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조선을 ‘기록에 진심인 나라’라 평한다. 그런 말을 들을 만하다.
1대(태조)~25대(철종) 472년 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만 888책에 4770만자에 이른다. 더 기막힌 기록물이 있다.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일기체로 정리한 <승정원일기>이다. 임진왜란(1592)와 이괄의 난(1624) 등을 겪으면서 앞부분이 전부 소실됐다. 그래도 인조(1623)~순종4년(1910)의 기록(3245책)이 남아있다. 글자수는 자그만치 2억2650만자에 달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이십오사>(3996만자)와 <명실록>(1600만자)은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두 역사서를 기록한 이들이 누구일까. 지금으로 치면 7~9급 하위직 공무원들이었다.
<실록>은 예문관 소속 봉교(7품) 2명·대교(8품) 2명·검열(9품) 4명 등 8명이, <승정원일기>는 주서(7품) 2명이 교대로 임금 곁에 붙어서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사관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기록에 한맺힌 사람들처럼 불철주야 쓰고 또 썼을까.
그 답을 조선초 사관인 민인생(1373~?)이 1401년(태종 1) 4월29일자에 남긴 한마디에서 찾는다.
이날 태종(1400~1418)은 편전 사관 민인생이 들어오자 “편전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사관은 들어오지 마라”고 짜증냈다. 그러나 민인생은 “임금과 대신이 정사를 돌보는 편전에 사관의 출입을 금하면 어찌하느냐”면서 폐부를 찌르는 한마디를 던진다. “사관은 곧게 써야 합니다…신(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上有皇天)”(<태종실록>)
1735년(영조 11) 2월10일 영조가 새벽까지 대신들과 밀담을 나눴다. 영조(1724~1776)는 이복형인 경종(1720~1724)을 둘러싼 독살 연루설과 노·소론의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이때 영조가 ‘역대급 잘못’을 저지른다.
“오늘의 말씀이 너무 망측해서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다”는 대신들의 청을 받아들여 밀담을 기록한 사관의 사초책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전직 사관인 이덕중(1702~?)과 정이검(1695~1754)이 득달같이 달려와 영조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사초책을 불태우다니요. ‘목이 달아나도 사필은 굽힐 수 없다(頭可斷 筆不可斷)’는 말이 있습니다. 장차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영조실록>)
■벽화에서 읽는 ‘전지적 기록자 시점’
참으로 추상같은 기록자 정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신이 어느날 갑자기 조선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일까.
아니다. 마침 기자는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최근 펴낸 <고구려의 문자문화>(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137)에서 그 ‘기록자 정신의 원류’를 새삼스레 읽을 수 있었다.
고광의 위원은 “‘문자’라는 키워드로 고구려사를 이해하는데 목적을 두고 이 연구서를 펴냈다”고 했다.
과연 다양한 국내외 사료를 찾고, 고고학 발굴 및 조사를 통해 축적된 문자 자료와 고분 벽화를 비교한 역작이었다.
그렇게 방대한 내용 중 기자의 시선이 ‘꽂힌’ 대목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동안 벽화에 나타난 주인공과, 그 시대의 풍속도만 눈에 불을 켜고 들여다 보지 않았던가.
연구서 덕분에 이번에는 ‘전지적 기록자 시점’에서 벽화를 바라보게 되었다.
우선 벽화에 등장하는 ‘붓을 쥐고 무언가를 끄적대는 사람’을 무어라 표현할까. 단순히 문서를 작성하는 기록원이나 혹은 관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손에 붓을 쥔 모습을 표현한 상형문자가 ‘역사 사(史)’자가 아닌가.
