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보물 1973호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미인도’는 과연 신윤복이 붙인 제목인가. 독자의 입장에서 각종 자료를 들춰보니 그게 아니었다. 후대에 붙여진 제목이었다. 가만보면 배경없이 그려진 여성의 전신 그림을 ‘미인도’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정하지 못한 제목이다. 생각해보라. 고려·조선시대의 남자상을 ‘미남도’라 하는가. 누구인지 모르면 그림의 주인공을 애써 찾아 ‘○○의 초상화’라 굳이 이름 붙인다.
그러나 여성의 그림은 어떤 경우 ‘특정한 인물의 초상화’ 인 것 같은데 주인공을 찾거나 적당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미인도’라 쉽게 명명한다. 이 경우 어떤 현상이 빚어지는가.
여성 그림은 그저 ‘미인을 감상하는’ 남성의 눈요깃감에 그친다. 개별 작품의 독자적인 지위나 성격을 잃어버리고 그냥 ‘미인’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의 일반적 범주’에 갇히고 만다. 다시 말하면 여성을 그린 그림은 그저 ‘남성의 완상용’이 되고 만 것이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어떨까. 다른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 일단 신윤복이 그린 ‘이른바 미인도’의 모델을 상상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혹시 신윤복이 가슴 속에 묻어둔 사랑하는 이가 아니었을까. 혹자는 아예 신윤복을 기생의 ‘기둥서방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미인도 보면 밤잠을 설친다”
중국에서는 미인도를 사녀화(仕女畵)라 했다. 사녀란 원래 궁녀를 의미했다. 당나라 이후 궁정여인이나 상류사회 여인을 주제로 한 그림을 사녀화라 했는데, 점차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그림으로 의미가 확대됐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왜 ‘미인도’라 했을까.
서거정(1420~1488)과 이승소(1422~1484), 이항복(1556~1618), 김상헌(1570~1652) 등의 글이나 시에 ‘미인도(美人圖)’가 등장한다. 특히 이항복은 당대 유명한 화가인 이흥효(1539~1593)의 ‘미인도’ 그림에 글을 남겼고(<백사집>), 김상헌도 명나라 왕지린(1535~1600)의 ‘미인도’를 보고 시 한수를 썼다.(<청음집>)
조선시대 어느 시기부터 ‘미인도’라는 표현을 썼다는 얘기다. 원래 중국의 사녀화나 한국의 미인도는 본래 유교의 도덕을 선양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단적인 예로 성종은 양귀비가 난간을 잡고 있는 그림, 후비가 나물을 캐는 그림, 요임금의 두 딸인 아황·어영 그림 등 3폭의 미인도를 그리게 한 뒤 신료들에게 ‘교훈의 글’을 남기도록 했다.
그러나 미녀도를 그린 이도 남성이요, 그것을 감상한 이도 남성이었다. 유교적인 교훈용으로 그림을 그렸다지만 남성들의 눈요깃거리로도 쓰였을 것이 분명하다.
조선 중후기의 문인 문신인 허균(1569~1618)과, 중인 출신의 서화수집가인 김광국(1727~1797)의 이야기가 웃긴다.
즉 허균은 당대의 화가 이징(1581~?)에게 그림 몇 첩을, 그보다 훨씬 후대의 인물인 김광국은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1726~?)에게 아예 ‘미인도’ 한 점을 그려달라고 했다. 허균의 부탁을 받은 이징은 여러 폭의 그림 뒤에 맨 마지막으로 ‘아이를 씻기는 두 여성’을 그려주었다. 신한평은 김광국의 요구대로 ‘미녀도’를 그렸다. 그런데 15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여인 그림을 본 허균과 김광국의 감상평이 놀랍도록 비슷하다.
“풍성한 살결이며, 아양부리는 웃음이 그 요염함을 한껏 발산하여~ 아아! 아리따운 자태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역시 신묘한 작품이다. 이것을 오래도록 펴놓고 싶지 않으니 오래 펴놓으면 밤잠을 설칠까 두려워서이다.”(허균의 <성소부부고>)
“일찍이 신한평군에게 <미녀도>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풍만한 살결과 어여쁜 자태가 너무나 실감나서 오래 펼쳐볼 수가 없다. 오래 보았다가는 이부자리를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김광국의 <석농화원>)
밤잠을 설치고(허균) 이부자리를 망칠까 두렵다(김광국)니 하여간 사내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어찌 그렇게 한 치의 다름이 없는 지 모르겠다.
