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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기생 화대까지 훑어간 애국기 헌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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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 이번 주 주제는 기생의 화대까지 거둔 일제하 애국기 헌납운동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수많은 친일 사례 가운데서도 극적인 친일행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쓰인 비행기 헌납행위일 것입니다. 물론 전쟁의 광란 속에서 일본인들은 물론 조선의 장삼이사까지 강요된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크흘리개 아동부터 기생들의 화대까지 거둬들인 것이지요. 하지만 일제에 아부하려고 지금으로 치면 수 십 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돈을 쾌척하면서 비행기를 헌납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일제는 쾌척자의 이름을 딴 비행기 명명식을 열어 격려해주었다지요. 그걸 또 선전 제목으로 삼아 전국 방방곡곡의 모범사례로 소개해서 저인망식 헌납운동을 벌였답니다. 일부 인사들은 애국기, 즉 비행기 헌납 운동을 독려하는 캠페인을 벌였답니다.

일제하 애국기 헌납운동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번 주 팟캐스트와 블로그 기사가 다룰 주제입니다.

이 기사와 팟캐스트는 변성호의 논문(2009년 경북대 석사논문) ‘전시체제기 조선에서의 군용기 헌납-일제에 의한 강제동원의 사례를 중심으로와 민족문제연구소의 2015년 기자간담회 자료 김용주 과연 애국자였나를 주로 참고해서 작성했습니다. 반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99’(돌배개)친일파 그 논리’(학민사), ‘친일파’(학민사) 등도 참고했습니다.

 

“기생양성소 주최와 본보(동아), 조보(조선) 지국 후원 하에 지난 15~16일 황해도 겸이포좌에서 애국기 황해호 헌납 후원 연주대회를 개최하여 순익금 122원66전을 얻어 읍장에게 송금 의뢰하였다 한다.”(동아일보 1937년 8월 21일)
매우 의미심장한 기사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기생양성소가 주최한 연주대회에 당시 조선을 대표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지국이 공동으로 후원했을까. ‘애국기 황해호’는 대체 무엇이며, 연주대회 순익금 헌납은 또 무엇인가. 그런데 1년 1개월 뒤인 1939년 9월 23일에는 더 기막힌 기사가 보인다.

문명기가 헌납한 10만원으로 제작한 애국기. 일제는 이 비행기에 ‘문명기호’라는 이름을 붙이고 대대적인 명명식까지 열어주었다. |변성호의 ‘전시체제기 조선에서의 군용기 헌납’ 논문에서

“회현동 국민정신총동원권번연맹에서는 회원인 기생들 일동은 매달 한번 공휴를 폐지하고 그 화대 전부를 국방헌금코저 결의하고 1회분(8월분)의 수득금 2350원을….”
이 무슨 말인가. 기생들이 한 달에 한번씩 돌아오는 휴일도 반납하고 그날 손님을 받아 영업해서 번 화대를 모아 국방헌금으로 납부했다는 것이다. 황해도 기생양성소가 중앙언론사들의 후원까지 받아가며 열었던 연주대회에서 번 돈은 애국기 ‘황해호’ 모금에 쓰였다. 또 서울 회현동의 기생들이 쉬는 날 대신 영업해서 받은 한달치 화대는 고사기관총 1대 값으로 헌납됐다. 일제가 만주침략 후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대대적으로 펼쳤던 국방헌납운동의 광풍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두가지 사례이다. 예비 기생들의 연주회에 굴지의 신문사들이 후원에 나서면서까지, 심지어는 기생들의 화대까지 눈독을 들여 거둬들인 것이다.

 

■전쟁의 총아
일제는 국방헌금 중에서도 애국기(군용기) 헌납운동에 혈안이 되었다. 군용기가 얼마나 중요했기에 그랬을까.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비행기는 초창기에는 귀족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1914년 제1차 대전이 발발했지만 초창기의 정찰기들은 비무장이었다. 당연히 비행기 간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별다른 상황이 아니고서는 상대편 조종사에게 손을 흔들며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8월22일 영국군 소속 조종사 2명이 다른 생각을 했다. 자신들의 기지 상공을 순회중인 독일 정찰기를 쫓겠다고 루이스 경기관총을 비행기에 싣고 올라가 쏘아댔다. 두 조종사는 “독일군도 이제부터 쏴대기 시작할텐테 하늘이 어찌되겠냐”는 질책을 받았다고 한다. 그 말은 맞았다. 그 때부터 연합군과 독일군 조종사들이 기총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공중전의 전개는 전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갔다. 미지의 세계인 하늘에서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됐다. 과학기술력과 공업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신병기(비행기)의 공습으로 대량살육 할 수 있는 미증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비행기는 곧 전쟁의 총아가 됐고, 각 국은 항공기 개발에 이은 대량생산에 국가적인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국방헌금으로 일본 육군성이 제작한 애국 1호. 일본에서 대대적인 헌납식을 치른 뒤 조선으로 건너와 여의도 비행장에서 다시 헌납식을 열었다.

