람에게 그 꼴을 보이겠는가. 빨리 옷을 갈아입도록 하라.”(<고려사> ‘세가·충혜왕 즉위년’조)
무슨 일화인가. 충숙왕은 친어머니가 몽골인인 의비(야속진·也速眞·1316~?)이었다.
그러나 아들(충혜왕)은 달랐다. 아버지(충숙왕)와 어머니(명덕태후 홍씨·1298~1380)가 모두 고려인이었다.
몽골인의 피가 흐르고 있던 충숙왕이지만 고려인 부모를 둔 아들(충혜왕)이 몽골인 행세를 하는 꼴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필시 변발 차림이었을 것이다.
■‘변발·호복 패션’
사실 당대 세계제국을 구축한 몽골은 고려만큼은 특별히 대우했다. 그럴만도 했다.
고려는 1231년(고종 18)부터 몽골의 6차례 침공에도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그런 고려가 28년 만(1259·고종 46)에 제발로 화의를 청하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에 몽골 황제 쿠빌라이(원 세조·1260~1294)는 고려에 “의관(옷과 갓)은 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원고려기사> 1260년 6월)는 등의 특전을 베풀었다. 하지만 이제 ‘상국’이 되었고, 세계제국이 된 몽골(원)나라의 법과 제도를 어찌 피해갈 수 있단 말인가.
원 세조(쿠빌라이)의 사위였던 충렬왕(1274~1308)이 가만 있지 않았다.
충렬왕은 1278년 전국의 관리·백성들에게 ‘변발과 호복’으로 바꿀 것을 지시한다.(<고려사> ‘지·여복1’조)
이런 ‘몽골 패션’은 당대의 초상화와 고고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무렵 여러차례 원나라를 방문한 이조년(1269~1343)과 이포(?~1373) 부자의 초상화에 나와있다. 좁은 챙이 달리고 둘레가 둥근 모자와 옷, 장화 등 몽골풍이 역력하다.
1997년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 비로자나불의 개금(改金·다시 금칠) 과정에서 발견된 복장 유물 중 몽골의 전형적인 의상(텔릭·telig)’이 있다. 경남 밀양의 박익(1332~1398) 벽화묘에 등장하는 시종과 마부들 역시 몽골식 모자와 변발차림이다.
하지만 고려가 ‘몽골’을 오랑캐로 내심 여기는 한 몽골풍의 확산은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도에 지나친 ‘몽골 패션’으로 아버지에게서 핀잔을 들었던 충혜왕의 경우가 그 단적인 예이다.
또 <고려사> ‘열전·이연종’조는 “1351년(공민왕1) 감찰대부 이연종(생몰년 미상)이 공민왕의 변발과 호복을 두고 ‘이것은 고려의 풍습이 아니니 절대 본받지말라’고 간언했다”면서 “공민왕이 기뻐하며 변발을 풀었다”고 전했다.
■몽골의 ‘고려양’ 선풍
같은 시대, 몽골에서는 거꾸로 ‘고려양’ 선풍을 일으켰다. 원나라 한림학사 장욱(1289~1371)의 ‘궁중사(宮中詞)’를 보자.
“궁중에서 가장 유행하는 옷은 고려 양식(고려양·高麗樣)이었다. 방령(方領)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반비(半臂)였다. 밤마다 궁정에서 앞 다투어 구경하니, 일찍이 (고려 여인들이) 황제 앞에서 입는 옷이었다.”
몽골(원) 궁중에서 유행한 고려 패션은 무엇이었을까. ‘나란히 마주보는 깃이 달렸고(방령), 허리까지 오는 짧은 소매의 덧옷(반비)’을 가리킨다. 이런 의상은 조선초 송효상(1430~1490)·정온(1481~1538) 등의 묘에서 출토된 옷에서도 확인된다.
장욱의 ‘궁중사’에 등장하는 ‘황제 앞(어전)에서 입는 옷’이 주목된다. 대번에 기황후(생몰년 미상)가 연상된다.
