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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황희 맹사성 투톱'을 죽을 때까지 부려먹은 세종의 용병술

“맹사성의 사람됨이 종용하고 간편하다. 선비를 예절로 예우하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급이 얕은 자라도 뵙기를 청하면 반드시 관대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였다. 이어 손님을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가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세종실록> 1438년 10월4일)


■‘배려심 갑 예절 남’ 재상님 

청백리의 대명사이자 재상의 롤모델로 통하는 고불 맹사성(1360~1438)이 죽은 뒤 <테종실록>의 사관이 남긴 졸기(부음기사)이다.   

교지연구가 김문웅씨가 공개한 ‘맹사성 왕지’. 1427년(세종 9년) 맹사성을 우의정에 임명한다는 임명장이다. 맹사성 이름 옆에 찍힌 확인점이 뚜렷하다. 맹사성은 이후 8년간 황희와 함께 정승 투톱체제를 이루며 세종의 치세를 이끌었다. 맹사성을 처음 재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것도 다름아닌 세종이 내린 임명장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김문웅씨 제공   

사실 정치가이자 행정가로서 맹사성의 진면목은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맹사성이 우의정일 때, 좌의정이었고, 맹사성이 좌의정일 때 영의정이던 황희(1363~1452)의 그늘에 가린 측면이 없지 않다. 당시 합좌기관인 의정부에서 의론하고 결정된 정사가 모두 ‘의정부’라는 이름이거나 혹은 의정부의 수장인 ‘황희 등’의 형식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려심 갑’인 ‘예절남 청백리’로서 맹사성의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앞서 인용한 <세종실록>은 창녕부원군 성석린(1338~1423)과 맹사성의 일화를 소개한다. 맹사성의 집이 선배인 성석린의 집 위에 있었는데, 맹사성이 오갈 때마다 늘 성석린의 집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예를 갖췄다는 것이다. 

이런 예절을 성석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켰다는 것이다. 야사모음집인 <연려실기술>은 맹사성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를 담고 있다.

첫번째는 맹사성의 타고난 검소함이다. 맹사성이 살고 있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다. 하루는 병조판서가 업무보고차 맹사성의 집을 찾았는데, 때마침 소나기가 내렸다. 그런데 맹사성의 집 곳곳에서 비가 새고 있었다. 병조판서의 의관도 모두 젖었다. 마침 바깥 행랑채는 짓고 있던 병조판서는 집에 돌아와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겠느냐”면서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였다.

또하나의 일화는 맹사성 재상이 평소 소타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맹사성이 고향 부모님을 뵈러 가면서 온양을 오갈 때 늘 간소한 행차를 차렸다. 하루는 맹사성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양성(안성)과 진위(평택)의 수령들이 장호원에서 영접하러 나갔다. 두 수령은 맹사성 재상의 행차가 뻑적지근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두 수령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남루한 행색의 선비가 있지 않은가. 두 수령이 선비의 하인을 불러 “이 무슨 무례냐”고 꾸짖었더니 지나치던 선비는 “온양에 사는 맹고불(맹사성의 호)이라 여쭈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두 수령은 깜짝 놀라 줄행랑 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도장(印)을 떨어뜨렸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했다.

재미있는 ‘공당’ 놀이도 인구에 회자된다. 

즉 맹사성이 온양에 들렀다가 조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지금의 경기 용인의 여원(旅院)에 들렀다. 이때 아주 성대한 행차를 꾸민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아 있었으므로 맹사성은 한쪽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는 의정부 녹사(중앙부처 상급서리) 시험을 보러가던 사람이었다. 이야기도 나누고 장기도 두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재미삼아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말끝마다 넣는 게임을 시작했다.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가는공.”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무슨 벼슬인공.” “녹사 취재이당.”

맹사성이 이때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 하니 그 사람은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이라 대답했다. 

서울에 올라와 녹사 시험을 주관한 맹사성은 응시자 자격으로 들어온 그 사람에게 다짜고짜 “어떠한공” 했다. 처음엔 맹사성을 몰라봤던 그 사람은 “어떠한공” 소리에 비로소 깨닫고는 갑자기 “난 이제 죽었지당”이라 답했다. 