 

■애국기 헌납운동의 효시
일제의 군용기 비행기 헌납운동은 제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육해군 소속의 항공기는 불과 20여 대였다.
그런데 훗날 일본의 선박왕이 된 야마시타 도쿠다로(山下德太郞)는 일본 정부에 항공기 연구개발을 위한 기금 100만엔을 헌납했다. 이것이 군용기 헌납의 효시가 됐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거액의 국방헌금이 모인다. 이때 일본 육군성은 대형다용도기(애국 1호)와 부상당한 병사들을 후송하기 위한 수송기(애국 2호)를 개발한다. 급기야 1932년 1월10일 도쿄의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황족들과 육해군 장성을 비롯, 10만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대적인 헌납식을 거행한다.
헌납식은 일본의 신도(神道)의식으로 진행됐다. 신사(神社)의 제사복을 입은 신관이 축문을 낭독하고 강신(降神)-헌찬(獻饌)-신부접수(神符接受) 순으로 진행됐다. 중요한 것은 신도가 일제침략의 정신적인 지주였다는 점이다. 신성한 존재인 천황의 전쟁에 참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 도리를 뜻한다. 이처럼 신성화한 의식으로 치러진 헌납식은 곧 전쟁의 광기를 촉발시켰다. 헌납식을 보도한 호외가 발행됐고, 각종 강연과 전람회 등을 통한 국방 헌금 모금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지역민과 기업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제작한 육군용 비행기는 애국기라 이름 붙였고, 해군용은 보국기(報國機)라 했다.

 

■코흘리개에 기생들까지 동원
식민지 조선도 예외일 수 없었다. 도쿄에서 헌납식을 치른 애국 1·2호기는 만주로 가면서 부산·대구·서울·평양을 거쳤다. 당시 비행기라는 매우 신기한 문물은 대중의 호기심을 끌었다. 조선군 사령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대적인 선전활동에 돌입함으로써 헌납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조선군사령부는 참모부 소속으로 애국부를 설치, 후방에서 전쟁후원활동을 펼쳐 민간인들을 끌어모았다. 본격적인 애국기 헌납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각 도시마다 도시의 이름을 딴 헌납기 운동이 전개됐다. 초등학교 아동에게 1전 이상, 중등학교 5전 이상, 기타 일반 10전 이상 씩 거뒀다, 코흘리개 아동들까지 동원한 것이다.  조선군사령부가 펴낸 <애국> 제1호를 보면 무지막지한 모금운동의 양상을 읽을 수 있다. 영화회나 강연회에서 모금주머니를 배포하는 것은 새발의 피였다.
경북 김천의 어머니회에서는 바자회 수익금을 기부했고, 전주·부산의 자동차 운전수 협회원들도 모금운동에 나섰다. 기생조합인 평양 권번 소속 기생들도 ‘미력이나마 돕겠다’고 했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은 학용품이나 일본된장(納斗)를 팔아 얻은 수익금을 헌납했다. 이 뿐이 아니다. 1932년 비행기 헌납을 위한 조선호 헌금 비파연주대회가 열렸다. 또 경성의 기자클럽은 애국기 헌납조성 야구대회까지 개최, 관람료 전액을 모아 애국기 경기호 헌납자금에 충당했다. 심지어 1937년 건립된 대구 측후소 건물은 외관상으로 당시의 쌍엽전투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해를 뜨는 동남향이 아닌 남서향으로 건물을 지음으로써 당시 동남아를 행한 일본 제국주의의 열망을 한껏 표현하고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한달 사이 개성호·전북호(2대)·강원호·평남호·경북호(2대)·황해호·함남호가 헌납됐다.

