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5월13일 영국인 앨리슨 하그리브스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무산소 등반에 성공한 최초의 여성이자, 남녀를 통틀어 남이 설치한 고정로프에 의존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두번째 등반가였다.
정상에서 두 자녀에게 보낸 “얘들아. 엄마가 올라왔어. 사랑해”는 라디오 메시지는 영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3개월후 하그리브스는 K2 등반 중 돌풍에 휘말려 숨졌다. 향년 33살. 그러나 두 자녀의 어머니로서 너무 무책임한 등반이었다는 ‘사후 악플’이 쏟아졌다.
소설 <제인 에어>의 샬럿 브론테(1816~1855)는 당대의 계관시인 로버트 사우드리에게 자신의 작품 한편을 보낸다.
그러나 사우드리는 “문학은 여자의 일도, 여자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지독한 남녀차별의 답장을 받았다. 10년 후 동생 에밀리와 함께 낸 시집은 단 2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믿은 브론테는 19세기 영국을 뒤흔든 문제작 <제인 에어>를 썼다.
브론테는 임신 중 여러가지 병이 겹쳐 39살의 나이에 숨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뉴욕타임스가 제110회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한 지난 8일부터 다루고 있는 ‘주목받지 못한(Overlooked)’ 여성들의 부음기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뉴욕타임스는 쿠바남성의 비밀결사를 꼬집은 판화가 벨키스 에이온(1967~1999)와 중국여성혁명가 추근(秋瑾·1875~1907), 인도 여배우 마두발라(1933~1969) 등의 삶도 재조명했다.
‘1851년 창간 이후의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가 백인 남성 위주였다’는 자성에서 비롯된 때늦은 부음기사라는 설명이 달렸다. 제목도 ‘더는 간과되어서는 안될(Overlooked No More)’이다.
3월28일자 인터넷판은 제목 그대로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 인물의 부음기사가 실렸다. ‘일제에 저항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유관순’이었다.
일제에 의해 작성된 유관순 열사(1902~1920년)의 수형카드와 함께 ‘16살 소녀는 평화로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자유를 향한 민족 열망의 얼굴이 되었다’는 부제를 달았다.
뉴욕타임스는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겪었던 17살 소녀가 순국 직전인 1920년 9월 28일 썼던 짧은 글 한편을 소개했다.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다.’ 일본 총리를 지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가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무릎을 꿇고 식민지배를 반성한 일도 언급했다.
뉴욕타임스의 ‘98년만의 부음기사’를 보며 새삼 반성하게 된다.
유관순 열사의 순국 100년이 다가오는데, 우리는 지금 열사의 염원을 받들고 있는가. ‘간과해서는 안될 부음기사’를 제대로 써야할 자들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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