영문을 모르던 다른 재상들이 모두 괴이쩍게 여겼다. 맹사성이 자초지종을 말하니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그 사람은 맹사성의 추천으로 합격증을 받아 의정부 녹사가 됐다. 이후에도 맹사성 덕분에 여러차례 고을의 수령으로 일했다. 후세사람들은 이것을 ‘공당 문답’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의 감각으로는 전형적인 아재개그가 아닌가.

고불 맹사성의 친필로 추정되는 ‘득팔자’ 시편. 맹사성이 전주에 사는 박효자라는 인물을 천거하면서 쓴 시가이다. |김문웅씨  제공


■“맹사성을 매우 쳐라! 죽여도 좋다”고 앙앙불락한 태종  

실록에 기록된 맹사성 졸기는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며, 오히려 그것이 단점으로 작용했다”고 평했다. 

“조정의 큰 일이나 정사를 돌봄에 있어 과단성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인물평을 종합해보면 맹사성은 상대방을 늘 배려하고 욕을 먹지 않으며 타고난 검소함을 바탕으로 별다른 굴곡과 대과없이 오래 재상직을 유지했던 인물로 비친다. 하기야 1427년(세종 9년) 1월 황희(좌의정)과 함께 재상의 반열(우의정)에 오른 맹사성이 1435년(세종 17년) 2월 무려 76살의 나이로, 그것도 좌의정직에서 은퇴했으니 그런 평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맹사성의 벼슬길은 그렇게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조선 개국 이후 13년 2개월 동안 1번의 좌천, 4번의 파직, 2번의 유배를 경험했다. 특히 1408년(태종 8년)에는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것이 이른바 조대림 사건이었다. 맹사성은 역린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죽음 일보직전까지 내몰렸다. 그의 아들 맹귀미는 장살당했다.

때는 바야흐로 1408년 12월9일 맹사성이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에 제수된 지 한 달 만에 일어났다.

문제의 인물인 조대림(1387~1430)은 태종의 차녀인 경정궁주(1387~1455))의 남편이자 개국공신 조준(1346~1405)의 아들이었다. 조대림은 당시 22살에 불과했다. 

그런데 조대림의 집에 출입하던 관노 출신의 목인해가 조대림을 이용하여 부귀를 도모했다. 목인해는 당시 총제(조선 삼군 도총제부에 두었던 버금 벼슬아치·지금의 부사령관)의 지위에 있는 조대림에게 군사를 움직이게 했다. 조대림을 반역자로 몰아 공을 세우고자 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목인해의 모함으로 인해 조대림은 국문을 당했다. 그러나 수사결과 조대림이 목인해의 계략에 넘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목인해는 능지처참 당했다.

그런데 이때 맹사성 등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관들은 “조대림을 다시 옥에 가둬야 한다”면서 “조대림과 목인해를 주범과 종범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태종은 “조대림은 본래 죄가 없는데 맹사성 등이 굳이 주범과 종범을 나누는 이유가 뭐냐. ‘왕실을 약하게 하려고 도모하는 것(謀弱王室)이냐. 맹사성 등의 진술서에 반드시 ‘모약왕실’이라는 네 글자를 받으라”고 펄펄 뛰었다.

태종은 한발 더 나아갔다.

“‘모약왕실’이라는 네글자 진술을 받을 때까지 매우 쳐라. 만일 승복하지 않거든 모질게 때려라. 죽어도 좋다.”

끝내 ‘모약왕실’의 진술을 하지 않으면 죽여도 좋다는 것이었다. 결국 대사헌 맹사성을 비롯, 사간원 우사간 서선, 지사간 박고, 우정언 이안유 등이 매를 견디지 못하여 모두 승복했다. 태종은 맹사성의 아들이자 사헌부 감찰인 맹귀미까지 가둬 죽이려 했다.


