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대시인 허균의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속마음을 매번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시린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7월 초, 한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친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허균(1569~1618년)의 시를 인용했다.
시 주석은 그러면서 “이 시구는 바로 중국과 한국의 친선과 우의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이 시는 허균이 정유재란 때 명나라 지원군의 일원으로 파견됐다가(1597년) 귀국하던 오명제에게 보낸 ‘송별시’이다. 허균의 송별시, 즉 ‘참군 오자어(오명제의 호) 대형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吳參軍子魚大兄還天朝)’를 더 보자.
■간담상조, 빙호옥호
“나라는 중외의 구별 있다지만(國有中外殊) 사람은 구별이 없는 법이네.(人無夷夏別) 태어난 곳 달라도 모두 형제니(落地皆弟兄) 초 땅, 월 땅 나눌 필요가 어찌 있으리.(何必分楚越) 간담을 매번 서로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빙호를 찬 달이 내려 비추네(氷壺映寒月) 옥을 보고 나의 추함 알아차렸고(依玉覺我穢) 타주는 그대를 따를 수가 없었네.(唾珠復君絶)”(<해동역사> ‘예문지’ 7)
명나라 파병군의 빈객으로 조선에 온 오명제는 조선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오명제는 서울에서 허균의 집에 머물면서 소중한 기회를 잡는다.
“허씨 형제 세사람은 허봉·허성·허균인데 모두 문장으로 해동(조선)에 이름이 났다. 허균은 기억력이 뛰어나 해동의 시 수백편을 외었다. 또 허균의 동생(허난설헌)에게서 시 200편을 얻었다.”(오명제의 <조선시선> ‘자서’)
허씨 형제 뿐이 아니었다. 오명제는 판서 윤근수로부터 조선의 시 수백편을 책상자로 얻었다.
1599년(선조 32년) 다시 조선을 방문했을 때는 ‘시문에 능한’ 정승 이덕형의 집에 머물러 상당수의 시문집을 구했다.
“정승 이덕형에게 여러 명사들의 시문집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덕형이 신라~조선에 이르는 모두 100여 명의 문집을 구해주었다.”
오명제는 이렇게 모은 조선의 책들을 두 달간 펼쳐보고는 좋은 시들을 뽑아 중국에 소개했는데, 이것이 <조선시선> 이다.(<해동역사> ‘예문지 4·경적 4’)
오명제는 <조선시선>의 서문(자서)을 한음 이덕형의 집에서 썼으며, 본문 뒤에는 허균이 지은 <조선시선 후서>를 실었다. 허균이 오명제에게 전한 송별시는 이 후서에 실려 있다.
시진핑 주석의 언급대로 550년 전 조선인 허균·이덕형 등과 중국인 오명제 등의 끈끈한 교류는 뿌리깊은 한·중 관계의 상징일 수 있겠다.
허균의 시처럼 티없이 깨끗한 마음으로(빙심옥호·氷心玉壺),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간담상조·肝膽相照)라는 것이니….
■사선을 넘나든 전우
시진핑 주석의 서울대 강연에서 언급된 인물 가운데 몇사람만 꼽아보자. 최치원과 김구 선생 등 장 알려진 인물들을 빼고….
“400년 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환난상조(患難相助)의 차원에서 양국의 군민이 함께 싸웠습니다. 이때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둘 다 전사했습니다. 또 명나라 군 통수인 진린의 후예가 조선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시진핑 주석)
등자룡(登子龍)과 진린(陳璘)은 과연 누구인가. 시 주석의 말마따나 등자룡과 진린은 이순신 장군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였다.
진린은 명나라 파병군의 수군도독이었다. 1598년(선조 31년) 1월 절강성 소속의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조선에 진주했다.
이순신 장군은 진린의 중국군을 환대했다. 진린은 선조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순신 장군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통제사는 천지를 다스릴 만한 재주를 지녔고,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킬 만한 큰 공이 있습니다.(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고금도에서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고 적병 100여명의 수급을 베는 장면을 지켜보고는 감사를 연발했다.
“역시 통제사는 임금의 주석(柱石)이 도리만한 신하야. 옛날의 명장인들 어찌 이보다 나을까.”(<일월록>)
‘주석지신(柱石之臣)’은 ‘나라의 기둥이 될만한 신하’를 뜻한다.
