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3회 주제는 ‘백성 버린 선조의 피란길, 그 참담한 징비록’입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1592년(선조 25년) 4월 30일 선조 임금이 피란길에 오릅니다.
임진왜란 발발로 왜군이 쳐들어오자 ‘무조건 피란’을 결정한 것입니다. <징비록>, <선조수정실록> 등을 보면 목불인견입니다. 선조가 벽제~혜음령을 지나자 밭을 갈던 백성이 대성 통곡합니다.
“나랏님이 백성을 버리면 누굴 믿고 살라는 것입니까.”
선조 일행이 임진나루에 닿았을 때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임진강변의 승정(丞亭·나루터 관리 청사) 건물을 헐어 불을 피웠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임진나루 건너의 동파역에 도착하자 파주 목사와 장단 부사가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임금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굶었던 호위병들이 임금에게 바칠 수라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네요. 한심 스토리는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던 사관 4인방(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은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넣은 뒤 도망쳤답니다. 이것이 ‘사초 폐기’ 사건입니다. 임금의 피란길을 끝까지 수행한 자는 어의 허준을 비롯해 17명에 불과했습니다. 하기야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갔는데 어떤 신하가 임금을 지키겠습니까.
이후 임진나루까지 진격한 왜군은 짐짓 후퇴한 척 조선군을 유인했습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던 야전사령관(도원수) 김명원이 도강을 주저했습니다. 임시 조정은 “왜 빨리 진격하지 않느냐”면서 문신인 한응인을 급파합니다.
김명원으로부터 지휘권을 빼앗은 한응인은 단숨에 임진나루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왜군의 유인책에 말린 조선군은 추풍낙엽처럼 패합니다. <징비록>은 5월17일의 ‘임진나루 전투’를 두고 “봄날 꽃놀이 하듯 군대를 다뤘으니 대패한 것이 당연하다”고 한탄했답니다.
임진나루는 이렇듯 왜란의 수치와, 위기에 처한 인간 군상들의 온갖 행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서울~파주~개성~평양~의주를 잇는 유서깊은 ‘1번 국도’의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오는 5월부터 군 보안 문제로 출입이 제한됐던 임진나루 구간(1.2㎞)이 단장돼 44년만에 개방된다고 합니다. 제가 군 부대의 허락을 얻어 답사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모쪼록 탐방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반성하고 경계하는 ‘징비(懲毖)’의 현장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늘 강조하지만 역사는 배우는 자의 몫이니까요.(다음은 관련기사입니다. 팟캐스트를 들으며 읽으시면 도움이 됩니다)
임진나루는 파주~개성~평양~의주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번 국도의 효시인 셈이다.
그런데 이 임진진은 200년 태평성대, 전쟁을 모르고 살았던 조선의 수치스러운 패배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누란의 위기에 빠진 상황을 접한 온갖 군상(群像)들의 행태를 낱낱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592년 4월30일 새벽. 선조가 피란길에 오른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양 근처까지 밀고 올라오자 조정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조정은 피란을 결정한다. <선조수정실록>과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등 사료를 보면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다.
“나라님이 백성을 버리시면 누굴 믿고 살란 말입니까?”
피란길에 오른 선조임금이 벽제~혜음령을 거쳐 마산역을 지날 무렵.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밭을 매던 백성들이 통곡했으나 소나기에 파묻혀버릴 뿐이었다.
임진나루를 건널 때는 이미 밤이 되었다. 날은 어두운 데다 비까지 내리자 앞길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 일행은 임진강 남쪽 언덕에 있는 승정(丞亭ㆍ나루터를 관리하던 청사) 건물을 헐어 불을 피웠다. 동파역(파주 진동면 동파리)에 닿은 것은 밤 8시였다.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왕을 위해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왕이고 뭐고 없었다. 하루 종일 굶었던 호위병들이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 것이다. 급기야 임금이 먹을 음식마저 없어지자 문책이 두려워진 허진과 구효연의 선택은? 삼십육계 줄행랑이었다.
■꼬리 무는 도주 행렬
하기야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14일조’의 피눈물 나는 후회.
