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불상’. 전북 익산 삼기면 연동리에 있는 석불사 법당엔 아주 희한하게 생긴 불상이 턱하니 자리잡고 있다. 

신성한 법당 안에 모셨으니 꼬집어 말하기는 좀 ‘거시기’ 하지만 솔직하게 표현하면 전혀 불상 답지않은 얼굴생김새를 갖고 있다. 까놓고 말하면 우스꽝스러운 광대 분장을 한 불상 같은 첫느낌이다. 인자하거나 아니면 엄숙한 부처나 보살의 얼굴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이전 이 절의 주지스님 얼굴을 새긴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 좌상.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백제 시대 최대의 3차원 환조석불로 유명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목이 달아났고 누군가가 새로운 불두를 얹어놓았다. 하지만 인자하거나 엄숙한 부처상도 아니고 '백제의 미소'를 구현하지도 않은 ‘광대 형상’의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복원해놓았다. 

그렇다. 이 불상의 본래 얼굴은 언제부터인지 떨어져 나갔고 그후 새로운 얼굴, 즉 불두를 만들어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이왕 새로운 얼굴을 올려놓을 거, 좀 그럴싸한 부처님 얼굴을 제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의 모습을 조형화한 불상을 제작해서 봉안하는데 이때의 불상은 부처님의 대체품이 아니다. 불교의 교주인 부처님 그 자체로 인식되기 때문에 엄숙한 점안식과 함께 불당에 모시게 된다. 따라서 이전에 훼손·멸실된 불상을 복원하는 경우도 당대의 양식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예배대상으로서 존격에도 합당한 모습으로 조성해야 하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 광대 모습의 불상은 무슨 꼴이란 말인가.


■가토 기요마사가 싹둑 잘랐다?

그런데 이 불상에는 세가지 반전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 중 하나는 구전을 통해 내려오는 ‘머리 잘린 불상의 사연’이다. 익산 금마에서 여산으로 이어진 1번 국도는 지금도 한양 가는 길목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금마~여산을 거쳐 서울로 진격하려던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를 가로막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대낮에도 칠흑같은 어둠이 몰려올 정도의 안개였다. 당황한 가토가 사람을 풀어 염탐했더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연동리 불상의 옛 사진. 광대얼굴에 눈썹과 수염까지 그려놓은 더욱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제공 

“마을 주민들이 작은 절에 모신 부처님에게 왜군이 패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토가 현장에 가봤더니 밤인데도 석불이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가토는 안개가 끼는 것이 바로 저 빛을 내는 석불의 탓이라 여기고 칼을 휘둘러 석불의 목을 쳤다. 의기양양한 가토가 돌아와 진격채비를 하고 있을 때 맑은 하늘에 소나기가 내렸다. 그 소나기에 조총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화약을 보관한 막사도 온통 비에 젖었다. 이때 낫과 죽창으로 무장한 의병들이 가토군을 습격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뭐 이런 내용의 구전설화다.


■흉사의 조짐, 땀흘리는 불상

또 하나는 나라에 좋지않은 일, 즉 흉사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어김없이 불상에서 땀이 흐른다는 것이다.

즉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25일 이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 10월26일의 약 보름 전, 광주 민주항쟁이 벌어진 1980년 5월18일 이전, IMF(국제통화기금) 금융 위기 직전인 1997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일인 2009년 5월23일 이전…. 

이후에도 2013년 2월1일, 2016년 2월16일과 3월5일 등에도 불상이 땀을 흘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땀흘리는 불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연동리 불상의 실측도면. 이렇게 목없는 불상으로 전해지다가 누군가 새로운 불두를 얹어놓았다. 

■머리 잘린 불상은 왜 첫번째로 조선의 보물이 됐을까

마지막 하나는 이 광대 형상의 불상이 대한민국 문화재를 대표한다는 ‘보물’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제45호니까 꽤나 일찍 국가지정문화재의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그 짐작이 맞다. 이 ‘광대 형상’의 불상은 일제강점기인 1933년 12월5일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하는 법(‘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한 뒤 첫번째로 선정한 보물 153건 중 제60호에 이름을 올려놓았다.(1934년 8월27일) 

연동리 불상의 당시의 보물 명칭은 ‘보물 제60호 익산 석불리 석불좌상’이었다. 