■“왕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수 없다”
고사에 등장하는 인물을 그렸거나, 혹은 뭇 남성들의 이상형을 그린 ‘미인도’는 그렇다 치자. 특정한 인물을 그린 여인의 초상화는 어떤가.
1695년(숙종 21년) 숙종 임금이 색다른 명을 내린다. 사대부 화가인 김진규(1658~1716)에게 “중전(인현왕후 민씨)의 초상을 그리라”고 명한 것이다.
그러나 김진규는 물론이고 다른 신료들까지 “신하가 감히 왕비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다”고 맹렬하게 반대했다. 숙종은 “정 그러면 종친인 임창군 이혼(?~1724)과, 중전의 오빠인 민진후(1659~1720)까지 곁에 머물면 되지 않겠냐”고 달랬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료들의 반대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왕비 초상화’ 건은 무산됐다.
내외법이 철저했던 시절, 여인, 그것도 국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왕실의 종친과 중전의 친오빠까지 두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 상황이라니 어떤 화가가 제대로 붓을 들 수 있었겠는가.
■기생의 초상을 그리고 시까지 지어준 남자들
결국 전신그림을 화폭에 담을 수 있는 부류는 신분이 낮은 화류계 여인, 즉 기녀였던 것이다.
물론 기생이라고 해서 아무한테나 얼굴을 맡기지는 않았다.
어숙권의 <패권잡기>를 보면 조선 전기의 이름난 기생 상림춘은 당대 최고의 화가 이상좌를 콕 찝어 “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는 글이 등장한다.
“서울 광통교 기생 상림춘은 거문고를 잘 타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자신의 초상화를 이상좌에게 부탁했다.”
또 조선 후기의 최고 화가인 이명기 역시 강원도 회양 기생인 단섬의 초상화를 그렸다.
“기녀 단섬은 가무에 능했고, 글자를 알았으며, 서화를 좋아했다. 화가 이명기가 그녀를 위해 작은 상을 그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단섬이 이 그림을 당대의 걸출한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1713~1791)에게 보내 “이 그림에 맞는 글 좀 써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흔쾌히 응한 강세황의 글이 더 웃긴다.
“25살, 선옥(단섬의 자)이 나의 서화를 좋아한다니 그 맑은 운치를 숭상할만 하다. 내가 불러서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두루마리 속 미인(단섬의 초상화)을 보니 매화를 보며 갈증나는 것을 위로할만 하다.”(<쇄편>)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강세황·이명기)가 둘이나 나서 기생의 초상화를 그려주고(이명기), 그 초상화에 ‘두루마리 속 미인이 어쩌구, 갈증이 나니 마니 어쩌구’ 하는 글까지 지었다(강세황)는 것이다. 단섬은 두 화가를 사이에 두고 줄타기를 한 것인가.
■새로운 직종, 기둥서방의 존재
그렇다면 혜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는 어떨까. 이해를 돕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18~19세기 한양 거리로 되돌아가보자.
당시 서울 중심가는 운종가 중심으로 흥성했다. 남공철(1760~1840)의 표현대로 “서울은 돈 가지고 살고, 팔도는 곡식 가지고 산다”(<금릉집>)고 할 정도로 각 지방의 화폐가 서울로 집중됐다. 길거리 곳곳에는 주막 깃발이 펄럭이고, 술과 매음을 하는 색주가가 성업중이었다.
당대 한양 풍경을 묘사한 박제가(1750~1805)의 ‘성시전도시’를 보면 “서울의 세군데 큰 저자의 갖가지 상인들이 성업 중인데 사람의 어깨가 서로 부딪치고 각색 상품의 잇속을 좇아 수레바퀴가 줄을 선다”는 대목이 있다. 한양거리가 흥청망청 댔던 것이다. 이런 풍토 속에서 예전에는 관리가 기생의 집에 조용히 찾아 하룻밤 머물렀던 공간이던 기방문화는 17세기 이후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1664년(현종 3년) 전 정언 정창도 일행이 술에 취해 창가(娼家)에 들렀다가 심야에 걸어나오다가 무인들이 여악(女樂)을 즐기던 곳에 뛰어들어 난투극을 벌였다”(<현종실록>)는 기사가 심상치 않다.
