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24회는 ‘가정법’입니다. 제목은 ‘만약 이성계의 장남이 살아있었다면…’입니다.
오늘은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가정법을 써보지 않습니까.
만약 한국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중국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조선이 임진왜란 때 완전히 쫄딱 망했었더라면…. 세종대왕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에 서거하지 않았다면….
뭐 이런 가정법 말입니다. 물론 역사를 읽는데 무슨 가정법이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가정법을 던져놓고 상상해보는 편도 흥미로울 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은 이런 가정법입니다. ‘만약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개국 조선의 2대왕이 되었다면 어찌 됐을까’하는…. 또 아버지의 뜻에 반해 은거의 길을 택한 이방우가 술병으로 일찍 죽지 않았다면 또 어찌 됐을까…. 뭐 이런 가정법들입니다.
그랬다면 조선의 그림은 달라졌을 겁니다. 형제들끼리의 유혈참극을 빚은 1,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개국초부터 정통성 시비에 휘말리지는 않았겠지요. 그리고 정종과 태종은 물론이고 세종, 성종 뭐 이런 분들까지 등장하지 않았겠네요.
그랬을 경우 조선은 어찌 됐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의 역사가 어찌 뒤바뀌어 졌을지 모르겠네요.
흔적의 역사 24회는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알아보고, 헛된 가정법을 풀어가려 합니다.
“태조 4년(1393), 진안대군 이방우는 술을 좋아하는 성질 때문에 날마다 술을 마셔댔다. 마침내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태조실록>)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인 이방우가 ‘술병’으로 죽었다는 <실록>의 기사다. 맏아들의 부음소식을 들은 태조는 3일 간이나 조회를 정지하라는 영을 내리고 근신했다. 태조는 이방우에게는 ‘경효(敬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역사를 쓰면서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써야 아무 쓸모 없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를 보면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만약’ 이방우가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면 어땠을까. ‘제1,2차 왕자의 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역사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조선의 설계자라는 정도전도 비명횡사 하지 않았을 것이고….
개국 조선의 ‘장자’였던 이방우는 과연 누구였고, 왜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술병에 빠져 죽었을까.
■이성계 맏아들의 행적
여기서 잠깐 이방우가 죽은 뒤의 이야기를 해보자.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나 동생인 태종 이방원이나 맏아들(혹은 큰 형)의 죽음을 애닮아 하면서 이방우의 가족들을 돌봤다.
예를 들어 2년 뒤인 1395년 태조는 진안대군 이방우의 아들인 이복근을 ‘진안군’으로 습봉(襲封·세습해서 봉함)했다. 동생인 태종은 1412년(태종 12년) 진안대군의 부인(태종의 형수)인 지씨에게 쌀·콩 15석과 술, 과자 등을 하사했다. 2년 뒤에는 이방우의 사위인 이숙묘에게 쌀·콩 20석과 종이 150권을 하사했다.
이방우의 부인인 지씨의 실록기사는 남편이 죽은 지 47년이 지난 1440년(세종 22년)에도 등장한다.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가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이방우의 부인인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지씨 등이 참석했다. 이날 최고 웃어른인 지씨에게 옥잔(玉盞)과 금배(金盃)를 올렸다.
그러나 이후에는 이방우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라진 이방우의 무덤이 현현하다
그러다 그의 사후 396년이 지난 1789년(정조 13년), 충주사람 이국주의 상언으로 진안대군 이방우의 무덤을 수축하고 어제비를 세웠다는 기사가 나온다.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연인즉은 이렇다.
1789년 2월, 정조가 원릉(영조의 능·경기 구리)에 행차한 뒤 돌아오고 있는데, 어떤 유학(幼學·벼슬하지 않은 유생)이 어가를 가로막고 무릎을 꿇었다.
“신은 진안대군(이방우)의 15대 손입니다. 듣기로 대군의 묘를 함흥에서 풍덕(개풍)으로 이장했다는데…. 병란 때문에 모든 문헌이 사라지고, 후손들 또한 먹고 살기가 힘들어 무덤을 돌보지 못한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이후 봉분을 찾을 수 없어….”
정리하자면 진안대군 이방우가 죽자 함흥에 장사를 지냈다가 풍덕(개풍)으로 무덤을 옮겼다는 것. 그런데 병자호란(1637년) 때문에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무덤의 소재를 뒷받침할만한 문헌 또한 사라져 버렸다는 것. 따라서 이후 100년도 훨씬 넘게 조상의 무덤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국주의 상언이 계속된다.
“그런데 1787년(정조 11년), 풍덕 지방에 홍수가 났을 때 묘갈(묘소 앞의 비석)이 드러났는데…. 묘갈의 내용을 보니 ‘진안대군의 부인인 지씨의 묘’(鎭安大君妻三韓國夫人池氏之墓)와 그 옆에 ‘대군묘대좌(大君墓在左)’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석인(石人) 한 쌍이 쓰러진 소나무와 가시덤불 속에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그러니까 실전된 조상(이방우 부부)의 무덤 봉분이 홍수 때문에 드러났다는 것. 그러나 이방우의 후손들은 쉽게 그 무덤을 보수할 수 없었다.
