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만2080점 vs 1500여점(360여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홈페이지를 보면 첫장에 노출되는 숫자가 보인다. 그때그때 업데이트되는 숫자는 나라 밖에 흩어진 한국 문화재의 숫자를 가리킨다. 아마도 문화유산을 빼앗긴 그런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자는 의미와 함께 반드시 찾아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다짐도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의미의 숫자가 있으니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의 ‘360여건 1500여점’의 유물이다. 

이번에 복원을 끝내고 처음 진본전시되는 ‘창조신 복희와 여와도’. 투르판 아스타나에서 출토된 7세기 유물이며, 삼베에 채색한 그림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수집품인가 약탈품인가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근 상설전시관 3층을 ‘세계문화관’으로 개편하면서 이 가운데 ‘창조신 복희와 여와’ 등 81건 154점을 전시 중이다. ‘360여건 1500여점’은 바로 ‘오타니 컬렉션’으로 통하는 중앙아시아 유물이다. 일본의 백작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6~1948)가 조직한 중앙아시아 탐험대가 20세기초 3차례 ‘수집한(?)’ 유물들이다. 물론 이 중에는 값을 치른 구입품도 있지만, 발굴이라는 미명 아래 무단 반출한, 이른바 약탈품의 수도 무시못한다. 게다가 현지인 꼬드겨 헐값에 유물을 넘겨받은 예까지 친다면 ‘오타니 수집품(컬렉션)’보다는 ‘오타니 약탈품’이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이유야 어떻든 참 신기한 일이기는 하다. 다른 곳도 아닌 국립중앙박물관에 약탈문화재가 있다니 말이다. 18만점이 넘는 문화유산을 속절없이 잃어버린 틈에, 어떻게 일본인이 수집·무단반입·약탈한 중앙아시아 문화재를 1500여 점이나 갖게 된 것일까. 


■먹이 본 상어떼처럼…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1833~1905)이 명명한 ‘실크로드’는 예부터 동과 서를 잇는 몇개의 교역로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실크로드가 지나는 길은 황량한 사막이거나 만년설을 이고 있는 준령이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다. 다행히 만년설에서 녹은 물이 미미하게 흘러 형성된 오아시스가 교역로를 지나는 여행객과 상인, 낙타와 말을 살려주었다. 이 오아시스를 점점이 연결하며 길게 뻗은 길이 바로 실크로드이다. 

투르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굴에서 절취한 벽화. 갑옷을 입은 2명의 인물이 공양물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벽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중국의 비단을 동경한 서역인들은 검은 모래바람에 시달리며 동으로 향했다. 곤륜(崑崙)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 서역남로를 통해 온 이들은 누란왕국에, 천산(天山)산맥 남쪽 기슭의 북로를 통해온 사람들은 언기국(焉耆·카라샤르)에 도착해서 일단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한 문명의 흔적들은 길게는 수천년, 짧게는 수백년 강한 사막의 모래바람에 묻혀있었다.

19세기에 들면서 중앙아시아에서 격변이 일어난다. 투르크계(위그르족) 이슬람교도인 무함마드 야쿱 벡(1820~1877)이 이끄는 군대가 청나라군을 축출하고 이른바 카쉬가리아 정권(1864~1877)을 세우기도 했다. 그 무렵 영국과 러시아는 혼란기를 틈타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양국은 타림 분지를 양국 세력의 완충지대로 삼자는 합의에 따라 카슈가르에 각각의 총영사관을 두고 대대적인 지리 및 군사적인 조사에 나섰다. 

그런데 이곳에서 다량의 고문서와 직물·목재류 등 유기질 유물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일약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때는 국제공동조사가 거론되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걸렸으니 성사될리 없었다. 급기야 각국 탐험대는 마치 먹잇감에 달려드는 상어떼처럼 중앙아시아 유물을 싹쓸이해갔다. 

