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는 합쳐야 왕망천이 될텐데(爾我合爲王輞天) 그림 날고 시(詩)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畵飛詩墜兩翩翩)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이는구나.(歸驢己遠猶堪望) 강서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레 바라보네.(초愴江西落照川)”
얼핏 보면 먼 길을 떠나보내는 님을 배웅하는 연인의 이별시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첫머리의 ‘너’를 ‘자네’로 돌려 번역하면 단순한 남녀 간의 이별시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에 등장하는 왕망천은 당나라 대시인이자 문인화의 창시자인 왕유(699~759)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다. 왕망천은 곧 왕유를 지칭한다. 그런데 소동파(1037~1101)는 시와 그림이 모두 능한 왕유를 일컬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극찬했다.
그러고보면 인용한 시는 ‘그림과 시’와 관련된 뭔가 심상치 않은 두 사람과 관계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못말리는 브로맨스
그렇다. 이 시가 언급하는 자네와 나는 겸재 정선(자네)과 사천 이병연(나)이다.
이병연(1671~1751)은 소동파의 표현대로 ‘겸재 자네의 그림과 나(사천 이병연)의 시를 합쳐야 비로소 완전체로 거듭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헤어질 판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냐는 것이다.
대체 겸재 정선이 얼마나 멀리 떠났기에 사천 이병연이 저토록 ‘강서에 지는 노을을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운운’하며 슬퍼하는 것일까.
실상을 알고보면 반전 그 자체다.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1740년이었다. 이병연의 나이는 69살, 정선(1676~1759)의 나이는 64살이었다. 양천 현감에 제수된 정선이 임지로 떠나는 길이었다.
양천이 어디냐. 전라도도 경상도도 강원도도 아닌 지금의 서울 양천구이다. 교통이 불편한 조선시대였으니 ‘멀다’ 느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고작 ‘양천 현감’으로 떠나는데 뭘 그리 ‘이별이 원망스럽네. 어쩌네’ 하고 호들갑을 떨었을까.
두 사람의 특별한 ‘브로맨스’를 모른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5살 터울의 불알친구
두 사람은 시쳇말로 불알친구였다. 요즘 서울 시내에서 뜨고 있는 동네가 있는데, 바로 서촌이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를 보면 “한양에서 가장 경치좋고 놀만한 장소를 꼽자면 삼청동이 으뜸이요, 인왕동과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그 다음”이라 했다.
인왕·쌍계·백운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사이, 즉 지금의 서촌 일대다.
조선 후기들어 이곳에 권문세가들이 모여살면서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을 이루고 있었다. ‘경화’는 ‘번화한 서울’을 뜻하며 ‘세족’은 ‘여러 대에 걸쳐 자리잡은 가문’을 뜻한다.
그 중 노론계 인사들인 김창협·감창흡·김창업 형제가 중심인물이 되어 형성한 문인집단이 있었다. 겸재와 사천도 이 동네에서 김창흡(1653~1722)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경화세족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이병연이 정선보다 5살 위였지만 평생지기로 지냈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5살 차이는 그냥 동무로 지냈던 것 같다. 이항복(1556~1618)과 이덕형(1561~1613)이 대표적이다. 이덕형이 5살 어리지만 이항복과 역사에 길이 빛날 ‘오성과 한음’ 일화를 남기지 않았던가.
■시는 사천, 그림은 겸재
겸재의 화명(畵名)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18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은 이규상(1727~1799)의 <병세재언록>을 보라.
“정겸재(정선)은 그림의 거장이다. 생동감이 넘치고 원기가 있었으며 붓놀림은 거친듯 해도 화폭 가득찬 그림이라 해도 한 점의 붓 흔적이나 먹자국도 없었다.”
이규상은 “겸재의 그림은 당대 으뜸이었고 원기 뿐 아니라 그 원숙함도 당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런 겸재의 이름에 비해 사천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사천이 다시 태어난다면 무척 억울해 했을 것이다.
사천 이병연은 ‘시의 천재’, ‘시의 화신(化身)’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요즘이라면 아마 ‘시 덕후’ 소리를 들을만큼 시를 끔찍하게 사랑했다. 예를들어 앞서 인용한 <병세재언록>은 겸재 정선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슬쩍 사천 이병연 이야기를 끼워놓는다.