따라서 ‘붓을 든 사람’을 벽화에 그려진 당대의 상황을 후대에 남길 임무를 맡은 기자 혹은 ‘사관’으로 해석해도 무리는 아니다. 아닌게 아니라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역사서를 편찬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삼국사기> ‘영양왕’조는 “600년 대학박사 이문진이 옛 사서를 5권짜리로 줄인 <신집>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의미심장한 부연 설명을 한다. 즉 “고구려 건국초 ‘어떤 이’가 <유기>라는 100권짜리 역사서를 편찬한 바 있다”고 소개한 것이다. <삼국사기>가 언급한 ‘어떤 이(有人)’는 ‘사관’의 직분을 맡은 인물이 틀림없다.
■파르티안 샷 선보인 마상무예 대회
고광의 위원의 설명을 토대로 ‘어떤 이(有人)’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보자.
평남 남포에 자리잡고 있는 덕흥리 고분 벽화의 ‘마상궁술(말타고 활쏘기 대회)’ 그림을 보자.
경기장에는 말을 탄 2명의 기수가 쏜살같이 달리면서 기둥 위의 과녁을 쏘고 있다.
왼쪽 사수는 몸을 뒤로 돌려 활을 힘껏 당기는 ‘파르티안 샷’의 묘기를 선보이고 있다. 고대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의 궁기병이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구사한 기술이다. 이 사수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머릿수건에 달았던 술 장식이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졌다. 두번째로 출전한 사수(오른쪽)는 앞의 과녁을 겨누고 있다.
과녁 기둥을 보면 첫번째와 두번째 과녁이 명중되어 두동강 나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림 위에는 두 사람이 말을 탄채 출전 대기 중이다.
그런데 경기장 가운데 3명의 인물을 보라. 심판인듯한 두사람은 약간 웃음기 띤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고구려 스포츠 기자가 적은 경기 기록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앞에 서있는 인물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점수를 열심히 적고 있다.
이 대목에서 고광의 위원의 ‘디테일’한 설명을 듣고 놀라 넘어지는 줄 알았다.
다소 넓은 목간에 세로로 선을 그어 두 부분으로 나눴는데, 그 양쪽에 ‘T’와 같은 부호로 표기해놓았다.
이 무슨 부호일까. 과녁을 2개 맞췄으니 ‘正’ 자 중 ‘T’로 표기해놓은 것이 아닐까. ‘2점’이라고….
그런데 이 인물의 앞쪽에는 ‘사희주기인(射戱注記人)’, 즉 ‘마상궁술(말타고 활쏘기) 대회의 기록자’라는 묵서가 있다.
이 인물은 마상궁술 대회의 기록원일까. 그러나 스포츠 기자 출신인 필자는 달리 생각해봤다. 요즘도 마찬가지겠지만 필자가 스포츠 종목을 취재할 때는 그 경기의 점수를 일일이 기록해가면서 그때 그때의 상황을 체크했다.
그래서 필자는 ‘사희주기인’으로 표현된 인물을 재미삼아 ‘고구려 시대 스포츠 기자’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싶다. 경기 결과를 보고하고, 또 여러 사람에게 알렸다면 뭐 ‘기자’이자 ‘사관’으로 일컬어도 무리는 아니겠다.
■유주자사의 무덤에 등장하는 ‘기록자’
덕흥리 고분 벽화 중에는 ‘기록자’가 또 한사람 그려져 있다.
덕흥리 고분은 408년(광개토대왕 19) 죽은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이다. 무덤에 주인공의 이름과 이력이 적힌 묵서가 있다. ‘진’은 건위장군-국소대형 등과 요동태수를 거쳐 유주자사를 지낸 고위인물이었다.
고분에는 ‘유주’에 속한 13개 군의 태수와 휘하 관리가 ‘진’을 찾아와 하례하고 업무보고하는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중 ‘진(鎭)’의 휘하 관리를 그린 그림이 있는데, 이게 심상치않다.
밑쪽 가운데는 어떤 이가 높은 감투를 쓴 사람에게 뭔가를 바치고 있다. 감투 쓴 사람의 오른쪽을 보라. 머리수건을 쓰고 노란색 옷을 입은 사람이 옆을 돌아보며 손을 마주대고 무언가 이야기 하고 있다. 역시 머리수건을 쓰고 갈색저고리에 검은 바지를 입은 사람이 그것을 받아 쓰고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붓이, 왼손에는 폭이 넓은 목간을 들고 있다.
