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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고려 외교 좀 배우라'고 가슴을 친 광해군

 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2회의 주제는 ‘광해군이 부러워한 고려외교’입니다.
 조선의 광해군은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러워하면서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배우라”고 했답니다.
 세상 돌아가는 형세도 모르면서 말로만 ‘숭명배청’이니 ‘재조지은’이니 떠들면서 주야장천 다쓰러져가던 명나라만 섬기려하는 대신들을 ‘한심한 인사들’이라 했다는 겁니다.
 그런게 광해군은 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했던 걸까요. 고려는 비록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피곤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답니다. 하지만 거란은 물론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원)의 애간장을 녹일만큼 능수능란한 곡예외교를 펼쳤습니다. 오죽했으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거란이 서희의 ‘세치혀’에 말려 280리나 되는 땅(강동 6주)을 떼주었겠습니까. 서희로 대표되는 고려의 외교관들은 강대국 황제들을 쥐략펴락하면서 어지간히 괴롭혔답니다.
 심지어 세계제국 원나라는 고려의 애간장 외교를 견디다 못해 재침공의 계획까지 세웠지만 끝내 포기했다네요.
 “지금 고려가 원나라를 섬기고 있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만약 저들이 험준한 산에 기댄다면 100만 대군을 동원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불가론 때문이라네요.
 과연 고려의 외교가 어땠기에 송나라, 거란은 물론 원나라까지 벌벌 떨었을까요. 고려의 균형 외교가 주는 교훈, 그리고 그것을 부러워한 광해군의 장탄식…. 미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눈터지는 균형외교를 펼쳐야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되돌아봐야 할 주제입니다.

 다음 관련기사를 보면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에서 들어보십시오.

 

  “요즘 우리나라 인심을 살펴보면 밖으로 큰소리만 일삼고 있다. 우린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1621년, 광해군이 하늘이 꺼질 듯 장탄식한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급박했다. 명나라는 요동 전투에서 신흥강국 후금에 의해 줄줄이 패해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론은 여전히 다쓰러져 가는 명나라 편이었다. 후금을 오랑캐의 나라로 폄훼하면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절묘한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온 광해군으로서는 이같은 공론이 한심했다.
 “명나라 장수들이 차례로 적(후금)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사람들이 명나라 장수를 포박해서 후금군에 넘겼다고 한다. 중국의 형세가 이처럼 급급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인심은 큰소리만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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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서 광해군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이럴 때(명청교체기), 고려처럼 안으로 스스로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심하다. 무장들 모두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고 하면서 막상 서쪽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 한다.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은 ‘고려처럼’만 하면 강대국끼리 충돌하는 격동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광해군은 ‘고려의 외교’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외교의 전통을 쌓은 서희의 묘. 서희는 세치혀로 거란80만대군을 물리쳤고, 강동 6주까지 덤으로 얻는 외교사상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다

 ■멘붕에 빠진 고려조정
 그랬다. 고려의 외교술은 대단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관’이라는 서희의 후예들이 아닌가.
 고려의 외교에 주춧돌을 놓은 서희의 외교술을 되돌아보자. 993년(고려 성종 12년) 10월,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군도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방어군을 편성했다. 거란의 선봉은 파죽지세로 고려 서북방 봉산군(황해도 북서)을 점령했다. 서희가 봉산군을 구원하려 나설 즈음, 거란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를 퍼뜨리고, 몇 차례에 걸쳐 고려에 문서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고려가 거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기 때문에 정벌하는 것이다. 80만 대군이 짓밟을테니 속히 항복할지어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멘붕’에 빠졌다. “빨리 군신을 이끌고 항복하자”고 아우성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서경 이북(평양)을 거란에 떼주고 황해도 황주~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자들도 있었다. 다급해진 성종(고려)은 땅을 떼어주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을 채택하려 했다.
 “서경 땅을 떼어주려던 임금은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그럼에도 곡식이 많이 남자 적군의 수중에 들어갈까 두려워한 나머지 대동강에 던져 버리도록 명했다.”(<고려사절요>)

 

