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1979년 충북 중원(충주)에서 발견된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대에 세운 제2의 광개토대왕비라는 근거자료가 제시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충주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을 맞아 지난 22일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린 고구려비 학술회의 발표문(‘충주 고구려비 판독문 재검토’)애서 “충주 고구려비문을 최첨단 기법, 즉 3D 스캐닝 데이터와 RTI 촬영으로 판독한 결과 맨 첫머리 제액에서 ‘397년(광개토대왕 영락 7년)’을 의미하는 연호(영락 7년) 등 8자를 읽어냈다”고 밝혔다.
고광의 연구위원이 읽어낸 글자들. 영락 7년, 즉 397년 광개토대왕 7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대박사는 안오고 소박사들만
충주지역 향토답사동호회(예성동호회)가 발견한 충주 고구려비는 발견 이후 건립연대를 두고 첨예한 논쟁을 벌여왔다. 총 500여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판독가능한 글자는 200여자에 불과했다. 내용 또한 난해했다.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총출동해서 해독했지만 역불급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주인들조차 “아직까지 대박사(大博士)님들이 안왔나보다. 이 소박사(小博士)들은 (해석이) 잘 안되나보다”라며 쩔쩔매는 학자들을 딱하게 여길 정도였다.
여러 각도로 빛을 쏘아보고 판독한 ‘영(永)’자. 두계 이병도는 1979년 당시 ‘꿈에서 나타났다’면서 ‘건흥’으로 읽었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1979년 6월9일 7시간에 걸친 고구려비 학술대회에서는 두계 이병도(1896~1989)가 “밤늦도록 고구려비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비문 전면에 ‘건흥(建興)’과 ‘4년’ 글자가 보였다”고 주장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여든이 넘은 두계(당시 83살)가 다소 황당무계한 ‘꿈 이야기’까지 꺼냈다. 이에 당시 젊은 학자인 이호영 단국대 교수가 “저는 양원(陽原)으로 읽을 수 있고, 4년이 아니라 7년으로 보고있다”고 반박했다. 이후 끝없는 논쟁이 벌어졌지만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연대는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설, 장수왕(413~491)설, 문자명왕(492~519)설 등 다양한 설을 주장해왔다. 요즘 들어서는 장수왕설과 문자명왕설이 유력한 설로 운위되고 있다.
고광의 위원이 읽은 '락'자. 두번째 글자의 상부와 하부의 형태를 결합해서 읽었다.
■꿈의 계시까지
그러다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을 맞이한 올해 이른바 ‘3D 스캐닝’과 ‘RTI 촬영(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을 활용해서 비문의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냈다. 두 방식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360도 돌아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쏘아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 읽어내는 기법이다. 동북아역사재단과 고대사학회 연구자들은 이 기법으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두차례에 걸쳐 ‘충주 고구려비문’의 판독회를 열었다. 학자들은 고심 끝에 기존 판독과 견해 차이가 있었던 글자 중 5자를 새로 확정했고, 새롭게 총 19곳에서 23자를 제시했다.
‘칠’자. ‘영락7’이라면 397년을 의미한다.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 시대에 일어난 일을 새긴 ‘제2의 광개토대왕비’라 할 수 있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이 중 확정한 글자는 전면의 ‘조(祖)’와 ‘공(公)’, ‘기(忌)’, ‘제(諸)’, ‘지(支)’ 등이다. 또한 새롭게 제기된 글자는 전면의 ‘구(句)’, ‘방(方+△)’, ‘불(不)’, ‘耳+令’, ‘구(九)’, ‘유(有)’, ‘공(恭)’, ‘제(諸)’, ‘지(支)’, ‘고(告)’, ‘부(扶) 혹은 말(抹)’, ‘△+衣’, ‘병(兵) 혹은 선(先)’, ‘탈(奪)’자이다. 왼쪽면은 ‘공(工+△)’(상), ‘이(二)’(하), ‘백(百)’, ‘육(六)’(상), ‘십(十)’(하), ‘사(四)’, ‘왜(倭)’자이다. 학자들은 특히 제액(비문의 제목)에 해당되는 전면(前面)의 윗단 부분’에 대해, 글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까지는 합의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 의견을 모으지 못한채 유보했다.
