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순절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1910년 9월6일이었다. 경술국치(8월26일) 소식이 뒤늦게 매천 황현(1855~1910)이 은거하던 전남 구례에 전해졌다.
이때 동생(황원·1870~1944)은 형(매천)에게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나라가 망했는데, 왜 ‘아무개 공(某公)’ 같이 인망(人望)이 두터운 분이 죽지 않고 있는거냐”고 책망했다. 매천이 씩 웃었다.
“나는 그러지 못하면서 남이 죽지 않는다고 뭐라 해서 되겠느냐. 나라가 망한 날에는 사람마다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틀 뒤인 9월9일 새벽 매천은 홀연히 붓을 들어 ‘절명시’ 4편과, 유서(‘순국의 변’) 등을 써내려갔다.
■내가 죽어야할 의리는 없지만…
우선 ‘순국의 변’을 보라.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한 날을 당해 한 사람도…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매천집>)
그렇다. 매천은 56살이 되도록 벼슬에 나간 적 없는 선비 신분이었다. 따라서 ‘포의의 선비로서 굳이 죽을 의리는 없다’고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곧 천고의 명언이 나온다. “500년 지속된 나라가 망했는데, 따라죽는 선비가 단 한 명도 없다면 얼마나 통탄스럽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소 읽은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매천이 남긴 절명시 4편은 어떠한가.
“…몇번이나 목숨 끊으려다가 이루지 못했네.(幾合捐生却未然) 이제 더는 어쩔 수 없으니(今日眞成無可奈)….”(1수) “…(황제의) 조칙은 더는 없으리니(詔勅從今無復有) 종이 한 장 채우는데 천줄기 눈물이라(琳琅一紙淚千絲).”(2수) “…무궁화 세상은 망하고 말았네.(槿花世界已沈淪)…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기만 하구나.(難作人間識字人)”(3수) “짧은 서까래만큼도 지탱한 공 없었으니(曾無支厦半橡功) 살신성인 그뿐이지 충성은 아니라네(只是成仁不是忠)….”(4수)
이중 ‘지식인(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 어렵다’와 ‘(자결 순국은) 살신성인 그 뿐이지 충성은 아니다’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유서의 내용과 함께 절명시의 이 구절이 핵심이다.
■선비의 ‘처변삼사’
매천의 자결순국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죽지않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면 어땠을까.
이 대목에서 잠깐…. 유학자이자 항일의병장 유인석(1842~1915)은 당대의 지식인(선비)이 국가의 파국에 맞서 대처하는 세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을 ‘처변삼사(處變三事)’라 한다.
“처변삼사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는 것(거의소청·擧義掃淸)과, 은둔·망명해서 유교의 도를 지키는 것(거지수구·去之守舊), 그리고 목숨을 끊어 지조를 지키는 것(자정수지·自靖遂志)이다.”(유인석의 <의암집>)
매천은 세가지 중 ‘자정수지’, 즉 ‘자결순국’을 택했다. 책을 읽은 지식인으로서 망국의 책임을 짊어진 것이다.
또 무명 선비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무슨 거창한 ‘충성’을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최고 가치인 ‘인(仁)’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고 했다.
■“죽는게 쉬운 일은 아닌가보다”
그러나 ‘자결 순국’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
새벽까지 절명시와 유서를 남긴 매천은 지병(疝症·하복부 통증) 치료를 위해 썼던 아편을 더덕소주 한 병에 타서 마셨다.
그러나 금방 절명하지 않았다. 장남(황암현·1880~1946)의 급보를 들은 동생(황원)이 뒤늦게 달려와 매천의 입에 해독제를 넣으려 했다. 매천은 동생의 손길을 뿌리치며 약그릇을 엎어버렸다.
“세상 일이 이쯤되면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한다. 오늘 죽지 않으면 앞으로 날마다 듣고 보는 것들이 모두 마음에 거슬려 바싹 말라서 극도로 쇠약해질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사느니 빨리 죽는게 편안하다.”
매천은 혼수상태에 빠지면서도 웃으면서 순간 죽음을 두려워한 스스로를 책망했다.
