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망국의 임금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기야 500년 왕조가 자기 대에서 끊겼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최근에는 고종이 그나마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쓴 증거가 여럿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랬겠지요. 쇠락한 나라의 임금으로 사방에서 으르렁대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그저 힘없이 나라를 바친 임금은 나이겠지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 가운데 또 하나의 증거가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고종이 1902년 비밀정보기관을 만들어 친일파와 일제의 결탁을 감시하고, 나아가 국내외 독립·애국운동을 배후 조정했다는 증거 말입니다. 1990년대 초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확인했던 자료인데요. 그 정보기관의 이름은 ‘제국익문사’였습니다. 이 교수는 이 ‘제국익문사’의 규정집을 찾아낸 것이지요.
그런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전후로 수상쩍은 인물들이 대거 러시아로 떠납니다. 이태진 교수는 바로 이런 분들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중 하얼빈 의거 직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 밀사 두 명, 즉 송선춘과 조병하 등이 의심스럽답니다. 제국익문사 요원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관심있게 바라봐야 할 인물이 있답니다. 정재관이라는 인물입니다. 이 분은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스 암살의거를 촉발시킨 인물인데요. 안의사 의거 두 달 전에 서울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잠입합니다. 정재관은 ‘제국익문사’의 해외통신원이 아니었을까요.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고 센프란시스코에 갔다가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함깨 모의했던 것은 나이었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7회는 ‘고종의 비밀정보기관과 하일빈 의거의 수상한 연관성…’입니다.
참 재미있는 자료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소장의 장서각 도서를 열람 중이던 이윤상(현 창원대 교수)의 눈에 밟힌 자료가 있었다.
<제국익문사비보장정>(帝國益聞社秘報章程)이라 적힌 규정집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신문사 혹은 비밀첩보 기관과 관련된 규정이라.
‘대한제국기의 황실재정’ 관련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이윤상은 이 자료의 존재를 전공자인 스승(당시 이태진 서울대 교수)에게 알렸다. 이태진 교수가 자세히 검토해보니 처음 보는 자료였다.
표지를 비단으로 하고, 고급 닦나무 종이를 사용한 이 장정은 고종 황제의 어람용이 분명했다.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화학비사법으로 작성하라’
1902년 6월 고종 황제가 지금의 국정원을 방불케하는 비밀정보(첩보)기관을 설립하면서 만든 규정이었던 것이다.
‘본사는 제국익문사로 칭하여 사무소를 한성 중앙에 둔다’는 제1조를 시작으로 총 23개조를 16엽(32쪽)으로 묶었다.
규정에 따르면 제국익문사는 황제 직속으로 설립됐다. 특히 눈에 띈 대목은 9조와 10조였다.
‘본사의 비보(秘報)를 황제에게 보고할 때는 묵서를 쓰지 말고 화학 비사법(秘寫法)을 정서해서 비밀히 어람하심을 편의하게 할 것이다.’(제9조)
이 무슨 말인가. 황제에게 정보 보고할 때는 먹글씨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특수 화학약품을 써야 비칠 수 있는 글씨로 비밀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또 봉투에 황실문양(오얏꽃)과 성총보좌(聖聰補佐·황제를 보좌한다)라는 글귀를 넣은 전용 인장을 봉투에 찍는다(제10조)고 했다.
오얏꽃은 조선왕실의 성씨인 이(李)씨를 의미한다. 이 봉투는 그야말로 황제만이 볼 수 있는 ‘특급기밀문서’였던 것이다.
■해외통신원까지 파견했다
책임자는 요즘의 국정원장에 해당되는 독리(督理)였다. ‘특별히 제실(황실)이 신임하는 1인으로 임명한다’(제22조)고 했다.
독리 아래로는 사무(司務)·사기(司記)·사신(司信) 등 3개의 분장직책을 두었다. 활동원으로 상임 통신원 16명, 보통 통신원 15명, 특별 통신원 21명, 외국 통신원 9명, 임시 통신원(부정액) 등 61명 이상을 두었다.
