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할만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동래성 수축을 위해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으로 보이는 백골들을 다수 발견한 것이다. 숫자는 최소 12명이었다.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의 사이에 띠를 이뤘다. 당시 정언섭이 건립한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의 비문을 보라.
“전후에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여지집성(輿地集成)>)
동래성에서 확인된 20대 여성의 두개골. 왜병은 이 힘없는 여인을 예리한 칼로 두 번이나 베었다. 여인은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경남문화재연구원
■끔찍한 발굴
그로부터 꼭 274년 뒤인 2005년, 바로 그 언저리에서 끔찍한 발굴이 이뤄진다.
부산 지하철 3호선 수안동 전철역사 예정지를 조사중이던 발굴단(경남문화재연구원)이 바로 그 동래읍성의 해자(垓子·적의 공격 막기위해 성 주변에 파놓은 도랑)를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졌다.
나무말뚝이 해자 바닥에 깔려있고 그 사이에서 인골과 찰갑(札甲·철판을 이어만든 갑옷)과 첨주투구(투구의 일종), 환도(環刀)와 깍지(궁수의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가락지), 창, 화살촉 등 정신없이 나은 것이다. 그런데 발굴단의 눈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죽은 뒤에 바로 이 해자에 유기된 발굴 인골들의 형태였다.
즉 출토인골들은 하지골이나 상지골~슬관절이나 주관절이 연결됐다던가, 두개골과 경추가 함께 확인됐다던가 했다. 이는 인대와 근육이 붙어있는 단계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것, 즉 죽은 뒤에 해자로 유기된 것이었더,
그런데 북서쪽에서 확인된 20~40대 성인남자의 인골은 머리 뒤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언가에 머리를 찔렸거나 베임을 당해 죽은 것이었다. 전투를 벌이다 적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 분병했다. 발굴단은 곧 임진왜란 때 비명에 간 이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제를 지냈다. 아마, 1731년, 같은 장소에서 인골들을 발견했던 동래부사 정언섭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유아인골의 머리에 난 총상
인골들을 분석한 결과 더 참혹한 결과가 나왔다.
분석결과 인골이 최소 81개체에서 최대 114개체까지 보이는데, 모두 해자의 바닥에서 집중적으로 검출됐다는 것. 이 인골들은 인위적으로 해체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는 곧 같은 시기에 해자에 시신들이 방치됐다는 얘기였다.
3차에 걸쳐 검출한 인골을 분류하면 남성이 59개체, 여성이 21개체에 이르렀다. 성별은 1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충격적인 인골은 어린아이의 것이 분명한 유아인골이었다. 당시 고인골 전문가 김재현 교수(동아대)의 분석결과 만 5세 미만의 유아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 유아의 두개골에는 전두골의 우측에 총이나 활로 맞은 사창(射創) 혹은 칼·창 등으로 찔린 자창(刺創)의 흔적이 보인다.
김재현 교수는 당시 “일본군의 조총에 맞은 흔적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조총의 총알이 부정형인데, 상처도 원형이 아니라 부정형의 둘쭉날쭉한 형태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상흔의 깨진 정도와 경사각도를 보면 이 유아는 전쟁통에 왜군이 쏜 조총에 비껴 맞았거나, 유탄에 의해 희생되었을 게 분명했다.
아마도 이 유아는 엄마와 함께 있다가 왜병의 총탄에 맞아 숨졌을 것이다. 지금도 그 모습을 보고 절규했을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유아는 왜병에 의해 해자로 던져졌겠지. 그 엄마도 어린아이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크다.
■처형당한 여인의 머리
다른 유골들의 두개골에서 확인된 상흔을 나눠보면 칼로 베인 절창(切創·모두 4개체로 남성 3개체와 여성 1개체), 총과 활에 의한 사창 또는 자창(2개체), 둔기에 의한 두개골 함몰(2개체) 등이었다. 이 가운데 20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은 더욱 더 비참했다.
왜병들은 이 여성의 머리를 두 번이나 칼로 벤 것이다. 특히 여성의 전두골을 보면 단 한 번의 칼놀림으로 예리하게 잘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힘없이 스러져가는 여인의 두정골도 칼로 베고…. 왜병은 이 여성을 두번이나 무참하게 칼로 벤 것이다.
더욱 눈을 의심하게 만든 것은 상흔의 부위였다. 칼로 벤 상흔의 위치가 이상했던 것이다.
보통 전쟁통에 백병전을 벌일 때 칼을 휘두르면 각도상으로 얼굴의 양쪽 옆을 베기 마련이라는 것. 그런데 이 여인의 상흔을 보면 왼쪽에 선 왜병이 꿇어 앉았거나 고개를 숙인 여인을 내리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처형이 아닌가. 왜병들은 아무 죄없는 여성을 꿇어 앉혀놓고 이렇듯 두번이나 칼로 내리쳐서 처형시킨 것이 아닐까. 이 뿐이 아니었다. 남성의 두개골 분석에서도 뒤에서 혹은 앞에서 칼로 벤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칼로 베인 것 같기는 한데 그 상처구멍의 단면이 반듯하지 않은 인골들이 있었다. 이는 칼이 아니라 다른 무기로 베였다는 소립니다.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이 남녀 1개체씩 확인됐다. 무자비한 학살의 현장이 분명했다.
