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9월, 경주 봉황대 바로 아래서 운영하던 박문환의 주막집은 장사가 무척 잘됐다.
사세확장’을 해야 했다. 그는 주막을 늘리기로 하고 뒤뜰의 조그마한 언덕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9월 23일 이상한 유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소문이 삽시간에 경주 전역에 퍼졌다. 당시 경찰서 순경(미야케 요산·三宅與三)이 이 풍문을 듣고 곧바로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노서리 일대를 순시 중이던 미야케의 눈에 심상찮은 장면이 목격됐다.
어린아이 3~4명이 매립된 흙 속을 열시히 찾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가보니 아이들의 손에 청색 유리옥들이 들려 있었다.
■“임금님의 무덤을 파다니…”
미야케는 곧 주막집 뒷마당으로 뛰어들어갔다. 현장은 어수선했다. 미야케는 경주경찰서장(이와미 하시미쓰·岩見久光)에게 “심상치않다”면서 “빨리 전문가들을 보내달라”고 긴급 보고했다. 이미 공사현장에서 청동 및 금제품과 유리옥 등 유물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미야케의 보고는 경주에 있던 총독부박물관 촉탁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를 통해 본부(총독부박물관)에 긴급보고했다. ‘고적전문가’를 긴급파견해달라는 보고였다. 하지만 전문가 파견이 늦어졌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등 당대의 전문가들 모두 가야 패총의 시굴조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문가를 기다리는 동안 현장은 물론 경주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인부가 유리옥을 양동이에 가득 담아 운반하다가 적발됐고, 순사들은 멋대로 토기를 발굴하고….
“황금이 나왔다”는 인부의 고함에 현장에 모여들던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또한 ‘일본인들이 신라왕릉을 판다’는 소문이 인근마을까지 삽시간에 퍼졌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모로가 히데오 등 현장 실무자들이 긴급유물수습에 나섰다. 전문가를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경주의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때 마침 경주 날씨가 황사 때문에 침침해졌는데, “일본인들이 국왕의 무덤을 파서 하늘이 어두워졌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들려왔다.
“금관총 유물 발굴 3일째. 황사 때문에 자욱하듯이 날씨는 매일 침침했다. 유언비어가 나왔다. ‘저것은 국왕의 묘다. 그것을 일본인이 팠기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시중에는 뭔지 모르는 일종의 살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 현곡면에 사는 70대 노파가 발굴장 한복판까지 들어와 털썩 주저앉아 절규했다. ‘임금님의 무덤을 파는 것이 웬말이냐!’”(오사카 로쿠손의 <취미의 경주>, 1939년)
■“일본 영토에서 발견된 금관?”
그렇게 4일 만에 수습발굴이 끝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유구와 유물의 출토상태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 고고학 발굴사에서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수습된 유물들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신라금관이 사상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그득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사상 처음으로 금관이 나온 이 무덤을 ‘금관총’이라 이름 붙였다.
일제는 “금관총 유물은 ‘일본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된 자랑스러운 발굴유물”이라 떠들었다.(<경주 금관총 보고서>)
조선을 ‘우리(일본) 영토’라 한 것이다. 속이 쓰리지만 어쩌랴. 당시 일제강점기였는데….
9개월만에 폭로된 '금관의 파문'사건(1936년 6월29일 부산일보). 당시 고이즈미 평앙박물관장이 서봉총 황금유물 특별전이 끝난 뒤 개최한 연회에서 평양 기생 차릉파에게 신라금관을 씌우고 희롱하는 희대의 사건이 9개말만에 폭로됐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부터 금관의 출토가 이어졌다.
금관총 발굴 후 3년 뒤인 1924년, 역시 봉황대 아래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조사해 두 번째의 신라금관이 발견됐다.
이것이 바로 금령총(金鈴塚) 금관이다. 이 무덤 역시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금관에 매달려있는 독특한 한 쌍의 금방울을 보고 이름을 금령총이라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 봉황대 서편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무덤에서 세번째 금관이 확인됐다. 이 고분의 발굴사는 두고두고 화제를 뿌렸다.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직접 발굴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웨덴의 한문명칭(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을 따서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연인즉은 이렇다. 1926년 5월 대구~경주~울산을 경유,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예정이었다.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했다. 총독부는 바로 이 고추밭의 흙을 파내 기관차 차고를 짓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공사 도중에 신라고분이 발견됐다. 그러자 총독부 촉탁으로 근무 중이던 문제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현지로 급파됐다.
■스웨덴 황태자의 발굴 이벤트
발굴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0월, 마침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재위 1950~73) 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이 때 일본은 황태자가 고고학자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마침 조선반도의 경주라는 곳에서 한창 발굴중인데 한번 가보심이 어떠신지요.”
