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이 요즘 히트를 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을 옛 문헌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영화 명량을 보기 전에, 혹은 본 후에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난중일기>, <백사집>, <난중잡록>, <재조번방지>, <백호전서> 등에 나타난 명량해전의 기록들을 읽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10여 척의 전선으로 적함대 133척을 맞아 거둔 대첩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일본인 간첩 요시라의 이간질에 녹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경질하고 원균을 기용한다. 그러나 원균은 왜적의 전술에 말려 대패하고 만다,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 강토는 또한번 왜적의 침략에 분탕질되고 만다. 1597년 8월 조선 조정은 권율 도원수 밑에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그런데 <임진잡록>은 이 대목에서 ‘누가 원균에게 돌을 던지겠느냐’고 변호한다.
“원균보다 충의를 다한 자와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었는고?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면 저 목숨을 보전하려고 도망다닌 자에게는 무슨 죄를 줘야 할꼬?”
어쨌든 복귀한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고 한다.
“임진년부터 지금까지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곧장 돌진해 오지 못했던 것은 우리 수군이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게 전선이 아직도 12척이나 남아 있습니다. 죽을 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13, 부록5 행록1)
그에게 남은 배는 단 10여 척 뿐이었다. 중과부적을 절감한 이순신 장군은 물살이 빠른 명량구에 진을 쳤다. 그는 휘하장수들과 함께 “우리는 함께 왕명을 받았다. 의리상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굳게 결의했다.
그가 마련한 필살기가 있었다. 단 10여척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 그는 백성들의 피란선 100여척을 이용하기로 한다. 전선 10여척을 앞에 두고 그 뒤에 피란선을 죽 늘어놓아 마치 100여척의 전선이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허장성세를 펼친 것이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지자 장군은 두려움에 떨고 소극전을 펼치려는 휘하장수들을 독려, 마침내 적선 31척을 깨뜨리는 전과를 세운다. 이 와중에서 적장인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목을 잘라 효수한다. 구루지마는 각종 문헌에서 ‘내도수(來島守)’, ‘마다시(馬多時)’, ‘뇌도수’ 등으로 표기돼있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단 1척의 피해도 입지 않았고, 전사자 2명과 부상자 2명이 있었을 뿐이다. 이 전투를 멀리서 지켜보던 백성들은 적선의 기세가 워낙 등등하자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 통곡하다가 하루종일의 혈전 끝에 아군이 승리하자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명량대첩의 낭보가 조정에 올라가자 선조 임금이 이순신에게 숭품(崇品), 즉 종1품에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자가 “이순신의 작질(爵秩)이 이미 높다”고 질투했다. 때문에 선조는 제장(諸將) 이하에게만 포상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임금과 신하들이다.
지금 이 순간, 필자는 명량해전을 기록한 옛문헌들을 되도록 가감없이 인용하고자 한다. 객관적인 자료를 주기 위해서….
■<선조실록>
1597년(선조 30년) 11월 10일조에 나오는 ‘제독 총병부에 적군의 동태와 대비책, 우리 장수의 전과를 알리다’ 라는 기사를 보자.
조선 조정이 제독총병부, 즉 명나라 지원군 사령부에 왜적의 동태과 그동안의 전과를 알리면서 1597년 9월16일에 있었던 명량대첩의 전과를 설명하고 있다.
“근래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치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습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 해로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적의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순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安衛)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습니다.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으며, 머리를 벤 것도 8급이나 되었습니다. 적선 중 큰 배 한 척이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우리 전선을 에워싸는 것을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宗)·영등 만호 정응두(丁應斗)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깨뜨리자 적이 크게 꺾였고 나머지 적들도 멀리 물러갔습니다. 이 때 진중(陣中)에 투항해온 왜적이 홍기의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安骨浦)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하였습니다. 한산도(칠천량)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1636년(인조 14년) 8월 5일조에 기록한 명량해전의 ‘단편’을 보자.
“지난 정유년(1597년·선조 30년)에 전선(戰船) 300척을 거느리고 원균(元均)이 원수가 되었을 때 한산도(閑山島)에서 패망하여 10척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李舜臣)이 통솔하여 명량(鳴梁)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신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니, 지난 일을 통해 분명히 징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신들이 8가지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명량대첩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난중잡록>
<난중잡록>은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1582~1610년까지 쓴 야사이다.
1597년(선조 30년) 1월, 일본의 요시라(要時羅)가 이순신을 모함했다.
요시라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에서 조선·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통역이었다. 그가 조정과 이순신 장군 사이를 이간질 시킨 것이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 땅을 건너오다가 바람을 만나 며칠동안이나 작은 섬에 정박했다고 분명히 이순신 장군에게 통지했는데….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 하여 오지 않아 일을 그르쳤습니다.”
▶간첩의 이간질에 이순신 경질
조정은 요시라의 이간질에 속아 “이순신이 헛되게 큰소리 쳐서 임금을 속였다”고 허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게 했다. 그런 뒤 전라 병사 원균(元均)을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 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은 한산도를 요새로 삼고, 이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크게 낙담했다. 그들은 더이상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난중잡록>은 이 대목에서 “요시라는 모두 일본을 위해 조선에 거짓으로 속였는데 우리만 몰랐으니 통탄할만 하다”고 안타까워 했다.
“요시라 놈이 간첩이 되어 조선을 그르친 게 한가지가 아니다. 이를테면 강화를 약속한 것이라든지, 이순신을 모함한 것이라든지.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토록 농락을 당하고도 멋대로 왕래하도록 했으니…. 아! 이 나라에 사람이 없구나!”
요시라에 깜박 속은 선조는 결국 이순신을 문책했다.