“태평을 누린 이래로 내병(內兵) 없애기에 힘썼다. 때문에 위태로운 시기에 임하여 흩어지는 것이 적을 본 군사들보다 심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 피눈물 나는 치욕의 역사를 서술해야 할 사관(史官)들도 도망쳤다.
“사관 조존세, 김선여, 임취정, 박정현 등은… 상(임금)이 자식처럼 대우했다. 그런데 왕이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결정하자 도망칠 것을 몰래 도모했다. 먼저 사초책(史草冊)을 불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선조수정실록> ‘1592년6월1일조’)
그렇다면 명망 대신들은 임금을 따랐을까. 천만의 말씀.
“임금이 경성을 떠날 때 국가가 틀림없이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러운 말이 퍼져(중략)명망 진신(縉臣)들이 보신책을 품었다. 경성~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은 겨우 17인이었으며….”
시골 백성들은 도리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임금이 때때로 굶는 상황이 연출되자 ‘껍질만 벗긴 현미로 밥을 지어 바치기도’했다. 언제 봐도 착하디착한 우리 백성들이다.
이제 ‘한심사건 Ⅱ’편을 보자. 무주공산인 한양을 점령한 왜군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5월10일 파주~임진진에 도달한다. 하지만 배는 이미 임진강 북쪽으로 모두 끌어다 놓은 상태였다. 왜군은 물살이 세서 쉽게 건널 수 없었다. 선조도 경기도와 황해도 군사들을 모아 임진강 사수에 전력을 기울이라고 명령해놓은 상태였다. 10일이 넘도록 임진진을 두고 대치하는 상황에 이르자 적이 꾀를 낸다. 우선 강화를 권하는 사신을 우리 측에 보낸다.
“우리가 물러나게(退) 하게 된 것은 강화를 위한 것이다. …전하(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귀국에 길을 빌려(假道), 명나라에 원한을 갚은 의향뿐이온데.…”
■두 명의 지휘관
그러면서 왜군은 임진진 남쪽 강가에 세운 막사를 불태운다. 소수의 척후부대만을 남긴 채 나머지 병력을 파주까지 후퇴시키는 등 술수를 부린다. 하지만 평양의 임시조정은 엄청난 오판을 내린다.
가뜩이나 적이 임진강을 쉽게 건너오지 못하자 낙관론에 젖어있던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왜군이 강화를 요청하고, 군대를 임진강에서 철수하자 잔뜩 고무된 것이다. 13일 경기감사 권징이 장계를 올린다.
“적군의 세가 고립무원입니다. (중략)기운이 피로하여 급격히 꺾여 막사를 불태우고 도망치려는 징조가 있으니 추격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임진강 전투의 책임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었다. 조정은 “왜 빨리 진격하지 않느냐.”고 교지를 내렸지만 김명원은 주저했다.
그러자 평양의 조정은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데도 반격하지 않는다.”고 의심한다. 그러면서 문신인 한응인(韓應寅ㆍ도순찰사)을 불러 이해 못할 지시를 내린다.
“경은 이명원의 절제(지시)를 받지 말고 기회를 놓치지 마라.”
세상에! 전투 현장에 가서 야전사령관의 지휘를 받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다니….
■군대 다루기를 봄날 놀이하듯 하다.
선조는 한응인에게 정예병 3000명을 준다. 이들은 모두 강변 출신 사병들로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잔뼈가 굵은 최정예병이었다. 한응인은 쏜살같이 임진진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제 아무리 정예병인들 얼마간의 짬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응인의 마음은 급했다.
“빨리 강을 건너 진격하라!”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병사들 가운데 반론의 목소리가 터졌다.
“멀리 오느라 피곤한데 내일 적정(敵情)을 제대로 살핀 뒤에 진격하는 게 옳을 줄 압니다.”
백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문신인 한응인은 “빨리 진격하라.”는 왕명을 받았던 터라 마음이 급했다. 불평불만 분자 몇 명을 끌어내 목을 베어버린다. 하늘처럼 여기라는 백성들의 목숨을 개·돼지 취급한 것이다.
