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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연봉 1000원으로는 턱도 없고 중국 간섭도 심하지만…' 이상재 선생의 다짐

“~빨리 부는 바람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따르겠네.” 육당 최남선의 ‘경부철도가’(1908년) 가사처럼 철도는 개화기 근대 문명의 상징이었다. 증기를 뿜으며 씩씩거리고 달리는 육중한 몸체의 열차가 얼마나 빨리 달렸으면 ‘바람처럼 달려 날개 가진 새도 따를 수없다’고 했을까. 철도 역사의 효시는 1899년 9월 일본측이 완공하여 가영업을 개시한 인천~영등포간의 경인선이었다. 


■‘바람보다 빠른 철도’의 역사 

사실 구한말 조선 내에서의 철도부설권은 열강의 먹잇감이었다. 서구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일본은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철도부설권을 따려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지금까지는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1896년 조선정부로부터 부설허가권을 취득했지만 자금난에 빠져 일본측에 170만원에 허가권을 팔아넘긴 것으로 알려져왔다. 이 와중에 일본이 부설권을 가져오기 위해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지럽다’는 헛소문을 미국내에 흘렸고, 이 마타도어 때문에 미국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는 바람에 모스가 자금난을 겪게 됐다고 한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1888년 2월12일 보낸 편지. 당시 워싱턴의 물가와 조선의 물가를 직접 비교할 수 있는 자료이다. 쌀 1두 값은 우리나라 돈 10이고, 고기 1근은 우리나라 돈 10여냥이며, 배추 1포기는 우리나라 돈으로 6~7냥이 넘는다고 했다. 공관의 1년 임대료는 780원이라 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결국 경인선 철도부설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일본이 경인철도조합을 만들어 모스에게 170만 2452원을 주고 부설권을 양도받았다.(1899년 3월22일) 일본은 모스가 진행해온 철도공사의 결함을 재점검한 뒤 재공사에 박차를 가했고, 급기야 1899년 9월 13일 인천~영등포 간 공사가 마무리됐다. 5일 뒤인 9월18일 이 구간의 가영업이 시작됐다. 이것이 철도 개통의 효시로 알려져왔다. 이후 이듬해인 1900년 6월말 한강교량을 완성했고, 7월8일 경성과 인천간 25리의 경인선이 완전 개통됐다.

그런데 이 경인선, 즉 경성~인천간 철도 부설 계획이 지금까지 알려진대로 1896년 무렵이 아니라 그보다 8년 전인 1888년부터 세워졌다는 사실을 적시한 외교문서가 131년 만에 공개됐다. 그리고 이 철도부설계획은 조선-일본이 아니라 조선의 워싱턴주재 주미공사관과 미국간 논의했던 사안이었다. 이 문서는 계약서의 조문까지 구체적으로 검토한 약정초안이다.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와의 인연

이 문서는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의 종손인 이상구씨(74)가 130년 넘게 소장해온 문중자료이다. 이상구씨는 최근 이 자료를 포함한 문헌자료와 사진자료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복원공사를 마치고 지난해 공개한 워싱턴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관련 자료를 찾던 중 이상재 선생 관련 자료들을 확인한 뒤 소장자 이상구씨와 접촉해왔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누구인가.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과 조선교육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독립 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몇차례 이어진 투옥도 마다 않고 일제에 맞섰고, 1927년에는 신간회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해 선생이 돌아가시자 사상 처음 열린 ‘사회장’에는 10만명의 추모객이 운집했다.

이상재 선생은 박정양(1841~1904) 초대주미공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18세 때 부정과 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한 과거에서 낙방하면서 크게 절망하고 만다. 합격여부가 금권과 정실에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참으로 한심하다. 다시는 들어갈 데가 아니구나”라고 탄식하고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의 꿈을 접었다. 선생은 이후 서울에 남아 세도가의 문객으로 세상사를 배웠다. 이때 만난 이가 바로 박정양이었다. 1881년 조선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신사유람단의 단장을 맡은 박정양은 이상재 선생을 수행원으로 데려갔다.