 

■친일파의 헌납 열풍 
일본 육군성이 발간한 <만주사변 국방헌품 기념록> 속에 기록된 각 지방의 이른바 ‘미담목록’을 보면 기가 찬다.
예산의 공립여자보통학교 학생들은 일장기로 손수건을 만들어 판 수익금을 헌납했다. 30여 년 간 모은 옛 동전 5000개를 냈다. 애국기 헌납을 위해 소 한마리를 기탁한 노인도 있다. 일제는 이 헌납운동의 열풍을 ‘헌납열’이라 했다. 헌납운동이 얼마나 집요하게 펼쳐졌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제2차대전 때 일본군이 생산한 군용기(대략 7만6000여대) 가운데 파악할 수 있는 최후의 헌납기 번호를 확인하면 약 1만3000대 가량이 된다. 엄청난 동원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 가운데 헌납이 판명된 것은 1700여기다. 2009년 현재 확인된 번호는 애국기의 경우 1945년 4월 7000번대가, 보국기의 경우 44년 12월 28일 6000번대가 보인다.
당시의 애국기 헌납운동은 조선군사령부 애국부가 수속과 관리를 담당했다. 각 행정기관장과 조선인 관리들은 목표액 달성을 위해 지역유지들과 결탁해서 국방헌납운동을 주도했다. 일부는 그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다. 특히 극성 친일파 가운데 재력가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애국기 헌납운동에 매진했다.
사실 군용기 한대값은 1932년 당시 기준으로 6~7만원 정도됐다. 우수기종은 13~20만원 선이었다. 이 정도의 돈이라면 지금으로 치면 어느 정도일까.
1930년대 초반 기준으로 농민의 1년 총 농가수입은 800~900원 정도였다. 1937년 무렵 봉급생활자의 한달 봉급 평균이 70원이라는 신문기사(동아일보)가 있다. 연봉으로 치면 840원이므로 농가소득액과 엇비슷하다. 만약 어느 개인이나 기업이 군용기 한대값으로 10만원을 헌납했다면 그것은 당시 봉급생활자 혹은 농가의 1년 수입보다 120배 이상의 거액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즘 봉급 생활자의 연봉(약 4000만원)으로 따진다면 무려 50억원에 이르는 돈을 낸 것이다.

여의도에서 열린 문명기호 명명식. 우가키 총독을 비롯해 수천명의 군중이 모였다.

 

■창씨명 문명기일랑의 오버
문제는 10만원이라는 거액을 덜컥 헌납한 자들이 상당수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가 바로 경북 영덕 출신의 문명기(창씨명 文明崎一郞·1878~?)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세간에서 ‘야만기(野蠻崎)’라 했을까.
문명기는 영덕의 친일 예속자본가로 금은채굴에 손을 대며 성장했지만 전국적인 인물은 되지 못했다. 그랬던 문명기는 1935년 애국기(육군기)와 보국기(해군기) 1대씩을 헌납하는 비용으로 10만원의 국방헌금을 기부하면서 일약 일제의 전국구스타로 떠오른다. 자신이 경영하던 금광을 일제의 주선으로 미쓰코시(三越) 재벌에 12만원을 받고 인계하면서 그 대가로 비행기를 헌납한 것이다. 중앙무대로 도약하기 위해 거액을 쾌척한 것이리라. 당시 만주에 이어 대륙침략을 획책하던 일제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일제는 그가 기증한 비행기 이름을 ‘문명기호’라 하고, 대대적인 명명식까지 열어주었다.  “문명기씨가 헌납한 애국 제120호 비행기 헌납식 및 명명식을 21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열었는데,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과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군사령관 등 수천명이 지켜보았다.”(동아일보 1935년 3월22일)
일제의 부추김에 고무된 문명기의 친일행각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시쳇말로 ‘오버’했다고 할 수 있을까. 1949년 친일파와 친일단체의 행적을 비분강개의 어조로 단죄한 <민족정기의 심판>은 “문명기는 자기 집안을 모두 왜식으로 꾸미고 처자까지 왜복을 입혔으며, 예의·동작·언어까지 왜식을 개량하고는 자식들이 조선말을 하면 ‘이 못된 비국민(非國民)아!’하며 난타했다”고 전했다.
그는 비행기를 헌납하면서 일본어로 방송한 ‘육해군기 헌납에 대해’라는 연설에서 섬뜩한 소리를 해댄다.
“비행기는 긴요한 병기입니다… 나도 헌납했던 문명기호를 타고 진작부터 피로써 굳게 맹세했던 비행사와 함께 적중으로 돌진해 들오가 육탄이 되어 그들의 심장을 서늘하게 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1932년 2월 상하이의 묘행진(廟行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3명이 육탄으로 돌격해서 전사한 적이 있다. 문명기를 “나도 이 육탄 3용사처럼 적중에 뛰어들 각오가 돼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문명기의 각오처럼 육탄 비행기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가미카제 특공대로 체현됐다. 소름끼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저서 <소지일격(所志一檄)>에서 “일본제국이 육탄 비행기 1만대를 준비하고 전단을 여는 경우 어떤 대적도 두려워하지 않고 수백대의 결사비행기를 희생하는 것에 의해 대세가 결정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런 신념에 따라 국방기 100대 기부를 결의하고는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가의 신주를 모신’ 이세대묘(伊勢大廟)에 참배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조선에서 대대적인 헌납운동을 펼친 문명기는 ‘1군(郡) 1기’ 운동까지 독려한 뒤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제창했다. 그는 이후 12만원이 넘는 국방헌금을 더 출연했다.
1943년에는 더 기가 찬 일을 벌였다. 애국기 헌납의 차원을 넘어서 해군함정 헌납운동인 헌함(獻艦)운동까지 펼치면서 자신 소유의 동광(銅鑛) 3개를 기부했으니 말이다.(매일신보 1943년 1월24일)      