“죽는 일이란 쉽지 않은가 보다. 독약을 마실 때에 세번이나 입을 대었다 떼었다 했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었단 말이냐.”
결국 매천은 음독한지 꼬박 하루만인 10일 새벽 56살의 춘추로 운명하고 말았다.
■“우리 애기 마음이 약해졌나보다”
절명시 가운데 “몇번이고 목숨을 끊으려했다‘는 구절이 눈에 밟힌다.
매천은 1905년 을사늑약 직후부터 자결순국을 결심했던 것 같다.
<매천야록>은 을사늑약 직후 순국 자결한 이들을 비분강개하며 소개한다.
예컨대 전 참판 홍만식(1842~1905)은 경기 여주 여막(주막)에서 을사늑약 소식을 들었다.
홍만식이 의관을 갖추자 낌새를 알아차린 자식들이 울며 “상소문이라도 올려보면 어떠냐”고 만류했다.
그러나 “지금 어떤 충언도 소용없다. 말만 많아봐야 어찌하겠느냐”면서 음독 순국했다.
이어 1905년 11월4일 충정공 민영환(1861~1905)도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순국했다.
<매천야록>은 이 대목에서 눈물겨운 일화를 전한다.
즉 자결순국을 결심한 민영환이 어머니(서씨)의 뺨을 마주대고 비비면서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십대 중반을 넘긴 아들이 어리광을 피우자 어머니가 씩 웃으면서 “우리 애기가 마음이 약해졌나 보다. 그만 가서 자라”고 다독거렸다.
어머니 방에서 나온 민영환은 세아이와, 임신 중인 아내가 있는 방에 들어갔다. 민영환은 아내에게 “관상가가 자식 다섯을 둘 것이라 했는데, 부인은 지금 쌍둥이를 가졌구려!”라 했다. 부인은 무슨 뜻인지 몰라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렇게 가족과 이별한 민영환은 섬돌을 내려가면서 홀연히 대성통곡했다. 민영환이 남긴 ‘국민에게 고하는 유서’를 보라.
“국가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민영환은 한번 죽어서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2000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합니다…영환은 죽되 죽지않고 구천지하에서 여러분을 도울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매천의 ‘죽음의 변’과 비슷한가. 굳이 죽을 의리도(매천 황현), 굳이 사죄할 이유도(민영환) 없는 두 분이 지식인으로서, 혹은 정치인으로서 책임을 짊어지고 가겠다고 했다.
■“어찌 훗날 민영환을 대하겠는가.”
특진관 조병세(1827~1905)가 민영환의 뒤를 따랐다
“조병세가 민영환의 부음을 듣고 ‘나도 죽어야 옳다’고 탄식했다. 손님들이 말렸지만 조병세는 ‘내가 죽지 않으면, 죽는 날 어찌 문약(文若·민영환의 자)을 대하겠느냐’면서 아편을 삼켰다.”(<매천야록>)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이 의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그때 조병세의 사위인 이용직(1852~1932)이 “대한의 대신이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어찌 너희(일본인)가 참견하느냐. 죽어서도 모욕을 주려는 것이냐”고 윽박질러 쫓아냈다.
조병세가 각국 공사관에 전달하려고 순국하면서 작성한 투서가 눈물겹다.
“공사 여러분께서는…약소국을 불쌍히 여기시어…우리의 독립권을 회복해 주소서. 조병세는 죽어서도 결초보은하겠습니다. 정신이 어지럽고 숨이 차서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국록을 먹는 관리들은 뭐합니까”
매천은 홍만식·민영환·조병세의 자결 순국 기사를 써내려가면서 본인 스스로도 그들의 뒤를 따를 결심을 한 것 같다.
1906년 6월 매천의 절친이자 독립운동가 박항래(1853~1933)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순절한 분 들 외에…그 밖의 대소 관료 중에는 한 사람도…자신의 의지를 표한 자가 없었습니다. 금사(錦士·박항래의 호)도 그랬는데 그 밖의 용렬한 관리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매천은 자성부사와 구례군수, 여산군수를 지낸 박항래에게 “국록을 먹고 있는 관원이 왜 자결하지 않으냐”고 일침을 가한 것이다.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할 관리들조차 수수방관하고 있는 상황을 안타까워 한 것이다.
