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까지 개성에서 약 20㎞ 떨어진 풍덕군 부소산 기슭에 있는 절터에는 특이한 탑 한 기가 서있었습니다. 아(亞)자형 3단 기단을 빼면 10층이어서 경천사 10층 석탑이란 이름이 붙었고, 높이가 13m나 되는 대형탑이었습니다. 옥개석 밑에 새겨진 명문(발원문) 등에 이 탑의 조성자는 1348년(충목왕 4년) 원나라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강융(?~1349)과 고용보(?~1362) 그리고 원나라 승상 탈탈(1314~1355) 등입니다. 이들은 고려왕실이 아니라 순전히 원나라 황제(혜종·재위 1330~1370)와 황후(당시 고려 출신인 기씨), 황태자 등의 만수무강을 빌기위해 이 탑을 조성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1902년 무렵의 경천사탑 10층석탑. 왼쪽 사진은 겅천사탑 강탈사건을 특종보도한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7일자. 황태자(순종)의 가례에 특사로 파견된 일본의 궁내대신(장관) 다나카 미쓰야키가 일본 무뢰배를 동원해서 통째로 뜯어갔다.
■일본 장관이 강탈해간 경천사탑
그런 탓일까요. 탑의 조성에 원나라 기술자들을 대거 동원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보기드문 대리석재를 사용했고, 원나라에서 크게 유행한 라마교 형식으로 쌓았습니다. 탑에는 동물과 꽃, 현장법사와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의 내용, 나한상이 조각돼있고, 각종 불회도와 여래상, 호법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1907년 정말 기가 막힌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황태자(순종·재위 1907~1910)의 혼례식에 사절단으로 참석한 일본 정부의 궁내부 장관(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1843~1939)이 골동품상을 통해 일본 무뢰배들을 동원해서 경천사 10층 석탑을 무단해체해서 일본으로 반출한 것입니다.
경천사탑을 강탈해간 일본의 궁내부대신(장관) 다나카 미쓰아키.
다나카라는 작자는 대한제국의 고종(재위 1863~1907)이 ‘조선과 일본의 우의친선을 위해 기증하겠다’고 허락했다고 강변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일본 신문조차 “친교 우위 차원에서 위해 탑을 주었다면 정부 차원의 기증식도 열고, 기증문서도 주고 받았을 것인데 그런 절차가 없지 않았느냐”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새빨간 거짓이었죠. 하룻밤 사이에 탑을 140조각으로 뜯어 달구지 10여 대에 실어 날랐다는 거 아닙니까. 주민들은 물론이고, 풍덕군수 등도 나와 말렸지만 일본인들의 서슬퍼런 총칼 위협에 발만 동동 굴렸답니다. 눈뜨고 코 베어간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40조각으로 해체해 달구지 10대로’
경천사탑 약탈 사건은 바람 앞 등불 같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상징해주는 사건이었죠. 눈 앞에서 멀쩡히 서있는 탑을 빼앗기고도 속수무책 바라만 봐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분연히 일어선 외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들이 바로 영국인 어네스트 베델(한국명 배설·1872~1909)과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였습니다.
사건이 일어난지 한 달 여 만인 3월7일 베델이 발행인을 맡은 <대한매일신보>가 이 천인공노할 뉴스를 특종 보도합니다. 베델은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뉴스>의 발행인도 겸했습니다. 1면 보도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경천사탑 강탈사건을 집중보도하며 “다나카가 고종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꾸며낸 말”이라고 폭로한 1907년 4월13일 <대한매일신보>. 오른쪽 사진은 <대한매일신보> 발행인으로 일제의 침략야욕을 집요하게 보도한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
“일본의 특사 다나카 자작(궁내대신)의 흉계로 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하여 탑을 해체한 뒤 실어갔다고 한다.”
베델은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1904년) 영국의 <데일리 크로니클> 통신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가 우국지사인 양기탁(총무·1871~1938)·박은식(주필·1859~1925)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1904년). 일제 침략에 맞서 위기일로의 국난을 타개하기 위한 신문 창간 및 발행에 문자 그대로 벽안의 외국인이 앞장 선 것입니다.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있던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당시 무려 1만3000부를 발행했는데, 이것은 당시 모든 신문 총발행 부수보다 많았답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 언론이었던 거죠.