김문웅씨가 공개한 ‘맹사성 왕지’와 ‘팔득자’ 시편은 조선후기 영조연간의 문인인 신경(1696~?)의 문집인 <직임집>에 그대로 소개된다. 맹사성의 후손들이 신경을 찾아와 이 두 자료를 보여주며 ‘문집에 이 자료를 기록해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군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면 아무래도 좋다”

옥사가 일어나자 감옥에 갇혀있던 사간원 좌정언 박안신(1369~1447)이 맹사성에게 “서로 얼굴이나 보고 한마디 말이나 하고 죽자”고 했다. 이에 맹사성은 작은 종이 쪽지에 “충신이 그 직책으로 인해 죽는 것이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요, 조종(祖宗)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라는 글을 써서 박안신에게 보여주었다. 

비록 군주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만 그 직책(대간)을 다한 것 때문에 죽는 것이라면 기꺼이 군주와 사직을 위해 죽겠다는 것이었다. 맹사성의 쪽지에 감탄한 박안신은 시를 지어 감옥의 벽에 크게 써붙였다.

“다행히 1000년 만에 황하의 물이 맑을 때를 만났으니, 군왕이 스스로 성명(聖明)하리라고 생각했다. 네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달갑게 죽음에 나가나, 임금이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이름을 얻을 것이 염려된다.”

맹사성 등의 운명은 바람 앞 등불이었다. 화가 풀리지 않은 태종은 이틀 뒤인 12월11일 대간·간관들을 모두 가둬버린 뒤 “맹사성·서선·박안신·이안유와 맹귀미를 모두 극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다. 특히 태종은 “백관이 저잣거리에 모여 그들의 형집행을 감독하라”고 명하고는 내관들을 시켜 “빨리 집행하라”고 독촉했다. 이에 대소신료들은 아연실색했다. 


■원로대신까지 충출동한 맹사성 구명운동

드디어 안성군 이숙번(1373~1440)이 나서 “맹사성의 직책이 (대사헌이고 직언을 서슴치않아야 할) 언관이어서 국가를 위해 간언한 것 뿐인데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느냐”고 변호해주었다. 그러나 태종이 펄펄 뛰며 “경(이숙번)은 공사를 구별할 줄 모르느냐. 누구의 말을 듣고 이렇게 사사로운 변명을 해주는 것이냐”고 다그쳤다. 

태종 이방원의 최측근이자 두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평정한 정사공신 이숙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전하를 따랐던 신의 마음을 전하께서는 아실 것입니다. 신은 남의 얘기를 들은 일도 없고, 두려워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이숙번에게 “그럼 경이 이 대사(大事)를 처리해보라”고 했다. ‘니가 임금이냐. 니가 해볼래’하고 길길이 뛴 것이다. 

이숙번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께서 일찍이 신 등에게 이르시기를, ‘모진 매 앞에서는 누구도 버틸 재간이 없다’ 하셨습니다. 맹사성이 심한 고문을 받고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모약왕실(謀弱王室)’이라고 자백했습니다. 지금 이것으로 극형을 가하는 것이 가합니까.”

태종은 지신사(도승지) 황희에게 얼굴을 돌려 “많은 재상들이 이따위 말을 아뢰러 오는데 너는 어찌하여 (재상들을) 막지 못했느냐”고 책망했다. 이숙번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만일 이 사람들을 반드시 사형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머리를 깎고 도망하겠다”고까지 했다. 

이숙번에 이어 원로대신들까지 줄줄이 나섰다. 권근(1352~1409)이 병든 몸을 이끌고 가마를 타고 달려온데 이어 영의정부사 하륜(1347~1416), 좌정승 성석린(1338~1423), 영삼군사 조영무(1338~1413년) 등이 대궐 뜰에 나와 맹사성 등의 극형은 불가하다고 입을 모았다. 하륜은 “맹사성은 모반한 것도 아니고, 무고한 것도 아니며, 다만 공무를 집행하면서 실수한 것인데 그 죄로 극형을 당하면 어찌 정리에 맞겠느냐”고 호소했다. 성석린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느니보다는, 차라리 법을 굽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으로 민심을 흡족시키는 것이 신들의 소원”이라고 간청했다. 조영무 역시 “신이 맹사성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며, 대간(간관)을 변명하자는 것도 아니”라면서 “그저 전하의 덕을 돕고자 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태종은 하륜에게 “그럼 내 잘못이라는 거냐. 공무를 어떻게 실수할 수가 있느냐”고 다그쳤다. 하륜은 이에 “예전에 군주가 형벌을 결단하려면 반드시 세번 혹은 다섯번의 상소(三復奏 五復奏)를 기다렸다”면서 “신은 동방에 주상과 같은 성군이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미처 몰랐다”고 통곡했다. 

