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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둑 쌓고 이익금 분담한 1500년전 신라 토지문서 94자 출현

결(結)과 부(負), 곡(谷)과 답(畓), 제(堤) 등 확인가능한 글자만 무려 94자…. 1500년전 신라인들이 마을에 둑을 쌓고 그 쌓은 둑 덕분에 받은 혜택에 따라 일종의 이익분담금을 냈고 그 이익분담금을 ‘결’과 ‘부’라는 토지단위로 계산했음을 시사해주는 일종의 토지 관련 문서가 경산 소월리에서 확인됐다. 이 자료는 신라의 토지제도인 결부제가 기존 문헌자료보다 100~150년 정도 앞선 시기인 6세기 중엽에 시작되었다는 추정도 가능케 한다. 또한 이 문서에는 신라판 ‘인터넷 축약글자’인 ‘답(畓)’자도 포함돼 있었다. 

목간에 쓰여진 글자. ‘감말곡’이라는 마을의 논답 7결과 ‘둑(堤) 위의 1결’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윤선태 교수는 이것을 지역할당이라고 해석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둑(堤) 둑(堤) 둑(堤)이 강조된 이유

이 문서는 지난 3일 공개된 ‘사람 얼굴 모양의 토기’와 함께 경북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목간의 형태로 출토됐다. 길이 74.2㎝가량인 이 목간은 사람 모양 토기의 아래에서 노출됐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 목간을 발굴단(화랑문화재연구원)으로부터 전달받아 지난 6일 1차 판독을 통해 굽은 나무의 표면을 다듬어 만든 총 6면(2면은 글자 연습면)에 걸쳐 약 94자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밝혀냈다”고 9일 밝혔다.

1차 판독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기록된 글자의 서체나 내용으로 보아 대체로 경산 인근 지역의 토지 현황을 기록한 ‘6세기대에 작성된 토지관리 문서 목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경산 소월리에서 발굴된 목간, 판독가능한 글자가 94여자에 달한다. 6세기 신라 시대 토지관련 문서로 추정된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차 판독에서는 확인가능한 94여자 가운데 60~70여자를 읽어냈다. 하지만 군데군데 보이지 않는 글자를 포함하면 몇자가 적혀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 예컨대 ‘감말곡 마을에 전답 7결과 제방 위의 1결(甘末谷畓七(?)□堤上一結) 등이다. 확인된 목간 글자 가운데는 ‘곡(谷)’과 ‘답(畓)’, ‘제(堤)’ 등의 글자가 특히 주목된다. ‘곡’자의 경우 골짜기(谷)를 배경으로 형성된 일정한 집단이 있었고, ‘둑’을 뜻하는 ‘제(堤)’는 조세 부과와 연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를 통해 골짜기(谷)와 둑(堤)을 중심으로 한 당시 지방 촌락의 입지,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해 축조한 제방과 그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논의 존재, 그리고 그곳을 대상으로 조세를 수취하는 중앙 정부의 지배 양상을 동시에 엿볼 수 있게 됐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특히 제방을 뜻하는 제(堤)자는 목간 밑부분에 ‘堤 堤 堤’라는 낙서가 써있을 정도로 강조되었고, 목간 내용 자체가 제(堤)자를 중심으로 상전(上田)과 하전(下田) 등으로 서술된다”고 밝히면서 “목간의 핵심어는 바로 이 제(堤)자와 작은 촌락단위인 곡(谷)자, 그리고 논을 뜻하는 답(畓)자”라고 강조했다.

주교수는 “목간의 전체적인 내용은 곡(谷)이라는 작은 마을 단위로 둑을 쌓고 쌓은 둑에 따라 생긴 저수지 덕분에 혜택을 입는 마을 주민들이 일종의 이익환수금을 ‘결과 부’라는 토지 단위로 계산한 문서”라고 풀이했다. 

1차 판독결과문 중 윗부분. 답과 결, 부자가 계속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시대판 줄임말 ‘답(畓)’자

무엇보다 논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우리 고유의 한자인 ‘답(畓)’자를 썼다는 것이 흥미롭다. 

561년(진흥왕 22년)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에 처음 등장하는 글자인데, 이번 목간에서도 보였다. 

김재홍 국민대 교수는 “답(畓)자는 물 수(水)와 밭 전(田)를 합한 말인데, 백제 등에서는 수전(水田)이라 썼지만 신라에서는 두 글자를 한글자로 합쳐서 고유의 한자인 ‘답(畓)’자로 썼다”고 밝혔다. 마치 요즘 SNS(사회관계망)상 주고받는 줄임말 같은 단어를 1500년 전 신라인들이 썼다는 얘기다. 김재홍 교수는 “무엇보다 이 목간의 제작연대가 창녕 척경비와도 비슷한 6세기 중후반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라 설명했다. 