‘영락7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자인 ‘년(年)’자. 광개토대왕 비문의 ‘年’자와 비슷한 형태라 한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영락7년을 읽었다
하지만 고광의 연구위원은 발표문에서 “비문의 핵심인 이 재액부분과 관련해서 8자를 읽어냘 수 있다”고 밝혔다. 고 연구위원은 “두계 이병도가 읽은 부분은 비석의 전문에 가로쓰기 형태로 새겨진 제액(비문의 첫머리에 새기는 비석의 제목)인데, 이번에 이 부분을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로 읽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고위원은 제액의 첫번째 글자를 ‘영(永)’자로 판단했다. 자획의 판별이 쉽지 않지만 하부에서 ‘水’자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고, ‘水’자 우측에는 점획이 분명하고 상부에도 패인 부분을 가로지르는 획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歲)자 부분,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 출토 ’천추만세영고명(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자형과 비슷하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고광의 위원은 “RTI 촬영 사진과 3D 스캐닝 사진 등을 통해 전체적인 글자의 형태는 ‘永’자로 확인된다”고 밝혔다, 고위원은 “이 글자는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에서 발견된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永’자와 비슷한 형태”라고 밝혔다, ‘永’자 좌측에도 다소 복잡한 형태의 필획들이 보인다. 이는 1500년 이상의 세월을 겪은 비석은 자연적 풍화의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흔적 지우기’의 하나로 인위적인 훼손일 수도 있다.
‘재(在)’자. 3D 자료를 보면 아래쪽 삐져나간 흔적은 뒤집힌 부채꼴 형태로 떨어져 나간 훼손 흔적이 분명하다.|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또 두번째 글자의 상부와 하부의 형태를 결합해 보면 전체적으로 ‘낙(樂)’자에 가깝다. 상부에 ‘백(白)’자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고 그 양옆으로 삼각형에 가깝거나 혹은 역삼각형 형태의 필획들도 나타난다. 하단부에는 가로획과 세로획들이 다수 엉켜있지만 ‘목(木)’자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고광의 위원은 “전체적으로 광개토태왕비의 ‘낙(樂)’자 형태와 유사한 결구로 보인다”고 밝혔다. 세 번째 글자는 ‘칠(七)’자가 확실했다. 가로획은 우측으로 약간 올라가는 형태이고 획의 끝 부분에서 미세한 파책의 흔적이 나타난다.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 이렇게 종서에서 횡서로 또는 횡서에서 종서로 서사 방식을 혼합하는 경우는 고대의 간독이나 서간문 등에서는 보이지만 금석문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라 한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새로 읽어낸 8자
고 위원에 따르면 네 번째 글자는 ‘연(年)’자이다. 두계 이병도는 마멸된 것으로 보았으나 이호영 교수는 ‘年’자로 읽었다. 이 글자의 좌측 부분은 물갈이 흔적이 잘 남아 있어 필획의 구별이 비교적 잘되며 2000년 고구려연구회 판독회에서도 제액의 글자 중에서 유일하게 확인하였던 글자이다. 첫 번째 획은 세로가 짧은 ‘ㄴ’ 형태이고 그 아래로 3개의 가로획이 있다. 그리고 이들 필획을 중간에서 관통하는 세로획으로 구성되어 있어 광개토태왕비와 유사한 자형 결구이다.