1888년 1월20일 편지. 이상재 선생은 “워싱턴에 근무중인 주미공사관 직원들의 매일 식비는 우리나라(조선) 돈 10이 100금(金)이라 연봉 1000원으로는 태반이 부족해서 어떻게 지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당대 조선과 미국의 환율을 짐작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딸능돈’과 박정양의 협의

박정양은 기회있을 때마다 이상재 선생을 추천했을 정도로 신임했다. 1887년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된 박정양은 이상재 선생을 1등 서기관으로 발탁한다. 박정양 공사와 이상재 1등서기관 등 초대주미공사관원 일행은 1888년 1월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이들은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미국대통령(재임 1885~1889)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본격적인 외교활동에 돌입한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은 이상재 선생이 1888년 11월 박정양 공사와 함께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10개월간 공관원으로 임무를 수행했을 때 생산된 자료들이다. 자료 가운데 당시 초대 주미공사관에서 일했던 공관원의 ‘업무편람’인 <미국공사왕복수록(隨錄)>과, 이상재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모음집인 <미국서간> 등은 최초 발굴자료들이다. 

이 중 1888년 양력 11월13일 조·미간 현안사업 중 뉴욕의 법관인 ‘딸능돈’(달링턴 혹은 탈링턴으로 추정) 기계조사원 ‘칸의긴(캐니건 추정), 회사원 늬벤(뉴벤 추정) 등이 조선기계회사를 설립하여 철로·양수기·가스 등 3건을 추진하려고 제안한 규칙과 약정서 초안이 주목된다. 이중 경인선 설치를 제안한 사실과 계약서인 ‘철도약정’ 초안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즉 “제1조 경성~제물포간 철로를 건설하는데, 개설도로 및 역사 건축 부지의 토지는 특별히 정부에서 면세를 허용할 일…”이라고 되어 있다. 또 만약 조선정부가 허용한다면 “제1조 조선 법률 사례를 준수하여 시행하니 철로 세금은 최대한 염가로 할 일…”이라는 약정 초안(미국인약초·美國人約艸)이 붙었다. 

특히 약정 초안 제4조는 “계약기한은 15년이며. 15년 후에 재약정 여부를 가린다”고 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조선에서 4년간 의사로 일한 경력이 있는 호러스 앨런(1858~1932)을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파견했다. 앨런은 잘 알려졌듯이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 자객의 칼에 맞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명성황후의 친정조카 민영익(1860~1914)을 완쾌시켜 고종의 신임을 얻은 미국인이다. 앨런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주미공사 공관원들을 대신해 양국간 사업을 주도하고 알선했다. 바로 그 앨런이 조·미간 철로 등의 제안서와 약정 초안을 두고 “이 규약의 초안은 매우 좋다. 정부는 돈 한푼 내지 않지만 이 약정에 따라 시행하면 경성이 번화스럽기가 세계 각국과 같게 된다”고 평가했다.  


■조선-미국간 철도부설 계약이 무산된 이유

하지만 이 때의 경인선 부설은 끝내 무산됐다. 당시 박정양 공사가 이 초안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철도약정’을 언급하면서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이니 거절해야 한다”고 고종에게 보고했기 때문이다.(박정양의 <미행일기>) 당시 박정양 공사는 고종에게 ‘조선이 철도부설권을 미국에 준다 해서 미국이 조선을 보호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요지로 보고했다. 

박정양 공사는 이때 “15년 약정이라지만 그때가서도 쉽게 개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그때 후회하지 말고 지금 일본철도회사 등과도 협의해서 조건이 좋은 쪽으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신중론을 개진했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박정양 공사는 미국이라면 무조건 조선을 도와줄 ‘대인배의 나라’로 여겼던 당대의 ‘맹목적인 미국 사랑’ 분위기에 일침을 가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편지. “중국 공사는 매번 우리나라 공사의 위에 서고자 하고, 우리 공사 역시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한다.…대저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공사는 30여 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다. 그러나 각국 공사와 서로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에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을 욕보이는 것이다.”(1888년 5월23일)라는 내용이다.

■“미국은 영토 욕심없는 대인배의 나라” 

아닌게 아니라 당시만 해도 조선 조정은 서구 열강 가운데 가장 먼저 외교관계를 맺은 미국에 열광했다. 청나라 외교관으로 주일청국참찬관이었던 황준헌(1848~1905)이 쓴 <조선책략>의 영향이 지대했다. 이 책을 읽은 조선 조야의 반향은 엄청났다. 

특히 “미국은 유럽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기에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 않으려는 대인배의 나라”라고 표현한 대목이 고종을 비롯한 조선 지도층의 심금을 울렸다. 재야에서는 보수유생들을 중심으로 거센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났지만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됐다. 고종 역시 ‘영토의 야심이 없는 대양인(大洋人)’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훗날 제2대 주미공사를 지낸 이하영(1858~1929)의 글을 보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1)미국은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내국 침입이 그다지 심하지 않을 것이다. 2)미국은 황금의 부국이니 조선은 물질적으로 덕을 볼 것이다. 3)종교지상주의의 국가이니 도덕을 존중할 터라 모욕과 야심이 적을 것이다.”    