그렇다면 일제는 조선 문화재를 폄하하기 위해 이 광대 형상의 불상을 ‘조선의 보물’로 지정했을까. 그러나 아무리 일제의 만행이 끔찍했다한들 그런 어이없는 횡포를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중국의 문화를 수입해서 일본에 전한 역할을 한 조선 유물과 유적’과 ‘내선일체의 관념을 명확하게 한 유물과 유적’을 보물이나 고적(사적), 명승으로 지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왜곡은 했겠지만 터무니없는 유물을 ‘보물’로 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 8월27일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법’을 제정하고 첫번째로 153건의 유형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했다. 그렇게 첫번째로 지정한 보물 중에 ‘보물 제60호 연동리 석불리 석불좌상’이 포함됐다.|조선총독부 관보 1934년 8월27일자  


■최고의 3차원 백제불상

생각해보면 불두(머리)가 떨어져나간 치명적인 흠결에도 ‘보물’ 대접을 받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불상은 옷주름이 새겨진 방형대좌(직사각형 형태의 받침대)와 거대한 광배를 갖춘, 현존하는 백제 최대의 환조(丸彫)석불이다. 환조는 한 덩어리의 재료에서 물체의 모양을 전부 입체적으로 만드는 3차원 조각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한 뒤 일제가 지정한 보물들을 재분류할 때 ‘보물 제60호’였던 연동리 석불좌상은 ‘보물 제45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 좌상’으로 바뀌었다. 이때의 지정사유를 보면 불상의 문화재적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몸), 대좌(받침대), 광배(光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새로 만든 것이며…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600년 쯤의 희귀한 백제시대 불상으로 그 의의가 높다.”

한마디로 머리는 잘렸지만 7세기 초반대 제작된 백제시대의 불상이라는 가치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블록을 쌓아놓은 듯한 ‘광대 불상’의 반전매력

사실 약 2년 전 이 불상을 친견한 필자에게는 ‘광대 형상’의 우스꽝 스러운 얼굴의 잔상만 남아있다. 

하기야 얼굴이 그 사람의 첫인상을 좌우하지 않는가. 그 잔상이 지금까지 남아 불상의 진정한 가치를 몰라보게 만들었다.

자, 이제 불상의 첫인상을 걷어내고 차근차근 가치를 살펴보자. 

백제의 장인들은 여러 형태의 불상을 창조해냈다. 충남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6세기 후반)에 이어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6세기 말)-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7세기초)-전북 정읍 보화리 출토 석조여래입상 2구(7세기 전반)와 함께 연동리 석조여래좌상(7세기 전반)을 제작했다. 사면불상과 마애불에 이어 이제는 3차원 입체 환조불상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은 당당한 어깨, 균형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 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몸체(佛身)은 마치 큰 블록을 쌓아놓은 듯 괴감(塊感)이 강하다. 이 특징으로 인해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 초의 양식과 맞닿아있다는 평을 듣는다. 중국의 타산 석굴 여래좌상(중국 산동성 청주시·6세기말·수나라)이나 용문석굴 빈양 남동의 여래좌상(하남성 낙양시·7세기 전반·당나라), 자선사 석굴 남굴의 여래좌상(중국 섬서성·7세기 전반·당나라) 등과 비교할 수 있다.

백제의 여러 불상이 산재해 있는 예산·태안·서산은 중국 산동반도를 향한 선박의 발착구였던 태안반도에서 백제 수도 부여를 잇는 교통로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불상 조성 양식이 이 경로를 통해 전래되었을 것이다. 

연동리 불상을 모신 석불사 대웅전. 생각같아서는 머리 잘린 모습 그대로 놔두고 보존하고 싶지만 예배대상인 불상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범상치 않은 가슴팍 띠매듭

연동리 불상의 옷을 보면 이중으로 옷을 입은 이중착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배 부분에서 왼쪽 어깨로 넘어가는 대의(大衣·설법 등의 행사에 입는 승려의 옷) 자락과 오른쪽 어깨와 오른팔을 덮고 오른쪽 배로 끼워져있는 옷자락이 별도의 옷감으로 보인다. 

이런 형태는 용문석굴 빈양 중동의 본존상(500~523년·북위) 등 비슷한 시기의 중국 불상과 함께 일본 아스카(飛鳥·538~710) 조각 중의 하나인 나라(奈良)의 법륜사(法輪寺·호륜지) 목조약사여래좌상에서도 보인다.