오타니 고즈이 백작. 오타니는 정토진종(일본 불교의 종파 중 하나) 본원사파(本願寺派·혼간지파)의 본산인 서본원사(西本願寺·니시혼간지)의 22대 세습 문주(門主·일파의 법통을 이은 지도자)였다. 오타니는 1900년대초 세차례에 걸쳐 탐사대를 조직해 중앙아시아 지역의 유물을 수집 반출 약탈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왕원록 도사가 발견한 희대의 보물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돈황(敦煌·둔황) 천불동에 조성된 막고굴 제17굴을 둘러싼 경쟁적인 유물 반출이다. 돈황에서 20㎞ 정도 떨어진 천불동은 동서양을 오가는 순례자·상인 등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출발자들은 미지의 세계에서 닥칠 지 모르는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신앙의 힘을 빌렸다. 서방에서 천신만고 끝에 돈황에 도착한 여행자들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어했다. 오아시스 지역인 천불동에는 마침 명사산 산록 일대에 길이 1.6㎞ 정도의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지역 사람들은 ‘절벽에 석굴을 조성해서 불상과 벽화로 아름답게 꾸며 이것을 부처님에게 봉헌하면 된다’고 여행객들을 꼬드겼다. 그렇게 4세기 중엽부터 13세기까지 조성된 1000개 이상의 석굴사원 중에 남아있는 것은 492곳 정도라 한다.

그런데 19세기말 제대군인 출신인 왕원록(王圓록)이라는 인물이 도사를 자청하며 막고굴에 정착했다. 그런데 1900년 왕 도사가 인부를 데리고 제16호굴을 청소하다가 벽면 하부에 생긴 틈을 발견했다. 왕도사는 귀를 대고 벽면을 두들겼고, 속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벽면을 무너뜨렸더니 작은 문이 나왔고, 내부에 많은 경전·문서·그림 등이 빼곡히 쌓인 작은 방이 발견됐다. 16굴의 북벽에 완전히 막혀있던 이른바 ‘장경동’(경전이 소장된 굴)이라는 이름의 17굴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왕도사는 이 사실을 감숙성(甘肅省·간쑤성) 관리에게 보고했지만 “유물 이동 경비가 은 5000~6000냥이 된다”며 “그냥 현장을 밀봉하라”는 명을 받았다. 왕도사는 낙담하고 말았다.

투르판 무르투크(木頭溝)에서 출토된 8~9세기 여인상. ‘여인’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타니 컬렉션 가운데 대표유물이다. 조형적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보아 베레클리크 석굴사원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마침 동투르크스탄을 조사중이던 영국 탐험가 마크 오렐 스타인(1862~1943)이 이 소식을 듣고 막고굴로 달려왔다.(1907년 3월) 스타인은 두 달이나 기다려 탁발하고 돌아온 왕도사를 만나(5월21일) “석굴을 측량하고 벽화를 촬영하고 싶다”고 운을 뗐다. 갖가지 언사로 왕도사를 꼬드긴 스타인은 결국 16개월 뒤 고문서 24상자와 회화 및 자수품 등 미술품 5상자 등을 무사히 영국으로 반출해갔다. 스타인이 지불한 돈은 130파운드에 불과했다. 스타인이 이후에도 두차례 더 막고굴을 방문했는데, 그렇게 수집한 막고굴 유물은 총 1만점 남짓이었고 그중 한문문서는 8102점에 달했다. 스타인 뿐이 아니었다.

프랑스인인 폴 펠리오(1878~1945)는 이듬해인 1908년 2월 막고굴에 도착해서 앞서 스타인이 빼먹은 고문서·고고품 등 5000여점을 쓸어갔다. 펠리오는 가져간 유물 일부를 남경(南京·난징)과 천진(天津·텐진), 북경(北京·베이징) 등에서 공개했다. 육조시대(229~589년)부터 당나라 시대(618~907)에 걸친 고색창연한 사경과 경전을 본 청나라 고증학자들은 경악했다. 청말의 금석·서화 소장가인 단방(端方·1861~1911)은 “일부분이라도 좋으니 도로 팔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지만 펠리오는 단칼에 잘랐다.

“아직 돈황에 좋은 유물이 잔뜩 남아있습니다.” 