기황후는 1333년 10대 어린 나이에 원나라로 끌려온 공녀 출신이었다. 원 황제 순제(1333~1372)의 차와 음료를 담당하던 소녀는 단번에 황제의 넋을 빼앗는다. 주유돈(1379~1439)의 ‘원궁사’는 “기황후는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볼, 버들가지처럼 한들한들한 허리로 궁중을 하늘하늘 걸었다”고 썼다.
‘지극히 영민하고 총명했던’(<원사> ‘후비열전’) 기씨는 마침내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기황후의 아들도 황태자에 책봉된다.(1353년) 이 무렵 원나라의 고려 열풍은 기황후의 등장과 함께 태풍으로 변했다.
“궁중 여인 중 태반이 고려인이었다. 의복·신발·모자·기물(器物) 모두 고려 양식을 따랐다.”(권형의 <경신외사>)
궁중 뿐이 아니었다. 원말명초의 학자인 도종의(1316~1369)는 “어느날 초청을 받고 찾아간 집에 모인 유학자들이…(수를 놓은 화려한) 고려 신발(高麗靴) 차림’이었다”(<남촌철경록>)고 전했다.
패션 뿐이 아니라 고려 노래까지 대유행했다.
“보초 서는 병사들은 고려 언어를 배우네. 어깨동무 하며 낮게 노래 부르니 우물가에 배가 익어가네.(衛兵學得高麗語 連臂低歌井卽梨)”(장욱의 ‘연하곡서·輦下曲序’)
■명나라 도읍을 강타한 말총 속치마
이러한 ‘고려양’의 바통을 이은 패션이 있었다. 조선의 패티코트(속치마)인 ‘마미군(馬尾裙·말총치마)’이었다
15세기 명나라 관료인 육용(1436~1497)의 <숙원잡기>를 보자.
“마미군은 조선에서 시작되어 경사(京師·명나라 초기 도읍인 남경)로 유입되었다…처음에는 부유한 상인과 귀공자, 기생들만 입었는데, 이후 조정관료들은 물론 무신들까지….”
이 글을 쓴 육용은 명나라 서울을 강타한 ‘마미군의 유행’이 영 마뜩치않은 듯했다. 육용은 “아랫도리에 허황되고 사치스럽게 옷을 입는 자는 예쁘게 보이고자 할 뿐”이라고 꼬집었다. 심지어 ‘마미군을 입은 꼴불견 대신’들의 실명을 거론한다.
“재상 만안(1489~?)은 마미군을 사철내내 벗지 않았고, 예부상서 주홍모(1420~1491)는 허리에 두 겹으로 겹쳐 입었다. 나이 어린 후작과 백작, 부마 중에서는 활시위로 옷자락을 꿰어 입는 자까지 있었다.”
육용은 “마미군이야 말로 ‘요사스러운 옷(복요·服妖)’”이라고 비판하면서 “결국 홍치제(1487~1505) 초기에 금지됐다”고 전했다. 17세기 풍몽룡(1574~1646)의 <고금담대>는 ‘마미군 금지’의 한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도성내 사대부가 마미군을 좋아하여 관청의 말에서 말총(갈기와 꼬리 털)을 뽑아가니…군마를 키우는데 차질을 빚어….”
대체 말총으로 어떻게 속치마를 만든다는 말인가. 15세기 문인인 왕기(1432~1499)의 문집(<우포잡기>)을 보자.
“(마미군은) 마미(馬尾·말총)로 만들며, 속옷 안에 묶는다…뚱뚱한 사람은 치마 하나, 마른 사람은 혹은 둘 셋의 치마를 입어, 겉옷이 펼쳐지는 게 마치 우산과 같다.”
즉 말총으로 만든 옷감은 면포나 비단과 달리 뻣뻣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마미군을 입으면 겉치마가 우산처럼 펼쳐진다. 사람들은 각자의 체형과 취향에 따라 마미군을 하나, 또는 2~3개씩 받쳐입었다. 치마를 볼륨감있게 펴주는 ‘페티코트(petticoat)’ 역할을 한 것이다.