연동리 불상의 가슴에 표현된 띠매듭도 매우 독특하다. 띠매듭은 타원형의 고리형 매듭이 일반적이지만 유독 연동리 불상의 경우에만 고리형이 아닌 삼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삼각형 형태의 띠매듭은 백제 양식의 영향을 받아 601~607년 무렵 제작된 나라의 법륭사(法隆寺·호류지) 금당 석가여래좌상의 배 부분에 나타나고 있다. 이런 역삼각형의 띠매듭이 백제 뿐 아니라 일본 아스카 시대 불상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대한 광배 역시 법륭사 석가삼존상의 광배와 매우 비슷하다. 우선 엄청난 크기의 연잎형 거신광(擧身光·광명이 전신을 감싸는 광배 형식)이라는 점이 일치한다. 

충남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6세기말의 백제 불상이다.

■일제가 보물로 지정한 진짜 이유

정리하자면 머리가 떨어져나가서 그렇지 이 연동리 불상은 현존하는 백제의 불상 중 가장 크고 시대가 올라가는 대형의 환조상이다.

이 불상이 제작된 7세기 전반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익산에 천도를 꾀했거나 행궁 혹은 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했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익산에는 새 도읍지로 삼으려 했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그리고 무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쌍릉 등 백제 말기의 흔적들이 다수 남아 있다. 석불사도 바로 당시 성행한 불교유적 중 한 곳이다.

백제인들은 중국의 북제·북주와 수·당나라 초의 영향을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수준높은 백제의 조형감각에 걸맞은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즉 백제의 석불제작은 6세기 후반 예산 석조사면불상에서 강렬하게 시작되어 서산 마애삼존불상에서 한층 난숙해졌으며, 익산 연동리 불상에서 거대한 3차원 입체 석조여래 좌상으로 절정기를 맞이한다.

연동리 불상은 서산 불상에서 전체적으로 보이는 백제조각의 미의식을 입체적으로 완성했고 광배의 형식이나 세련된 표현 등은 일본 법륭사 조각(석가삼존상·623년)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1933~34년 조선총독부는 ‘중국의 문화를 수입해서 일본에 전한 역할을 한 조선 유물’이라는 점에서 이 연동리 불상을 조선의 ‘보물’로 지정했을 가능성이 짙다.

충남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7세기 초 작품이다. 모두 연동리 불상에게 영향을 끼쳤다. 

■누가 머리를 잘랐을까

이 연동리 불상의 머리가 언제 잘렸는지, 또 언제 저렇게 우스꽝스러운 광대 형상의 얼굴을 앉혔는지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도 저런 얼굴이었다니 아마도 그 이전에 ‘광대 형상’ 얼굴을 얹어놓았을 것이다.   

석불사라는 사찰명은 1963년 쓰러진 불상의 광배를 일으켜 세우고 불전을 지어 붙인 이름이다. 불상은 이후 보호각에 안치됐다.  

1989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불상의 보호각을 헐고 새로운 법당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불상이 놓여있던 현재의 법당 자리를 발굴조사했다. 그 결과 동서 13.8m×남북 12.8m 내외의 금당지 추정 건물지가 발굴됐다. 발굴단은 출토된 유물을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 백제 무왕시대에 창건된 사찰과 불상이 고려시대 중기인 12~13세기 무렵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했다.

백제시대로 편년되는 다량의 평기와가 출토됐고, 인근 미륵사지에서 상감청자와 함께 출토되는 어골문과 국화문, 어골문과 반호문이 결합된 형태의 평기와 등문양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땀흘리는 불상의 정체

이제 한가지 숙제가 남는다. 저 우스꽝스럽게 생긴 얼굴을 아예 없애거나 아니면 적당한 얼굴로 복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전북 익산시와 석불사측은 2017년 6월부터 ‘잃어버린 보물 제45호의 얼굴’을 되찾아주려는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해 익산시의 의뢰를 받은 원광대 산학협력단(책임연구원 김정희 교수)의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불두(부처님의 머리) 복원안 학술연구 사업’ 보고서가 발간됐다. 

보고서는 우선 ‘땀흘리는 불상’의 별명을 얻은 연동리 불상의 수수께끼를 과학적으로 해석했다.