매천은 아무리 목청을 돋운다 해도 민영환·조병세·홍만식 같은 우국지사가 더 나올리 없다고 판단 것 같다.
■아직 죽지 않은 인물을 순절자로 표시
을사늑약 후 매천이 남긴 ‘오애시(五哀詩)’가 그러한 조바심을 반영한다.
‘오애시’는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의 팔애시(八哀詩·당대 현신 8명의 애도시)를 모방해서 지은 시이다.
을사늑약 직후에 자결순국한 민영환·홍만식·조병세 등 3인과, 이미 작고한 우국지사 이건창(1852~1898), 아직 순국하기 전인 유학자·의병장 최익현(1833~1906) 등 2인까지 5명을 읊은 애도시이다.
민영환·홍만식·조병세 등 세 분은 그렇다치지만 왜 이건창·최익현 두 분을 포함시켰을까.
“…애도시를 지으면서 최익현을 언급한 것은 그에게도 바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또 지금 인물들이 너무 보잘것없어 (이미 죽은) 이건창을 추모한 것이다.”(<매천집> ‘을사고·오애시’)
매천은 국록을 먹는 관리들의 순절을 더는 기대하기 힘들다고 본 것일까. 그래서 이미 죽은 이건창을 포함시킨 것 같다.
앞으로는 어떨까. 다만 면암 최익현 정도가 가능성 있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 석자를 포함시킨 것이다.
과연 면암 최익현은 74살의 고령에도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뒤 대마도 유배생활 도중 순국했다.
매천의 예상대로였다. 매천이 최익현을 위해 지은 시(‘면암 선생을 곡하다·哭勉菴先生)’는 절창(絶唱)으로 꼽힌다.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만 푸르니(故國有山虛影碧) 아! 가련하다. 어디에 님의 뼈를 묻으리오.(可憐埋骨向何方)”
■경술국치 최초의 순국자
이제 최익현마저 떠났으니, 이젠 누가 남았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매천 황현, 그 자신이었다.
평생 벼슬 한번 한 적 없지만, 그저 공부한 선비라는 이유로 망국의 책임을 짊어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매천은 생각보다 외롭지 않았다. 매천처럼 ‘나라가 망한 날에 단 한사람 죽는 자가 없어서야 말이 되느냐’면서 자결 순절을 택한 이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절친인 김택영(1850~1927)이 1911년 매천의 시문을 모아 펴낸 <매천집>은 경술국치 직후에 황현을 전후로 자결순국한 15명을 언급했다. 그 중 최초의 순국자는 금산군수 홍범식(1871~1910)이었다.
홍범식은 망국의 비보가 전해진 8월29일 자결 순국했다. 홍범식은 을사늑약 이후 늘 “민충정공(민영환)이 잘 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가족 모두에게 유서를 남긴 홍범식은 벽에 ‘국파군망 불사하위(國破君亡 不死何爲·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없어졌으니 죽지 않고 무엇 하리오)’라는 여덟 글자를 써붙였다고 한다.
홍범식 자결 순국의 파급 효과를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홍범식의 유서를 아들(홍명희)에게 전달한 이는 금산재판소 서기였던 김지섭(1885~1928)이었다. 훗날 의열단원이 된 김지섭은 도쿄(東京)의 일왕 거주지 입구인 니주바시(二重橋) 폭탄 투척 사건(1924 1월)의 주인공이다. 홍범식의 자결을 목도한 송철(1894~1968)은 미주지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홍범식의 아들은 소설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1888~1968)이다. 홍범식의 유서는 심금을 울린다.
“내 아들아…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날 욕되게 하지 말아라.”