활동지역도 광범위했다. 외국공관 및 거류지를 포함한 경성 전 지역과, 내륙 및 항구를 포함한 지방 도시까지 정보망을 마련했다. 해외지부까지 두었다. 일본의 도쿄·오사카·나가사키와,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그리고 러시아의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와 뤼순 등까지 통신원을 파견했다.(제15조)
서울(경성)과 지방의 정보 활동 범위를 구분지어 매우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우선 서울의 경우 정부 고관과 군영 장관의 회합과 동선까지 파악했다.
또 승진 및 임용 대상의 관리 심사에 필요한 전과 기록이나 의심스런 행적과 은폐한 정황까지 보고하도록 했다. 국사범의 가족동정과 서신왕래 유무까지 파악했다.
익명서(전단)와 유언비어(訛言)로 민심을 선동하는 자와, 국가시책을 살피지 않고 음모를 획책하는 불평당과 한산배(閑散輩), 그리고 국가 기밀을 외국인에게 넘기는 자도 첩보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인과 천주교인의 동태도 관심거리였다.
지방의 경우 각 관찰사와 수령의 동정이 첫번째 보고대상이었다. 물론 양민을 괴롭히는 자와 조정의 명령을 사칭해서 재물을 빼앗는 자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됐다.
또한 정감록이나 남조선(동학농민군 중 김개남 장군 등이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새 왕조)을 칭해서 요사스런 말을 지어내는 자, 녹림당(도적떼)의 이합집산도 채탐(採探) 했다. 특히 국경지대나 연해의 삼림을 벌목해서 불법으로 팔아넘기는 자도 보고대상이었다.
해외에 파견하는 요원들의 정탐활동도 아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제8조)
즉 파견국의 정세와 대한국 정책은 물론 각국 국회의 법안 의결 상황까지 체크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심지어는 파견국 군함과 육해군 장관의 진퇴 상황까지 꼬박꼬박 보고하라고 했다.
특히 해당국가로 망명한 국사범의 동향까지 파악해서 보고해야 했다. 국사범이 주거지를 옮기거나 수상한 음모가 포착되거나, 심지어는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대한제국 백성들의 동향도 보고사항이었다. 그야말로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정보수집이 아닐 수 없다.
■고종은 ‘민간인 사찰’의 원조?
이 규정집을 뜯어보면 전반적으로 공통점이 있다.
정탐의 주된 대상이 일본인과 일본기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0여 개 항목이나 된다.
즉 “일본의 정당과 낭객(떠돌이 일본 무사), 수상한 자의 도착 소식은 물론 일본 수비대와 헌병대가 무상으로 왕래하는 상황까지 보고하라”고 했다.
또 할 일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남의 밭에서 캔 인삼을 몰래 쪄내는(蒸蔘)하는 일본인도 요시찰 대상이었다. 특히 일본 상인배가 폭발약을 만들고, 각종 물품을 몰래 파는 행위도 관심거리였다.
이태진 교수는 이 대목에서 “제국익문사는 대한제국 황제정과 경제질서에 침투하려는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려고 만든 정보기관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았다.
이중 ‘자유 민권을 빙자해서 (황제의) 전제정치를 비방하며 인심을 선동하는 자’도 사찰대상에 올렸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악명높은 ‘민간인 사찰’의 시초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태진 교수는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고 밝힌다.
“제국익문사의 규정이 인권 탄압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의 관민공동회, 만민공동회의 자유민권 운동도 일본공사관의 공작에 따라 황제정의 교란을 목적으로 일으켜졌다는 연구가 잇따르고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독립협회는 황제를 중심으로 일치단결을 주장한 부류(남궁억·윤치호)와 자유민권 쟁취를 우선해야 한다는 부류(안경수·정교) 등으로 나뉘어졌다.
그런데 초대독립협회장을 지낸 안경수 등은 1894년 무렵부터 이미 일본 공사관에 포섭되어 비밀리에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1897년 10월 출범한 대한제국은 고종의 광무개혁으로 나름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학교·종교단체·낭인 단체 등을 통해 한국 내정을 교란시킬 음모를 진행시켰다.
이태진 교수는 “제국익문사는 결국 호시탐탐 침략을 노린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창설되었다”고 분석한다.