군주가 사형판결 등의 결단을 내릴 때는 3번 혹은 5번의 이의제기 상소를 기다리는 게 도리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하륜은 “태종 임금이 이렇게 쉽게 사형집행을 내리는 군주일 줄 몰랐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자 다소 누그러진 태종은 “내가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경들이 알지 않느냐”면서 “아무리 여러번 생각해봐도 맹사성의 죄는 죽여야 마땅하지만 경들이 이렇게까지 간하니, 내가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이미 맹사성을 비롯한 죄인들이 저잣거리에서 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하륜 등은 “빨리 명을 거두지 않으면 사형이 집행될 것”이라고 독촉하자 태종은 마지못해 사형판결을 철회했다.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가볍게 바꿀 수 없지만 임금이 혼자서만 국가를 다스릴 수 없다. 경들도 어찌 나를 불의(不義)에 빠뜨리고자 하겠는가? 경들의 말을 따르겠다. 경들도 왕실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모하라.”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맹사성

대사헌 맹사성으로서는 황천길에 접어들기 직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셈이다. 맹사성은 장 100대의 처벌과 함께 한주(충남 한산) 향교의 재복(齋僕·노복)으로 유배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아들인 맹귀미는 이듬해인 1409년(태종 9년)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 형제의 옥사와 관련된 이무(1355~1409)의 사위라는 점 때문에 구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맹귀미는 “사위는 장인의 죄에 연좌되지 않는다”는 태종의 명으로 풀려났지만 취조과정에서 입은 장독(杖毒) 때문에 결국 사망했다.  

맹사성으로서는 눈 온 뒤에 서리내린 격이었다. 사선을 넘나들던 자신의 처지도 딱했는데, 생때같은 외아들까지 잃었으니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는가. 그러나 맹사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도 “충신이 그 직책으로 인해 죽는 것이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라면서 ‘죽어서도 충성하겠다’고 다짐한 인물이다. 시간이 지나 화가 풀린 태종이 맹사성의 가없는 충성심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맹사성의 사형집행을 막으려고 내로라하는 원로대신까지 나서서 울면서 구명운동을 펼치지 않았던가. 


■병주고 약준 태종

태종은 뻬앗았던 맹사성의 직첩(관리 임명장)을 20개월만에 돌려주고 쌀과 콩 20석을 하사하면서 잔치까지 베풀었다. 병주고 약 준 셈이다. 맹사성은 1411년(태종 11년) 판충주목사에 임명되었다가 12일 만에 공안부윤에 임명됐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맹사성을 서울에 두고 정악을 가르치는 것이 좋겠다는 예조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이후에는 예조판서와 호조판서,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충청도관찰사는 83살의 부친을 가까이서 봉양하라는 태종의 배려 아래 받은 관직이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맹사성은 승승장구한다. 예조·호조·공조판서를 1번씩, 이조판서를 2번씩 역임했다. 맹사성을 향한 태종과 세종의 두터운 신뢰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맹사성은 이후 의정부찬성사와 판좌군도총제부사, 의금부 제조 등의 경륜을 쌓았다. 후일 재상으로서의 자질을 닦는 계기가 됐다.


■황희·맹사성의 8년 투톱 체제가 출범하다

1426년(세종 8년) 전현직 관료들이 대거 연루된 뇌물수수사건(노비증여사건)이 터져 조정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 사건으로 태종 시대의 신하들이 몰락했다. 세종은 1427년(세종 9년) 1월 25일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발탁하는 등의 인사쇄신을 단행한다. ‘황희·맹사성 투톱’ 체제를 구성한 세종의 의도는 분명했다. 승하한 선왕(태종)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펼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황·맹 투톱’은 불과 5개월만에 큰 위기를 맞는다.