이 무렵 예전에는 없었던 업종이 생겼다. 바로 기방의 기부(妓夫·기둥서방) 제도였다.
당시 서울의 궁중연회에 동원된 지방출신 기생들은 관으로부터 별도의 여비를 받지 않았다. ‘각자도생’이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숙소와 생활비가 큰 문제였다. 이때 기녀들의 의·식·주를 주선하면서 기방영업도 시킨 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기부이다. 시쳇말로 ‘기둥서방’이다. 조정은 아예 기부가 될 수 있는 직업군을 정해놓았다. 즉 서울의 경우 각전의 별감, 포도청 군관, 승정원의 사령, 의금부 나장, 궁가나 외척의 겸인(청지기), 그리고 무사 등이었다. 직책이나 신분이 높지는 않았지만 각 부문에서 큰소리깨나 치는 자들이거나 힘깨나 쓰는 자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가는 왜 무사가 되었을까
여기서 혜원 신윤복을 등장시켜봄은 어떨까.
신윤복은 화가인 신한평의 2남1녀 중 장자이며, 본명은 신가권이고, 윤복은 초명 또는 예명이다. 그러나 신윤복에 대한 기록은 소략하기 이를데 없다.
이구환(1731~1784)의 <청구화사>은 “혜원은 동가숙서가식 떠돌았으며, 방외인(국외자)으로 살았고, 여항인(중인·서얼·서리·평민층)과 가까웠다”고 전했다.
또 서유구(1764~1845)는 “신윤복은 김홍도와 함께 협사(狹斜·유흥가), 즉 색주가의 이속지사(俚俗之事·풍속화)를 즐겨 그렸다”(<임원십육지>)고 했다. 또 “혜원이 점잖지 못한 그림으로 도화서에서 쫓겨갔다”는 구전도 전해진다.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았기에 심지어 여자가 아니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까지 퍼진 것이다.
그런데 오세창(1864~1953)의 <근역서화징>에는 “혜원의 직책은 아버지 신한평과 함께 첨사를 지냈다”는 대목이 나온다. 첨사란 첨절세사의 약칭인데, 조선시대 병영과 수영에 속한 무관벼슬이다. 시쳇말로 ‘뜬금포’가 아닌가. 왜 화가가 무관벼슬을 받아 각 부대로 배치된다는 말인가. 이유가 있다.
■혜원은 기생들의 오빠, 혹은 기둥서방이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관방지도 제작은 국방정책에서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1795년(정조 9년) 편찬된 <대전통편>을 보면 “전국의 각 병영에 사자관(문서를 정사하는 관원)과 화원(화가)를 각 1명씩 파견한다”고 했다. 화가집안인 신윤복 부자가 대를 이어 첨사직을 지냈다면 각 병영에 소속되어 지도의 제작이나 관방도 등 군사서류 설계 등을 맡았을 것이다. 그런데 신윤복 부자의 첨사는 원래 정3품이었지만 후기에는 종6품으로 하향되었을 가능성도 있단다.
그렇다면 어떨까. 신윤복이 지낸 첨사는 무사직이다. 무사는 앞서 살펴봤듯이 기부(妓夫)가 될 수 있는 직업군 중 하나였다.
게다가 ‘동가숙서가식’ 했고, ‘방외인(국외자)’로서 시정의 ‘여향인’과 어울렸다. 혜원 신윤복은 그렇다면 어떤 기방의 기부가 아니었을까.
물론 혜원이 기녀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며 착취한 문자 그래도 기녀에게 빌붙은 기둥서방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른바 풍류남아 화원으로서 이 기방, 저 기방을 오가며 한두달씩 살았다가 떠나는 그런 의미의 기부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기생들의 오빠’가 아니었을까.
■기녀를 주인공으로, 양반을 쪼다로
사실 혜원 신윤복(1758~?)과 기녀는 떼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다.
같은 풍속도 계열이지만 서민들의 일상과 애환을 진솔하면서 해학적으로 그린 단원 김홍도(1745~?)와 전혀 다른 작품세계를 걸었다.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을 보면 전 작품에서 여인이 등장한다.
특히 30작품 중 18작품의 주인공이 기녀이다. 신윤복은 그동안 화면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여성들, 즉 기녀들을 과감하게 표현했다.