나라(奈良) 시대의 법륭사(호류지) 금당 삼존불상. 광배의 표현이나 옷입는 방식 등이 연동리 불상의 영향을 받았다

연구팀은 불상이 땀을 흘렸다는 날짜의 과거 기상자료를 찾아보았다. 익산의 기후자료가 없어서 가까운 전주지역의 과거 기상데이터를 참조했더니 10·26사태가 일어난 1979년 10월26일 무렵인 10월11일 7㎜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또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1980년 5월 18일 무렵인 12~15일 사이 4~22㎜의 비가 내렸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일인 2009년 5월23일 무렵인 21일에도 37㎜의 많은 비가 내렸다. 이밖에도 연동리 불상이 땀을 흘렸다는 2013년 2월1일과 2016년 2월12~13일에도 역시 강우가 관측됐다. 

물론 불상이 예전에는 보호각 내에 있었고, 1989년 이후에는 아예 대웅전 안으로 모셔져 있었다. 따라서 비를 직접 맞지도 않았고 빗물이 보호각 내부로 흘러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공기 중 수증기량이 많아지기 때문에 보호각이나 대웅전 내부의 습도가 높아진다. 습도가 높을 때 불상 표면의 온도가 차가워지면 쉽게 이슬이 맺힌다. 그렇다면 다른 사찰의 불상도 마찬가지 상황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찰의 불상은 왜 땀을 흘린다는 보고가 없는가.

김정희 원광대 교수(고고미술사학과)는 “불상이 안치된 석불사 대웅전은 다른 사찰의 불당에 비해 매우 협소한데다 불상의 대좌(받침대) 앞을 나무로 막아놓은 폐쇄적인 구조여서 결로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가상복원안 제 1안. 태안 마애삼본존불입상의 좌측여래입상의 두발과 얼굴형, 귀를 바탕으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의 눈 코 입을 앉혔다. 자문위원들의 권고에따라 눈 코 입을 ‘뽀샵’ 했다. 백제의 미소를 가미한 특징이 있다. |원광대 산학연구소 제공 

■니케 여신상처럼 머리 잘린채로 둘 수는 없을까 

‘광대 불상’의 얼굴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물론 머리가 잘린 채로 그대로 두는 것, 즉 있는 그대로 두는 것도 ‘문화재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견도 유력하다. 단적인 예로 1863년 에게해 북서부 사모트라케에서 발굴된 니케 여신상의 경우도 머리와 두 팔이 없는 모습으로 복원됐다. 그렇지만 이 머리없는 여신상은 ‘밀로의 비너스’와 함께 그리스 헬레니즘 조각을 대표하는 보물로 간주되고 있다. 머리 부분이 없어 더욱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의 연구진인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은 “니케의 여신상처럼 없으면 없는대로 복원하는데 가장 이상적이지만 연동리 불상은 지금도 사찰의 대웅전 안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어서 목없는 채로 둘 수 없다는게 사찰측의 입장”이라고 전했다. 박물관 전시품이 아니라 사찰 대웅전을 찾는 사람들의 예불·참배대상인 불상을 목없는 채로 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복원안 제2안. 제 1안에 일본 법륭사(호류지) 금당본존불을 추가했다. 제1안의 머리에 법륭사 본존불의 얼굴형과 눈 코 입을 약간 추가해서 가상복원했다.|원광대 산학협력단 제공   

■참배·예불 대상이라…

어떤 경우든 지금의 ‘광대 모습’으로 놔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연구진은 연동리 불상이 조성되었던 6~7세기 동북아 불상을 두루 참조해서 가장 이상적인 얼굴을 찾기로 했다.

연동리 불상은 당당한 체구와 凸형으로 도드라지게 새긴 옷주름, 섬세하고 화려한 화염문 등으로 보아 북제·북주 시기(6세기 중 후반)의 불상양식에 연원을 둔다. 특히 이중으로 옷을 입은 형식은 하북성 향당산 석굴에 조성된 북제·북주 불상과 가장 연관성이 짙어보인다. 그러나 돌덩이를 쌓아 올린 듯한 괴감 강한 신체표현은 6세기~7세기전반인 수나라와 초당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광배의 표현이나 옷입는 방식은 일본 법륭사(호류지) 금당 삼존불상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의 불상들은 아무래도 이국적인 요소가 가미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장 참고해야 할 것은 역시 비슷한 시기의 백제 불상이다. 연동리 불상 역시 당대 백제인의 미의식을 반영했을테니까…. 