■“통제사가 죽었구나! 함께 싸울 이가 없구나”
마침내 7년 가까이 질질 끈 전쟁을 마무리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1598년 11월 19일의 이른바 ‘노량해전’이었다.
<선조실록>, <연려실기술>, <징비록>, <난중일기> 등에 기록된 그 날의 현장을 복기해보자. 이날 이순신의 조선군과 진린의 명나라 군이 연합작전을 펼쳤다.
“이순신 장군이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베었다. 적은 배를 모두 끌고 와서 관음포에서 싸웠다.”
이 때 진린 도독은 사천의 적을 무찔렀다. 적이 이순신의 배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자 진린은 조선 배로 바꿔 타고 포위망을 뚫고 이순신 장군을 구원하려 했다.
그러나 적병이 진린의 배를 포위했다. 적의 칼날이 거의 진린에게 닿을 정도였다. 진린의 아들(구경)이 몸으로 막다가 찔려 피가 뚝뚝 떨어졌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들이 한꺼번에 칼을 빼들고 배 위로 몰려오자 명나라군이 장창으로 낮은 자세에서 찔러댄 물에 떨어져 죽은 왜적이 숫자가 1000명을 헤아렸다. 육박전은 계속됐다.
이순신은 진린이 포위당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 포위망을 뚫고 전진했다. 멀리 붉은 휘장을 친 적선 한 척 황금 갑옷을 입은 세 명의 적장이 전투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 때 이순신은 군사를 집결시켜 붉은 휘장을 친 적선을 맹공, 황금갑옷을 입은 적장 한 사람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적선들은 진린 도독을 놔두고 그 배를 구원하러 갔다. 도독의 군사는 이 때문에 빠져 나왔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지휘선을 다시 맹공해 산산조각냈다. 그러자 나머지 적들이 혼비백산했다.”
이 과정에서 그만 큰 사고가 터진다.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개의치 않고 직접 손으로 북을 치다가 그만 적탄에 맞은 것이다.
알다시피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며 비밀에 붙였다. 그러나 진린 도독이 멀리서 보고 장군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배 위에서 조선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베려고 공을 다투는 모습을 보고 “통제사가 죽었구나!” 하고 간파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그걸 어찌 아느냐”고 묻자 진린 도독은 “통제사의 군대는 군율이 매우 셌는데 이제 그 배에서 공을 다투느라 어지러운 것을 보니 이것은 장군의 명령이 없기 때문”이라 답했단다.(<자해필담>)
이순신의 서거 소식에 진린은 배에서 넘어지기를 세 번이나 하면서 울부짖었다.
“함께 싸울 이가 없구나! 나는 노야(老爺·이순신을 지칭)가 살아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
진린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자 온 군사가 모두 울어서 곡성이 바다 가운데 진동하였다. 조선군은 물론 명나라군도 이순신 장군의 관을 부여잡고 울부짖었으며, 고기를 물리고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순신의 전공을 명나라 황제(신종)에게 알렸다. 그러자 황제는 이순신에게 도독의 인장을 내렸다.
그야말로 피를 나눈 전우가 된 진린은 이후 조선과 영원한 관계를 맺는다.
진린 도독이 죽고(1607년), 명말 청초의 어수선한 정세를 맞이한 후손들이 조선땅에 정착한 것이다. 맨처음 도착한 곳이 진린 도독의 체취가 묻어있는 고금도였단다.
이후 진린 도독의 후예는 ‘광동 진씨’ 가문을 개창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70살 노장 등자룡
등자룡은 진린 제독의 휘하 부총병이었다. 절강과 직예(지금으로 치면 서울 주변의 수도권 지역) 출신의 정병들을 이끌고 참전한 일흔살의 노장이었다.
그 역시 노량해전에 참전, 불꽃처럼 싸우다가 전사했다. <해동역사> ‘비어고’ 등에 기록된 등자룡의 전공을 보라.
“진린 제독이 급히 등자룡을 급파, 조선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수군 1000명을 거느리고 3척의 전함을 몰아 선봉이 되었다. 그의 나이 70살이 넘은 나이에도 의기를 더욱 가다듬어 으뜸의 공을 세우고자 했다.”