야전사령관 김명원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과 귀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한응인이 전략 전술을 모르는 문신이지만 임금이 친히 “김명원의 지시를 받지 말라.”는 특명을 내렸으니 참우리 측 진영에서는 이긴 줄 알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방의 적 7~8명이 윗옷을 벗은 채 대검을 휘두르면서 뛰쳐나오자 아군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강안까지 밀린 군사들은 강물에 투신하지 않으면 적의 칼에 찔려죽었다. 단 한 명도 왜군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1592년 5월17일 이곳 임진진에서 펼쳐진 임진강 전투의 ‘한심 스토리’다. 무기력한 조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군대 다루기를 봄날 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서애(西厓) 유성룡의 한탄이 하늘을 찌른다. 서애의 반성을 더 들어보자.
“순찰사들은 모두 문인 출신이었다. 병무에 익숙하지 않았고, …요지(要地)를 지키지도 못했으며….”
한때는 철옹성(산성)을 쌓고, 필살의 청야전법을 쓰면서 수와 당나라 같은 제국을 망하게 하거나 번번이 골탕 먹인 게 우리 민족인데…. 그러나 농업 국가이자 유교국가인 조선의 방어체제는 어설펐다.
선조 임금이 망명길에 넘었던 혜음령. 선조가 고양과 파주 광탄을 잇는 이 고개를 넘자 백성들은 통곡했다고 한다
■태평성대의 그늘
세조(1417~1468년) 때부터 조선의 방위개념은 진관(鎭管) 체제와 그 뒤를 이은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였다. 진관 체제는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유사시에는 군사 체제로 전환하는 향토단위의 방어전략이었다. 강성문 교수(육사 명예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농업사회였으니 예전처럼 청야전술을 펴고, 산성에 틀어박혀 적군을 막는 일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지에 읍성을 쌓고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받는 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군사에는 문외한인 수령이나, 백성들의 입장에서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천재지변을 이유로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기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농사일이 바쁜데 무슨 군사훈련? 뭐 이런 식이었다.
개국(1392년) 이후 200년간이나 평화를 유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양반관료층의 토지 집적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자영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함에 따라 병농일치, 양인개병의 원칙이 무너졌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제승방략체제였다.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여러 지역의 군사들을 특정장소에 집결시켜 대처하는 체제. 이때 조정은 제승방략의 군사 지도자를 파견하게 된다. 이런 방어체제는 신속하지만, 대규모의 침공을 받으면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제승방략 체제 아래서는 전쟁이 나면 모든 군사가 모여 조정이 보내는 지휘관만을 기다리는 형편이 됩니다. 장수가 오지 않고 적의 공격을 받으면 군대는 흩어지고 결국 패하게 됩니다.”
■장수는 오지 않고 왜군은 턱밑까지 쫓아오고…
역시 <징비록>의 고발이다. 임진왜란 때도 문경의 수령들이 제승방략에 따라 한 곳에 모여 조정이 파견하는 지휘관을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지휘관(순변사)은 도착하지 않았고, 도리어 왜군의 진격이 더 빠르자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순변사 이일이 문경에 도착했을 때는 고을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다시 그런 맥락에서 임진강 전투의 ‘한심 스토리’를 더듬어보자. 임진강 전투는 도원수(야전사령관)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하지만 임진강 도하에 어려움을 겪은 왜군이 화해를 청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짐짓 군대를 후퇴시키는 등 술수를 부리자 그만 속아 넘어가고 만다. 평양의 망명정부는『적군이 고립 무원하여 피곤하니 쳐야 한다.』는 경기감사의 낙관론에 빠진다. 그러면서 임진강 도강에 소극적인 야전사령관(김명원)을 의심하여 또 다른 지휘관, 그것도 문신(한응인)을 파견한다.
그러면서 “너는 도원수(야전사령관)의 지시에 따르지 마라.”는 명령을 내린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말이 앞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나폴레옹은 “작전을 펼 때에는 현명한 장수 두 사람보다 용렬한 장수 한 사람이 더 낫다.”고 했다. 정 야전사령관의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될 일 아닌가.
임진강 전투에 투입된 인원은 1만5000명이었고, 왜군은 1만2000명이었다. 병력, 숫자나 지형지물의 측면에서 유리했음에도, 한심한 위와 아래가 연출한 엇나간 이중주로 참패의 고배를 든 것이다.
<징비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는 임진강 패전 이후 인간 군상들의 행태를 소설처럼 묘사한다.