■고종이 고관대작들을 사찰한 이유
그렇다면 제국익문사 요원들이 실제로 활동했다는 증거는 있는가. 한마디로 ‘증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따지고보면 ‘있었다’ 하더라도 워낙 비밀정보를 다루는 조직이었으니 실체를 쉽게 드러낼 리는 만무하다.
정보보고 때도 묵서가 아니라 화학약품을 칠해야 나타나는 특수잉크 글씨를 썼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방증자료는 찾아볼 수 있다.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퇴위 사건을 다룬 나라사키(楢崎桂園)의 <한국정미정변사>의 내용이다. 이 책은 “고종이 평소 내각의 친일 대신들을 의심하여 3~4인의 밀정을 붙여 모든 기밀을 탐지하게 했다”면서 “그래서 많은 일이 이 밀정에 의해 결정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 황제의 이른바 전제정치라는 것은 실은 밀정정치, 잡배정치의 폐단에 빠진 것”이라 비난했다. 황제의 정보정치를 ‘밀정정치’ 혹은 ‘잡배정치’로 폄훼하고 있지만 대상이 누구인가.
내각 내부의 친일파 대신들이 아닌가.
제국익문사 규정집을 보면 ‘고관대작들의 동향파악’이야말로 비밀요원들의 주요임무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적시돼있다.
‘각 내각의 고관과 각 군영 장관이 모이고 이동하는 사항과 각 공관에 본국인이 출입하는 사항, 그리고 공무원 혹은 군인이 외국인과 밀통하는 정황… 등을 보고해야 한다.’(규정집 제5조)
고종은 대한제국의 고급정보들이 일본측의 매수공작으로 흘러 나가자 제국익문사를 통해 역정보전을 벌였을 수 있다.
또 하나의 방증자료가 있다. 1910년 6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통감이 외무대신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에게 보낸 보고서에 ‘(고종의) 미국 통신원에 관한 건’이라는 항목이 있다.
규정집에서 보듯 제국익문사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에 9명의 해외통신원을 두었다. 따라서 데라우치 통감이 말하는 ‘해외통신원’ 운운은 바로 이 제국익문사 요원을 지칭한 것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된 밀사 2명의 정체
제국익문사 요원들의 암약을 입증할 다른 증거는 없는가.
제국익문사를 직접 지칭한 자료는 없지만 방증자료는 제법 눈에 띈다.
이 가운데 이태진 교수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과 제국익문사의 연관성’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다.
이 교수는 안중근의 거사 3개월 후인 1910년 1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인 총영사 오토리 후지타로(大鳥 富士太郞)가 외무대신 고무라에게 보낸 보고서를 주목하고 있다.
보고서는 “지금 블라디보스토크에 태황제(고종)의 밀사를 자처하는 자가 2명 왔다”고 시작한다.
“태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사람은 37~8세의 송선춘과 35~6세의 조병한이다. 경성~하얼빈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1월17일 도착했다.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민회에 처음 나타났다. 두 사람은 태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뤼순 감독에 있는 안응칠(안중근)을 구출하는게 사명이라고 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 기관들은 한국인 밀정들을 고용해 상당한 고급정보를 깨내고 있었다.
총영사 오토리가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이 보고서도 신빙성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보고서를 보면 “이 두 사람의 밀사는 고종의 어새가 찍힌 친서를 보였다”고 전한다.
“두 사람은 곧 니코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방면으로 떠날 예정이다. 송선춘은 한국 관리로서 일본·미국을 다녀온 적이 있고, 일본어와 영어에 숙달돼있다. 두 사람은 모두 단발에 양복을 입었다.”
매우 구체적인 정보보고가 아닐 수 없다. 고종의 비밀어새가 찍힌 밀서를 들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송선춘·조병한 두 밀사는 혹 ‘제국익문사’ 요원이 아닐까.
두 사람 가운데 송선춘은 한국관리이며, 일본·미국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송선춘은 혹 제국익문사 ‘해외 통신원’이 아니었을까. 이런 합리적인 추정도 해볼 수 있다.
■밀사를 의심했던 한인사회
오토리 총영사의 보고서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후 4차례에 걸쳐 숨막히는 추가보고가 이어진다.