1차 판독문 중 가운데부분. 상전과 하전이라는 표현이 보인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결부제의 출발점?

목간 내용 가운데 토지 면적 단위인 ‘결(結)’과 ‘부(負)’ 자와 관련된 다른 해석도 흥미롭다.

신라 특유의 토지제도라 할 수 있는 결부제와 관련된 글자이기 때문이다. 결은 농가 한 가구에 나누어 주기 위한 면적이었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1결의 면적이 얼마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15,447.5㎡(4700평) 정도라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결의 100분의 1인 ‘부(負)’는 글자 그대로 사람이 등에 지는 1짐을 의미하는 단위이다. 그 밑의 단위로는 ‘1속(束 묶음 단)’은 한 묶음, ‘1파(把·웅큼 주먹)’, ‘1악(握·포기 및 그루) 등이 있다. 결부제와 관련된 자료는 ‘7세기 신라’부터 잇달아 나온다.

1차 판독문 중 아랫부분. 낙서형태로 제방을 의미하는 제(堤)자를 연속으로 써놓았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삼국유사> ‘원광서학’에서는 “613년(진평왕 3년) 시주 여승이 점찰보에 밭 100결을 바쳤고, 옛 토지문서가 아직도 보존돼 있다”고 했고,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에서는 “663년(문무왕 3년) 김유신에게 500결을 하사했다”고 했다. 가장 확실한 1차 사료는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이 소장한 신라촌락문서(민정문서)이다. 이 문서는 신라중앙정부가 사해점촌·살하지촌·모촌·서원경모촌 등 4개촌의 촌명과 촌역, 가구와 인구, 우마, 토지, 수목 등의 현황과 변동 등을 촌 단위로 기록한 일종의 촌적(村籍)이다. 

그런데 이 문서에는 ‘사해점촌=19결 70부’ 등의 내용이 기록됐다. 촌락문서의 연대는 학자들에 따라 695년(효소왕 4년), 755년(경덕왕 14년), 815년(헌덕왕 7년), 875년(헌강왕 1년)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신라의 지방장악을 의미하는 문서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신라촌락문서의 연대는 ‘695년설’이 유력하다”면서 “이번에 확인된 6세기 목간의 ‘결’과 ‘부’자는 150년 정도 앞선 ‘결부제’의 생생한 증거일 수 있다”고 밝혔다. 윤선태 교수는 특히 “이번에 확인된 목간자료에는 밭 몇전, 논 몇 전 등을 할당하는 내용이 나온다”면서 “신라 중앙정부가 6세기부터 지방의 행정체계를 장악하고 사용처에 따라 할당하는 지배방식을 완성했음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자료”라 해석했다. 즉 “531년(법흥왕 18년)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했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법흥왕조’의 기사가 눈에 띈다는 것이다.

경북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출토되는 목간. 길이 74.2㎝가량인 이 목간은 사람 모양 토기의 아래에서 출토됐다. |화랑문화재연구원 제공

김재홍 교수는 “이번에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의 2차 사료에 기록으로만 등장했던 신라 7세기 초 중반의 ‘결’자와 ‘부’자가 실물자료로 나왔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전경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도 “정사인 <삼국사기> ‘문무왕조’ 기록만 따르더라도 기존에는 삼국통일 이후 사용된 것으로 여겨졌던 ‘결’과 ‘부’ 같은 토지면적 단위를 6세기까지 소급해볼 수 있는 자료가 확인된 셈”이라고 전했다.

학계는 이번 94자가 확인된 목간의 발견으로 당시 신라의 지방 지배와 토지를 중심으로 한 경제활동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차 판독에 임한 김재홍 교수 등 학자들은 이곳에서 17㎞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영천 청제비(보물 제 517호)를 주목하고 있다. 이 비석은 오늘날까지 저수지로 사용하고 있는 청못을 축조·수축한 뒤 그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536년(법흥왕 23년)에 건립됐다. 

목간과 함께 발견된 사람얼굴 모양의 토기. 3면에 사람 얼굴이 새겨져있는데, 마치 요즘의 이모티콘처럼 다양한 표정을 하고 있다. |화랑문화재연구소 제공

따라서 전문가들은 경산 소월리 부근에서도 제방의 축조와 관련된 비석이나 물막이 둑이 확인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목간은 이제 1차 판독이 끝난 상태다. 아직 읽지못한 글자도 있고, 내용과 문맥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윤선태 교수는 “목간 발굴 당시의 사진을 보니 1차 판독 때보다 글자들이 더 잘보였다”면서 “발굴 당시의 사진 등을 토대로 추가적인 판독과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종훈 소장은 “관련학계와 함께 자연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추가적인 판독과 연구 과정을 거쳐 더 다양한 해석과 내용을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