 ■“거란의 엄포는 공갈”
 이 때 서희가 손사래를 치고 “절대 아니되옵니다”라고 소리치며 급히 나섰다.
 “먹을 것은 백성의 생명인데, 어찌 쌀을 버리십니까. 차라리 적에게 이용되는 편이 낫지, 강물에 던지는 것은 하늘의 뜻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서희는 냉정한 시각으로 상황을 판단·정리해서 성종에게 간했다. 서희는 처음부터 거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바 있다.
 거란군이 진군하지 않고 자꾸 항복만 강요하며 변죽만 올리는 것이 수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거란의 항복 권유문서와 그 간의 행동을 보니 협상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누누이 간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성종이 끝내 ‘할지’를 결정하자 목숨을 건 간쟁에 나선 것이다.   
 “(발해가 망한 뒤) 북쪽의 땅 수백리는 생여진(生女眞)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광종 임금(재위 949~975)이 되찾아 가주와 송성(이상 평안도)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공한 이유는 바로 이 두 성만 빼앗는데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서희는 “거란이 고구려 옛 땅 운운하며 큰 소리치는 것은 공갈에 불과하다(其聲言取高句麗舊地者 實恐我也)”고 단언했다.
 즉 거란이 가주와 송성 등 두 개 성만 원하는데 서경 이북까지 내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게 서희의 주장이었다. 서희는 또 “삼각산 이북은 고구려의 옛 땅이니 절대 내줄 수 없다”면서 “한번 땅을 떼어주면 그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시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땅을 떼어주면 영원토록 수치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도성에서 기다리면서 신들이 한 번 싸움을 한 연후에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요컨대 서희는 섣부른 ‘할지’를 채택하는 대신,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협상에 임할 것을 주청한 것이다.  

 

 ■“장기전과 협상을 겸비하자”
 서희가 나름 자신감을 보인 까닭이 있었다. 바로 만만치 않는 고려의 국방력이었다.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서경(평양)을 북방기지로 삼아 주변에 여러 성책을 쌓아 방비를 단단히 해놓은 바 있다. 이후 정종-광종-경종 시대에 걸쳐 꾸준히 영토를 넓히는 등 북방정책을 이어갔다. 특히 정종 시대에는 거란에 붙들려 있던 최광윤의 보고에 따라 거란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 군사 30만을 편성하기도 했다.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군비를 정비해서 좌우군을 설치하고 평북의 서북계와 함남의 동북계에 각각 병마사를 보내 방비를 튼튼히 했다. 전쟁 3년 전인 990년에는 평양부와 안성 등 11역에 쌀 9375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고려는 결국 북방의 지세에 맞는 축성과 여진족 축출의 경험을 살려 만만치 않은 전쟁억지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전쟁을 일으킨 거란으로서도 쉽사리 공격작전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장기전’과 ‘협상’을 겸하자는 서희의 주장은 맞았다.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의 묵묵부답이 계속되자 안융진(청천강 연안인 평안도 안주 입석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격파됐다. 다시 기가 꺾인 소손녕은 감히 전진할 생각을 못한채 재차 항복만 권유했다.

서희가 거란 소손녕과의 회담에서 얻어낸 강동 6주. 고려는 영토를 넓혔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적자임을 만방에 알리는 망외의 소득을 올렸다.(‘장철균의 <서희의 외교담판>, 살림, 2013’)

 ■“누가 세치혀로 공을 세우겠는냐”
 그러자 고려 성종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누가 능히 거란 진영에서 말로써 군사를 물리치고(以口舌却兵) 역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겠느냐.”
 누구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서희가 손을 들었다.
 “신이 비록 부족하지만 한번 나서보겠나이다.”
 고려와 거란의 명예를 건 불꽃 튀기는 외교전쟁이 벌어졌다. 소손녕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소손녕은 거란 경종(969~982)의 사위이자 중국 송나라를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회담이 진행되기 전부터 양측의 심리전은 대단했다.
 적진(거란진영)에 들어간 서희는 일단 통역을 시켜 회견 때의 예절을 물었다. 준비 없이 회담에 임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었기에 먼저 탐색전을 벌인 것이다.
 소손녕은 “나는 대조(大朝·거란)의 귀인이니 마땅히 고려사신(서희)이 뜰 아래서 (당 위에 있는) 나에게 절해야 한다”고 먼저 도발했다.
 서희 역시 결코 꿀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 뜰 아래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예의가 아닌가.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마주 보는데 무슨 가당찮은 이야기인가.”
 소손녕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신은 2~4차례나 신경전을 벌였지만 좀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화가 난 서희는 그냥 객사로 돌아와 누운채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은 이 소식을 듣고서야 뜰이 아닌 당(堂) 위에서 예를 차리도록 허락했다. 서희는 그제서야 소손녕과 대등한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회담에 나섰다. 