① 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현 부사. ②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③ 왜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모습. ④ 송상현 부사의 순절 직전 모습. 조복을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⑤ 동래부민 김상과 아낙 2명이 왜병에게 기와를 던지며 싸우고 있다. ⑥ 적이 떠난 뒤 죽은 김상과 아낙 둘, 그리고 왜병 3명. ⑦ 송상현의 애첩 김섬이 자리를 피하다 잡혔지만 사흘 동안 왜병을 꾸짖고 욕하다가 역시 살해됐다. | ‘동래부사순절도’는 동래성 전투의 모습을 시간대별로 묘사하고 있다. 점선원안은 동래성 해자 발굴지점.
■그 참혹했던 1592년 4월 15일
과연 1592년 이곳에서는 어떤 참혹한 일들이 벌어졌을까. 기록을 통해 알아보자.
1592년 1월, 일본 전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출병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왜병의 총병력은 30만 명이었다.
마침내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 여 명은 700척의 전함에 분승,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왜병은 부산진을 함락하고 동래성으로 밀어닥쳤다. 그때가 14일 오전 10시 쯤이었다.
왜군은 선발대 100명을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라고 항복을 종용한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宋象賢·1551~1592년)이었다. 송부사는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고 일축한다.
15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된다. 궁시(弓矢) 위주의 방어로는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鳥銃)의 화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송상현 부사는 부산성이 왜군의 맹렬한 조총 공격에 녹아난 것을 알고는, 통나무 방패로 방어책을 세웠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조총의 위력은 엄청났다. <무기요람(武器要覽)>은 “숲에서 나는 새도 모두 떨어뜨릴 수 있으니 그래서 이름을 조총(鳥銃)이라 했다(卽飛鳥之在林 階可射落 因是得名)”고 했으니….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100~200m였고, 명중거리 50m, 분당 사격은 4발이었다.
오죽했으면 선조는 ‘조총은 천하의 신기(鳥銃者 天下之神器也)’라고 감탄까지 했다.
발굴지점에서 인골과 찰갑 등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
각설하고, 겹겹이 에워싼 왜군의 총공세가 이어지고, 동래성은 뚫리기 시작한다.
“총성이 울리고 그 검광은 백일을 무색하게 했다. 적군이 성중에 들어와 사람으로 메우다시피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 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왔다.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임진동래유사>)
송상현 부사도 위기에 처했다. 왜적 가운데는 통신사로 조선을 드나들던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이가 있었다.
통신사 시절 송상현의 후대(厚待)를 받은 경험이 있는 평조익이 급히 나서 송상현에게 “빨리 피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송상현이 꿈쩍도 하지 않자 평조익은 부사의 옷을 잡아당겨 성벽의 빈터를 가리켰다. 하지만 송 부사는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4번 절하며 담담하게 죽을 준비를 했다. 그런 뒤 태연히 붓을 들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외로운 성에는 달무리가 지고 다른 군진에는 기척도 없군요.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정은 가볍습니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양산군수 조영규도 송상현 부사와 함께 죽었고, 송부사의 겸인(집사) 신여로, 비장(裨將) 송봉수·김희수, 향리(鄕吏) 송백 등 송부사의 핵심 측근들도 모두 살해됐다. 동래향교 노개방과 유생 문덕겸·양조한 등도 함께 순절했다. 왜장도 송상현 부사의 순절에 감동해서 장례를 돕고 제사를 지냈으며, 심지어는 송상현을 죽인 자를 끌어다 죽였다고 한다.
“갑오년(1594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송상현의) 집안사람으로 하여금 시체를 거두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경내에서 벗어날 때까지 호위해주었다. 적진에 남겨진 유민들이 울며 송상현의 시신을 전송했다.”(<선조수정실록>)
■잊어서는 안될 백성들의 넋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죄 없는 백성들다.
이들은 조국을 위해 칼과 낫, 곡괭이, 심지어는 맨손으로 적과 싸웠고, 그 과정에서 힘 없는 여성과 어린아이까지 속절없이 적병의 창칼에 스러졌다.
<임진유문(壬辰遺聞)>을 보라. 동래부민 김상(金祥)은 동네 아낙 두 사람이 깨 준 기와로 적병을 내리쳤다. 적이 떠난 뒤 김상의 어머니가 보니 김상과 두 아낙이, 적병 세 사람과 함께 죽어 있었다. 또 한 사람 비극의 주인공은 송상현 부사의 애첩인 김섬(金蟾)이다.
“송상현의 애첩 김섬은 함흥의 기녀였다. 송상현의 순절 즈음에 적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사흘 동안이나 적을 꾸짖고 욕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적도 이를 의롭게 여겨 관구를 갖추어 송상현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
동래성 전투로 왜군은 참수 3000여명, 포로 5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서정일기(西征日記)>) 당시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사로 활동했던 루이스 프로이스(Lois Frois)는 조선군 전사자가 약 5000명이라고 했다. 물론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한 수치일 것이다.
“양산군수 조영규의 아들 조정로가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동래성에 갔는데, 성 안이 온통 시체로 덮여있어 유골을 수습하지 못했다.”(<충렬사지> ‘조공유사기·趙公遺事記’)
임진왜란 후 17년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의 글을 보라.
“4월15일 청명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나 ~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라 했다. 송상현 부사를 좇아 모인 성안 백성들은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천 명 중 한 두 명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고, 조손·부모·부부·자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며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내(이안눌)가 눈물을 흘리자 늙은 아전은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이안눌의 <맹하유감사(孟夏有感祠)>)
'흔적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 기록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진실 (8) | 2014.08.04 |
---|---|
시진핑이 언급한 '인물탐구' (0) | 2014.07.29 |
'정몽주으리', 포은은 '의리!'의 조상이다. (0) | 2014.07.15 |
판다 외교와 코끼리 외교 (2) | 2014.07.06 |
고지쟁탈전에 흘린 젊은 넋들의 피 (0) | 2014.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