■무언가를 잔뜩 기록중인 ‘기실’
황해도 안악에서 확인된 안악3호분의 벽화에도 ‘기록자’가 등장한다.
이 무덤의 주인공을 두고 ‘고구려왕(미천왕 혹은 고국원왕)설’과 ‘중국 귀화인(동수)설’로 나뉜다.
주인공이 누구든 이 고분은 마치 지하궁전을 방불케하는 어아어마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무덤 주인공이 정사를 펼치는 그림과 함께 250여명이 등장하는 대행렬도가 벽화를 장식하고 있다.
그중 주인공의 ‘정사도’를 보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사람의 신하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는 ‘성사(省事·관리 직책)’가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문서를 받쳐든채 주인공에게 보고하고 있다.
주인공 왼쪽 인물은 어떨까. 이 인물에는 ‘기록 담당 관리’를 뜻하는 ‘기실(記室)’ 직책이 쓰여있다.
‘기실’은 오른손에 붓을, 왼손에 목간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다. 주인공 오른쪽 ‘성사’의 보고 내용을 받아 적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보고 후 주인공이 내리는 명령이니 지시 내용을 기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앉아서 기록하고 있지만
6세기 전반에 조성된 집안(지안·集安) 통구(퉁거우·通溝) 사신총의 벽화에서도 ‘기록자’의 모습이 보인다.
무덤방 서쪽의 천장고임 벽화 인물을 보라. 머리를 풀어헤치고 오른 무릎은 세우고 왼발을 세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인물은 오른손에 붓을 들고 왼손에는 두번째 손가락으로 목간의 바닥을 받쳐 손바닥으로 감싸쥔채 무언가를 쓰고 있다. 얼핏 보면 기록자의 자세가 매우 불편해보인다. 이를 두고 고광의 위원은 “실제로 폭이 좁은 목간이나 죽간을 손에 쥐고 오랫동안 많은 양의 문서를 쓰다보면 왼손이 피곤하지 않겠냐”면서 “그래서 벽화에서와 같은 자세로 바꿔 앉아서 목간을 쥔 왼손의 팔꿈치를 왼 무릎 위에 가볍게 받쳐서 글씨를 썼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안(集安) 무용총 벽화의 ‘기록자’는 평상에 걸터 앉아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자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올려놓고 있다. 그래도 앉은 자세이니 편안해 보이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이런 상태에서 허리를 세우고 목간에 글씨를 쓴다면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임금의 표정도 써야 합니다”
기록자의 자세와 관련해서 조선조에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1489년(성종 20) 8월27일 사관인 검열(9품) 이주(1468~1504)가 문제를 제기한다.
“저희(사관)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목소리만 듣고 용모를 보지 못하니 사람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옛 역사서를 보면 ‘발연히 얼굴빛이 변했다’ ‘용모가 태연자약하다’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성색(聲色)이 모두 노기를 띠었다’는 등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주의 말은 “옛 사관들은 용색(容色)과 언모(言貌)를 모두 기록했는데 조선의 사관들은 땅에 엎드려 기록하니 매우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그렇다고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기록하는 것도 버릇없는 짓이라는 주장과. 엎드려서는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때 성종이 절충안을 마련했다.
“그래? 그러면 앉아서 기록하도록 하여라”
이때부터 사관은 앉아서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하루종일 꿇어앉아 임금과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고 분투했던 사관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까. 통구 사신총이나 무용총의 ‘기록자’의 자세에서도 그러한 고단함이 묻어나온다.
■“지혜로운 자가 붓을 썼다”
그렇다면 벽화 고분 ‘기록자’의 도구는 어떨까.