고 위원에 따르면 다섯 번째 글자와 여섯 번째 글자는 ‘세재(歲在)’이다. ‘세(歲)’자 부분은 상부의 ‘山’자 형태가 비교적 명확하고 그 아래쪽에 비스듬한 세로획들과 이 세로획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획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 출토 ‘천추만세영고명(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자형과 비슷하다. 여섯 번째 글자는 ‘재(在)’자이다. 3D 자료를 보면 아래쪽 삐져나간 흔적은 뒤집힌 부채꼴 형태로 떨어져 나간 훼손 흔적이 분명하다. 고광의 위원은 그 다음 글자에서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
3D 촬영과 RTI촬영을 위해 포토샵으로 처리한 충주 고구려비.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따라서 고위원은 “이렇게 종서에서 횡서로 또는 횡서에서 종서로 서사 방식을 혼합하는 경우는 고대의 간독이나 서간문 등에서는 보이지만 금석문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라고 밝혔다. 고광의 위원은 “이번에 읽어낸 제액은 총 8자이며,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고 전했다. 고구려에서 이러한 연호와 간지를 기재하는 방식은 광개토태왕비의 ‘영락5년세재을미(永樂五年歲在乙未)’ 등을 비롯하여 ‘건흥오년세재병진’명 금동광배 등에서도 보인다.
또한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연대는 지금까지 전면 7행 15~22자 사이의 ‘12월23일 갑인(十二月입三 甲寅)’ 날짜와 좌측면의 ‘신유년(辛酉年)’이라는 연간지 중심으로 추정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최첨단 촬영으로 판독한 글자는 ‘23일’이 아니라 ‘27일(입七)’이었다. 제액에서 확인된 ‘영락7년세재 정유’가 397년이라면 그해 12월27일은 ‘경인(庚寅)’이 되어야 한다. 그동안 경(庚)자를 갑(甲)자로 잘못 읽은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신유’로 읽었던 부분도 ‘공이백육십(功二百六十)’일 가능성이 크다. ‘신유년’이 아니라 ’공이백육십’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3D촬영과 RTI 촬영의 기초자료를 확보하려고 준비하는 모습.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397년 일어난 일
고광의 연구위원은 “이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며 이 비석을 세운 연대는 397년 12월 27일 이후일 것”이라면서 “이 비석의 건립연대가 광개토대왕 재위시절로 소급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중원고구려비에서 읽은 주요 내용은 ‘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이다. 즉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여형여제’ 즉 형제사이임을 영원히 맹세했다는 뜻이다 물론 고구려가 형이고, 신라가 동생이다. 또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일컬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한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구려는 스스로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폄훼한 것이다.
또 ‘동이매금지의복(東夷寐錦之衣服)’과 ‘상하의복(上下衣服)’, ‘대위제위상하의복(大位諸位上下衣服)’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대목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고구려군의 신라주둔과 관련된 대목이다. 즉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신라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고구려 군부대의 지휘관)’라는 뜻이다.
그동안 ‘신유년’으로 읽었던 부분. 그러나 이번에 판독결과 ‘공이백육십(功二百六十)’인 것으로 판명됐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동쪽 오랑캐 신라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와 신라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신라 자비왕) 때 이미 친선(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는 신라가 왕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예속관계가 이어졌다. 즉 광개토대왕 2년(내물왕 37년·392년) 신라 왕족 실성(훗날 실성왕으로 등극)이 고구려 인질로 떠났다. 401년 귀국한 뒤 내물왕의 후계자가 된 신라 실성왕은 412년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인질로 보낸다. 또한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10년(400년)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는 5만 보기병을 파견, 왜병을 쫓아낸 적도 있다. 하지만 424년 장수왕 12년(눌지왕 8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交聘)의 예를 닦았다”(삼국사기)는 기록을 끝으로 고구려·신라의 우호관계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신라가 고구려의 예속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판독이 맞다면 충주 고구려비가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국 사이이고, 밀월관계를 맺고 있을 때 건립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고광의 연구위원은 “그러나 아직까지 비문에 등장하는 간지 등의 해석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100% 확증할 수는 없다”면서 “향후 비문을 더 판독하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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