“노출된 묘역 둘레를 백성들의 무덤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이국주)이 감히 백성들의 무덤을 깔아뭉개고 새로운 무덤을 조성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무례함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입니다.”
이국주의 상언을 들은 정조 임금은 가슴을 쳤다.
“아! 그 분은 우리 집안의 오태백(吳太柏)이신데…. 그 묘가 실전되어 안타까웠는데 이제 떨어져 나간 비문 조각과 갂여나간 글자를 이끼에 묻히고 돌이 부서진 뒤끝에서 비로소 찾아냈으니….”
정조는 이렇게 한탄하면서 경기관찰사에게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돈과 곡식을 넉넉히 주어 무덤을 봉축하고 제청(祭廳)을 지어라. 따로 무덤 지키는 민호(民戶)를 두어 백성들이 장사지내거나 나무하고 꼴베는 것을 금하게 하라. 무덤조성이 끝나면 해당지역 수령이 돌봐라.”(<정조실록>)
■조선의 오태백
정조 임금은 묘소가 다 정비되고, 비석을 세우는 날 직접 비문을 지었다.(<홍재전서>)
“공은 태조의 장남으로 (太祖長胤)~가정에 있어서는 효성스러웠고(在家而孝) 신하가 되어서는 미더웠네.(爲臣也藎) 의로운 군대가 서쪽으로 돌아오자(義旅西回) 필마로 동쪽으로 떠나가니(匹馬東조) 북산의 옛 마을로(北山故里), 곧 오태백(吳泰伯)이시었네(卽泰伯吳)”
정조 임금의 이 어제시는 태조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정조 임금의 어제시가 표현했듯 이방우를 지칭할 때 꼭 나오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조선의 ‘오태백(吳太伯)’이라는 별명이다. 과연 오태백이 누구이기에 이방우를 조선의 오태백이라 지칭했을까.
오태백은 중국 춘추시대 ‘춘추5패’ 중 하나였던 오나라의 시조였다.
그는 본래 주나라 태왕의 장남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인 태왕은 왕위를 막내아들인 계력에게 물려줄 뜻을 품고 있었다. 태왕의 숨은 뜻은 원대했다.
막내아들인 계력도 현명했지만 계력의 아들인 희창이 더 현명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태왕은 막내아들인 계력을 차기 국왕으로 선택함으로써 그 다음 보위를 막내아들의 아들인 희창에게 넘긴다는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의도를 눈치 챈 태백은 둘째 동생인 중옹과 함께 오랑캐 땅인 형만(장수성 쑤저우 지방)으로 피했다. 거기서 태백은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잘라 절대 왕위를 이을 뜻이 없음을 전했다. 덕분에 막내아들인 계력은 왕위에 올랐고, 계력의 다음 왕위는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희창에게 전해졌다.
이로써 주나라는 주 문왕 때 반석 위에 올랐고, 그의 아들인 주 무왕 때 은(상)을 멸하고 중원의 천자로 우뚝 섰다.
후세 사람들은 막내동생에게 ‘쿨’하게 왕위를 양보하고 오랑캐의 땅에 묻힌 태백을 칭송했다. 태백은 형만 사람들의 추앙을 받아 오나라 시조로 옹립됐다.
훗날 공자는 그런 태백을 두고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고 말할 만하다. 세 번 천하를 양보했으나 백성들이 일컬을 것이 없다.(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논어> ‘태백’)고 했다.
그런데 정조를 비롯한 조선사람들은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를 ‘조선의 오태백’이라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우는 고려의 충신
과연 이방우는 ‘쿨’한 마음으로 동생들(방과와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초야에 묻힌 오태백 같은 존재였을까.
과연 그랬을까. 따져보자. 태조 이성계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와 6남2녀를,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 2남1녀를 각각 두었다. 한씨와의 사이에서 이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강씨와 사이에서 방번·방석 등의 아들을 낳았다.
이성계의 맏아들인 이방우는 어렸을 때부터 효자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
“조금 자라서는 시서(詩書)에 몰두하고 몸소 검약을 실천하였으며 일체의 부귀 영화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고려조에 벼슬해서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1388년(고려 우왕) 아버지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면서 운명이 갈린다.
이방우의 무덤을 수축하면서 그의 삶을 기록한 <정조실록>을 더듬어보자.
“태조대왕(이성계)이 위화도 회군을 하고 명나라를 받들자 대군(이방우)은 가족을 이끌고 철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은거한 것이다.
이 <실록>의 기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역성혁명의 뜻을 구체화하자 철원으로 은거했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결국 이방우는 아버지의 혁명을 반대했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다는 것이 아닌가. <정조실록>은 이후 이방우의 행적을 이렇게 소개한다.
“1392년, 태조께서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르자 대군은 마음 속으로 두 동생(정종과 태종)이 모두 성덕이 있음을 인정하고 고향(함흥)으로 낙향했다. 태조께서도 대군의 뜻을 대략 아시고 땅과 집을 하사했다. 장남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그 자취를 묻어버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마지막 대목, 즉 이방우의 자취를 묻고 싶어했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이방우에게서 고려 충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목이 아닌가. 결국 이성계의 역성혁명은 맏아들 이방우에게 용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맏아들은 결국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고려의 망국을 슬퍼하면서 소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결국 술병에 걸려 죽고 만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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