얼굴복원 프로젝트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소재구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중국이나 일본 불상은 참고는 하되 당대의 백제 불상 얼굴을 중심으로 복원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역시 자문위원인 문명대 한국불교미술연구소장은 특히 “연동리 불상의 복원에 ‘백제의 미소’를 살리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평을 내렸다.

가상복원 제3안. 서산 불상과 일본 법륭사의 금당본존불을 정리한 복원안이다. 서산 불상의 두발과 얼굴형에 법륭사 불상의 눈 코 입을 약간 뽀샵해서 앉혔다. |원광대 산학협력단 제공

■백제의 미소를 살린 복원이라면 뽀샵이라도?

연구진이 1년 여의 작업 끝에 완성한 가상복원안은 5가지다. 이중 1안과 2안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검토를 통과했다. 

연구진은 “좀더 다양한 안을 제시해달라”는 문화재위원회의 요구에 3~5안을 추가한 뒤 자문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최종안을 확정했다. 

제1안은 비슷한 시기의 백제 불상인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의 좌측여래입상(6세기 말)과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의 본존불(7세기초)을 이용한 복원안이다. 보존상태가 좋지않은 태안 불상의 두발과 얼굴형, 귀를 바탕으로 서산 불상의 눈·코·입을 앉혔다. 물론 자문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눈·코·입 모양을 조금 보정했다. 뚜렷한 백제인의 얼굴로 ‘뽀샵’ 처리했다. 태안 불상은 당당하고 장대한 체구에 비해 머리가 작은 것이 북제 시대의 불상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신체 특징은 북위 혹은 동위의 불상과 비슷하다. 이에 비해 서산불상은 태안 불상보다 양감이 많고 크게 뜬 두 눈과 팽창된 뺨에 미소도 더 짙어졌다. 북제·북주의 불상에 ‘백제의 미소’를 가미했다. 

제4안. 일본 법륭사 본존불과 일본 전 다치바나 본존불을 이용한 복원안이다. 가장 현실성이 희박하다. |원광대 산학협력단 제공

이런 풍만한 신체특징 표현은 연동리 불상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백제화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복원안이다.     

제2안은 제1안에 일본 법륭사(호류지) 금당 본존불을 추가한 복원안이다.

즉 제1안의 불두(머리)에 일본의 법륭사 금당 본존불(석가여래좌상·623년명)의 얼굴형과 눈·코·입을 약간 추가해서 가상복원했다.

법륭사 금당본존불을 추가한 이유는 연동리 불상의 광배 및 착의문양이 법륭사 불상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굴 형태는 약간 다르다. 태안 좌측불과 서산 본존불의 얼굴형태와 달리 법륭사 금당 본존불은 긴 얼굴형에 크고 긴 귀를 하고 눈은 행인형(杏仁形·살구씨 형태)으로 크게 뜨고 있다. 또 입가에는 고졸한 미소를 띠고 있다. 이 얼굴형과 신체특징은 백제 등 삼국을 경유하여 일본에서 수용된 양식과 중국 산동반도에서 직접 수용된 양식을 절충한 것이다. 제1안보다 더 산동반도의 직접 영향력을 가미한 복원안이다. 

제3안은 서산 불상(마애여래삼존상의 본존불)과 일본 법륭사(호류지) 금당본존불로 정리해본 가상복원안이다.

서산 불상의 두발과 얼굴형에 법륭사 불상의 눈·코·입을 앉혔다. 물론 자문위원의 권고에 따라 서산 불상의 얼굴형에 맞도록 법륭사 불상의 눈·코·입을 ‘뽀샵’ 처리했다. 이 가상안은 백제화가 추진된 서산 불상의 얼굴형과 산체특징을 기본으로 하되 제작연대가 연동리 불상과 비슷하고 백제의 영향을 받은 법륭사 불상(623년·7세기 전반)의 얼굴형태를 접목했다. 얼굴형을 법륭사 불상에 맞춘 제2안보다는 백제의 취향이 짙은 복원안이다.