게다가 꼭꼭 눌렀던 여성들의 속내를 과감하게 내보였다. 견고한 유교사회에 갇혀있던 여성을 담장밖으로 해방시킨 것이다. 그것은 시대의 금기를 깨는 대담한 도전이었다. 여성이 주인공이 되자 사대부 양반들은 ‘쪼다’로 전락했다.
■최초의 누드화, 최초의 키스신
예컨대 ‘단오풍정’은 단옷날 기녀들이 속살을 드러난채 목욕하고 그네 타는 모습을 포착했다. 퇴기인듯한 여인은 주요부분만 치마로 살짝 가리고 젖가슴과 볼록 나온 배, 엉덩이와 장딴지의 맨살을 드러낸채 서있다. 이 그림은 ‘조선 최초의 누드화’라 할 수 있다. ‘월하밀회’는 ‘조선 최초의 키스신’이다. 남녀가 포옹하며 밀회를 나누고, 또 다른 여인은 담에 의지해서 지켜본다. 저 진한 두 남녀의 애정신을 바라보는 여인은 얼마나 애간장이 녹을까.
■‘당신의 마부가 되어주겠다’는 양반
필자를 가장 포복절도하게 만든 그림은 ‘연소답청’과 ‘유곽쟁웅’이다. ‘연소답청’은 기생들의 봄나들이를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양반들의 꼬락서니가 참 우습다.
기생들을 말에 태운 것도 모자라 말에 탄 기생이 손을 내밀자 얼른 달려와 담뱃대를 건네주는 꼴이라니…. 게다가 다른 남자는 자기 갓을 마부에게 넘긴채 마부이 벙거지를 쓰고 걷고 있다. “당신의 마부가 되어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곽쟁웅’ 역시 꼴사나운 양반 한량들의 술집 난투극을 보여준다. 갓이 다 망가질 정도인데도 웃통을 벗어젖힌채 으름장을 놓는 나이 많은 사람은 말리는 사람이 있으니 한번 더 객기를 부리는 듯하다. 왼쪽의 젊은이는 분이 덜 풀렸지만 기부(기둥서방)인 별감(붉은 곳) 등 두 사람이 떼어 말리자 할 수 없이 옷고름을 매만지며 싸움 종료를 인정한다. 맨 오른쪽에서 갓과 갓끈을 쥐고 있는 사내는 젊은이와 한패인듯 하다. 이 사내는 술에 취했고, 옷에 흙이 잔뜩 묻었다. 이 사내도 얻어맞았다. 기방에서 잔뼈가 굵은 혜원이 아니고서는 그릴 수 없는 생생한 결투 장면이다.
■조선판 모나리자의 미소
‘기생들의 오빠’ 혜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의 모델은 누구였을까.
사대부 여인이 아닐까. 당대 사대부 부인의 예복으로 경사스러운 예식에 입었던 이른바 삼회장 저고리를 입은 점이 꼽힌다. 삼회장 저고리는 깃과 고름, 소매 끝동에 옷길과 다른 색 천을 대어 만든 저고리다. 그러나 사대부 여인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여염의 규수가 외간 남자 앞에서 모델을 했다니…. 쉽게 상상할 수 없다. 비교적 남성과의 접촉이 자유로웠을 기생일 가능성이 짙다.
본격적으로 신윤복의 모델이 된 이 기생여인을 보자. 의자에 앉아있는 것인가. 배를 내밀듯한 치마와 작은 키 등을 감안하면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여인의 손길을 두고도 갖가지 해석이 나온다. 붉은 삼작노리개와 옷고름을 매만지고 있다. 저고리 고름의 나비 매듭을 푼 뒤 마지막 매듭을 풀어내리는 모습인가. 아니면 노리개를 옷고름에 매어 늘어뜨리기 위한 동작인가. 어찌 알겠는가.
구름 같은 가체머리, 길이가 짧고 소매통이 좁은 저고리, 풍성한 치마와 속곳바지, 고개를 살짝 내리고 시선을 아래로 둔 모습…. 넓은 이마와 앳되고 둥근 얼굴, 가늘고 긴 선한 눈, 가느다란 눈썹, 작고 둥근 코, 꼭 다문 야무진 입술, 목 뒤쪽으로 흘러내린 실머리, 그리고 살짝 모습을 드러낸 속곳 자락과 새하얀 버선….