이런 믿음 덕분인지 통상조약을 맺은 첫번째 서양국가가 바로 미국(1882년)이었다. 특히 조·미 통상조약의 ‘제1조’는 조선과 고종 임금에게 매우 의미심장했다. 즉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는 이른바 ‘거중조정’ 조항이 들어있었다.

고종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않으려는 대인배이자 대양인인 미국의 중재자 역할에 큰 기대를 걸었다. 서양국가 중에 가장 먼저 미국에 상주공사관을 두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때가 1887년 8월이었다. 고종은 “미국과는 제일 먼저 통상해서 서로 교빙(交騁)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아직 상주 공사를 파견하지 못했다”면서 “내무부 협판 박정양을 전권대신으로 특파해서 미국의 수도에 주재시킬 예정”이라고 선언했다. 

이 중 1888년(고종 25년) 음10월10일 조·미간 현안사업 중 뉴욕의 법관인 ‘딸능돈’ 등이 조선기계회사를 설립하여 철로·양수기·가스 등 3건을 추진하려고 제안한 규칙과 약정서 초안.  “제1조 경성~제물포간 철로를 건설하는데, 개설도로 및 역사 건축 부지의 토지는 특별히 정부에서 면세를 허용할 일…”이라고 되어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얼토당토 않은 ‘영약삼단’의 조건   

그러나 곧 난관에 봉착했다. “조선은 여전히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중국측의 집요한 방해와 몽니 때문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에서 서양 각국으로 사절을 파견하려면 먼저 (종주국인) 중국에 요청하여 인준을 기다려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후 치열한 외교전 끝에 조선의 워싱턴 주재 공사관 설치가 결정됐다. 하지만 청나라가 내건 조건이 기막혔다. ‘영약삼단(령約三端)’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로, 별도의 약속’을 뜻하는 ‘영약’(령約)과 ‘세가지 단서’(三端)를 합한 말이었다. 

“첫째 조선 사절이 주재국에 도착하면 마땅히 먼저 중국공사관으로 가서 온 이유를 중국 사신에게 보고하고 함께 외부에 다녀와야 한다. 둘째 조회나 공연에서 수작이나 교제를 당하면 조선 사절은 중국 사신의 뒤를 따른다. 셋째 교섭할 대사에 관계가 긴요한 것은 조선 사절이 먼저 중국 사신과 은밀히 상의하여 명확하게 제시한다.”

초대주미공사인 박정양 일행은 청나라가 내건 ‘영약삼단’ 조건을 무시하고 중국의 장음환 공사를 통하지 않은채 토마스 베이야드 미국 국무장관을 직접 방문하겠다고 국무부에 문서를 보냈다. 박정양은 이에따라 베이야드 국무장관을 만나 스티븐 글로버 클리블랜드 미국대통령에게 국서를 제출하는 절차와 일정을 협의했다.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은 조선의 외교관들

하지만 1888년 1월(양력) 우여곡절 끝에 워싱턴 DC에 도착한 초대 주미공사일행은 이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는다. 

공개된 이상재 선생의 문건 중 ‘송미국외부조회(送美國外部照會)’(1888년 1월10일)가 바로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이 ‘영약삼단’을 무시하고 청국공사 장음환(張蔭桓 1837~1900)을 찾아보지 않은채 ‘토마스 베이야드(1828~1898) 미국 국무장관을 방문하겠다’고 국무부에 보낸 문서다. 박정양 공사가 클리블랜드 대통령(1893~1897)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한 절차로 미국 국무부를 방문하겠다는 내용이다. 주미공사가 국제관례에 따라 자주국으로서 외교를 전개했음을 입증한 중요한 외교문서임이 틀림없다.

또 “병환 중인 박정양이 귀국하므로 서기관 이하영을 대리공사로 임명한다”고 미국 정부에 통보한 문서(1888년 11월 16일)도 공개됐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은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국측으로부터 부단한 사임 압력을 받았다. 

결국 조선정부는 청나라의 집요한 압력에 박정양에게 소환명령을 내린다. 조선정부는 박정양의 후임에 당시 주미공사관에서 참찬관으로 일하고 있던 미국인 호러스 앨런(1858~1932)을 대리공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박정양은 “조선인 관원이 있음에도 외국인을 대리로 삼는 것이 매우 구차스럽고 다른 나라의 비웃음을 살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앨런보다 직위가 낮은 서기관 이하영(1858~1916)을 추천해서 허락을 받아냈다.