■말총패션의 원조는 제주도
당대의 궁중화인 <명헌종원소행락도>에서 우산 모양으로 펼쳐진 마미군을 입고 있는 궁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마미군이 유행한 중국의 ‘경사’, 즉 수도는 명나라의 초기 도읍(1368~1421)이었던 남경(南京·난징)이다.
중국 양자강(揚子江·양쯔강) 이남에서는 북경(北京·베이징)으로 천도한 1421년 이후에도 여전히 남경을 경사(수도)라 했다. 조선의 마미군은 남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강남’에서 유행한 패션이었다. <성종실록>에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인다.
즉 1490년(성종21) 특진관 유자광(1439~1512)이 “제주도 수령들이 불법으로 말총으로 만든 옷을 만드느라 말 꼬리와 갈기를 잘라 거의 다 없어졌다”고 고한 것이다. 유자광은 그러면서 한가지 흥미로운 일화를 전한다.
“(1488년) 최부(1454~1504)가 표류 중 중국에 닿았는데, 어떤 이가 묻더랍니다. ‘말총옷(마미군)을 가져왔느냐’고요. 최부가 ‘없다’고 하자 중국인은 ‘예전(1483년)에 왔던 이섬(생몰년 미상)은 말총옷을 가져왔는데, 너는 없다니 참 빈한한 유생이로구나!’라고 핀잔을 주었답니다.”
중국 강남에서 유행한 마미군이 해상을 통해 제주도에서 들어온 ‘패션’이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말총을 쓴 이유
사실 마미군 뿐이 아니었다. 조선 전기의 치마는 윗옷의 품이 크고, 폭이 넓고 볼륨감이 있는게 특징이었다.
조선초 문신인 하연(1376~1453)의 부인 성주 이씨(1390~1465)의 영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인천 석남동 출토된 15세기 치마의 경우 밑단 둘레가 450cm에 이른다. 경기 양주의 남양 홍씨 부부 합장묘 이장 때 출토된 치마는 그 폭이 아파트 2층 높이인 무려 550cm에 달했다.
이처럼 치마의 드레시함을 미적 가치로 두었다면 속옷을 여러 개 입어야 했다. 그러려면 옷감이 많이 필요하다. 그럴 때 뻣뻣한 말총으로 만든 페티코트 하나가 경제적이었다. 제주도는 자연스레 마미군이 유행할 수 있었던 토양이 되었다.
요컨대 ‘조선 여성의 드레시한 치마 스타일’이 ‘제주 말총’과 결합하여 ‘마미군이라는 페티코트로 재탄생’했다. 이것이 해상교류를 통해 ‘중국 강남지역으로 건너가 마미군 열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마미군’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패션은 중국의 전통적인 슬림한 H라인 형태와는 사뭇 다르다.
중국 의상 뿐이 아니다. 일본의 기모노나 베트남의 아오 뜨 턴, 류큐의 의상과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동아시아 국가들 중 드레시한 치마를 선호한 나라는 조선뿐이었다. 14세기 무렵 조선이 퍼뜨린 ‘마미군’과 비슷한 패션은 19세기 서구 유럽 여인들이 입었던 크리놀린(crinoline·말총 페티코트)과 비슷하다.
조선에서 시작되어 14~15세기 중국에서 대유행한 말총 치마가 19세기 서양에서 등장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유행은 이렇게 시공을 초월해서 돌고도는 모양이다.
■하후상박 패션이란?
또 조선 후기 ‘비너스의 곡선미보다 아름답다’고 극찬받은 패션이 있다. 그것이 이른바 ‘하후상박 패션’이다,
그 무슨 패션인가. 저고리의 길이가 극도로 짧아지고 품이 좁아지면서 상의는 몸에 긴박하게 밀착되었다. 반면 허리에 둘러 입던 치마는 가슴 위로 올라갔다. 겹겹이 껴입은 속옷은 엉덩이를 더욱 크고 풍성하게 부풀렸다.