44살의 고고학자 황태자는 반색했다. “빨리 가보자”고 했다.
드디어 1926년 10월 10일, 구스타프 황태자를 위한 발굴 이벤트가 펼쳐졌다.
사실 이미 발굴단에서는 황금유물을 확인하고는 반쯤 노출시켜 놓은 상태였다. 황금관 수습의 영광을 스웨덴의 황태자에게 선물하고자 한 것이다.
황태자가 능수능란, 발굴현장에 뛰어 들었다. 탄성이 터졌다.
관 안에 흩어져있던 금관과 금장신구, 각종 구슬류가 햇빛의 직사광선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 것이다. 황태자 부처는 한쪽 무릎을 꿇고 피장자의 혼령에게 정중한 서양풍의 경의를 표했다.
“전하, 이 요패(腰牌·황금 허리띠)만큼은 전하께서 발굴하시도록 남겨놓았습니다.”
발굴자의 말이 떨어지자 고고학자의 끼가 발동한 황태자는 즉시 상의를 벗고 발굴에 나섰다. 고고학자다운 신중한 발굴은 1시간이나 걸렸다.
“오! 얼마나 경이로운가!”
금제곡옥이 달린 요패가 모습을 드러내자 황태자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다음 황태자를 감동시킨 마지막 한마디….
“전하께서 이 금관을 수습해주시옵소서.”
황금관까지? 황태자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금관을 들어올린 뒤 나무상자에 넣었다. 1500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신라금관은 이렇게 북유럽 황태자의 손으로 부활된 것이다.
금관총 유물전시관 전경. 금관 등 금제유물의 가치가 워낙 높았던 터라 금관의 복제품이 도난되고 금제유물 진품이 사라지는 등 수난을 겪었다.
■개 목걸이도 황금이었던 신라
이후 금관의 출토는 계속 이어졌다.
금관총·금령총·서봉총에 이어 천마총·황남대총 북분 등 출토지가 확실한 금관 5점이 확인된 것이다. 그 뿐이 아니라 출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경주 교동에서 도굴되어 압수된 교동금관, 가야금관으로 알려진 호암 미술관 소장 금관, 그리고 도쿄미술관에 소장된 도굴품(오쿠라 컬렉션) 등 3점을 포함하면 모두 8점이 남아있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은 모두 합해 10여 점인데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이 8할이나 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의 진(津)을 향하고 있는 나라(신라)가 있으니 눈부신 금은채색이 그 나라에 많다.”(일본서기 권8 중애기·仲哀紀)
12세기 때 아랍의 알 이드리시가 쓴 <천애횡단갈망자(天涯橫斷渴望者)의 산책>이란 책의 내용이다.
8~9세기 견문록을 모아놓은 이 책에는 “신라에는 금이 너무 흔해서 개(犬)의 목걸이도 금”이라고 표현돼 있다.
개목걸이도 금이었으니 신라는 가히 ‘황금의 나라’였던 것이다. 신라인들의 금사랑은 이토록 유별났던 것 같다. 금귀고리 하나만 보더라도 고구려의 경우 지금까지 불과 20여점, 백제는 40여점이 각각 출토됐을 뿐인데 신라는 무려 700여 점에 달할 정도다.
특히나 금관은 우리나라 고대 유물 가운데 단연 눈을 끄는 유물로 꼽힌다. 세계에 내놓아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드는, 독특한 형태의 금관이기 때문이다. 출토된 신라 금관은 특히 마립간 시대, 즉 눌지마립간~지증마립간(417~503년)에 집중 출토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감쪽같이 사라진 금관총 유물들
그런데 홍안박명(紅顔薄命)’이라 했던가.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금관의 팔자는 유난히 셌다.
사상 최초로 확인된 금관총 금관을 보라. 1927년 12월 10일 밤, 경주박물관에 진열돼있던 금관총 유물들이 사라져버렸다.
범인은 진열실의 자물쇠를 부수고 금제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귀고리, 반지 등 90여점의 황금유물들을 털었다. 다행히 유리를 깨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상하개쇄식 진열장에 놓여있던 금관은 손대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경주시민들은 경악했다. 시민들은 도난품의 발견을 기원하며 눈물어린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범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경주 읍내에서 조곰이라도 정당히 보이지 안는 사람은 거의 전부를 모조리 한번식 취됴(취조)하여 오히려 수색이 턱업시 가혹한데, 일반의 비난까지 바다가며(받아가며) 계속하야 왔으나 도적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하야….”(<동아일보> 1928년 1월 19일)
경찰은 ‘가혹수사’라는 비난을 들어가며 경주읍내를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경찰과 박물관 측은 궁여지책의 선전전을 펼쳤다.