아마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 민회는 고종이 파견한 두 밀사를 신뢰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탐색했던 것 같다.
정보와 역정보, 반계와 반간계가 난무했던 격동의 시기였으니 누군가를 쉽게 믿을 처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토리의 1910년 2월 22일자 정보보고를 보면 그때서야 한인사회가 두 밀사를 믿어준 것 같다. 이때가 되면 한인들은 송선춘을 ‘송 주사’로 일컬었다. 송선춘의 관직이 아마도 주사(主事)였을 것이다.
“밀사는 도착 당시 다수의 한인으로부터 그 진위를 의심받고 있었다. 한인들은 작금에 이르러서 두 밀사의 밀칙을 믿기에 이르렀다. 밀사 중 조병한은 이미 (안중근 가족이 와있던) 니코리스크로 떠났고, 송선춘도 안중근 가족에게 보낼 300루블을 들고 니코리스크로 갔다.”
오토리의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의 두 밀사는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의 모금운동을 독려하고 재판을 도우려고 러시아행을 결행했다.
■“배일운동의 배후엔 고종이 있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생긴다. 안중근과 고종 황제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얘긴가. 이 대목에서 오토리 총영사의 3월2일자 정보보고가 눈에 밟힌다.
“지금 (니코리스크를 거쳐 뤼순으로 간) 송선춘·조병한 등 두사람은 결코 가짜가 아니다. 오히려 지난해 니코리스크 시에서 사망한 이용익도 한황(韓皇·고종)의 밀사이며. 그가 당시 휴대해온 내탕금 7000엔은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이상운도 처음엔 밀사였으며 폭도의 위로와 선동이 목적이었다.…”
무슨 말인가. 고종의 밀사가 송선춘·조병한 두사람 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용익과 이상운이라는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고종이 내탕금(황실의 금고)에서 자금까지 대줬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모든 배일운동의 총지휘자로 ‘고종 황제’를 지목했다는 것이다.
“한인 밀정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배일(排日)의 본원(本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 황제’(고종)라 한다.”
그러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작년(1909년) 10월 하얼빈에서의 흉변(안중근 의사의 거사)도 궁정(고종)으로부터…선동해온 것으로서….”
오토리 보고서는 결국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고종 황제의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럼 내가 나서겠다”고 손 든 안중근 의사
이 대목에서 이태진 교수가 주목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정재관이다.
이 교수는 1910년 1월 8일 소네 아라스케(曾내荒助) 통감이 외무대신 고무라에게 보낸 극비문서를 인용한다. 이른바 ‘흉행자(안중근) 및 흉행혐의자 보고서’이다. 보고서는 “1909년 10월 10일 한국인(유진율)이 경영하는 블라디보스토크 ‘대동공보사’ 사무실에 미하일로프 사장과 주필 정재관…등 6명이 일하고 있는 중에 안중근·우덕순·조도선 등 3명이 방문해서 잡담을 나눴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토 공의 하얼빈 방문 소식에 좌중의 1명이 ‘그가 한국을 삼키고 이제 또 하얼빈에 온다면 반드시 예측할 수 없는 간계를 품고 오는 것’이라 했다.…사장 미하일로프가 이번이 정말 좋은 암살기회다. 흉기(무기)를 구입하는 등의 필요자금은…동포들의 자금을 갹출할 수 있다 하자…안중근은 ‘내가 실행을 맡겠다’고 자청하고….”
이 보고서를 보면 러시아인 사장인 마하일로프의 역할이 눈에 띈다. 미하일로프는 러시아 장군 출신이다.
러일전쟁 중에 이범윤이 이끄는 러시아의 한인 의병부대와 함께 진공작전을 수행한 인물이며, 변호사 자격증도 갖고 있었다. 이범윤은 고종 황제로부터 간도관리사 직함을 부여받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런 친연관계 덕분에 러시아인인 미하일로프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이 운영하는 신문사(대동공보사)의 사장이 된 것이다.
미하일로프는 당연히 한국인의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러나 이태진 교수는 “미하일로프의 역할은 러시아인의 신분으로 한국인의 국권운동을 표면에서 이끄는 역할에 머물렀을 것”이라 보고 있다.