 
 ■서희와 소손녕의 피말리는 외교전
 회담 역시 팽팽한 접전으로 이어졌다. 소손녕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거란의 소유인데, 고려가 이를 야금야금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니 대국(거란)이 이를 토벌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땅을 떼어 바치고 조회한다면 봐줄 것이다.”
 그러니까 신라 땅에서 일어나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왜 지금은 거란의 영역이 된 고구려의 고토를 야금야금 침범하느냐는 것이었다.
 서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응수했다. 
 “그 무슨 소리인가.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을 봐라. 고구려를 계승했다 해서 고려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평양에 도읍을 둔 까닭이다. 또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침식하고 있다고? 아니다. 그 사이 여진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때문에 고려가 거란을 찾아 조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희는 한술 더 뜬다.
 “고려가 거란에 조회하고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면 된다. 그 곳에 성을 쌓고 도로를 내면 고려와 거란이 직접 통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고려는 거란에 조빙(朝聘·알현하고 조공을 바침)을 할 것이다.”
 서희는 마지막으로 “장군(소손녕)이 거란 황제에게 고려의 제안을 알린다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쐐기를 박았다.
 할 말을 잃은 소손녕은 거란 황제(성종·982~1031)에게 사실을 고하며 혀를 내둘렀다.
 “고려에서 화친을 칭했나이다. 마땅히 전쟁을 중지하심에 옳을 줄 아옵니다.”

 

 ■명분(거란)과 실리(고려)의 성과
 이것이 바로 서희가 ‘세치의 혀(三寸舌)’로 얻은, 압록강 이동 지역인 ‘강동 280리’에 건설했다는, ‘강동 6주’이다.
 고려로서는 상상도 못할 망외의 외교적 성과였다. “당신 나라에 직접 조공을 바치려면 양국 국경이 맞닿아야 하고, 따라서 가운데 양국 관계를 방해하는 여진 땅을 고려에 넘겨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니….
 무엇보다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여서 국호를 고려라 했고, 그 때문에 평양을 도읍(서경)했다고 주장함으로써 협상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한 것이다. 사실 욱일승천한 거란의 국력을 볼 때 도리어 거란이 강동 6주를 할양하겠다고 주장해도 고려로서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되레 세치의 혀를 놀려 궤변일 수도 있는 주장을 현실로 만들어 성사시켰으니…. 서희 외교는 전쟁에서 가장 바람직한, 싸우지 않고 승리한 외교전의 대표사례라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서희는 거란에 ‘사대(事大)’라는 명분을 내주는 대가로 군사요충지이자 고구려의 고토인 강동 6주라는 실리를 챙긴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 서희의 가장 의미심장한 승리는 고려가 고구려의 적자임을 공식확인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역사는 공식적이고 객관적으로 고려의 역사로 편입된 것이다.   

강화도에 있는 고려 고종의 홍릉. 강화도 정부를 이끌었던 고종도 끈적끈적한 외교로 세계최강 몽골을 골치아프게 했다.

 

■송나라를 꿈쩍 못하게 한 외교
 서희-소손녕 회담 이후에도 고려의 후속외교는 더욱 빛났다.
 “994년, 거란의 연호를 시행했다. 6월, 고려는 원욱을 송나라에 보내 ‘송나라와 합동작전으로 거란을 정벌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이제 겨우 북쪽 변방이 안정됐는데, 경솔하게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끊었다.”(<고려사절요>)
 참으로 치밀하고 노련한 외교술이 아닌가. 이미 거란과의 전쟁에서 국고가 바닥나 있었던 송나라는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니까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관계 단절이라는 명분과 격식을 갖추면서 거란 사대에 따른 외교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밀사를 파견해서 송나라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제안을 함으로써 국교단절의 책임을 송나라에 돌리는 외교술을 펼친 것이다.
 
 ■세계최강 몽골의 애간장 녹은 외교술
 서희의 명성을 이어받은 고려의 외교는 세계최강 몽골제국을 쥐락펴락, 애간장을 녹일 수준이었다.
 1231~1259년까지 고려는 막강한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러나 고려는 강화도 천도 이후 상황에 따라 몽골의 요구를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항쟁과 교섭의 이중주 외교가 빛을 낸 것이다.
 예컨대 1231년 11월, 몽골은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매우 질책했다. 그러자 고려 고종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몽골을 녹인다.
 “아니, 전쟁으로 유민들이 모두 흩어지면 나라의 근본이 텅텅 비게 되고, 나라의 근본이 비게 되면 장차 누구와 함께 공물을 마련해서 상국(몽골)을 섬기겠습니까? 차라리 남은 백성들을 수습해서 섬(강화도)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에 바침으로써 변방 신하의 명분을 잃지 않는 것이….”       
 고종은 더 나아가 “어디에 있든지 정성을 바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면서 “우리가 천도한 이유는 바로 상국을 잘 모시기 위한 것일뿐”이라고 주장했다.
 1238년(고종 25년)에도 고려는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통해 몽골에 표문을 보낸다.
 “무력정복한다는 위협말고, 조상의 유업을 보존하게 한다면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해를 거르지 않고 바치겠습니다.”
 항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국(몽골)을 더 잘 모시려 천도한 것이라는데 무엇이라 하겠는가. 