즉 ‘천년이 넘는 금세공품은 요즘의 금과 성분이 달라 녹이면 금방 눈치챈다’는 둥, ‘무덤에서 나온 물건을 갖고 있으면 집안에 변고가 생긴다’는 둥…. 범인찾기에 현상금 1000원이 걸렸다. 범인의 행방은 그래도 묘연했다. 그렇게 6개월이 훌쩍 지난 1928년 5월21일 꿈 같은 반전이 벌어졌다.
인분을 처리하던 노인이 경주경찰서장의 관사를 지나다가 갱지에 싸인 물체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 도난 당한 금제품들이 들어있었다.
순금제 반지와 순금 장식 몇 점을 빼고는 모두 회수된 것이다. 물론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경찰과 박물관측의 선전전 때문에 두려워한 범인이 순금 제품을 어찌 처리할 줄 모르다가 그냥 돌려준 것이 분명했다.
금관총의 수난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956년 3월7일, 경주박물관에 진열중이던 금관총 금관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박물관 수위가 금관고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외출한 사이 금관을 들고 유유히 사라진 것이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1927년 도난 때는 그래도 금관 만은 훔치지 못했는데…. 그러나 진열중인 금관이 모조품이었던 것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도난금관은 모조품’이라는 기사를 접한 범인으로서는 청천벽력이었으리라. 범인은 경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언론보도에 보고 발길을 돌렸다.
그는 경주 시외의 서천(西川) 모래 밭을 깊숙히 판 뒤 모조금관을 파묻고 말았다. 훗날 범거된 범인의 진술에 따라 경찰은 서천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모조금관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금관을 기생의 머리 위에
그러나 지금까지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수난사는 따로 있다.
1936년 6월29일자 부산일보 기사를 보라. 기사 사진을 보면 신라왕관(서봉총 왕관)을 쓴 여인이 등장한다. 기사 제목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금관의 파문, 박물관의 실태(失態)? 국보를 기생의 완롱(玩弄)물로’.
무슨 사건인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은 1935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평양박물관은 제1회 고적애호일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열었다.
경성박물관로부터 대여받은 금관은 물론 금제귀고리와 허리띠, 목걸이 등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들을 전시했다.
당시 평양박물관장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다. 서봉총 발굴에서 참여한 인물이었다. 보물급 유물이었으므로 전시는 삼엄한 경계 속에 이뤄졌다.
그런데 사건은 전시회를 끝내고 예정된 유물반환일을 하루 앞둔 9월10일 터졌다. 박물관측은 성공적인 전시회를 자축한다는 명목으로 축하연회를 열었다. 평양의 각급 기관장들이 다 모인 자리에 유명한 기생들도 총출동했다. 기생들과의 술자리가 질펀해지고 취흥(醉興)이 도도(滔滔)해졌다. 술기운에 이성을 잃어갔다. 그 때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탈행위가 벌어졌다.
그만 차릉파(車綾波)라는 기생의 머리에 금관을 씌운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금제 허리띠와 금귀고리, 금목걸이까지 차릉파의 몸에 휘감았다. 그러면서 금관을 쓴 차릉파의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신라 56대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친 것이 935년이니까…. 그리고 평양기생 차릉파가 금관을 쓴 것이 1935년이니까…. 꼭 1000년만에?
신라는 꼭 1000년만에 ‘제57대 여왕 차릉파’를 내세워 부활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부활한 신라의 여왕은 평양 출신 기생이었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이 천인공노할 장면이 SNS를 통해 퍼졌을 텐데…. 그 때만 해도 한 순간의 일탈로 끝날 뻔했다. 아마도 참석자들은 술이 깬 뒤 입단속을 하면서 사건을 덮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입소문이 퍼졌다. 특히나 금관을 쓴 차릉파의 사진이 평양시내에서 나돌기 시작했다. 결국 사건은 9개월만에 언론에 보도되고 말았다. 금관을 쓴 차릉파 기생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린채…. 이 사건은 식민지 백성들의 공분(公憤)을 샀다. 연회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니까….
그들이 신라금관을 쓴 기생을 마음껏 농락했다는 것 때문에, 또 ‘신라여왕’을 끼고 술판을 벌였다는 점 때문에….
하지만 국보를 ‘기생의 악세사리’로 전락시킨 고이즈미는 보도 후 총독부로부터 견책을 받고 시말서까지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평양박물관직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금관의 수난사를 보면 꼭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의 수난사를 보는 듯 하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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