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03년부터 ‘귀부인(Monna) 리자(Lisa)’라는 뜻의 영어식 표현인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했을 때 이 그림을 가져갔다.
프랑수아 1세가 정식으로 구입했고, 훗날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근대적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루브르궁(박물관)의 전시물이 됐다. 나폴레옹이 잠깐 이 그림을 자신의 침실에 걸어두기도 했지만 1804년 반환했다.
1911년 8월 22일 청년화가 루이 벨루가 루브르 박물관의 ‘살롱 카레’ 벽에 걸려 있어야 할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림은 없고 그림을 고정해둔 못만 4개 박혀 있었다. 없어진 것은 전날이었는데 다음날 아침 9시가 될 때까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벨루가 경비원인 푸파르댕에게 “그림 어디갔냐”고 물었다. 푸파르댕은 “아마도 박물관 측에서 홍보용 사진을 찍으려고 떼어간게 아니냐”고 대수롭지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오후가 되도록 그림의 행방은 묘연했다.
전시장 뒷편 충계에서 모나리자가 담겨있던 액자와 유리 케이스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도난사실을 알게 됐다.
당국은 박물관을 1주일간 폐쇄한채 수사를 벌였다.
‘미라보 다리’를 쓴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입체파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기도 했다. 아폴리네르는 “루브르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력이 있었다.
한때 아폴니리네르의 비서였던 제리 피에레가 루브르에서 고대 이베리아의 조각상을 빼돌려 그 중 하나를 피카소에 팔아넘긴 일도 있었다. 아폴리네르와 피카소, 둘다 의심을 받을 만했지만 일주일만해 혐의를 벗었다.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범인은 2년 3개월 뒤인 1913년 11월 이탈리아에서 붙잡힌 빈센초 페루자였다. 루브르에서 훔친 모나리자를 50만 리라(10만 달러)에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에 팔려다가 덜미를 잡혔다. 페루자는 “이탈리아 국보가 프랑스에 있는 꼴을 볼 수가 없어 훔쳤노라”고 큰소리치면서 국민적 영웅이 됐다.
사실 모나리자는 미술계 외에서는 그렇게 유명한 작품은 아니었다. 도난사건 이후 급반전이 일어났다. 그저 수많은 소장품 중 하나일 뿐이던 모나리자의 위상을 일약 ‘루브르의 대표선수’로 올려놓았다.
아니 모나리자가 루브르의 소장품이 아니라 루브르가 모나리자를 모신 신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나리자는 이후 1962~63년 미국, 1974년 일본·구 소련 순회 전시 외에는 프랑스 땅을 떠난 적이 없다.
그동안에도 수난은 계속됐다. 1956년에는 누군가 던진 황산을 맞기도 했다. 또 돌멩이 세례에 왼팔꿈치 부분의 물감 색이 떨어져 나기기도 했다. 이후 방탄유리가 그림을 보호했다.
그럼에도 테러는 계속됐다. 1974년 도쿄 전시 때는 한 관람객이 장애인의 박물관 접근권 보장을 주장하며 붉은 페인트를 뿌렸다. 2004년에는 프랑스 시민권을 거부당한 러시아 여인이 박물관에서 구입한 도자기 찻잔을 던졌다.
최근 프랑스 정부가 3개월간 국내순회전시를 계획했다가 루브르박물관의 반대에 부딪쳐 보류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순회전시비용만 3500만 유로(454억원)이 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모나리자를 보려고 루브르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은 대체 어쩌란 말이냐”는 항변이 먹혔다.
국내순회마저 이렇게 난리를 떨고 있으니 해외대여전시를 겨냥했던 프랑스 정부로서는 언감생심, 입도 벙긋 할 수 없게 됐다.(이 기사는 ‘이연식의 <위작과 도난의 미술사>, 한길아트, 2008’를 참고했습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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