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조선을 두고 시대착오적인 쇄국정책으로 근대화가 늦어진 나머지 망국을 초래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유독 한 분야에 관한 한 중국 및 일본보다 앞서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예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로 전깃불입니다. 그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1847~1931)이 인류 역사상 위대한 백열전구를 발명한 것은 1879년 10월이었습니다.
1887년 1~3월 사이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하고 불을 밝혔다. 전등 설치에 관한한 중국과 일본보다 2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한국전력 전기박물관 홈페이지
■1887년 1~3월 경복궁을 환하게 밝힌 전등불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7년 여가 지난 1887년(고종 24년) 1~3월 사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건청궁(고중 부처의 생활공간)에 전등불을 환하게 밝혔답니다. 이것은 중국 베이징(北京)의 자금성은 물론, 일본의 궁성보다 약 2년 앞지른 선구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조선의 고종은 ‘전깃불에 관한 한 얼리어댑터’였던 셈이죠. 사상 처음으로 전등불이 켜지는 모습을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하는데요. 당시 이 모습을 숨어서 지켜봤다는 안상궁(1936년)의 회고담이 재미있습니다.
1887년 1~3월 사이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하고 불을 밝혔다. 전등 설치에 관한한 중국과 일본보다 2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전기박물관 홈페이지
“건청궁 앞 연못에 설치된 쇳덩이(기계)를 서양인이 움직였는데 연못의 물을 빨아올려 물끓는 소리와 우레와 같은 굉음이 났다. 얼마 뒤 궁전 내의 가지 모양의 유리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됐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건청궁 내에 설치된 발전설비는 16촉광의 전구 750개를 켤 수 있는 시설이었다니 대단하죠.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아니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부모가 물려주신 것이라며 자르기를 거부했던 조선 땅에서 왜 전깃불은 그토록 빨리 도입했을까요. 그것도 중국·일본보다 더 빨리….
초창기 건청궁 옥호루 앞마당에 설치된 가로등. 당시 발전규모는 16촉광의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설비였다.|전기박물관 제공
■조선사절단이 뉴욕거리에서 겪은 신기한 경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882년(고종 19년) 5월 서구열강 가운데는 처음으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듬해(1883년) 9월 보빙사라는 이름의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합니다. 민영익(1860~1914)을 전권대사로 한 사절단 11명은 당시 미국의 체스터 아서 대통령(1829~1886·재임 1881~1885)에게 국서를 전달했습니다. 당시 아서 대통령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조선 보빙사가 큰 절을 올렸다는 사실이 화제를 뿌렸죠. 그런데 보빙사는 미국 체류 기간 중 아주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에디슨이 전등불을 발명한 지 불과 4년 만인데요. 진깃불이 뉴욕과 보스턴의 밤거리를 비추는 희한한 장면을 목격한 겁니다.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신문물을 눈 앞에서 보게 된 겁니다.
1883년(고종 20년) 9월24일 뉴욕의 에퀴타블 빌딩을 방문해서 발전기에서부터 전기불이 켜지는 과정을 지켜본 유길준(1856~1914)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악마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다”고 경악했습니다. 유길준은 “편리할 뿐 아니라 안전하게 조작하는 방법도 알게 됐다”면서 “더이상 검증할 필요도 없으니 조선에서 이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는 열망을 감추지 못했습니다.(<서유견문>)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을 도입한 후 궁중에 설치된 등갓.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선명하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고종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보빙사의 강력한 추천에 전기 도입을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미국의 에디슨 측도 조선을 동양진출의 교두로 삼았답니다.
당시 에디슨램프사의 총지배인(프란시스 업튼)이 1887년 4월18일자로 사장(에디슨)에게 보낸 업무연락서는 “경복궁의 전등시설은 에디슨 제품의 동양 판촉을 위해 시범케이스로 시공됐다”면서 “향후 일본 궁성에 설비될 시설과 함께 동양에서는 유일한 시설”(미국 국립에디슨유적지 기념관 자료)이라고 했습니다. ‘윈윈’이었던게지요.
■외국인을 호위대장으로 임명한 고종
고종이 전기도입을 더욱 서두르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입니다.
우국지사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 1888년조를 보면 심상치않은 언급이 있습니다.
“고종은 임오군란·갑신정변 이래 가까이서 변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 하여 미리 피란하려고 가마꾼 20명에게 후한 월급을 주고 궁성 북문에 대기시켜 반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게 했다. 또 밤에 변란이 많이 일어나니 궁궐 내에 전등을 많이 켜서 새벽까지 훤하게 밝히도록 명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고종이 야밤에 일어나는 변란이 두려워 전전긍긍했고, 또 그 때문에 불을 훤히 밝히려 했다는 말 아닙니까. 고종의 불안은 1894년(고종 31년) 7월23일 일본군의 ‘경복궁 무력 점령 사건’까지 일어나자 더욱 격심해졌다고 합니다.
보빙사의 일원이던 유길준(오른쪽)은 미국의 각 도시에 켜진 전등불(왼쪽)을 보고 ‘악마의 힘으로 켜진 불’이라고 경악했다.