사건은 황희·맹사성 체제 출범 직전인 1427년 1월 초 황희가 충청도 신창에서 발생한 사위(서달)의 아전 살해사건에 개입하면서 신창이 고향인 맹사성에게 도움을 청한 일이 5개월만인 6월에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서달은 황희의 사위인데…신창현을 지나다 고을 아전이 예로 대하지 않고 달아나는 것을 괘씸하게 여겨 잡아와 묶어놓고 때렸는데…이를 본 다른 아전 표운평이…항의하자 표운평을 마구 때려 다음날 죽고 말았다.”(<세종실록> 1427년 6월21일자)

문제는 당시 찬성이던 황희가 판부사였던 맹사성의 고향이 신창이라는 것을 알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황희와 맹사성이 서달의 살인사건을 무마하려고 개입한 대형독직사건이었다. 황희·맹사성 투톱체제가 시작되자마자 찾아온 위기였다. 당시 영의정이 공석이었으므로 좌의정 황희는 사실상 총리였고 우의정 맹사성은 차상, 즉 부총리였다. 

세종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고위관료가 연루된 뇌물수수사건을 마무리 짓고 자신의 주도아래 막 정계개편을 끝냈는데, 야심차게 구성한 의정대신이 개입된 대형비리가 또다시 터지다니…. 대간들이 황희와 맹사성을 탄핵했지만 세종은 결단을 내렸다. 

의금부에 구금된 두 사람을 하루만에 풀어주었다.

그리고 좌의정, 우의정에서 파면된 두 사람의 직을 불과 2주만에 회복시켜주었다.

대사헌 이맹균(1371~1440)이 “두 사람에 대한 형벌이 너무 가볍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세종은 “자네의 말이 옳다”고 수긍하면서도 “그러나 대신의 진용퇴출(進用退出·발탁하고 해임하는 것)은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황희·맹사성을 보호해주었다.


■죽을 때까지 ‘부려먹은’ 세종의 용인술땎

세종은 이후에도 영의정을 두지않고 약 4년7개월(1427년 1~1431년 8월) 세종 동안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체제를 유지했다.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국정전반에 걸쳐 깊이 관여했다. 유능한 인재선발을 위해 과거제 운용에 대한 강경과 제술의 시행방법을 논의했고, 직접 과거시험문제를 출제했다. 맹사성은 특히 예악을 정비하는 문제에 천착했다. 예치사회에서는 예약을 국가통치의 기반으로 한다. 예를 통해 국가질서를 바로 잡고 음악을 통해 백성의 마음을 안락하게 만드는 것이 국가통치의 요체였다.

맹사성은 아악을 일신한 박연(1378~1453)과 함께 음악자문 분야에 출중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황희=좌의정, 맹사성=우의정’ 체제는 1431년(세종 13년) 9월 ‘황희=영의정, 맹사성=좌의정’ 체제로 발돋음한다. 우의정에는 권진(1357~1435)이 임명됐다. 미완의 체제였던 의정부 기능이 완전히 회복된 순간이었다. 바야흐로 세종시대 문화의 황금기가 ‘황희·맹사성’ 투톱체제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을 극진하게 대우했다.

맹사성의 경우 부친을 위해 휴가를 주었고 등창이 나자 의원과 약을 보내주었다. 두사람이 늙어서 기동하기 어렵게 되자 궤장을 하사했고, 노루를 한마리씩 하사하기도 했다. 1435년(세종 17년) 2월1일 맹사성은 좌의정의 신분으로 관직에서 은퇴한다. 

‘황희·맹사성’ 투톱체제는 무려 8년 간이나 지속됐다. 그러고보면 세종도 대단한 분이다. 맹사성의 나이 76세까지, 황희의 나이 87살까지 ‘부려먹었으니’ 말이다. 세종은 맹사성과 황희가 은퇴한 뒤에도 중요한 국사를 처리할 때 자문을 요청했다. 맹사성과 황희는 은퇴한 지 불과 3년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세종은 그야말로 ‘황희·맹사성 투톱’의 재능을 그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활용했던 셈이다. 그래도 두 분이 79세(맹사성), 90세(황희)로 천수를 누렸으니 그 또한 세종대왕의 홍복이 아닐까 싶다. 