■정재관의 정체
물론 근거가 있다.
1909년 12월 7일 일본 관동도독부 육군참모장인 호시노 긴코(星野金吾)가 구라치 데쓰기치(倉知鐵吉) 정무국장에게 보낸 정보보고를 보라.
“하얼빈 흉행(의거)을 조두한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어 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전 시종무관 정재관이다. 정재관은 하와이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단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며 1908년 3월의 스티븐스 암살사건을 일으킨 주동자이기도 하다.”
호시노의 다음 보고가 더 충격적이다.
“정재관은 약 2개월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한국어 신문(<신한민보>)에 한국인이 이토 공을 권총으로 겨누는 삽화를 싣게 했다. 정재관은 경성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안중근 등 뜻을 같이 하는 무리를 사주하여 하얼빈 사건(의거)을 감행하게 되었다. 사건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는 하얼빈의 한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칭찬하고 곧 하얼빈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호시노가 하얼빈 의거의 배후자로 꼽은 정재관은 2개월 후 작성된 소네의 보고서에 등장한 <대동공보사> 주필 정재관, 바로 그 사람이다.
■스티븐스를 집단구타한 정재관
정재관이 누구인가. 1902년 미주로 이주한 뒤 북미 교민들이 결성한 국민회 총회장을 맡은 인물이다. 특히 1908년 벌어진 스티븐스 암살의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즉 그 해 3월 21일 친일 외교고문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이후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다”는 등의 망언을 일삼았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다. 한·일 양국인 간에 교제가 친밀하다. 일본이 한국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농민들과 백성은 예전 정부의 학대와 같은 대우를 받지 아니하기 때문에 일인들을 환영한다.”(‘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정재관은 양대 항일운동단체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의 공동회를 열어 스티븐스의 망언소식을 전했다.
스티븐스 암살사건 직후에 발간된 신문(‘샌프란시스코 콜’)은 “암살공모는 ‘성스러운 전쟁에 신명을 바쳐 모든 일본인을 근절하라’는 의병선언에 따른 것”이라면서 “이같은 의병선언을 미국에서 처음 받은 이는 바로 정재관”이라고 전했다.(1908년 3월23일자)
어쨌든 항일단체 연합회는 정재관과 최정익, 문양목, 이학현 등 4인을 대표단으로 뽑아 스티븐스이 묵고있던 호텔로 찾아갔다.
그래도 해명과 정정의 기회는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단칼에 거부하며 오히려 극언을 해댔다.
“이완용 같은 충신과 이토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에 큰 행복이요, 동양에 대행(大幸)이다. 태황제(고종)이 덕을 잃고…백성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다. 일본에게 강탈하지 아니하면 러시아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은 정재관이 스티븐스를 쓰러뜨렸다. 스티븐스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쳤다. 다른 이들은 막 일어서려는 스티븐스에게 의자를 집어던졌다.
스티븐스의 안면에 유혈이 낭자했다.
스티븐스를 집단 구타한 대표단이 돌아와 사건의 전말을 공동회에 보고했다. 이 사건은 결국 다음 날인 23일 오전 9시30분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사살로 비화했다.
■고종의 시종무관 정재관은 제국익문사 해외통신원?
그로부터 1년6개월후인 1909년 9월 15일 정재관이 관여하고 있던 샌프란시스코 발행의 <신한민보>(공립신보의 후신)이 매우 의미심장한 삽화를 게재한다.
김척(金尺)이라는 한국 남성이 만주까지도 맛깔스럽게 먹겠다고 나선 욱일(旭日), 즉 일본을 향해 권총 5발을 쏘는 장면이었다.
‘천도(天道·하늘의 도리)’와 ‘공법(公法)’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는 글까지 실었다. 이 삽화는 여성으로 표현된 한국을 사무라이 일본이 농락하는 장면을 실은 일본 신문의 삽화에 응답하는 취지였다.
훗날 안중근 의사는 이 삽화가 자신의 의거 결행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밝힌 바 있다.