일본군의 감시 속에 언제 화를 입을 지 몰라 전전긍긍했던 고종은 아예 외국인들은 시위대장과 부대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들이 미국인 예비역 대령인 윌리엄 맥엔트리 다이(1831~1899)와 러시아 건축가인 아파나시 세레딘 사바틴(1860~1921)이었습니다.
뭐 예비역 대령인 다이는 그렇다칩시다. 그러나 건축가를 호위대 부대장으로 기용하다니요. 외국인이라면 일본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겨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건축가에게까지 호위를 맡긴 것이겠죠. 어쨌든 시위부대장을 맡은 사바틴은 고종의 명에 따라 1894년 9월 1일부터 일주일에 나흘씩 저녁 7시에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에 퇴근하는 일을 반복했다고 합니다.(김영수의 <명성황후 최후의 날(서양인 사바찐이 목격한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억>, 말글빛냄, 2014에서)
■낮에 자고 새벽까지 일한 고종
그런 탓일까요. 고종은 낮에는 자고 전등을 환하게 켠채 야밤에 정무를 돌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고종의 주치의를 지낸 독일인 리하르트 뷘쉬(1869~1915)는 “황제는 낮에 자고 오후 3시에 일어나 다음날 새벽 3~4시까지 일했으며…마당을 가로질러 이 건물 저 건물을 다닌다”고 회고했답니다.(리하르트 분쉬의 <대한제국을 사랑한 독일인 의사 분쉬>, 김종대 옮김, 코람데오, 2014) 윤치호(1866~1945)의 영문일기에도 고종을 알현한 뒤 새벽 2시에 귀가했다느니 대궐내에서 등불놀이를 본 뒤 밤 3시 무렵에 돌아왔다느니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윤치호의 <영문일기>, 박미경 옮김, 국사편찬위, 2015)
그런데 문제는 경복궁의 불을 환하게 밝히는데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었다는 겁니다. 맨처음 설비투자에만 무려 2만4524달러를 썼답니다. 게다가 밤새도록 켜놓았으니 운용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황현 같은 이는 “전등 한 개를 하룻밤 밝히는데 엽전 1000꾸러미의 비용이 든다”(<매천야록>)고 꼬집었습니다. 이 뿐이 아니라 훗날 종두법을 시행한 지석영(1855~1935)이 사헌부 장령(정4품) 시절 “날이 밝은 시각에도 불필요하게 전등을 켠다”(<고종실록> 1887년 3월29일)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궁궐을 훤히 밝힌 전등불을 둘러싸고 곱지않은 시선이 많았다는 얘기죠. 아닌게 아니라 “고종이 매일 밤 전등을 켜놓고 악공들에게 ‘아리랑타령’을 부르게 했다”느니, “불빛이 낮처럼 환한 가운데 수십명이 음탕하고 비루한 가사를 부르자 명성왕후가 무릎을 치며 ‘그렇지 그렇지’ 했다”(<매천야록>)느니 하는 기록이 보입니다.
에디슨램프사의총지배인이 1887년 4월18일자로 사장(에디슨)에게 보낸 업무연락서. “경복궁의 전등시설은 에디슨 제품의 동양 판촉을 위해 시범케이스로 시공됐다”고 밝혔다.(출처:미국 국립에디슨유적지 기념관)
■건달불, 증어망국…
그런 탓일까요. 경복궁을 환하게 밝힌 전등은 여론은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때 설치된 발전기가 증기동력이었기 때문에 증기기관의 냉각용수가 열탕이 되었는데요. 때문에 경복궁 향원정의 연못에 뜨거운 증기수가 역류되어서 연못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증어망국(烝魚亡國)’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또 전기등이 건들거리면서 자주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해서 ‘건달불(乾達火)’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심야의 변란을 우려해서 갖가지 비판여론에서 경복궁 내를 낮처럼 환히 밝혔지만 침략야욕에 눈이 먼 일본의 만행은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1895년(고종 32년) 10월 8월 전등불이 설치되고 외국인들이 호위를 맡은 건청궁을 짓밟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으니 말입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의 침전에는 호머 헐버트(1863~1949)와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 등 외국인들이 3인 1개조로 불침번을 서야 겨우 안심했다고 합니다.(김동진의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 참좋은친구, 2010에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경복궁 내의 전등 한 개를 하룻밤 밝히는데 엽전 1000꾸러미의 비용이 든다”고 비판했다.
그러고보면 경복궁 건청궁에 설치된 전등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고종은 분명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꺼져가는 왕국의 불빛을 되살리려고 했을 겁니다. 그래서 궁궐의 불을 밝혔을 겁니다. 하지만 경복궁 무단점령사건(1894년)에 이은 천인공노할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 등 거리낌없는 일본의 ‘묻지마!’ 도발과 침략에 결국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동양 3국 중 가장 먼저 전등불을 켠 바로 그 건청궁 내에서…. 그리고 궁궐에 전등불을 단지 불과 23년만에 한일병합이라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아니 왜 이러한 가슴 아픈 역사를 소개하느냐’고 못마땅해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늘 좋은 역사만 배울 수는 없습니다.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될 역사, 결코 잊지말아야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고자 하여 이 쓰라린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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