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여름 경주 천마총을 한창 발굴하고 있을 때였다. 전국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고 민심마저 흉흉했다.
경주에서는 멀쩡한 신라왕릉을 발굴하는 바람에 하늘이 노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그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경주 김씨 종친회 노인들이 발굴현장을 방문해 발굴조사를 중단하라고 법석을 떨었다. 어떤 노인은 현장에 드러누웠다. 시민들 사이에는 “데모라도 해서 발굴을 막자”는 여론도 비등했다.
왕릉을 발굴하면 액이 따른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러던 7월26일 오후 왕릉의 흙더미 사이에서 눈부신 금빛유물이 나타났다. 1,500여 년간의 긴 잠을 깬 순금제 신라금관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보관을 담은 상자를 무덤 밖으로 옮기기 위해 한 발짝 떼는 순간…. 그때까지도 뙤약볕이 이글거리며 내리쬐고 있던 서쪽 하늘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일순 하늘이 암흑천지로 변하면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꽈다당.”
유물 상자를 옮기려던 조사원과 인부들은 놀라 혼비백산, 금관을 수습한 상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는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현장사무실로 뛰었다.
갑작스런 하늘의 조화에 잔뜩 겁을 먹었던 조사요원들은 폭우가 진정되자 조사하던 무덤 내부로 돌아가 작업에 나섰다. 그런 다음 금관 상자를 안전하게 무덤 밖으로 옮기자 그렇게 무섭던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평상대로 맑게 개었다. 모두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금관이 출토되고 난 이후부터는 유언비어도 사라지고 아울러 가뭄도 해소됐다는 것이다.
발굴단은 “1,500여 년간 땅 속에 묻혀있던 어느 신라왕의 넋이 자신의 유택(幽宅)을 헐어버린다고 크게 노해 천둥·번개를 내고 비를 뿌렸을 것”이라고 이심전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천마총 뿐이 아니었다. 백제 무령왕릉을 팠을 때도 큰 비가 내렸다.
1971년 7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무령왕릉의 입구를 파헤치는 순간 천둥 번개를 동반한 억수 같은 소나기가 퍼부었다. 별별 흉흉한 소문이 들리고 실제로 발굴과 관련된 인물들이 횡액을 당했다.
김원룡 당시 발굴단장은 공교롭게도 빚에 몰려 집을 처분했고 남의 차를 빌어 타고 무령왕릉에 가다가 아이를 친 일도 있었다. 무령왕릉의 ‘무’자만 나와도 가슴이 떨렸던 김원룡은 늘 연구실 책상머리에 유서를 붙이고 다녔다는 후문이다.
1956년 중국의 명십상릉 중 정릉(만력제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도 무서운 비가 내렸다. 명루의 돌짐승과 인부 한사람이 차례로 벼락에 맞아 떨어지거나 죽었다. 실성한 노파는 발굴현장에 찾아와 흐느적거리며 “제발 부탁이니 날 용서해요. 더 이상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게요”라며 해괴한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당시 북경시 부시장 우한(오함)의 비극 또한 왕릉 발굴의 저주인가. 우한은 1955년 “왕릉발굴은 시기상조”라는 다른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굴을 강행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우한의 희극작품 ‘해서파관(海瑞罷官)’이 4인방의 함정에 걸렸다. 중국을 10년간이나 소용돌이에 빠뜨린 문화대혁명의 서곡이었다.
해서(1514∼1587년)가 누구인가. 명나라 때 ‘해청천(海靑天)’으로 일컬어질 만큼 청렴하고 대쪽같은 성격으로 황제의 실정을 질타한 인물이다.
그런데 마오쩌둥(毛澤東)은 1959년 “해서는 황제를 비판했지만 충심으로 절개를 지켰다”면서 추켜세웠고 그 선양작업을 우한에게 맡겼다.
우한은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과감하게 펼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해서를 추앙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뒤에 ‘해서파관’이라는 이름의 희극으로 공연됐다. 공연은 마오쩌둥의 극찬을 받았다.
그런데 1965년, 강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이 “우한의 ‘해서파관’은 독초(毒草)이며 깨끗하게 청소돼야 한다”고 포문을 열면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해서파관’은 (현대중국의 황제인) 마오쩌둥을 겨냥한 것이라는 올가미였다. 우한은 69년 홍위병들에 의해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죽기 전 정릉발굴을 반대했던 동료에게 눈물을 흘리고 옛 일(정릉 발굴)을 후회했다.
“이보게, 자네가 맞았어. 자네가 나보다 훨씬 멀리 내다본 것 같아.”
왕릉 발굴의 저주는 비단 동양뿐만이 아니다. 투탕카멘의 저주는 그 절정이다.
1923년 2월7일 영국의 카나본 경은 고고학자 카터와 함께 이집트에서 투탕카멘의 미라를 발견했다. 카나본은 이 발굴에 재정적인 지원을 한 인물.
영국의 일간지 기자가 그에게 “만약 투탕카멘의 저주가 사실이라면 당신은 6주밖에 못살 것”이라고 농을 던졌다.
저주란 바로 ‘파라오의 잠을 깨우는 자에게는 죽음의 저주가 있으리라’는 파라오 관 뚜껑에 쓰여 있는 글귀를 말한다. 그런데 4월5일 카나본 경은 이집트 호텔에서 모기에 얼굴을 물려 그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왼쪽 뺨에 물린 모기자국과 투탕카멘 왕의 미라 왼쪽 뺨에 있는 벌레 물린 자국이 일치할 줄이야. 이뿐 아니다.
발굴대원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사고로 줄줄이 목숨을 잃었다. TV 프로그램에 출연, “파라오의 저주라니, 터무니없다”고 큰소리 친 아담슨 조차 교통사고를 당했고 24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부인이 죽었으며 아들이 등뼈를 다쳤다. 발굴 이후 10년 이내에 사망한 이는 21명.
물론 발굴에 참여한 1,500명 중 21명이라면 많은 숫자가 아니다. 또한 발굴 관련자들의 평균수명이 73살이었다는 조사는 ‘투탕카멘의 저주설’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저 호사가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하지만 조상들의 ‘영면의 공’을 후세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파헤치는 건 분명 ’저주’를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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