특히나 웃는 건지 마는 건지 속내를 비치지 않는 여인의 표정은 이 작품의 백미이다. 조선판 모나리자의 미소인가. 작가 신윤복의 시선이 부끄러웠던 것은 아닐까.
■모델, 그녀는 혜원의 뮤즈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여인인가
혜원이 작품 왼쪽 위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한 편의 글이 인상적이다.
“가슴 속에 서려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 붓끝으로 그 마음까지 고스란히 옮겨 놓았네.(盤박전胸中萬花春 筆端能與物傳神)”
여기서 전신(傳神)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전신은 정신을 전한다’는 용어다. 중국 동진의 고개지(346~407)는 “그림을 그릴 때는 대상의 정신(神)을 전(傳)해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그림의 대상인 모델의 외면은 물론 내면, 즉 그 모델의 요동치는 흉중을 그 정신까지 붓끝으로 전했다는 만족감과 희열이 혜원의 한 편 시에 오롯이 담겨있다. 이것은 모델인 여인과 의기투합하여 혼연일체를 이루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여인이 봄날에 피어나는 춘정을 화가의 앞에서 숨겼다면 저런 표정이 나왔을까. 화가가 모델의 겉모습 뿐 아니라 그 마음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면 저런 작품이 나왔을까.
무엇보다 혜원이 저토록 혼신을 다해 그린 작품의 모델은 과연 누구였을까. 예술적인 영감을 불어넣어준 혜원의 ‘뮤즈’였을까. 아니면 기방을 떠돌던 ‘자유로운 영혼’인 혜원이 그래도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한여인이었을까.
그런데 이 모델은 <혜원전신첩>에 등장하는 기생들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분석도 있다. ‘연소답청’에 말을 탄 노랑저고리의 옥색치마를 입은 여인과는 복식이 거의 비슷하고, ‘상춘야흥’에서 당상관 곁에 앉은 기생과, ‘주유청강’의 담뱃불을 잡은 기생과는 고개를 살짝 내려 하향한 시선처리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모델의 마음까지 그렸던 혜원의 희열
사실 이 그림과 다소 비슷한 또다른 ‘미인도’가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미인도에도 마찬가지로 시 한편이 적혀있다.
“잠깨어 운문에 나서니 찬기운이 냉랭한데 귀옆을 살짝 스치는 머리칼, 긴소매, 얇은 홑적삼에 한정(閒情·한가로운 마음)이 두려운데 찾아올 봄은 더디기만 하구나. 꽃가지나 꺾어 홀로 바라보네.”
이 시에는 을유년(1825년 혹은 1885년) 3월16일 기거하던 곳(寄所寫)에서 그렸다는 구절이 함께 적혀 있다. 무슨 뜻일까. 기방에 머물던 화가가 그려준 작품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혹자는 이 작품 또한 혜원의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펼친다. 그러나 혜원이 그렸든 그리지 않았든 두 작품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도쿄박물관 ‘미인도’는 더 동적이지만 가체(트레머리)나 얼굴표정은 섬세함이 떨어져 보인다.
치마주름을 명암까지 곁들여 너무 진하게 그렸다. 주인공이 너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웃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무엇보다 모델의 정신까지 담았다고 의기양양하여 감탄했던 앞서의 소감은 어디가고 ‘찬기운이 냉랭하고 봄은 더디다’는 무미건조한 글을 남겼을까.
만약 두 작품의 화가가 달랐다면 논외일 것이다. 그러나 두 작품의 작가가 한사람, 즉 혜원이었다면 어떨까. 모델과 작품을 대하는 화가의 마음이 천양지차였다는 반증이 아닐까. 진정으로 연모한 ‘마음 속 여인’을 그렸을 때와, 그저 주문을 받아 그려준 여인을 그렸을 때는 당연히 달랐을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박영민, ‘조선시대 미인도와 여성초상화 독해를 위한 제언’, <한문학논집> 제42집, 근역한문학회, 2015
황효순, ‘혜원 신윤복 연구’, 성신여대 박사논문, 2003
임미현, ‘조선 후기 미인도의 성격’, 숙명여대 석사논문, 2011
조재희, ‘조선후기 서울 기생의 기업 활동’,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5
오주석,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월간미술, 2016
조정육, <조선의 미인을 사랑한 신윤복>, 아이세움, 2009
문선주, ‘조선시대 중국 사녀도의 수용과 변화’, <미술사학> 제25호, 미술사학연구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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