서희진의 <동정기>를 보면 등자룡은 장사 200명을 거느리고 조선 군사의 배에 뛰어오른 다음 곧장 진격해서 왜적들을 죽였다.
그러나 다른 배가 화기(火器)를 잘못 쏘는 바람에 등자룡의 배에 불이 붙었다. 이 틈에 왜적들이 배로 올라와 등자룡을 찔렀다. 등자룡은 그만 아군의 오폭이 빌미가 되어 전사하고 만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112년이 지난 1710년(숙종 39년), 조선 조정은 의미있는 결정을 내린다.
진린 도독은 정유재란 당시 관우의 신력을 빌려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고 완도 고금도에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지은 바 있다. 그런데 숙종은 진린과 등자룡,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위패까지 함께 배향하고 ‘탄보묘(誕報廟)’라 일컬었다.
■정율성은 누구인가
이제 시진핑 주석이 한·중 우의의 상징으로 또 언급한 정율성(鄭律成)이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시진핑 주석은 “(한국인인) 정율성(1914~1976)은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 정율성은 중국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의 녜얼(섭耳·1912~1935), ‘황하대합창’의 시싱하이(洗星海·1905~1945)와 함께 중국현대의 3대 작곡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전라도 광주 출신인 정율성은 19살 때인 1933년 중국으로 떠나 항일투쟁을 벌인다.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정율성은 홍군(중국공산당군)의 근거지인 옌안(延安)행을 결심하게 됐다.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소극적 항일을 간파하게 된 것이었다. 정율성은 1937년 우여곡절 끝에 옌안으로 들어가 산베이(陝北)공학-루신예술학원의 음악학부에서 수학했다.
그는 1938년 혁명의 열기로 가득찬 옌안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곡을 ‘옌안송(延安頌)’이라 했다.
이 노래는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해방구 및 국민당 통치구역에까지 전파됐다. 항일과 혁명을 위해 천리·만리길을 걸어 옌안에 모인 젊은이들의 열정과 적(일본군)에 대한 분노를 잘 그려냈다는 평을 듣는다. 이 노래를 듣고 옌안으로 옌안으로 발길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율성에게 음악을 배운 가수 멍위(孟于)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17~18살 여고생 때인 1938년, 이 노래를 칭따오(청도)에서 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어요. 헉명을 하려면 옌안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탈영하던 병사의 마음을 바꾼 것도 바로 ‘옌안송’이었다고 한다. 옌안송은 중국인들이 화교를 통해 모금운동을 펼칠 때 불렀던 노래이기도 했다.
■불멸의 ‘팔로군행진곡(인민군해방군가)’
그러나 ‘팔로군행진곡’(1939)을 빼놓고는 정율성을 논할 수 없다. 이 곡이 바로 시진핑 주석의 언급대로 ‘중국인민해방군가’로 지정된 곡이니까….
원래 중국공산당군은 홍군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이른바 2차 국공합작이 이뤄진 후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됐다. 팔로군은 이 때부터 중국공산당군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됐다. 정율성은 <팔로군 대합창>이라는 곡의 이름 아래 모두 8곡을 작곡했다.
‘팔로군 군가’, ‘팔로군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자야강 병사의 노래’, ‘기병가’, ‘포병가’, ‘군대와 인민은 한 집안 식구’, ‘팔로군과 신사군’ 등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 바로 ‘팔로군행진곡’이다.
‘전진(向前)!전진(向前)!전진(向前)! 우리 대오 태양 따라 나간다.(我們的隊伍向太陽) 조국의 대지 밟으며(脚踏着祖國的大地), 민족의 희망을 안은(背負着民族的希望) 우리는 천하무적 무장(我們是一支不可戰勝的力量) 우리는 노동자 농민의 자제(我們是工農的子弟), 우리는 인민의 군대. 두려워 않고, 굴복 않고, 용감히 싸우네.(我們是人民的武裝 從无畏懼 絶不屈服 英勇戰斗) 반동의 무리를 쓸어낼 때까지(直到把反動派消滅干淨) 마오쩌둥의 기치를 높이 든다.(毛澤東的旗幟高高瓢揚) 들으라! 나팔 소리 울리는 바람을(聽! 風在呼嘯軍號), 들으라! 혁명가가 얼마나 우렁찬지를(聽! 革命歌聲多료亮), 동지들아 발 맞춰 해방의 전장으로 나가자!(同志們整齊步伐奔向解放的戰場),동지들아 발맞춰 조국의 변방으로 나아가자.(同志們整齊步伐奔赴祖國的邊疆,전진(向前)! 전진(向前)! 우리의 대오 따라 태양이 따라간다.(我們的隊伍向太陽) 최후의 승리를 위해!(向最后的 勝利), 전국의 해방을 위해!(向全國的解放)!’