투르판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오타니 탐험대가 이곳의 석굴에서 벽화를 뜯어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삭줍기로 돈황 유물 탈탈 털어간 일본인 오타니

충격을 받은 청나라 조정은 그제서야 “돈황의 막고굴 유물들을 북경으로 모두 실어오라”는 명을 내렸다.(1910년) 뒤늦게 북경의 경사 도서관으로 이전된 막고굴 고문서·책은 낱장까지 포함해서 1만점에 육박한다. 하지만 왕원록 도사는 교활한 인물이었다. 어느 틈인가 막고굴 유물 일부를 빼돌려 은닉해놓은 뒤였다. 그 왕원록이 ‘인마이포켓’한 막고굴 유물을 챙긴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인 오타니가 파견한 탐험대였다. 1912년 2월 오타니가 파견한 승려 다치바나 즈이초(橘瑞超·1890~1968)와 요시카와 고이치로(吉川小一郞·1880~1936)가 돈황을 찾았다. 둘은 이때 이른바 돈황문서를 500여권을 입수했다. 

오타니의 별장인 효고(兵庫)현 니라쿠소(二樂莊). 오타니 수집품이 이곳에 소장돼 있었다. 1916년 이 니라쿠소를 구입한 광산재벌이 중앙아시아 유물 360여건 1500여점을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나 또한 스타인 박사가 남겨놓은 것과 절의 승려 등이 은닉해 둔 것을 모아서 가져왔습니다. 돈황은 예부터 불교가 매우 융성했던 곳으로 천불동 내의 불상조각이나 벽화 등은 불교 동점 사상 사장 중요한 재료라는 것은 물론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다치바나의 여행기 <중아탐험>)

오타니가 파견한 탐험대가 이미 스타인과 펠리오, 그리고 청나라 정부까지 나서 훑고 지나간 막고굴에서 이삭줍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유물들을 왕원록에게서 구입한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 또한 명확하지 않다. 이렇게 해서 일본(오타니 유물 포함 1000점)은 영국(1만점), 파리(5000~6000점), 북경(1만점)에 이어 4번째로 많은 돈황문서를 획득한 나라가 됐다.

중앙아시아 로프노르에서 출토된 기원전 17~15세기의 목조인면상. 이런 인면상은 샤오허(小河) 유적에서 확인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오타니 백작의 정체

그렇다면 중앙아시아로 이른바 ‘탐험대’를 보낸 오타니 고즈이는 누구이며, 왜 그가 수집(혹은 약탈)한 유물이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을까.

오타니는 경도(京都·교토)에 본부를 둔 정토진종(일본 불교의 종파 중 하나) 본원사파(本願寺派·혼간지파)의 본산인 서본원사(西本願寺·니시혼간지)의 22대 세습 문주(門主·일파의 법통을 이은 지도자)였다. 1903년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본원사의 문주직을 세습했고, 백작 작위도 계승했다.   

하지만 오타니는 속세를 떠나 평생 기도와 명상에 몰두한 진정한 의미의 성직자는 아니었다. 오타니는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영국에서 유학했으며,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이 됐다. 이후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 덕분에 한창 중앙아시아 발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중앙아시아 탐험의 개척자라는 스웨덴의 스벤 헤딘(1885~1923) 및 오렐 스타인 등과 교분을 쌓았다. 

오타니는 불교도의 입장에서 유럽에서 붐을 일으키던 중앙아시아를 바라보았다. 1915년 출간된 <서역고고도보>에 게재한 서문에 오타니의 시각이 잘 나타나있다.

기원전 17~15세기 유적인 로프노르에서 출토된 바구니.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탐험대를 조직한 목표는 불교의 동진 경로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옛 중국 구법승의 이동로 흔적을 찾고, 이슬람교도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 불교가 받은 압박 상황을 밝히고, 중앙아시아에 남아있는 불상과 불경, 불구(佛具) 등을 수집하고, 나아가서는 지리·지질·기상학의 자료를 찾고자 했다.” 

오타니는 1902년부터 1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 전역에 이른바 탐사대를 보내 벽화 등 수많은 유물을 수집·반출·약탈해왔다. 모든 비용은 서본원사(니시혼간지)가 댔다. 