매천이 그토록 강조했던 ‘국록을 먹은 이의 순절’이란 다름아닌 홍범식이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대로에서 할복자결순국한 내시
형조판서를 지낸 김석진(1843~1910) 역시 음독 자결 순국했다. 경술국치 후 일제는 76명의 관료 및 유학자들에게 작위를 주고 은사금을 주는 포섭책을 펼쳤다. 김석진은 일제의 은전을 단호히 거부하고 이미 마련한 극약을 먹고 자결 순국했다.
김석진의 순국은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공사들과 상인들도 ‘오로지 충신은 김석진 뿐’라고 칭송했다.
공조참의를 지낸 이만도(1842~1910)는 경술국치 후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했다. 이만도는 절명시에서 “나 자신 속인 데다 남 속였더니…아직 목숨 붙어 있나니…”라며 국치 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무력감을 토로했다. 단식 20일이 지나자 “내일이면 옥황황제를 만날 터이니…수척한 몸 처마 아래 나가 앉으매…절로 마음 편하다”고 초연해졌다.
병조참의·동부승지 등을 지낸 장태수(1841~1910)는 세 아들이 일본 헌병들에게 세 아들이 붙잡혀 가는 것을 보고 단식 순국했다. 전 사헌부 지평 정재건(1843~1910)과 전 우승지 이재윤(1849~1911), 유생 김지수(1845~1911), 전 첨정 정동식(?~1910), 유생 이학순(1843~1910), 의관 송익면(1847~?), 유생 오강표(1843~1910), 유생 이근주(1860~1910), 유생 김영상(1836~1910), 유생 조장하(1847~1910) 등도 있다.
김택영이 <매천집>에서 자결순국자로 거혼한 마지막 인물은 이름없이 성만 밝힌 ‘반성(潘姓)’이다.
‘반성’은 내시 반하경(?~1910)을 가리킨다. 반하경은 고종 연간에 승전색(왕과 왕비의 최측근에서 말을 전하는 내시부의 정·종 4품관직)을 지낸 인물이다. 반하경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사퇴한 뒤 경기 파주에 은거했다. 그는 경술국치를 맞아 “비록 내시의 신분이지만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면서 대로변에서 할복 자결했다.
배웠다는 유생과, 국록을 먹은 관리에 평소 천대받았던 내시까지…. 매천 황현의 ‘순국길’이 그렇게 외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매천집>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의병장 김도현(1852~1914)은 1914년 어머니의 사망 후 경북 영해의 관어대로 나가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투신했다.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도해(蹈海) 순국’의 길을 택한 것이다.
“…나라잃고 흘린 눈물 그대로인데 부모마저 가시니…희디흰 저 천길되는 저 물속이 내 한몸 간직하기 꼭 알맞네.”
■글 읽은 사람의 도리는 책임감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겪는 동안 자결순국으로 의리를 세운 분들의 숫자를 헤아리기는 어렵다.
57명의 구체적인 이름을 적시하며 소개한 연구가 있었고, 90여 명에 이른다는 논문도 보았다.
필자의 부족한 깜냥으로 모든 분의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새삼 두 분의 유언이 심장을 때린다.
“나라가 망한 날, 한 사람도…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느냐.”(매천 황현)
“민영환은 한번 죽어서…우리 2000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한다…”(충정공 민영환)
이것이 매천의 말씀처럼 ‘글 읽은 자가 사람 구실을 하기위해’ 순국했다는 말씀이다.(참 을사늑약 후 매천으로부터 “뭐하고 있냐”는 타박을 들었던 박창래는 전남 순천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뒤 옥중순국했다.)
(이 기사를 위해 박동욱 한양대 교수와 오제호 국가보훈부 홍보담당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영붕, <매천 황현 시와 사상>, 보고사, 2017
박동욱, ‘일제강점기 순국 절명시의 의미와 전변’, <어문연구> 45권1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7
박민영, ‘의암 유인석의 위정척사운동:<소의신편>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속대학원 석사논문, 1986
심경호, ‘매천 황현의 삶과 한시연구’, <한국한시연구> 30호, 한국한시학회, 2022
허경진, ‘매천의 죽음과 문학적 성과’, <애산학보> 46, 애산학회, 2019
황현, 이장희 역, <매천야록>(상·중·하), 명문당,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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