■딩쉐쑹과의 국제결혼
재미있는 것은 궁무의 작사 중에는 맨 앞의 시작 부분, 즉 전진(向前)! 전진(向前)! 전진(向前)! 부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율성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가사를 받고보니 노래 시작부분이 어딘가 기백이 부족했습니다. 생각하다 못해 첫부분을 고쳤습니다. 전선에서 일본놈들과 싸우는 팔로군의 대오를 표현하려고…. 고치고나니 기백이 살아나고 노래가 살아났습니다.”
이 ‘팔로군행진곡’은 이후에도 신중국의 운명과 함께 했다. 이 곡은 1945년부터 벌어진 해방전쟁 시기에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인민해방군군가’로 사용됐다. 급기야 1988년 7월 25일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지정됐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때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연주되기도 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정율성이 훗날 중국 최초의 여자대사를 지낸 딩쉐쑹(丁雪松)과 혼인했다는 것이다.
딩쉐쑹(1911~2011)은 신중국 출범 이후 주 덴마크와 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낸 여성이었다. 정율성은 1938년 옌안시절 항일군정대 여학생 대장이던 딩쉐쑹에게 매혹됐다.
그는 들꽃을 꺾어 몰래 주고, <안나 까레리나>와 <동백꽃 처녀> 등의 소설책을 건네며 편지를 살짝 꽂아넣곤 했다. 딩쉐쑹 역시 ‘약간 수척했지만 영준하면서 강인한 인상의 조선 혁명청년’에 마음을 열었다. 두 사람은 1941년 결혼했다.
■북한군가를 작곡하다
그런 정율성의 운명을 바꾼 세번째 사건이 있었다.
해방(1945년)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부인과 딸을 북한에 가라는 명을 받은 것이다. 45년 9월 도보로 연안을 떠나 3개월에 평양에 도착한 정율성은 곧바로 황해도당위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정율성은 이 때부터 ‘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중우의’ 등의 노래를 만들었다. 48년에는 북한 최고 영예인 ‘모범근로자’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율성은 ‘조선인민유격대 전가’와 ‘공화국 기치를 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등의 작품을 남긴다.
정율성은 이후 1950년 10월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국적과 당적을 회복했고, 다시 북한에 파견됐다가 1952년 4월 중국으로 돌아온다.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 중 간첩죄명으로 감금되고 창작활동이 박탈되는 등의 위기를 맞는다. 그럼에도 불타는 창작열이 이어져 교향악의 최고탑이라 할 수 있는 ‘마오쩌둥 시사(毛澤東詩詞)’ 20편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완성하기도 한다. 정율성은 1976년 4인방이 몰락하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노래하는 연가와 건군 50주년을 위한 대형창작을 서두른다.
그러나 그 해 12월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자 후야오방(胡耀邦)은 “정율성의 노래는 연안 시기에 큰 봉우리를 이뤘고, 중국 인민의 해방사업과 혁명투쟁에 크나 큰 기여를 했다”고 애도했다. 그가 묻힌 바바오산(八寶山) 혁명 열사릉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정율성 동지는 자기 생명을 중국 인민 혁명사업에 바친 혁명가이다. 인민은 영생불멸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노래도 영생불멸할 것이다.”
정율성은 불후의 명작이라는 ‘인민해방군군가’를 비롯해 400여 곡을 작곡했다. 그는 2009년 중국에서 열린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신중국 건국에 공헌한 영웅 인물 100인’ 가운데 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2년 8월24일 한국과 중국의 국교수교일에 정율성의 음악이 연주되기도 했다. 중국에서 차지하는 조선인 정율성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군의 애창곡
그러고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왜 유독 국내에서 정율성이라는 인물을 평가되지 않았을까.