쌍엽비행기를 본따 건설한 대구측후소 건물. 남서향으로 건물을 지었다. 동남아를 향한 일제의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밖의 헌납자들
문명기의 악명에 버금가는 애국기 헌납자들도 다수 눈에 띈다.
조선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를 지낸 최창학(1891~1959)은 군용기 제작을 위해 40만원을 헌납했다. 그는 1941년 8월 자신의 헌납군용기(애국 제180호·경성 3호기) 명명식에서 “2400만 민중이 편안히 지내는 것은 오직 홍대무변(鴻大無變)하옵신 천황폐하의 어능위(御稜威·매우 존엄한 위세)와 용감한 황군의 덕택”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친일기업인인 방의석(1895~1961)은 온 가족이 헌납운동을 펼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부인과 70대 노모가 애국부인회에 거금을 기부했고, 자신은 비행기를 두 대가 헌납하고 거액의 국방헌금을 냈다. 전쟁 중에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기도 한 방의석은 조선의 공직자대회에 참석해서 비행기 ‘공직자호’ 헌납을 결의하는 데 일조했다.
신용욱(1901~1961)은 일본에서 비행사가 되어 조선에서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의 청년들을 일본항공특공대 조종사로 키워 전쟁에 내몰았다. 그는 김연수와 고원훈 등과 조선항공공업회사를 창설하여 비행기를 생산, 일본군에 헌납했다.
실업가 박흥식(1903~1988)은 3만원을 기탁한 것은 물론 친일잡지에 이른바 황도선양을 부르짖으면서 비행기 헌납을 촉구하는 등의 논설을 싣기도 했다. 유한앙행의 유명한 사장은 유한애국기 1대 값으로 5만3000원을 기탁하기도 했다.

 

1944년 아사히 신문에 게재된 기명광고. 애국기헌납운동을 독촉하는 광고다. 금전용주의 이름이 선명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종교계의 참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군용기 헌납운동은 다시 한 번 광풍으로 번졌다.
일제는 모든 단체들을 동원해서 조선전역에서 1군1기 운동을 펼쳤다. 개전 20일만에 165대의 비행기가 헌납됐다.
헌납운동은 모든 분야에서 펼쳐졌다. 종교계에서는 교파의 이름을 딴 보국호 745호 ‘조선장로호’를 헌납했다. 1942년 2월10일 벌어진 헌납식은 일본의 신도의식으로 진행됐으니 우상을 배격하는 기독교로서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불교계도 전국사찰에서 모금한 돈으로 1942년 11월 애국기 979호 ‘조선불교호’를 헌납했다. 불교호 헌납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친일파 이종욱(1884~1969·창씨명 廣田鐘郁)과 김법룡(창씨명 香川法龍)이었다. 원래 종단 간부들은 종교기관인만큼 병원자동차를 헌납하려 했지만 얼마나 집요하게 모금운동을 펼쳤던지 5만3000원에 달하는 거금을 모아 비행기 ‘조선불교호’를 헌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무된 김법룡은 1944년 2월 보현사 주지로 일하면서 해군기 1대의 기금으로 8만원을 헌납한다. 비행기 헌납이 일제의 구미에 딱 맞는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보현사 단독으로 비행기 값을 낸 것이다. 
이밖에 천도교도 심지어는 짚신을 삼고 금연 단식 등을 통해 애국성금을 냈으며 1942년에는 육군기 용담호 1대를 조선군 사령부에 헌납했다. 천주교도 다르지 않았다. 천주교 기관지인 <경향잡지>를 보면 “비행기 한 대 값을 더 보내달라는 것이 남태평양 1선에서 악전 고투하는 황군 용사들의 외침”이라고 촉구하는 내용이 나온다.(1944년 2월) 천주교는 태평양 전쟁 직전에는 1만원을 모아 조선군사령부에 헌납했다. 조선 유도연합회도 1941년 10월15일 전선유림대회에서 군용기 헌납 결의한 뒤 모금한 10만여원을 군용기 ‘유림호’를 헌납했다.