<대한매일신보> 1907년 6월4일과 5일자. 4일자에서는 일본의 <이륙신문>을 인용, “이 약탈사건이 미국 등 해외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면서 “만약 다나카 대신이 탑을 가져온 절차에 잘못이 있다면 다나카 본인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5일자는 “석탑을 빨리 되돌려보내 잘못을 사죄하라…일본으로선 역사의 무한한 수치가 될 것이니 일본 당국자는 반성하라”고 보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정말 집요했습니다. 6월까지 3개월 동안 경천사탑 약탈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첫 기사인 3월7일자는 “주민 20여 명이 일제히 달려들어 탑재석을 실어나르는 현장을 막아섰지만 일본인 40~50명이 총검을 들고 시위하며 달구지를 좌우에서 호송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국민을 만만하게 본 다나카의 만행과 모욕에 능히 항거할 것”이라고 분개했습니다.
추적보도가 이어졌습니다. “고종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꾸며낸 말이다. 황제가 600년 된 탑을 가져가라고 허락했을 리 없다.”(4월13일) “석탑을 빨리 되돌려보내 잘못을 사죄하라…일본으로선 역사의 무한한 수치가 될 것이니 일본 당국자는 반성하라”(6월5일)는 등 끈질기에 파고 들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두 주역인 베델과 양기탁(사진 오른쪽). <데일리미러> 1908년 8월8일자에 실렸다.|배설(베델)선생 기념 사업회 제공
■일본신문도 비판 논조로 돌아서
영향력있는 언론이 앞장서자 일본 신문들조차 흔들렸습니다. 일제통감부가 발행하는 영자지 <서울프레스>조차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를 인용하면서 다나카를 비판하는 일도 벌어졌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서울프레스>가 경쟁지인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받아쓴 것은 처음이며. 경천사탑 약탈과 관련해서 <서울프레스>의 논조는 자못 솔직했다”고 소개했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6월4일자에서 일본의 ‘이륙신문’을 인용했는데, <이륙신문>은 “이 약탈사건이 미국 등 해외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면서 “만약 다나카 대신이 탑을 가져온 절차에 잘못이 있다면 다나카 본인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답니다.
<이륙신문>은 심지어 “절차가 잘못됐다면 다나카가 책임을 지어 양국 황실에 누를 끼쳐서는 안된다”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필봉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괴롭혔던 영국인 베델은 일제의 탄압 때문에 옥고를 치렀다. 그 후유증으로 만 37살의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1909년 5월5일 수많은 인파가 양화진 묘소까지 따라갔다(오른쪽 사진). 베델의 관에는 태극기를 덮었다(왼쪽 사진). |배설(베델) 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난 죽어도 신문은 살아남아 한국동포를 구하라”
물론 <대한매일신보>를 베델 혼자 만든 것은 아닙니다. 양기탁·박은식·신채호(1880~1936) 선생 등 내로라하는 우국지사들이 힘을 합해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인 베델이 앞장서서 방패막이를 자처하지 않았다면 경천사탑 약탈사건은 일제의 방해와 협박 때문에 보도되지 않았거나 흐지부지 되었을 것입니다.
초대 한국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그랬다죠.
“이 이토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느낌이나 생각이 통함)시키는 힘이 큰데, 그중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 계속되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랬으니 통감부는 베델과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했고, 결국 베델은 치안방해선동죄를 뒤집어쓰고 옥고를 치릅니다. 그러면서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졌고, 급기야 1909년 5월 만 37살의 나이로 타계하고 맙니다.
베델의 유언은 “내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영토록 살아남아 동포들을 구하라”는 것이었답니다.