■베제클리크 벽화 등 50여상자 반출

오타니가 직접 이끈 1차 탐험대(1902~04)는 인도팀과 중앙아시아팀으로 나눠 활동했다. 특히 중앙아시아팀은 카슈가르(疏勒)와 호탄(和田) 등을 거쳐 사막을 넘어 고창(高昌·투르판) 서쪽에 있는 쿠차(庫車)의 석굴에 4개월 머물며 키질(克孜爾)의 천불동을 외국탐험대로는 처음으로 관측 조사하고 벽화와 장식품을 챙겼다. 1903년에는 투르판(吐魯番)의 베제클리크 석굴을 찾아 몇몇 벽화를 절취해가는 등 다수의 벽화와 불경, 조상(彫像)의 단편들을 챙겨갔다, 

사람 모양의 나무장신구. 기원전 17~15세기 유적인 로프노르에서 출토됐다. 나무와 털실, 깃털 등으로 만들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오타니는 러·일 전쟁의 여파가 가라앉은 1908~09년 2차 탐사대를 출발시켰다. 이때 참여한 대원이 18살의 승려인 다치나바 즈이초와 러일전쟁 때 포병으로 종군한 이력이 있는 노무라 에이자부로였다. 이때 영국 정보부대는 오타니 탐험대를 스파이 감사 차원에서 줄곧 미행했다고 한다. 

탐사대는 키질과 쿰트라 석굴에서 수많은 불경과 벽화를 반출했고, 호탄 지역에서는 불상을 수집했다. 이때도 오타니 탐험대는 베제클리크 (伯孜克里克)제15호굴에서 서원화(誓願畵·불교에서 바라는 바를 이루겠다고 맹세하는 주제의 그림) 단편들을 절취해갔다. 제2차 오타니 탐험대의 가장 큰 수확은 누란(樓蘭)에서 찾아낸 4세기 초의 유물인 ‘이백 문서’라 할 수 있다. 또 미란에서 뜯어온 벽화 등도 있다. 오타니 탐험대가 2차 탐험에서 반출해온 유물은 불상·벽화·고문서 등 50여 상자에 달한다.

오타니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치바나를 중심으로 한 3차 탐험대를 보낸다.(1910~14년) 앞서 언급했듯 돈황 막고굴에서 왕원록 도사가 숨겨놓은 마지막 유물(당나라 경전 등)을 낱알까지 훑어간 것이 바로 이때이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미란 유적에서 3~4세기 초기 불교 벽화들을 챙겼다.  

이들은 투르판 토유크에서 불교경전을, 아스타나와 고창 고분에서 비석을 비롯한 부장품들이 작성된 고문헌, 문서, 직물 등을 입수했다. 이른바 오타니 탐험대가 가져온 유물들은 일본 국내 학자들에 의해 조사·전시·출판됐다. 특히 호탄(和田)과 쿰트라(庫木吐喇) 출토 불상과 키질(克孜爾)와 토유크 벽화와 불화 등이 소개됐다,

그러나 이 오타니 탐험대의 약점은 서구 열강의 탐험대와 달리 상세 보고서는커녕 발굴품들의 출처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굴조사라는 미명아래 유적을 마구 파헤쳐놓고 상세한 보고서를 남기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의 한반도를 연상해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학술적인 깊이 없는 승려들이 주도한 중앙아시아 탐사는 ‘마구잡이 약탈’이라고 폄하해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오타니 탐험대의 1차여정(1902~04). 오타니 백작이 직접 탐사에 나섰다. 4개월간 키질석굴을 조사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횡령·위조사건 때문에 산산이 흩어진 유물들

이른바 오타니 수집품은 오타니의 별장인 병고(兵庫·효고)현 이락장(二樂莊·니라쿠소)에 보관됐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현재 일본, 중국, 한국 등의 여러 기관(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과 개인 컬렉션으로 흩어져있다. 

무슨 곡절이 있기에 그렇게 산산이 흩어졌을까. 

2차 탐사대의 여정(1908~09). 불상 벽화 고문서 등 50여 상자의 유물을 빼갔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3차 탐험이 끝나던 해인 1914년 2월 터진 일련의 횡령·위조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오타니가 문주로 있던 서본원사 승려 5명이 교단 부속의 재단 자금을 유용한 혐의로 교토 감옥에 수감됐다, 이때 오타니는 책임을 지고 문주직에서 물러난다. 오타니와 교단은 당시 자금난에 빠져있었다. 오타니가 10여년간 쓴 탐험비용만 경도(京都·교토)시의 1년 예산에 해당될만큼 엄청났으니 말이다.  