정재관의 이 무렵 행보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정재관은 이 무렵 이상설 선생과 함께 샌프란시시스코에서 서울(경성)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북미와 하와이 지역 국민회의 총회 결의(1909년 5월)에 따라 ‘원동(극동)’의 독립운동 사업을 추진하라는 중책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이태진 교수는 이 대목에서 다시 소네 아라스케의 1910년 1월 8일자 정보보고를 떠올린다.
안중근·우덕순·조도선 의사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사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대동공보사 주필이 바로 정재관이 아닌가.
또 1909년 12월 7일자 호시노의 정보보고에는 “정재관이 한국의 ‘시종무관’을 지냈고, 경성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안중근의 거사를 사주했다”고 했다.
이태진 교수는 이 대목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다.
정재관이 대한제국의 전직 시종무관이었다면 고종의 경호를 맡았던 최측근 관리가 아닌가. 게다가 정재관이 하와이로 이주한 해가 1902년이라면….
통신사를 가장해서 비밀리에 창설한 제국익문사가 퍼뜩 떠오른다. 그렇다면 정재관은 제국익문사 규정집에 나오는대로 고종이 파견한 제국익문사의 해외비밀통신원은 아니었을까.
일본측 정보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일어나기 2개월 전에 정재관이 경성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그렇다면 경성 체류 중에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은 것은 아닐까.
고종의 비밀첩보조직인 제국익문사가 던지는 수수께끼이다.
■안중근 의사가 언급한 김두성의 정체
사족을 달자면 안중근 의사는 거사후 열린 공판에서 “의병의 총관할자가 누구냐”는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마나베 주조(眞鍋十藏) 판사의 질문에 분명히 답했다.
“팔도의 총독은 김두성이라 부른다.…강원도 출신으로 8도 의병장을 휘하에 거느린 인물이다. 그 부하로는 허위·이강년·민긍호·홍범도·이범윤·이연찬·신돌석 등이 있지만 지금에는 없는 사람도 있다. 나는 김두성으로부터 청국과 러시아 부근의 의병사령관으로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안의사가 언급한 김두성이 실존인물이며, 그 인물이 바로 유인석 의병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김두성(金斗星)이 바로 고종 황제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견해다.
상하이 주재 러시아 상무관인 L V 고이에르가 남긴 보고서를 보면 “한때 고종이 러시아 망명을 계획했는데, 비밀단체를 구성하는 해외거주 한인들이 있고, 그 조직의 총대장이 고종이기 때문에 이들 모두가 고종의 해외망명을 지원할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만약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면 김두성(金斗星)이란 가명은 어떨까. 황금빛(金)을 내는 북극성(斗星)이다. 이것은 군주를 지칭한다. <논어> ‘위정편’에 있다. 즉 ‘덕으로 정치하는 것은 북극성이 자기 위치를 잡고 있고, 뭇별들이 그것을 에워싸는 것과 같다(爲政以德 譬如北辰其所 而衆星共之)’는 대목이다. ‘북신(北辰)’은 군주를, ‘중성(衆星)’은 신하를 의미한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총대장 고종 황제의 부하로 청국과 러시아 부근의 의병사령관 직분을 명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종 황제와 제국익문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뭔가 밀접한 친연관계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제국익문사 규정집을 본 국정원이 깜짝 놀라더군요. 1902년 작성된 이 규정집은 지금의 국정원 규정과 기본틀에서 손색이 없다고 했어요. 고종황제는 그렇다면 어느 나라를 모델로 만들었을까 생각해봤어요. 러시아쪽이 아닐까. 러시아 표트르 대제 시기의 정보기관을 벤치마킹한 것은 아닐까. 뭐 그렇게 추측해봤어요.”(이태진 교수)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태진, ‘제국익문사 비보장정:대한제국 황제 직속 항일 정보기관 규정집’, <한국사론> 38호, 서울대, 1997
이태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고종황제’,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론>, 지식산업사, 2010
오영섭, ‘안중근의 의병운동’,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론>, 지식산업사, 2010
최덕규, ‘고종황제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1904~191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3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2
이윤상, ‘대한제국의 생존전략과 을사조약’, <역사학보> 제188집, 역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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