고려말 대학자 이제현도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을 들먹거리며 원나라의 고려흡수 계획을 무산시켰다. 

 

 ■고려의 핑계외교
 고려의 ‘핑계외교’는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1253년(고종 40년), 고려는 대장군 고열을 보내, 몽골장군 예쿠(也窟)에게 보내 육지로 환도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힌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으면 실소를 터진다.
 “황제(몽골)의 성지를 받들려 승천부(경기 개풍) 백마산 아래 성곽과 궁실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동북 방면에 포달인(抱獺人), 즉 수달을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서 뭍으로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의 대군이 들어왔습니다.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시면 내년에는 고려 국왕이 신료들을 인솔하고 뭍으로 나가렵니다. 제발 군사를 돌리심이….”(<고려사절요>)
 아니 수달사냥꾼이 무서워 육지천도를 하지 못하겠다니…. 그것도 모자라 군사를 철수시키면 뭍으로 나가겠다니….
 고려는 몽골이 “왜 강화도에 성을 쌓느냐”고 질책할 때마다 “송나라 공격에 대비하려 한 것”이라든지, “해적들의 노략질 때문”이라든지, 갖가지 토를 달았다.   
 몽골로서는 지긋지긋한 고려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있다. 1256년(고종 43년)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황제(헌종)에게 몽골 군대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개경에 환도해야 철수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김수강의 화술이 백미다.
 “짐승이 사냥꾼을 피해 굴 속으로 숨었는데, 그 구멍 앞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피곤한 짐승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김수강의 ‘절묘한 외교술’에 감탄한 몽골 황제는 무릎을 치며 군사를 철수시켰다.
 “그래, 네가 바로 참 사신이다. 마땅히 두 나라는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려사절요>)
 
 ■애자(愛子)와 진자(眞子)의 차이
 혀를 내두를 고려의 외교술은 감탄을 자아낸다.
 1241년(고종 28년), 고려는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몽골의 협박 때문에 종친인 영녕공 준을 몽골로 보냈다. 그러면서 영녕공을 고종의 아들이라 거짓으로 고했다. 훗날 이 말이 거짓으로 판명됐다.(1254년) 고려 출신인 민칭이라는 자가 고자질한 것이다. 황제가 마침 몽골에 머물던 고려사신 최린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위기에 빠진 최린의 임기응변을 보라.
 “영녕공 준은 왕의 애자(愛子)입니다. 진자(眞子·참아들)는 아닙니다. 전에 올린 표문(외교문서)를 보면 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애자는 무엇이고, 진자는 무엇이냐. 다르냐?”
 “그럼요. 애자라는 것은 남의 자식을 길러 자기 자식으로 삼은 것입니다. 만일 소생의 자식이라면 어찌 다시 ‘애(愛)’자를 쓰겠습니까.”
 황제가 새삼스레 고려가 올린 표문을 보니 모두 ‘애자’라 돼있었다. 황제는 더 이상 고려를 문책할 수 없었다. 애자와 진자….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말장난에, 궤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외교관 최린은 기막힌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고려사절요>) 
 아니 어찌보면 거짓아들인 영녕공을 보내면서 고려가 만일을 위해 마련해놓은 장치였을 지도 모른다. 아들 자(子) 앞에 애(愛)자를 수식해놓은 치밀함이라고 할까.