오타니의 3차탐사(1910~14). 돈황 막고굴에서 돈황문서 500여점을 챙겼다. 이밖에도 투르판과 누란 미란 등에서 벽화들을 대거 수집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오타니는 10개월 뒤인 1914년 중국 여순(뤼순·旅順)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때 1714건에 이르는 유물(문서는 110건 2만6433점)이 중국으로 건너가 국립여순박물관을 거쳐 지금은 중국국가도서관에 소장돼있다. 

또 1948년 10월 오타니 사망 이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2개의 나무상자가 발견됐다. 이 나무상자들은 오타니가 여순으로 옮기려다가 무위에 그친 것들이다. 그런데 이 나무상자에는 오타니 수집 중 가장 유명한 이백문서(4세기초 이백이라는 인물이 쓴 죽간) 등 9000여 점의 유물이 들어있었다. 그것이 용곡대(龍谷大·류코쿠대) 도서관에 기증됐다. 국립동경(東京·도쿄)국립박물관도 600여점의 오타니 수집유물을 갖고 있다.  

1916년 조선총독부 수정전에 전시된 오타나 컬렉션의 벽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가운데는 유독 벽화가 많다. 오타니가 여순(뤼순)으로 거처를 옮길 때 주로 불교경전 등 문서류만 가지고 갔고, 부피가 큰 유물들은 남겨놓았기 때문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광산재벌은 왜 조선총독에게 기증했을까

나머지가 바로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360여건 1500여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유물이 뿔뿔이 흩어질 때 맨 마지막까지 니라쿠소에 남아있던 것들이다. 오타니는 여순으로 떠나면서 3차 탐험대를 이끈 심복 다치바나와 요시카와에게 이락장(니라쿠소)을 맡겼다. 오타니의 별장인 이락장(니라쿠소)은 인도양식을 혼합한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이 이락장은 급기야 1916년 1월 상공대신을 지낸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1869~1965)에게 넘어갔는데, 이때 별장 지하실에 소장된 중앙아시아 유물까지 덤으로 묻어갔다.

그런데 광산재벌이기도 한 구하라라는 인물은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와 동향(山口縣·야마구치현)이었다. 구하라는 덤으로 얻은 오타니 수집품을 데라우치에게 기증 형식으로 인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장사꾼인 구하라가 아무런 대가없이 이 유물을 고향선배라는 이유만으로 데라우치에게 넘겼을리는 없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학계에서는 아마도 조선 내에서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등 조선총독부의 이권사업을 노리기 위해 이 유물을 데라우치에게 뇌물로 넘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타니 수집품이 소장됐던 이락장은 1932년 화재로 소실됐다. 한국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면 이 유물들은 한 줌의 재로 변했을 것이다. 참 이것도 운명은 운명이다.


■주로 벽화가 남은 이유 

아무튼 이락장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유물 360여건 1500여점은 1916년 4월30일 고베(神戶)를 떠나 5월 서울의 경복궁 수정전에 보관 전시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타니 컬렉션의 특징은 문서자료가 거의 없고, 벽화가 중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오타니가 여순으로 떠날 때 부피가 큰 유물을 들고가지는 못했기 때문이리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타니 컬렉션 중 벽화는 총 60건 62점이다. 이중 기존 연구로 주제와 출토유적이 밝혀진 유물이 38건 정도 되는데, 투르판 지역에서 최대 석굴사원인 베제클리크 출토 ‘서원화’가 26점이다. 나머지는 야르호(雅爾湖·5점), 쿰트라(4점), 키질(2점), 미란(米蘭·1점 등 순이다. 이밖에도 신강 위구르 자치구 동남부에 자리잡고 있는 로프노르(羅布泊)와 누란(樓蘭)에서 수집한 목조인면상과 뱀 미라, 바구니, 인형목장구, 모자, 가죽신발, 목제기둥, 향로와 세발단지, 벼루 등이 있다. 흙으로 빚은 소조상으로는 호탄에서 출토된 ‘세라피스’(귀인의 상)과 ‘서있는 작은 부처’ 등과 ‘부처의 머리’ ‘보살의 머리’ ‘불교 신의 머리’ ‘바라문의 머리’ 등 머리 시리즈, 그리고 ‘여인상’과 ‘흙에 찍은 부처와 스투파’, ‘명상하는 승려’, ‘관음보살’, ‘분노하는 형상의 신’ 등이 있다.


