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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김기춘의 파부침주와 허균의 유민가외

‘근검협동(勤儉協同) 총화유신(總和維新)’.

 

1974년 1월 1일자 신문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의 신년휘호다. 한해의 국정방향을 사자성어로 정리한 대통령의 각오가 담겨있다.

 

그런데 바로 신년휘호 사진 옆의 대통령 신년사 기사가 살풍경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부정하는 일체의 불온한 언동과 개헌서명운동을 즉각 중단할 것을 엄중히 경고한다’는 신년사가 떡하니 실렸다.

 

1974년 1월1일자 매일경제 1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근검협동, 총화유신'이라는 신년휘호를 남겼다. 한편으로는 "유신체제를 부정하는 일체의 불온한 언동과, 이른바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하라'고 경고했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인 1962(혁명완수)~79년(총화전진)까지 빼놓지않고 신년휘호를 발표했지만 매양 이런 식이다. 유비무환(72)·국력배양(73)·국론통일(75)·자조자립(76)·총화약진(77)·자주총화(78) 등….

 

온통 ‘단결하라’ ‘홀로서라’는 따위의 ‘~하라’식 으름장이다. 이쯤되면 시민의 삶을 어루만져주는 신년휘호가 아니라 일방통행식 신년협박이 아닐 수 없다.

 

한학에 밝은 김종필 전 총리는 해마다 새해맞이 사자성어를 구상하느라 홍역을 치렀다. 예컨대 95년 1월4일 신정 연휴기간 내내 장고한 끝에 발표한 사자성어가 ‘종용유상(從容有常)’이었다.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그는 ‘어려움을 당해도 남보기에 우습지않게 처신한다’는 등 여러 개의 뜻풀이까지 설명했다. 그러나 민자당 탈당을 앞둔 본인의 복잡한 심경을 사자성어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김종필 전총재는 96년 부대심청한(不對心淸閑·조건반사적 행동을 하지 않음), 97년 줄탁동기(안팎이 무르익어 자연스레 태어남) 등 어려운 사자성어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 역시 시민의 삶과는 관계없는, 개인의 한해 좌우명일 뿐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역대 최악의 사자성어는 ‘파부침주(破釜沈舟)’일 것이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015년 청와대 시무식에서 역설했다는 사자성어다. 파부침주는 밥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배마저 가라앉힌채 결사항전하겠다는 뜻이다.

 

당시 청와대는 ‘정윤회 청와대 문건’을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아닌 청와대 비서관의 문서유출 사건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김 전 실장은 ‘충(忠)은 한자로 쓰면 중심이며, 중심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는 둥 ‘군기가 문란한 군대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둥 ‘다른 마음(異心)을 품어서는 안된다’는 둥 대통령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을 위해 ‘파부침주하라’고 협박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알량한 사자성어는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역사는 백성이 아닌 군주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자, 그 자를 일컬어 간신이라 일컫는다.

최근 대선주자들도 새해를 맞아 경쟁적으로 기발한 사자성어 발굴에 나섰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재조산하(再造山下·망가진 나라를 다시 세운다)와 이재명 성남시장의 ’사불범정(邪不犯正·바르지못한 것이 바름을 범하지 못한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의 ‘마부위침(磨斧爲針·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혁고정신(革故鼎新·낡음을 청산하고 새로움을 창조한다)’, 안희정 충남지사의 ‘민주주의’, 유승민 개혁보수신당 의원의 ‘불파불립(不破不立·깨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다), 김부겸 민주당 의원의 ‘노적성해(露積成海·이슬이 쌓여 바다를 이룬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국태민안(國泰民安)’ 등….

다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사자성어를 고르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사자성어가 있으니 말이다.

 

바로 허균의 ‘호민론’에 등장하는 ‘유민가외(唯民可畏)’다. “천하에 두려운 것은 오로지 백성 뿐(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이라는 것이다.(<성소부부고>) 또 있다.

 

순자가 말한 주수군민(舟水君民)은 어떤가. “군주는 배(舟)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가라앉힐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순자> ‘왕제’)

이 두 가지면 될 것을 뭐하러 머리 싸매고 그 어려운 사자성어를 찾아 헤매는가. 그 시간에 서민들의 삶을 어루만질 대책을 세우면 될 것을….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