“당시에 시로는 이사천, 그림으로는 정겸재 아니면 쳐주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머리털 한 올, 수염 한 터럭까지도 모두 시(詩)다
사천 이병연은 어떤 인물인가. 목은 이색의 후손인 사천은 당대의 ‘훈남 시인’이었다.
“큰 키에 수염이 훌륭했으며 용모가 둥실하고 위엄이 있었다”는게 <병세재언록>의 인물평이었다.
“가벼운 여느 시인의 시와 달랐다. 이병연은 시에 관한한 천성을 타고났으며, 무게가 있고, 시구(詩句) 또한 기이하고 웅장했다. 우리나라에 시의 거장이 여럿 있으나 삼연 김창흡 이후에는 사천(이병연) 한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이름이 넘쳐 흘러 어린아이들이나 종들조차 ‘이삼척시’라 했다. 삼척은 이병연이 고을살이 한 곳이다.”
코흘리개 어린아이나 무지랭이 천민들까지 ‘사천 이병연의 시’를 알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병연을 둘러싼 당대의 평론은 눈이 부실 정도로 극찬 일색이다.
실학자 이덕무는 이병연의 시 몇 편을 소개하면서 “영조 임금이 즉위한 뒤 50년 이래 시인이라면 마땅히 사천 이병연을 쳐야 한다”고 극찬했다.
“아담한 작품의 맑은 운치가 깊고도 곱다. 모두 외워볼만 하다. 중국 문사들은 이병연의 시를 보고는 ‘당·송대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극찬했다.”(<청장관전서> ‘청비록’)
문인 이우신(1670~1744)은 “이병연의 시골(詩骨·시인의 골격)은 흠 하나 없는 옥과 같아서 머리 털 한 올 수염 한 터럭(一髮一毛摠是詩)이 모두 시”라고 극찬했다.
그야말로 이병연의 몸 그 자체가 한 편의 시(詩)라는 말이다. 시의 화신(化身)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이우신의 다음 표현이 걸작이다.
“시를 탐해 고질병이 되었다고 비웃지 마라.(寞笑耽詩成痼癖) 그대 보면 나도 모르게 콧수염 뜯으며 시를 읊나니(對君不覺動吟자)….”(<사원수창록>)
■시 짓느라 콧수염이 남아나지 않았다
이병연과 함께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콧수염을 뜯게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사천은 ‘시(詩) 덕후’였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새벽에 여러 수를 지었다. 사천이 지은 시가 1만3000수가 넘었다.”(<병세재언록>)
그러나 사천의 족인(族人)인 이윤영(1714~1759)과, 안석경(1718~1774) 등은 “사천이 지은 시가 3만수가 넘는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고 했다.(이윤영의 <단릉유고>, 안석경의 <삽교만록> 등)
1만3000수든 3만수든 지독한 다작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시를 짓기만 했을 뿐 선집은 <사천시초> 딱 1책(2권)에 담긴 시 500여 수 뿐이다.
그런데 시를 지을 때의 버릇이 독특했다. 아니 치열했다고 표현해야 옳겠다. 신정하(1680~1715)의 평가가 흥미롭다.
“시를 지을 때 심사숙고하고 끈질기게 훑어보았다. 시 한 구절을 만들 때마다 반드시 수염 서너 터럭을 만지작거려 잘라내고서야 그만 두었다. 이병연의 시는 빼어났지만 수난을 당한 수염은 길지 않았다. 일찍이 문을 닫은채 수십일 동안 시를 짓느라 끙끙 댔는데, 드디어 문밖으로 나온 얼굴을 보니 수염이 짧아져 있었다. 사람들은 의당 그러려니 하고는 ‘웬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상자에 그가 짓은 시가 가득 쌓였으리라 여길 뿐이었다.”(<서암집>)
시의 천재가 수염이 다 뽑힐 정도로 치열하게 시를 지었다니 그렇게 나온 시가 얼마나 빼어났겠는가. 안석경은 “사천의 시 3만여편은 새로우면서도 웅휘하여 신화(神化)에 가깝다”면서 “시를 지을 때면 늘 심사숙고하고 오래도록 읊조려 경솔하게 내놓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온 세간의 평가가 ‘그림은 겸재(정선), 시에는 사천(이병연)’이다.
