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과 2014년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옻칠 갑옷은 백제산이 아니라 당나라 제품이며, 이 갑옷에 명광개(明光鎧)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견해가 나왔다.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학술지 <고고학지> 제24호에 실은 논문(‘공산성 출토 칠갑 명문 재고’)에서 그동안 학계에서 주장해온 ‘공주 옻칠갑옷=백제제작설’을 반박했다.
공산성 출토 갑옷에서 보이는 명문들. 645년 제작된 것이라는 데는 모두 동의하지만 백제 제작설과 당나라 제작설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이태희 연구사 제공
이 갑옷에서는 지금까지 제작연대를 짐작할 수 있는 ‘행정관십(行貞觀十)’과 ‘구년사월이십이일(九年四月二十二日)’ 명문과 함께 ‘이○은(李○銀)’, 왕무감(王武監), 대구전(大口典), 참군사(參軍事), ‘○작배융부’(○作陪戎副), ‘○인이행좌’(○人二行左), ‘근조○’(近趙○)’, 익주(益州), 그리고 낙서로 쓴 공노(孔奴) 등의 글자가 60여자가 보였다.
학계 주류는 이 옻칠 갑옷의 제작지로 백제를 지목해왔다. 북송시대의 백과사전인 <책부원구>가 “당 태종이 정관 19년(645년) 백제에 사신을 보내 산문갑(山文甲·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황칠)을 요청했다”고 기록한 것을 증거로 삼았다,
여러 명문들. 명문에 나오는 관직명이 백제가 아닌 당나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와함께 <삼국사기> 무왕 27년(626년)과 38년(637년), 40년(639년), 의자왕 5년(645년)조를 보면 다양한 종류의 갑옷을 당나라에 보낸 사실이 적혀있다.
학계는 그 중 “의자왕 5년, 즉 645년 당나라에 금색칠을 한 갑옷과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을 만들어 바쳤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보장왕조’)는 기록을 의미심장하게 보았다. <삼국사기>는 “이 황금칠 갑옷을 당나라 군사들이 입었고, 당태종과 당나라 장수인 이세적이 만났는데 갑옷의 광채가 빛났다”고 했다. 이것을 광채가 빛난 갑옷이라고 해서 명광개라 했다.
이태희 연구사는 일단 ‘행정관십(行貞觀十)’과 ‘구년사월이십이일(九年四月二十二日)’의 명문을 통해 이 갑옷이 정관 19년(645년) 4월21일이라는 기존 해석을 따랐다.
그러나 이 연구사는 명문에 등장하는 ‘익주’라는 지명을 수나라 때의 촉군(스촨성 청두·四川省 成都)으로 보았다. 당나라는 수나라 시절 촉군이던 이곳을 익주(益州)라 개칭했고, 갑옷을 제작한 645년 무렵에는 익주 등 8개 주와 무주도독부, 휴주도독부 등을 통솔했다.
이 연구사는 또 “갑옷에 등장하는 관직명 중 ‘사호군’(史護軍), ‘참군사’(參軍事), ‘작배융부’(作陪戎副), ‘대부’(大夫) 등은 그 시대 당나라 관직”이라고 주장했다.
복원과정에서 보인 낙서. ‘공노’라고 새겨져 있다.
당나라 관직도를 분석한 이 연구사는 갑옷에 등장하는 ‘참군사’를 무관의 선거(選擧)와 병기 및 의장 등을 담당하는 도독부의 ‘병조참군사(정7품 이하)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또 ‘배융부’ 명문은 무산관(武散官·산관은 관리 품계) 종9품하인 ‘배융부위’(陪戎副尉)가 틀림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밖에 확인된 명문 중 ‘대부’는 당나라 문산관(文散官) 가운데 하나이며, 종2품 광록대부(光祿大夫)부터 종5품하 조산대부(朝散大夫)까지 각기 다른 명칭에 대부가 붙는다는 것이다. 이태희 연구사는 “갑옷 명문의 지명과 관직명은 모두 당나라와 연관된다”면서 “따라서 갑옷의 제작 주체 역시 당나라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사는 공산성에서 출토한 갑옷에 ‘명광개’ 명칭을 붙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삼국사기> 등에 “백제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갑옷 명광개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공산성에서 출토된 옻칠 갑옷 명문. 붉은 색 명문이 눈에 띈다. 이태희씨는 이 붉은 색 명문을 ‘당나라에서 제작된 뒤 제작이력을 붉은 옻칠로 새겨넣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태희 연구사는 “그런 기록들을 살펴보면 백제가 당나라에 전달했다는 갑옷은 가죽이 아니라 금속, 즉 철갑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즉 <당육전> 등에 “지금의 명광, 광요, 세린, 산문, 오주, 쇄자 등의 갑옷은 모두 철갑이며, 피갑은 물소와 코뿔소 가족으로 만든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죽에 황칠로 빛을 냈다고 해서 그것을 ‘명광개’로 일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연구사는 또한 “당나라 법령을 토대로 송나라가 시행한 <천성령(天聖令)>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천성령>에는 “기물 제작은 견본에 따라야 하고 제작연월, 장인(匠人), 담당관 이름, 제작한 주(州)와 감(監)을 붉은 옻으로 기록한다”는 규정이 분명히 기록돼있다. 이태희 연구사는 결국 “공산성 갑옷에 새겨진 붉은 색 명문은 바로 옻칠갑옷을 만든 뒤 붉은 옻으로 기록한 제작 이력”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이 연구사는 갑옷의 복원 과정에서 확인한 ‘공노(孔奴)’ 낙서를 두고는 아직 해석할 수 없는 글자라고 유보했다.
이렇게 ‘공산성 갑옷=당나라 제작설’이 등장함에 따라 향후 학계 논쟁이 가열차게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갑옷을 두고 칠피기술을 포함한 백제의 갑옷 제작 기술이 당나라에서도 알아줄만큼 뛰어나다고 여기는 학설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 명문의 글씨체는 당나라 시기에 유행했고, 일반적인 기록문에 쓰여진 글씨체(구양순체)가 아니라, 구양순체가 다소 가미된 사경체(불경의 내용을 필사하는 서법) 위주”라면서 “이 글씨는 백제의 사경승이 쓴 것 같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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