“임진강 도강공격은 절대 안 된다.”고 섣부른 공격을 극구 반대했던 노병 유극량(劉克良). 그는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비록 뜻은 같지 않지만 어찌 가만있으리오.”하면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다.
이때 ‘쌍두마차’김명원(도원수)과 한응인(도순찰사), 그리고 박창간(朴忠侃ㆍ검찰사) 등은 모두 청단의(파란 색의 비단 옷)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박충간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를 도원수(김명원)라고 오해한 병사들이 “원수(元帥)가 도망간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강을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대패한 김명원과 한응인은 평양으로 돌아왔지만 특별한 문책은 없었다. 김명원은 훗날 좌의정을 지냈다.
패전의 책임을 진 한응인에게는 공을 세워 보답하라는 뜻에서 강동지구(江東地區) 방수(防守)직이 내려졌다. 한응인은 나중에 우의정에 올랐다. “왜군은 고립무원이니 빨리 쳐야한다.”고 잘못된 정보를 올렸던 경기감사 권징(權徵)은 가평으로 피했다.
겸재 정선의『임진적벽도』.수려한 절경을 자랑하지만, 임금이 도망가고, 유극량 장군이 헛된 죽음을 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억울한 죽음
왜군은 임진강 전투에서 크게 이겼음에도 쉽게 임진강을 건너지 못했다. 열흘 후에야 임진강 상류로 올라가 조그만 배를 타고 몰래 아군의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곳을 지키던 부원수 이빈이 화살 하나 쏘지 않고 도망친 게 아닌가. 모든 군사가 흩어졌다. 이로써 임진강·한탄강 방어선이 무너져 조선은 누란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산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았으나 억울하게 죽은 이도 많았다. 이전에 김명원과 함께 한강 사수에 나섰던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의 곁을 떠나 양주 산골짜기에 들어가 적 60명의 머리를 베었다. 하지만 김명원은 신각(申恪)이 주장(主將)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보고했다.
조정은 5월18일 선전관을 시켜 전투에 참전하러 연천(한탄강)에 와 있던 신각의 사형을 집행하게 했다.
그런데 선전관이 연천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각이 양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평양조정에 알려졌다. 이에 조정은 사형집행을 중지시키기 위해 급히 다른 선전관을 보냈다. 하지만 이 선전관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각의 목이 나뭇가지에 효수된 뒤였다. 억울한 신각에게는 구십 살의 노모가 홀로 계셨으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조금만 쉰 후에 적정을 살핀 뒤 공격하자.”고 건의한 죄로 한응인에게 죽임을 당한 이름 모를 장병들의 넋은 누가 달래줄 것인가.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스러져간 백성들은 어떻고…. 역사를 읽으면 역시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전쟁의 결과가 어떻든 관계없다. 전쟁은 무고한 백성들의 억울한 떼죽음만을 낳는다. 반면 살 수 있는 지위의 사람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살아남아 떵떵거린다.
임진나루는 임진왜란 때의 뼈아픈 패배를 거울삼아 숙종과 영조 때 군사요새로서 격을 갖추었다. 서울~평양~의주를 잇는 1번 국도의 관문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일제강점 초기 일본군에 의해 이웃한 장산진과 함께 모두 헐려나갔다. 문루와 성벽, 부속건물 등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나 남아있다.
선조가 피란길에 머물렀고, 말발굽 소리로 분주했던 왕년의 역터인 동파역(진동면 동파리)은 어떤가. 초여름 수풀 속에 표지석 하나 없는 그 슬픔의 현장에는 군 훈련장이 서있다. 바로 곁에는 해마루촌 60여 가구가 들어서 있다. 민통선 이북의 전원주택촌인데, 고즈넉한 풍취를 자아낸다. 치욕의 역사를 담고 있는 현장이어서인가. 어느 곳에서도 아픈 역사를 떠올릴만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니….
임진나루는 이렇듯 왜란의 수치와, 위기에 닥친 인간 군상들의 온갖 행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동안 군 보안 문제로 출입이 제한됐던 임진나루 구간(1.2㎞)이 단장돼 44년만에 개방된다고 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필자가 군부대의 허락을 얻어 답사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모쪼록 탐방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반성하고 경계하는 ‘징비(懲毖)’의 현장으로 삼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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