그야말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두사람이다. 당대 저명문사들의 논평은 한결같다. ‘좌사천(이병연의 호). 우겸재(정선의 호)’라는 것이다. 김창업(1658~1721)과 조현명(1691~1752)의 시를 보라.
“정선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 금강산이 있고부터 이런 기이함은 없었네.”(김창업의 <노가재집>)
“이병연의 아름다운 시와 정선의 그림, 좌우에서 맞아주며 주인노릇하네.”(조현명의 <귀록집>)
■친구와 함께 금강산 여행
“겸재 자네, 금강산 한번 구경하지. 내가 마침 여기(금화) 있으니까….”
1712년 당시 금강산 길목인 강원도 금화현감이었던 사천 이병연은 겸재에게 ‘금강산 구경’을 제안했다. 겸재는 이미 1년 전(1711년) 스승인 김창흡 등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온 바 있었다.
그러나 천하명산 금강산 여행이라면 언제고 불감청이언정고소원이었다. 겸재와 함께 금강산 여행을 한 이는 아들 덕분에 따라나선 이병연의 아버지 이속과 동생인 이병성, 그리고 또다른 벗인 장응두였다.
겸재는 여행 뒤 금강산의 모습을 30여폭의 그림에 담아 이병연에게 준다. 이병연은 두 사람의 스승인 김창흡의 제(題·품평)를 받고, 조유수와 이하곤, 신정하 등에게도 시를 붙이게 해서 <해악전신첩>을 꾸민다. 조선판 ‘콜라보 화첩’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해악전신첩>이다.
이 화첩은 전해지지는 않지만 여러 문집에서 화첩에 붙인 시들을 찾아볼 수 있다.
■‘씩 웃더니 내 손에서 붓을 빼앗아 그림 그리더라’
금강산 여행 도중 겸재가 비로봉을 그릴 때를 묘사한 사천의 시는 ‘금강산 콜라보 작품’ 가운데서도 으뜸이다.
“나의 벗 정선은(吾友鄭元伯) 주머니에 그림 그릴 붓이 없어(囊中無畵筆) 때때로 그림 그리는 흥취가 솟으면(時時畵興發) 내 손에서 붓을 빼앗아가네.(就我手中奪) 금강산에 들어와(自入金剛來) 쓸어내리듯 휘두른 붓질이 더욱 방자해져서(揮灑太放恣) 백옥같은 만이천봉(白玉萬二千) 하나하나 점찍어 그리고(一一遭點毁) 놀랍도록 꿈틀거리는 구룡폭(驚動九淵龍) 어지러운 비바람 일어나네(亂作風雨起)….”
이 대목은 겸재의 그림그리는 필법이 ‘일필휘쇄(一筆揮灑)’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번에 거침없이 쓸어버리듯 휘두른 빠른 붓질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는 당대의 생생한 장면을 짐작하게 만드는 공감각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정선이 문득 한번 웃더니(元伯却一笑) 먹만으로 젖은 듯 그려내니(用墨若和水) 신이 전하듯 더욱 기이하고 뛰어나(傳神更奇絶) 옅은 구름이 달을 가린 듯 하네.(薄雲如蔽月) 흥이 다하자 붓을 던지고 일어서니(興瀾投筆起) 산과 더불어 가볍게 희롱하였구나.(與山聊戱爾) 나를 보고 가져가라 하니(顧我且收去) 관아의 창 가운데 놓아두었네.(郡齋窓中置)”
시를 보면 사천과 겸재는 얼마나 허물없는 사이인가. 사천의 시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금강산 여행 도중 내 친구 정선이 비로봉을 보자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어 조바심을 냈다. 그런데 마침 붓이 없었다. 정선이 씩 웃더니 내(이병연) 손에서 붓을 빼앗아 일필휘쇄로 쓱쓱 비로봉을 그린 뒤 ‘자 이 그림을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금화현청에 걸어두었다.”