■선의의 취득국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스웨덴(스벤 헤딘)·영국(오렐 스타인)·독일(폰 르콕)·프랑스(폴 펠리오)·미국(랭던 워너)에 이어 일본(오타니)까지…. 패권주의를 과시하면서 경쟁적으로 중앙아시아 유물을 톤(t) 단위로 빼간 이들은 1984년 출간된 피터 홉워크의 단행본 제목처럼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싸다. 지금 중앙아시아 유물들은 최소 13개국의 30개 박물관과 연구기관에 흩어져있다. 

영국·프랑스·스웨덴·독일·러시아·미국·인도·일본·대만·핀란드·중국 등 중앙아시아 유물들을 소장한 나라 중 ‘대한민국’이 끼어있다. 어찌보면 ‘약탈문화재를 소장한 나라’라는 반갑지 않은 오명을 안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가해국이 아니라 선의취득국이 아닌가. 뭐 언젠가는 중앙아시아인들에게 돌려줄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오타니 수집품들이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유물이라면 지금 이 순간 어느 나라로 돌려줘야 한단 말인가. 상설전시관에 마련된 이른바 중앙아시아 유물들을 살펴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경로로 들어왔던지 수중에 들어온 문화유산인만큼 탁월하고도 보편적인 가치에 걸맞은 대접을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는….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나카사와 카즈토시, <돈황의 역사와 문화>, 민병훈 옮김, 사게절, 2010

피터 홉커크, <실코로드의 악마들>, 김영종 옮김, 사계절, 2000

김혜원·강건우·강인욱,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로프노르·누란 출토품>(일제강점기 자료조사 보고 21집), 국립중앙박물관, 2016

민병훈·김혜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종교회화>(일제강점기 자료조사보고 7집), 국립중앙박물관, 2013

김혜원·조연태·박학수·윤은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앙아시아 종교·조각>(일제강점기 자료조사보고 8집>, 국립중앙박물관, 2013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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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duhan 2020.01.08 15: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구 열강의 박물관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약탈물 전시장이다.그러나 만약 현지에 있었다면, 가치를 모르는 현지인이 헛된 죽어 버렸을 것이다.

    • 아베진삼 2020.01.13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 고마워 죽겠다.. 현지인이 다 죽여 없앨지 모르니 더 갖구가서 보관해 줘..

    • 아베진삼 2020.01.13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또라이 또라이 상또라이

    • kimduhan 2020.01.14 1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실에 일본이 복원되기 전 석굴암은 붕괴하고 있어 전혀 보호되지 않았다.그 예술적 가치를 조선 시대의 한국인은 전혀 몰랐다.

    • Abe 2020.01.17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제강점기 때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전실과 주실 전체를 시멘트로 1미터 이상 덮어버린다. 다음은 비도의 윗부분에도 시멘트를 이용해 석축옹벽을 쌓고, 진입로 역시 이전에 있던 좌우 돌담을 기준으로 시멘트 석축옹벽으로 개조한다.[3] 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 kimduhan 2020.01.17 1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주 불국사 석굴암을 시멘트 돔으로 감싼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석굴암을 훼손하기 위해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문화재 인식과 기술로는 그게 최선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두었더라면, 그게 현재까지 남아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마 더 심각하게 훼손되었을 거다.

      이러한 일을 모두 식민 통치기 일본의 잘못으로 귀결시키는 일은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짓이다. 문제는 외부만큼이나 내부에 있다.

      https://ppss.kr/archives/185687

  2. Abe 2020.01.17 1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무당이 사람잡는 꼴이었지..
    실력없으면 그냥 두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