가장 중요한 도구는 붓이다. 1988년 경남 창원 다호리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 제작된 붓 5점과 ‘삭도(削刀·지우개용 칼)가 출토됐다. 이 붓 5점은 양쪽에 붓털을 끼운 형식이었다. 한쪽만 붓털을 끼운 중국 붓과 다른 독자적인 붓이다.
붓대의 양쪽 끝단과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필가(筆架·붓을 걸어놓는 기구)에 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옻칠 칼집에 들어있던 ‘지우개용 칼’은 죽간이나 목간에 잘못 쓴 글자를 지울 때 사용됐다.
중국 후한의 왕충(27~100?)은 “지혜를 갖춘 이는 세치의 혀와 1척의 붓으로 일한다(知能之人 須三寸之舌 一尺之筆)”(<논형>)고 했다. 기원전 1세기면 이미 한반도 남부에까지 ‘지혜를 갖춘 이가 붓으로 무언가를 기록한’ 시대였다는 뜻이다.
붓의 전통은 고구려 시대에 접어들며 더욱 발전했다. 특히 고분 벽화 그리기가 유행하면서 다양한 붓이 제작·활용되었다.
고광의 위원은 “안악3호분의 ‘기실’과 덕흥리 고분의 ‘사희주기인’, ‘통구 사신총’의 ‘서사인’ 등이 쓰는 붓이 사뭇 다르다”고 분석한다. 특히 ‘덕흥리 고분’의 ‘마상궁술’ 기록자가 쥐고 있는 붓 끝을 자세히 보면 고리인 듯한 것이 보인다. 이 붓을 걸어두며 썼던 것으로 해석된다. 다호리 붓이 연상된다.
벼루는 어떨까. 통구 사신총의 ‘기록자’ 앞쪽에 걸상을 놓고 그 위에 검은 색 벼루를 올려놓았다.
이와같은 고구려 벼루의 실물자료는 종종 보인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에두아르 샤반느(1865~1918)가 1907년 집안의 태왕릉애서 와당 형태의 벼루를 수집해간 것이 효시였다. 이후 집안과 평양의 고구려 유적에서 다양한 형태의 벼루가 나왔다.
최근에는 경기 연천 호로고루와, 서울 홍련봉 2보루 및 몽촌토성에서도 잇달아 출토됐다.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시절 전투와 전쟁 상황을 보고하는 숨막히는 문서행위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증거해주고 있다.
■목간인가 종이인가
벽화의 기록자들은 종이를 썼을까, 아니면 목간이나 죽간 등을 사용했을까.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 또는 완성)된 것은 기원후 105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도 목간은 보편적인 서사자료였다. 물론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확인할 수 있다.
“통구 사신총을 보십시요. 기록자 앞의 책상 위에는 목간으로 보이는 11개의 물체가 정연하게 놓여있습니다. 위와 아래 끝부분에 다소 불규칙하죠. 목간마다 길이가 약간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고광의 위원)
원래 문서가 완성되면 다른 문서와 섞이지 않도록 끈으로 묶는다. 안악3호분 벽화에서 ‘성사’가 묘주인공에게 보고하는 목간 문서가 끈으로 묶여있다. 반면 아직 작성중인 통구 사신총의 문서는 끈으로 묶어놓지 않았다.
이밖에도 무용총과 덕흥리 고분의 기록자들은 목간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고광의 위원의 저작물을 통해 고구려 고분벽화의 글자와 그림을 살펴보았다. 새삼 에드워드 핼릿 카(1892∼1982)의 명제가 떠오른다. “역사는 과거의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언…. 벽화를 그렸던 고구려인과 1500년 시공을 초월한 소통을 즐겼으니 푹푹 찌는 무더위에 얼마나 시원한 피서인가.(이 기사를 위해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고광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서사 관련 내용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34권, 한국고대사학회, 2004
고광의, <고구려의 문자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023
고구려유적유물도감편찬위, <고구려 유적유물도감(5·6)-고구려편3·4>, 1990
박진욱·김종혁·주영헌·장상렬·정찬영, <덕흥리벽화무덤>,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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