흥취가 나면 남의 붓을 빼앗아 그냥 단 한번의 붓질로 쓰윽 그린 정선과, 이 모습을 마치 현장중계하듯 멋들어진 시로 전한 이병연의 글솜씨 모두 대단하다.
■헤어지면 날개잃은 새가 된다
뭐니뭐니 해도 두 사람 ‘콜라보’의 백미는 <경교명승첩>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이별시’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기도 하다.
1740년 겸재가 양천 현감으로 출사할 때의 나이는 64살이었다. 이병연의 나이는 69살이었다.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은 조선시대 임금들의 평균수명조차 47살 언저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두사람 다 엄청 장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나이에 헤어진다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으니 ‘자네와 나는 떨어져 살 수 없고…, 자네가 떠나는 강물에 지는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본다’고 안타까워 한 것이다.
고작 엎어지면 코닿을 양천의 현감으로 떠난 친구를 배웅하면서 웬 호들갑이냐고 핀잔을 줄 개재는 아니다. 찬찬히 살펴봤듯이 두 사람의 브로맨스는 단순한 우정의 단계를 넘어서지 않던가.
세간의 평가처럼 ‘좌사천 우겸재’였고, ‘시 속에 그림있고(詩中有畵·사천) 그림 속에 시있으니(畵中有詩·겸재)’ 두사람의 헤어짐은 곧 사천의 표현대로 ‘날개 잃은 새’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이 들었다.
■“그대의 그림과 내 시를 교환하자”
하여 두 사람은 몸은 떨어졌지만 작품으로는 하나가 되기로 약속했다. 시(이병연)와 그림(정선)을 주고받아 ‘시화첩’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겸재가 양천현감으로 떠난 지 1년 뒤인 1741년에 쓴 편지를 보면 저간의 사정이 잘 나와있다.
“나와 겸재 사이에 시와 그림을 주고받자는 약속을 했는데, 약속대로 왕복을 시작한다.(與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그러면서 두 사람의 작품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자부심도 마음껏 피력한다.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꿔보면 둘 사이에 누가 남고 모자라는지 어찌 값어치를 매길 수 있겠는가.(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둘러 그리니 어느 것이 쉽고 어려운지 모르겠구려.(詩出肝腸畵揮手 不知雖易更雖難)”
여기서 나온 표현이 그 유명한 겸재와 사천의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즉 ‘시와 그림을 바꿔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말그대로 서울과 서울 근교 한강 일대 이름다운 경치를 화첩으로 꾸몄다. 즉 남한강 상류에서 시작해서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양천 10경을 비롯한 한강 주변의 명승을 그리고(겸재), 이 그림에 붙인 시(사천)를 담았다.
■“천금을 주어도 팔지 말자”
<경교명승첩> 가운데는 두 노인(사천과 겸재)이 소나무 아래서 완성한 작품을 보는 그림(‘시화환상간’)이 있다.
사천의 ‘자네의 그림과 나의 시를 바꾸자’는 편지글이 겸재의 필치로 적힌 그림인데, 그 옆에 ‘천금물전(千金勿傳)’이라는 도장을 떡하니 찍어놓았다.
“천금을 준다 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다짐 도장이다.
이 대목과 관련해서 신돈복(1692~1779)의 <학산한언>은 겸재의 그림판매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를 전한다.
즉 신돈복이 이병연의 집을 찾아갔더니 책장에 귀하다는 중국책이 1500권이나 쌓여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더니 이병연은 “내가 마련한 것”이라면서 자초지종을 밝혔다는 것이다.
“겸재의 작품은 손바닥만한 크기여도 북경의 그림시장에서 고가에 팔린다네. 내가 겸재와 엄청 친하지 않은가. 그림도 가장 많이 얻었지. 그래서 북경을 방문하는 사신편에 크고작은 그림을 보냈다네. 그 돈으로 볼만한 책을 사오게 했더니 이렇게 많이 모인 거네.”
무슨 뜻일까. 겸재와 사천이 얼마나 허물없이 지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필휘쇄, 즉 붓질 한번에 쓸어버리듯 그림을 그려댄 겸재는 많은 크고작은 작품을 사천에게 주었다는 것. 그리고 사천은 그 그림을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편에 보내 중국 시장에서 내다팔았고, 그 수익금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중국서책을 사모았다는 것.