제 5안. 중국 하북성 향당산 석불의 북제시대 불상의 얼굴을 연동리 불상 얼굴에 그대로 앉힌 가상복원안이다. |원광대 산학협력단 제공 

■일본·중국 냄새가 풍겨서…

제4안은 일본의 법륭사(호류지) 본존불과 전 다치바나(傳橘夫人念持佛·8세기초)의 본존불을 이용한 복원안이다. ‘전 다치바나 부인 염지불’은 일본 나라 시대 성무(聖武·쇼무)천황(재위 701~756)의 부인인 광명황후(光明皇后·701~760)의 모친인 귤삼천대(橘三千代)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전 다치바나 부인 염지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백제 양식과 중국의 산동반도 양식을 절충한 것으로 보이는 법륭사 불상의 얼굴형에 초당(7세기 전반)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는 ‘전 다치바나 염지불’의 본존불 신체모습을 가미했다. 취향이 다른 다양한 불상들이 제작된 6~7세기를 반영하는 안이다. 

제5안은 중국 하북성 향당산 석굴의 북제시대 여래좌상 얼굴을 연동리 불상 얼굴에 그대로 앉힌 가상복원안이다. 연동리 불상이 중국 북제시대 정형을 도입했을 것이라는 가정아래 연구진이 생각해본 가상안이다. 그러고보면 아무래도 일본과 중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제4안과 제5안은 가능성이 떨어지는 복원안들이다.  

필자는 여전히 연동리 불상의 머리를 굳이 복원할 필요가 있겠냐는 의견에 마음이 기운다. 물론 지금의 ‘광대 형상의 얼굴’은 절대 아니다. 백제 최고·최대의 환조불상이라는데 지금의 ‘광대 얼굴’을 보면 몰입도가 확 떨어진다. 가장 이상적인 복원안은 그냥 머리가 잘린채로 두자는 것이다. 언제 누가 불상의 목을 댕강 잘랐는지, 혹은 비바람과 지진 같은 천재지변으로 가장 약한 목부분이 날아가 버렸는지 모르지만 그 훼손의 과정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불상이 예불과 신앙의 대상이라 반드시 복원해야 한다면 가장 ‘백제 다운’ 얼굴이어야 한다. 엄숙하고 근엄하지만 백제의 미소를 살포시 담은 그런 인자한 부처의 모습으로….

김정희 교수는 “가상복원안은 사라져버린 연동리 불상의 얼굴을 되찾기 위한 첫단계에 불과하다”면서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모아 최대한 7세기 전반기의 백제불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의상 익산시청 역사문화재과 학예연구사는 “연구서 발간으로 기초조사는 끝냈다”면서 “향후 학술회의 등을 열어 각계의 공감대를 조성한 뒤 바람직한 복원안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원광대 산학협력단,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복원고증 학술연구>, 익산시, 2018

임석규, ‘동아시아 불교 조각사에서 본 연동리 석불좌상의 위치’, <6~7세기 백제사에 있어서 익산의 위상> 고도 익산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학술회의, 익산시, 2017

김선기, ‘익산지역 백제사지 연구’, 동아대박사논문, 2010

김영애, ‘통일신라 조각과 나라(奈良)조각의 비교연구’, 동국대박사논문. 2001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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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duhan 2019.03.07 1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가 불상의 머리를 잘랐는지 모르겠어?물론 가토 기요마사가 아니다. 조선 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이 머리를 자른 것이다.그런 것은 상식이다.

  2. 문선이 2019.03.08 1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해 안에 꼭 찾아가 뵈어야 겠다.
    佛頭가 광대모양이라지만 예경하는 불교신자들은 개의치 않을 것 같다.
    물론 6세기에 적합한 상호를 모색해 보는 것도 좋겠지만 못생겼다고 예경 받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금강경의 말씀처럼 色으로 부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영원히 부처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니!
    언제 저런 형상을 하고 계시며, 누가 만들었는지는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저 모습은 저 모습데로 남겨두심이
    어떨런지.....

  3. 달구지 2019.03.09 1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처처 불성이요 두루 만물이 부처라 하였다 부처님 상에는 본래 표준이 없다 석가여래 만이 부처님 이 아니다

  4. 달구지 2019.03.09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처님 말씀 하시기를 사물을 볼때 눈으로 보지말라고 하셨습니다 분별심으로 본래 모습을 볼수없서 행 함에 바르지 못할수 있다
    하셨습니다

  5. 동그리 2019.05.24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옆사람도 부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