■‘맹사성을 우의정에 임명한다’는 임명장의 발굴

최근 교지연구가인 김문웅씨(79·전 국가안전보장회의 행정실장)가 세종 임금이 맹사성(1360~1438)을 우의정으로 임명한 왕지(王旨)와 맹사성의 친필로 추정되는 시를 경향신문에 공개했다. 황희 정승과 투톱을 이루며 세종의 치세를 이끈 맹사성이 정승으로서 첫발을 내딛으며 받은 임명장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왕지’는 명나라 선종(재위 1425~1435) 때의 연호(1426~1435)인 ‘선덕 2년 2월16일’이라고 돼있다. 1427년 2월16일이라는 뜻이다. ‘왕지’의 끝에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조선국왕지인’은 명나라 황제(영락제·재위 1402~1424)가 1403년(태종 3년)에 보낸 도장이다. 성종 때부터는 중국과의 외교문서에만 ‘조선국왕지인’을 찍었고, 각종 교지와 교서에는 ‘시명지보’를 썼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왕지’의 명칭은 1435(세종 17년)~1443년(세종 25년) 사이 ‘교지(敎旨)’로 바뀐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왕지’ 중 국보는 1건도 없고, 보물만 11건 지정돼있다. 

특히 ‘맹사성 왕지’의 ‘맹사성’ 이름자 바로 옆에 찍힌 ‘삐침’이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김문웅씨는 “이것은 맹사성의 임명장임을 알리는 세종대왕의 확인점일 가능성이 짙다”고 밝혔다. 세종대왕의 치세를 함께 할 인재를 구했다는 안도감과 기쁨이 섞인 ‘확인점’이라는 것이다. 김문웅씨는 이 ‘맹사성 왕지’와 함께 맹사성의 친필로 추정되는 ‘(박효자)에게 팔자를 얻어주다(得八字)’는 제목의 시고를 공개했다. 맹사성이 ‘견성(전주)에 살고 있는 박씨 효자를 추천하면서 지은 시고’이다. 


■‘보물급 유물이 틀림없다’

이번에 김문웅씨가 공개한 맹사성의 우의정 임명장인 ‘왕지’와 ‘박씨효자 득팔자’ 시고가 영조 연간의 문신인 신경(1696∼?)의 문집인 <직암집>에 그대로 등장한다. <직암집>에는 ‘맹사성 왕지’와 ‘득팔자’ 시고가 실린 내력을 아주 흥미롭게 밝히고 있다. 

즉 맹사성의 후손인 맹숙춘과 맹여화가 신경을 찾아와 ‘맹사성 왕지’와 ‘득팔자’ 시고를 보여주며 “한마디 말로 기록해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신경은 <직암집>에서 (신경의 조상인) 신개(1374~1446)와 맹사성이 함께 세종의 치세를 이끈 인연을 소개하며 “기꺼이 맹사성을 위한 글을 기록으로 남긴다”고 했다. 특히 신경은 “임진왜란 등 전쟁의 와중에 온전하게 남아있는 문적이 거의 없는데 이렇게 300년간이나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으니 얼마나 기이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냐”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신경은 “맹씨의 후손인 맹여화는 ‘왕지와 시고’를 위·아래로 나란히 놓고 합해서 하나의 시첩을 만들어 먼 후손에 전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는 글로 마무리했다. 이 ‘왕지’와 ‘시고’가 이번에 공개된 것이다. ‘맹사성 왕지’와 친필추정 ‘득팔자’ 추정 시편을 공개한 김문웅씨는 “보물로 지정된 왕지가 몇 건 있지만 조선 재상의 롤모델이자 청백리로서 대중적인 이미지를 지닌 맹사성의 임명장, 그것도 세종의 확인점까지 찍힌 유물인 점에서 획기적인 자료”라고 말했다. 영조 연간의 인물인 신경이 300년만에 실견한 '맹사성 관련 유물'이 다기 30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이정주, ‘조선~태종 연간 맹사성의 정치적 좌절과 극복’, <조선시대사학보> 50집, 조선시대사학회, 2009

김일환, ‘고불 맹사성의 재상정치활동 연구‘, <포은학연구> 제19권, 포은학회, 2017

맹온재, <고불 맹사성 연구>, 국립국악원,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