물론 달리 볼 수도 있다. 사천이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편에 정선이 보내준 그림을 ‘중개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중개한 겸재의 그림이 중국시장에서 고가에 팔리면 사천은 이익금의 일부를 수수료조로 떼어 중국책을 사는데 쓴 것이 아닐까. 겸재로서는 자신의 그림이 중국에서 고가에 팔렸으니 좋고, 사천으로서는 겸재의 작품을 중개해준 대가로 받은 중개 수수료로 귀한 중국책을 구입할 수 있어서 좋고…. 시쳇말로 ‘경제공동체’라 할만큼 두 사람의 사이에는 격의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교명승첩>의 경우 절대 남에게 넘길 수 없었다. 이 작품은 60년 지기 노년의 득의작이 아닌가. 두사람이 합작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경교명승첩> 만큼은 ‘누가 천금을 준다해도 절대 넘기지 말자(千金勿傳)’고 굳게 다짐하고 있다. ‘우정은 결코 돈으로 바꿀 수 없다’면서 피로 맹세한 브로맨스 같다.
■누가 시인이고 누가 화가인지…
두사람의 ‘콜라보’를 지켜본 제자 박사해(1711~?)는 사천·겸재 두 스승을 어찌 표현할 지 몰라 그냥 ‘이로시화(二老詩畵·두 노인의 시화 그림)’라 했다.
“그림이라 말하자니 곧 시가 있고, 시라고 말하자니 곧 그림이 있는지라. 그런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그저 ‘이로시화’라 했다.”
박사해의 다음 표현이 걸작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로시화’라는 표현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자책한다.
“이로시화(二老詩畵)라는 표현도 잘못됐다. 시(詩)를 그림(畵)보다 앞세운게 아닌가. 이 또한 잘못된 평가가 아닐까.”
그러면서 두 스승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소리울림은 적적하고 고요한데 글의 꾸밈과 생각이 그윽하고 묘한 것은 겸재 노인의 ‘그림시’요, 쇠와 돌이 쨍그렁하듯 그대로 베껴내어 핍진한 것은 사천 선생의 ‘시그림’이다.… 사천선생께서 바라보면 겸재노인의 그림이 바로 시이고, 겸재노인께서 살펴보면 사천선생의 시가 바로 그림이다.”
박사해는 마지막으로 선언한다.
“나는 두 노인 중에 어느 분이 시인이고 어느 분이 화가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두 분을 시화주인(詩畵主人)‘이라 불러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누가 시인이고, 화가인지 모르겠다? 마치 “내가 나비가 된 것일까. 나비가 내가 된 것일까”를 외친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연상하게 된다.
시인(사천)이 변해 화가(겸재)가 되었는지, 화가(겸재)가 변해 시인(사천)이 되었는지….
최근 문화재청은 겸재와 사천 등 두 벗의 콜라보 작품인 ‘경교명승첩’을 비롯하여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겸재 작품 건을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보물지정을 계기로 ‘시 속의 그림(詩中有畵), 그림 속의 시(畵中有詩)’ 속에 살았던 겸재와 사천 등 두 친구의 멋진 브로맨스도 기억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엄소연, ‘우정의 내러티브로서의 정선의 <경교명승첩>’, <예술과 미디어> 14권 1호, 한국영상미디어협회, 2015
장진성, ‘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 <동악미술사학> 제11호, 2011년
‘애정의 오류-정선에 대한 평가와 서술의 문제’, <미술사논단> 제33호, 한국미술연구소, 2011
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소명출판사, 2005
박미나, ‘18세기 금강산 시와 그림의 관련 양상 연구’, 경기대석사논문, 1998
윤진영, ‘조선후기 서촌의 명소와 진경산수화의 재조명’, <서울학 연구> 50권 50호, 서울학연구소, 2013
최완수, <겸재 정선>, 현암사 2009
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솔 1999
박은순, ‘사의와 진경의 경계를 넘어서:겸재 정선 신고’, <겸재 정선>, 겸재 정선기념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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