여성성을 강조한 새로운 스타일, 이것을 ‘하후상박(下厚上薄) 치마저고리’라 일컫는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고구려 고분벽화 속 여성들에서 보듯 전통적인 옷차림새는 노출 보다는 은폐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들어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여자의 저고리는 혁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급속도로 짧아진다,
품도 좁아져 가슴을 가리지 못할 정도가 된다. 어떤 경우엔 앞이 채 여며지지 않을 정도다. 앞여밈은 가려졌지만 길이가 짧아져 가슴이 그대로 드러난 경우도 있다. 치마는 어떨까.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면서 허리에 입던 치마의 위치가 가슴 위로 올라간다. 여기서 새로운 노출이 이뤄진다.
허리에 입었을 때 크게 벗어나지 않던 치마가 가슴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만 움직여도 흘러내린다. 그래서 별의 별 방법을 써서 치마를 고정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완전히 고정시키기 어렵다.
게다가 저고리가 너무 짧으니 가슴을 가리기에도 역불급이다. 팔을 머리 위로 올리자 치마말기는 여지없이 가슴 밑으로 내려오게 된다. 속살이 보일락 말락 하는 길이의 저고리와 움직임에 따라 흘러내린 치마허리가 가슴 노출을 유도한다.
이를 두고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요즘 부녀자들의 저고리는 너무 짧고 좁으며 치마는 너무 길고 넓으니 의복이 요사스럽다”(<청장관전서> ‘사소절·복식’)고 개탄했다.
“소매에 팔을 꿰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 번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졌고…간신히 입고 나서 조금 있으면 팔에 혈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부풀어 벗기가 어려웠다…어찌 그렇게 요망스러운지….”
■“기생 복장이라니!” “비너스보다 아름답다!”
그래도 정적인 자세로 있을 때는 아름답고 단아한 패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어떨까. 몸을 가려줄 장치가 금방 사라져버린다. 하다못해 치맛자락을 앞으로 가져와 가슴 앞에다 대어 벌어진 가슴을 가리고자 했다. 어떤 여인들의 속옷은 아예(일부러) 치마 밖에 나와있다.
당대의 패션리더는 뭐니뭐니해도 ‘기녀’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속옷 노출 패션’은 일반 서민들에게까지도 만연해 있었다. 실학자 이덕무의 전언이 그것을 입증한다.
“요즘 유행하는 복장은 창기(娼妓)들의 아양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처와 첩에게 권해 그것을 본받게 한다.”
이덕무는 “규중 부인이 기생의 복장이라니…빨리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도도하게 흐르는 패션의 흐름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하후상박’ 패션에 외국인들도 열광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쓴 영국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새비지 랜도(1865~1924)는 “고대 로마의 조각에 나타난 아름다움을 볼만큼 보았지만 한국 여성의 옷 꾸밈새와 견주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극찬했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인 랜도는 특히 “비너스의 곡선미도 한국 여성의 의상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을 따라가지 못한다”고까지 했다.
‘고려양’과 ‘마미군’, ‘하후상박 노출패션’까지…. 새삼 당대를 풍미한 패션을 살펴보면 그 원조 문제를 논하기 보다는 그 시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 멋을 음미해보는 것이 흥미롭다는 생각이 든다.
단적인 예로 19세기 서구 유럽에서 유행한 ‘크리놀린(crinoline·말총 페티코트)’의 원조가 400~500년전 조선의 ‘마미군’이라고 주장하고 우기면 어떨까. 지나친 비약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까. (이 기사는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공동 개최한 학술대회(‘한국복식문화사-한국의 옷과 멋’)에서 발표된 논문인 김윤정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의 ‘고려시대 복식과 고려양(高麗樣)’, 구도영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명나라라의 조선 드레스 열풍과 조선 전기 여성 한복’,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의 ‘조선 후기 여성 패션과 아름다움-외국인의 시각을 겸하여’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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