자료 중에는 앨런이 워싱턴을 떠나 도쿄에 머물고 있는 박정양에게 자신(앨런)의 권유로 영약삼단을 어겼음을 입증해주는 편지가 있다. 즉 앨런은 박정양이 귀국 후 중국의 처벌 대상이 되는 것을 염려해서 영약삼단의 위반 과정을 적으면서 앨런 자신이 주도했다고 밝혔다. 물론 앨런 자신이 영약삼단 위반의 책임을 지겠다는 선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앨런이 ‘영약삼단 위반’을 자신의 공으로 내세우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1888년 1월 초대 주미공사로 내정된 박정양 등 사절단 일행이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려고 백악관을 방문한 모습을 그린 잡지.

■‘중국 때문에 죽겠지만 그래도…’

이상재 선생의 편지모음인 <미국서간>도 의미있는 자료이다.

편지는 이상재 선생이 주미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된 1887년(고종 24년) 9월23일부터 귀국 후인 1889년(고종 26년) 2월3일까지의 편지 38통이 수록됐다. 대부분은 집안일과 관계된 내용이지만 워싱턴 현지의 높은 물가 때문에 지내기 어렵다는 푸념도 있다. 

“물가는 고등(高騰·높고 올라서) 매일 식비는 우리나라 돈 10이 100금인즉 연봉 1000원으로는 태반이 부족해서 어떻게 지내야 할 지 모르겠다.(1888년 1월20일)  

이 편지내용을 분석해보면 1888년 당시의 조선돈과 미국 달러의 환율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돈 10이 미국돈 100금이라 했고, 연봉 1000원으로는 생활하기 힘들다는 대목을 단서로 계산해볼 수 있겠다. 

“공관은 매년 임대료를 780원씩(우리돈으로 환산하면 1만5000냥)으로 정하고 입주했다. 관내의 일용집기는 1500원으로 구입했다. 조·석반은 사·하인배가 살과 고기를 사서 관내에서 밥을 지어먹는다. 쌀 1두 값은 우리나라 돈 10이어서 (10명이 먹을 경우) 100냥이 넘고, 고기 1근은 우리나라 돈으로 10여냥인즉 물가가 고등(高騰·높음)함을 알 수 있다. 배추 1포기 값은 우리나라 돈으로 역시 6~7냥이 넘는다.”(1888년 2월12일)

이 역시 당시 워싱턴의 물가와 조선의 물가를 직접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닐까.  

편지내용 중에는 이상재 선생의 미국관을 읽을 수 있는 대목도 있다.

“미국 풍속은 민(民)을 주권(主權)으로 삼는다. 소위 군주는 4년마다 교체되고, 인민이 회의해서 차출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권한이 없고, 오로지 민의를 주로 삼을 뿐이다.”(1887년 12월 22일)

초대공사관원 일행.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 이완용, 박정양, 이채연. 뒷줄 왼쪽부터 김노미, 이헌용, 강진희, 이종하, 허용업  등 수행원과 하인들도 함께 찍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

그러나 선생의 가장 큰 괴로움은 ‘영약삼단’을 트집잡는 청나라 공사관의 집요한 공세였던 것 같다. 사사건건 ‘영약삼단’을 거부한다면 조선정부가 청나라 정부에게 괴롭힘을 당할게 뻔하고, 그렇다고 무작정 따르자니 자구국가 외교관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미국 물정은 언어와 문자가 모두 통하지 않아서 듣거나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또 한편으로 중국공사가 예절(영약삼단) 문제로 매번 트집을 잡아 정말 소위 진퇴유곡의 처지이다.”(1888년 2월12일)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중국 공사가 양보하지 않고 고집부리는(相持) 것이다. 그러나 서로 부딪히면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곤란을 당할까 두렵다. 그렇다고 명령을 들으면 외양의 기품을 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때 중도를 취하기 어렵다.”(1888년 3월 2일)

그래도 결코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비록 가난한 나라에서 왔지만 그래도 조선이라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어엿한 외교관이 아닌가.

“중국 공사는 매번 우리나라 공사의 위에 서고자 하고, 우리 공사 역시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한다.…대저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공사는 30여 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다. 그러나 각국 공사와 서로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을 욕보이는 것이다.”(1888년 5월 23일) 

외교무대에 첫선을 보였고, 말 조차 통하지 않은 처지였지만 그래도 기죽지 않고 고개를 세우려 했던 조선 외교관의 분투를 엿볼 수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