그가 해방 이후 중국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북한에 건너가 만들었다는 ‘조선인민군 행진곡’의 가사를 보자.
‘우리는 강철 같은 조선인민군/평화와 정의 위에 싸우는 전사/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조국의 완전독립 쟁취하리라./인민의 자유행복 생명을 삼고/규율과 훈련으로 다진 몸이니/승리의 민주대열 조선의 인민군/나가자 용감하게 싸워 이기네.’
이 행진곡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부른 군가이다. 역시 그가 만든 ‘유격대전가’ 역시 북한군의 애창곡이었다. 그러고보니 정율성은 중국군과 북한군의 대표 군가를 창작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정율성은 조선인민군 군가를 창작했고 인민군 협주단을 창건한 사람”이라고 격찬했다. 1992년 북한에서는 ‘작곡가 정율성 상·하’의 제목으로 3시간에 달하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랬으니 남한의 백성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증유의 전쟁을 겪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원쑤’와 ‘용감히 싸우는 인민군’이라는 내용의 군가를 창작한 인물을 쉽게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진핑 주석으로서는 점증하는 일본의 도발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진린 및 등자룡’ 등 중국과 조선의 이순신 장군의 연합작전을 열거하고, 다시 김구 주석과 정율성 음악가 등을 거론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인 공조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서복, 김교각, 공소….
이밖에 시진핑이 거론된 역사인물 중 하나가 진시황 때 불로장생의 약과 신선을 찾아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떠났다는 서복(徐福)이다.
서복은 서불(徐市)로도 일컬어진다. <사기> ‘진시황본기’를 보면 제나라 사람인 서복은 진시황에게 “바다 가운데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등 3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신선을 찾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서복은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지도 않고, 신선을 찾지도 않은채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진시황은 “서복 등이 막대한 금액을 낭비했다”고 분노하면서 결국 선비들과 방술사 460명을 생매장한다.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 사건이다. 하지만 서복이 어디로 떠났는 지는 알 수 없다, 더 이상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데도 시진핑 주석은 ‘선약을 구하려 제주도에 닿은’ 서복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긴 하다. 과거 중국과 중국인이 한반도에 문화를 전파했음을 과시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립서비스인지는 알 수 없다.
시진핑이 언급한 역사인물 가운데 ‘금신좌(金身坐)가 된 주화산의 신라왕자 김교각’이 있다.
‘김교각’(법명 교각)이라는 이름은 우리 역사 기록에는 찾기 어렵다. 813년 츠저우시(池州市·지주시) 사람인 비관경(費冠卿)이 교각스님 입적 후에 쓴 ‘주화산 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와 이용(李庸)이 편찬한 <주화산지(九華山志)> 등에 기록되어 있다. 스님이 신라의 어느 왕 후손인지도 모른다.
다만 중국측 자료를 토대로 계산하면 696년 신라 효소왕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교각 스님(696~794)은 주화산 화성사에서 75년간 수련한 뒤 열반에 들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과연 이 유언대로였다. 신도와 승려들은 3년간 썩지않은 그의 육신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인정하고 금을 입혀 등신불로 봉헌했다. 시진핑이 언급한 ‘금신좌’가 바로 이 등신불을 가리킨다.
또 언급된 공소(孔紹)는 공자의 53세손으로 알려져 있다. 원나라 한림학사를 지내다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창원 공씨의 시조가 됐다.
창원 공씨 가운데는 조선 중기 때 대사헌을 지낸 공서린(1483~1541)이 가장 유명하다. 공서린은 1507년 식년문과에 1등으로 급제했고, 홍문관 수찬·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을 돌다가 기묘사화 때 사림파 인물과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 후에 청백리로 녹선되기도 했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참고문헌>
이종한,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음악이 나의 무기다)>, 지식산업사, 2006
김성준, <정율성의 음악활동에 관한 연구>, 명지대 석사논문,1997
이미화, <정율성의 성악작품에 관한 연구:'연안송' '연수요' '팔로군행진곡'을 중심으로>, 건국대 석사논문, 2009년
노기욱, <정율성 음악의 사상적 지향>, '역사학연구' 제37집, 호남사학회, 2009
송서평, <정율성의 음악창작 탐구>, '남북문화예술연구' 통권 제 5호, 남북문화예술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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