 

    ■몽골 쿠빌라이가 반색한 이유
 그러나 고려는 28년 간의 줄다리기 끝에 화의를 결정한다.(1259년)
 고려 태자(원종)가 위독한 부왕(고종)을 대신해 뭍으로 나가 몽골로 향한 것이다. 그런데 몽골로 가던 길에 황제 헌종(몽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려 태자는 이 와중에 훗날 원나라 세조가 되는 쿠빌라이(忽必烈)를 만나게 된다. 쿠빌라이는 반색하며 고려 태자를 맞는다.
 “고려는 만리 밖의 나라이다. 당 태종도 친히 정벌했는데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이제 세자가 스스로 왔으니 하늘이 뜻이 아닌가.”
 마침 또 하나의 뜻밖 소식이 들렸다. 고려 고종이 승하했다는 것이었다. 몽골의 비서감 조양필은 무릎을 치면서 “때마침 찾아온 고려 세자를 고려왕으로 세워 귀국시키면 군사를 동원하지도 않고 한 나라를 얻는 것”이라고 쿠빌라이에게 고한다. 쿠빌라이가 벅찬 심정으로 되돌아본다.
 “넓은 하늘 아래 복종하지 않은 나라는 고려와 송나라 뿐이었는데…. 이제 송나라도 솥 속의 고기이자 장막 위 제비집 같이 멸망 직전이다. 이젠 고려도 이제 제국의 품에 들어와 조회하는구나.”(<고려사절요>) 
 쿠빌라이는 더 나아가 선심공세를 편다.
 “좋다. 고려 만큼은 의관을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 개경 환도는 속도조절을 해서 알아서 하라. 설치된 다루가치(총독)는 귀환시켜라.”(<원고려기사>)
 쿠빌라이는 “원나라에 조회한 나라가 80여 개국인데 고려처럼 예(禮)로 대접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공치사했다.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약속…. 이것을 ‘불개토풍(不改土風)’ 혹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 한다. 시쳇말로 하면 ‘세조(쿠빌라이)의 유훈’이라 말할 수 있다.

 

 ■“세조의 유훈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고려는 이 ‘세조의 유훈’을 두고두고 써먹었다. 몽골이 노골적인 내정간섭에 나설 때마다 이 유훈을 들먹였다.
 예컨대 세조의 유훈이 발표된 지 60여 년이 지난 1323년(충숙왕 10년), 원나라가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립, 흡수통합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자 당시 원나라에 있던 도참의사사 이제현은 예의 그 ‘세조의 유훈’을 인용하면서 ‘불가’를 외쳤다.
 “세조황제의 조서 덕택에 고려의 옛 풍속이 유지되고, 종묘와 사직이 보전됐습니다. 다 세조 황제의 덕입니다. 이제 고려에 행성을 설립한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다른 것은 다 논하지 않더라도 세조의 조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제현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영종(재위 1320~1323)은 “세조(쿠빌라이)의 정치를 본받고 회복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제현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해서 원 조정을 협박한 것이다. ‘세조의 유훈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이냐’고…. 원나라는 결국 정동행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황제와 맞장 뜬 고려 외교관
 다시 1260년대로 돌아오자.
 1268년(원종 9년), 문하시중 이장용이 몽골에 갔을 때였다. 쿠빌라이가 “고려군사의 수를 정확하게 알리지 않으면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려 군사의 수를 정확히 파악해서 남송과 일본원정에 동원하려던 것이었다.
 “고려군사의 수가 5만명은 된다고 한다. 그 중 4만명은 송나라와 일본 정벌에 보내라.”(황제)
 “5만 군사는 없습니다. 예전에 4만 군사가 있었지만 30년간의 전쟁과 전염병 때문에 다 죽었습니다.”(이장용)
 “아무렴, 산 사람이 없겠느냐. 너희 나라에도 여자들이 있다면 어찌 태어나는 자식들이 없겠느냐. 함부로 말하지 마라.”(황제)
 “고려가 황은(皇恩·몽골 황제의 은혜)을 입어 군대를 파한 이래로 이후에 성장한 자들이 겨우 9~10살입니다.”(이장용)
 국익을 위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말은 했던 고려 외교관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는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고려는 몽골과의 화의(1259년) 이후에도 어지간히 몽골의 애를 먹였다. 11년 후인 1270년이 돼서야 개경으로 환도했으니까.
 견디다못한 몽골 조정은 고려를 재침공할 것을 타진하게 된다.(1269년)  
 하지만 마형과 마희기 등 조정대신들이 입을 모아 ‘불가론’을 외쳤다.
 “고려가 지금 원나라에 내조(來朝)하기는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만약 정벌이 실패할 경우 국위가 손상되고…. 저들이 험준한 강산에 기대고, 섬에 식량을 쌓아 지키면 100만 군대라도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원사> <원고려기사> 등)  
 유라시아 대륙을 벌벌 떨게 한 공포의 제국 몽골도 고려의 외교전에 두손 두발 다 들었던 것이다.
 어떤가. 서희와 고려의 외교정책을 닮으라고 가슴을 치고 한탄하는 광해군의 외침이 동감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외교는 또 어떤가. 다 같은 서희의 후예들인데….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