경북지역 가운데서도 특히 영일군의 애국기 헌납운동 실적이 대단했다. 14대의 가격인 123만9000원을 모금했다는 기사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애국기 헌납 기명광고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선친인 김용주씨의 친일행각을 입증하는 새로운 자료를 공개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바로 김용주가 참여했다는 애국기 헌납운동 자료이다. 연구소가 발굴한 1942년 1월12일 매일신보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이틀 전인 1월10일 대구부 회의실에서 애국기 부민호 10기 헌납운동 결의대회가 열렸다. 대회에는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장 박중양 등이 모였는데, 사업부장에 김용주(창씨명 金田龍周·가네다 류슈)를 선임했다.’
김용주가 속한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의 활약은 대단했다. 결의대회 후 40일 남짓 지났을 때인 1942년 2월27일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북지부는 대구부내 부유계급에 비격하여 맹활동을 계속한 결과…22만5000여원을 모아…미·영을 격멸할 군용기 5대를 충분히 헌납하게 된 셈이다.”
특히 김용주가 활동해왔던 경북 영일군의 애국기 헌납실적은 엄청났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두 달 만인 1942년 2월24일의 매일신보를 보면 영일군에서만 무려 8대의 비행기가 헌납됐다.      
“경북 군용기 헌납운동이 더욱 맹렬한 바 현재 21기에 달하며, 이들 중 단연 빛나고 있는 것은 동해안의 영일군의 8기다. 한 군에서 군용기를 8대나 헌납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반도 최초일 것임에…영일군민의 불타는 애국열을 여실히….”
1942년 8월까지 조선에서 헌납된 비행기 280여대 가운데 5대 이상의 헌납대수를 기록한 곳은 함경남도 원산과 경상북도 포항인 것으로 알려졌다.(매일신보 1942년 11월17일) 
심지어 김용주는 창씨명 금전용주의 이름으로 아사히 신문(조선판)에 ‘결전은 하늘이다! 비행기를 보내자!(決戰は空だ! 送れ飛行機を!)는 제목의 애국기 헌납 선동 기명광고를 게재했다.(1944년 7월 9일)
“시국은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의 한가운데로 돌입하고…적의 맹렬한 공습 아래에서 묵묵히 수호에 애쓰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들, 우리 형, 우리 동생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과 그리고 ‘좀 더 비행기를’이라고 외치는 필사의 요청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경북 포항읍 中谷請章, 포항수산물출하조합, 영일어업조합, 金田龍周, 金宮東德”
이처럼 광고까지 동원한 헌납운동은 큰 성과를 냈다. 1945년 5월말까지 경북이 109대의 군용기를 헌납했는데 영일군에서만 123만 9000원을 모아 14대를 헌납했다.(매일신보 1945년 6월11일) 

 

■지움 뿐 아니라 왜곡·날조까지 해서야
친일행적이 제기된 인물들 가운데는 자발적인 친일이 아니었다든지, 당시 친일파가 아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든지 하면서 항변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시대분위기에서 1전 2전 푼돈을 낸 장삼이사와, 지금의 돈가치로 억대, 수십억대인 1만원, 10만원을 덜컥 내고, 심지어는 비행기 헌납 촉구 광고까지 기명으로 게재하는 유력인사들의 친일행각이 같을 수 없다. 물론 조상이 친일파라고 해서 그 후손들까지 손가락질 받는 것이야말로 연좌제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연좌제가 아니다. 심지어 친일행적을 지우려 하고, 그조차 모자라 애국자로 포장하려든다면 그것은 더구나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 덧붙여 친일인물을 헌창하는 기념사업을 벌인다면 어찌 되는가. 이 또한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조상의 잘못에 용서를 구할 용기가 없다면 최소한 왜곡·날조는 하지 말아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역사적 사실을 지우려는데 그치지 않고 왜곡을 넘어 날조까지 하는 경우라면 당연히 철저한 검증을 통해 사실을 가려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으니까….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