<워싱턴포스트> 1907년 6월9일자. 경천사10층석탑의 강탈사실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일본이 임진왜란 때부터 원각사 10층 석탑과 이 경천사 10층 석탑을 뜯어가려고 획책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임진왜란 때 두 탑에 눈독을 들인 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다. 400년 뒤 다나카는 서울 한복판에 있던 원각사 탑은 차마 가져가지 못하고 경천사탑만 강탈했다.(출처:정진석의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영국 언론인 배설>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역사공간, 2013에서
■강탈사건을 현장취재한 외국인
이 강탈사건을 해외에 널리 알려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시킨 외국인이 한 분 더 계십니다. 바로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였습니다. 헐버트는 1886년 왕립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초빙된 이후 일제 침략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 바친 인물입니다. 특히 130년 전인 1890년 무렵부터 한글의 우수성과 한국문화의 독창성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분인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헐버트라는 분이 경천사탑 강탈사건의 고발에 발벗고 나섰답니다. 서울에서 이 천인공노할 소식을 전해들은 헐버트는 현장으로 달려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헐버트는 자신의 취재내용을 베델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에 제보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의 특종보도는 헐버트의 제보에서 비롯된 거죠. 헐버트는 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이륙신문>을 전재한 <대한매일신보>(오른쪽 사진). 미국을 방문중인 구로키 대장(왼쪽 사진)이 경천사탑 약탈사건의 전모를 묻는 미국기자들의 취재요청을 모두 거절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해외언론에 ‘강탈사건’ 폭로
자신이 발행하는 <코리아 리뷰>는 물론이고, 일본 고베(神戶)의 <저팬 크로니클> 1907년 4월 4일자에 경천사탑 탈취 사실을 기고했습니다. 일부 일본신문이 “불법 약탈했다는데 그것은 새빨간 거짓”이라는 반박기사를 내자 헐버트는 현장 사진과 상황을 정확히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까지도 무척 곤혹스러워 했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다나카의 석탑탈취사건을 결국 뭉개고 말았습니다. 헐버트는 국제여론에 호소하기로 합니다.
뉴욕포스트 등에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기고하여 미국내 여론을 환기시켰습니다. 실제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일본 육군대장인 구로키 다메모토(黑木爲楨·1844~1923)에게 미국 기사들이 몰려들었고 곤란해진 구로키가 논평을 거부했다는 기사가 다름아닌 일본신문(<이륙신문>)에 실렸습니다.
헐버트는 이 문제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까지 끌고 갔습니다.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헐버트는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열린 연설에서 일본의 야만성을 폭로하면서 바로 경천사탑 약탈사건을 거론했습니다. 당시 만국평화회의를 보도한 공식 신문(<쿠리에 드 라 콩페랑스>)에 “경천사 10층석탑 사건은 일본이 조선의 문화를 파괴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한국인 밀사들의 활약상을 보도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공식 신문(<쿠리어 드 라 콩페랑스>). 헐버트(오른쪽 사진)는 평화클럽 연설에서 일본인의 야만성을 폭로하면서 경천사탑 강탈사건을 그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포장도 뜯지않은채 반환된 탑
이 탑은 어찌되었을까요. 결국 11년 뒤인 1918년 11월15일 약탈한 상태 그대로, 포장도 뜯지 않은채 반환되었답니다. 국내외의 거센 비판여론에 힘입은 마지막 통감 및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와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가 끝까지 버티던 다나카를 궁지에 몰아넣어 결국 반환하도록 했답니다. 당시엔 조선이 영영 일본의 식민지로 남을 거라고 생각했겠죠.
헐버트는 일본 고베에서 발행되는 ‘저팬 크로니클’ 1907년 4월4일자에 경천사탑 강탈사건을 폭로하는 사실을 기고했다.|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그러니 조선총독으로서는 ‘조선문화재’가 자기가 다스리는 ‘조선땅’에 있는게 좋았겠죠.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서도 조선에 시혜를 베풀 필요가 있었고요. 그래서 비등한 국내외 여론을 등에 업고 반환을 추진한거죠.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도착한 탑재의 포장을 뜯어본 사람들은 그 참담한 몰골에 고개를 돌려야 했답니다. 해체된 탑부재는 당대의 기술로는 복원조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가 심했답니다.
40년동안 방치한 뒤 두차례에 걸친 수리복원 끝에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국보(86호)의 대접을 받고 서있습니다. 만약 베델과 헐버트가 약탈사건을 끈질기게 고발하여 국내외 여론을 환기시키지 않았다면 경천사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나카 개인의 정원을 지키는 신세로 전락했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백주에 총검을 들이대고 높이 13m나 되는 으리으리한 탑을 뜯어가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그 시절이 너무도 가슴 아픕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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