“4월 13일 임금은 ‘이순신의 공과 허물이 똑같으니 죄를 주지는 마라’고 한 뒤 권율 장군의 원수부에 백의종군하도록 했다.”
이순신 장군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권율 장군의 문책을 받고 곤장을 맞는 처지에 빠진다. 적을 두려워 하여 싸움을 이리저리 피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권율은 곤장을 치면서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 했다고 한다. 곤장을 맞은 원균은 분을 품고 남은 군사를 있는 대로 이끌고 부산에 이르렀다.
“왜선 1000여 척이 나왔다, 원균이 노젓기를 재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병이 물결처럼 흩어졌다. 짐짓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 같이 보였다. 원균이 이 틈을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모르니, 뱃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배가 국경을 넘어 대마도가 장차 임박하였으니, 뱃길을 잘못 들어 우리는 살아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스스로 죽을 땅에 들었으니,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했다.”
▶죄없는 자가 원균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을 들은 원균이 후퇴를 명령했다. 밤낮으로 사력을 다해 배를 몰아 가덕도~영등포~온라도로 계속 후퇴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적병은 조선의 기세라 꺾인 줄 알고 500여척을 동원, 맹추격했다. ~포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여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베고 찍었다.”
원균은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는 “적세가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지탱할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어찌하랴. 오늘의 일은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다.”라 순국을 결심한다.
이 때 배설이 원균의 옥쇄를 반대하고 나서며 큰소리쳤다.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에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요긴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 바다에서 기세를 잃어 군사들이 놀라 소란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여 용맹은 쓸 수 없으니 겁내는 것을 써야겠습니다.”
원균은 벌컥 화를 내면서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 했다. 결국 원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옥쇄했다. 배설은 싸움이 한창일 때 자신의 소속으로 된 배 12척을 이끌고 달아났다. 아이로닉하게도 배설이 이끌고 도망한 배 12척이 명량대첩의 밑천이 될 줄이야.
이 패배로 원균은 여론의 십자포화를 당했다. 당시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건장하여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0마리, 닭과 꿩 3ㆍ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했는데, 마지막 순간에도 앉은 채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원균은 이 죽음으로 웃음거리가 됐다. 당시 곡성에 사는 생원 오천뢰(吳天賚)가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한다.
“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閑山一島國南門)/무슨 일로 조정에서 장수를 자주 바꾸었나.(底事朝廷易將頻)/처음부터 원균이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不是元均初負國)/원균의 배가 원균을 저버렸네.(元均之腹負元均)”
원균의 ‘배(腹)’가 원균을 죽게 만들었다는 비웃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난중잡록>은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원균에게 돌을 던지라’고 변호한다.
“원균보다 충의를 다한 자와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었는고?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면 저 목숨을 보전하려고 도망다닌 자에게는 무슨 죄를 줘야 할꼬?”
▶명량해전의 전과
어쨌든 이 패배로 조선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미처 도피하지 못한 남녀들은 모두 살육을 당하였다. 왜적은 전공을 헤아린다는 이유로 산 사람들의 코를 모조리 베어 가기도 했다. 이로써 그 뒤 수십 연간에 조선의 길에서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원균이 죽은 뒤 권율 도원수의 휘하에 있던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왜적들은 다시 조선 땅을 분탕질 했다.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도원수의 진중(陣中)으로부터 출발하여 진주의 서로를 거쳐 구례로 향하다가 적선이 이미 나루터에 정박해 있는 것을 보고는 곡성을 거쳐 서해로 향해 갔다. 이때 배설이 배 12척으로 퇴각하여 진도의 벽파정 밑에 있었는데, 이순신이 그리로 달려갔다.
배설은 교만하고 패악하여 군율을 어겨 이순신에게 죄를 얻자, 자기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星州)의 본집으로 돌아가니, 이순신이 즉시 죄목을 갖추어 아뢰었다. 배설은 도망하였다가 그 뒤에 체포되어 주벌을 받았다.
1597년 9월 이순신은 잔병을 거느리고 진도의 명량구에서 머무르며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난중잡록>이 전하는 명량대첩의 상황을 보자.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구루지마 미치후사)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 때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
이순신은 왜적의 침입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에게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경솔히 대적하지 말고 기회를 따라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일일이 작전을 지시했다.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집어 삼킬 듯 쇄도했다.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
싸움을 육박전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난전이 되자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朱喇·소라껍데기로 만든 나팔)을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북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됐다.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이 때 이순신은 구루지마 마치후사(來島守)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매달았다. 조선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추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급이 되었다. 왜적선 가운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 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했다.
왜적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뼈아픈 패배였는지 “왜병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전쟁담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명량의 싸움을 말하였다”고 한다.
■<백사집>
<백사집> 3~4 ‘비명·통제사 이공의 노량비명’ ‘고 통제사 이공의 유사’를 보자.
<백사집>은 당대 병조판서를 지낸 이항복의 시문집이다. 이항복은 <백사집>에서 이렇게 이충무공을 평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병풍(병풍처럼 감싸 안음)은 한산(閑山)이고, 그 경계는 노량(露梁)이며, 그 요충지는 명량(鳴梁)이었다. 만일 한산을 잃고 노량을 지키지 못하여 곧바로 명량을 축박해 온다면 경기(京畿) 일대가 마음을 동요하게 될 지경이었다. 이때 공을 이뤄 삼도(三道)의 적을 막아낸 이가 바로 원후(元侯) 통제(統制) 이공(李公)이었다.”
▶“의리상 생사를 함께 한다.”
<백사집>이 전하는 명량해전은 어땠을까.
“원균 사후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 공은 단기(單騎)로 군졸들을 불러모아서 명량(鳴梁)으로 나가 진을 쳤다. 갑자기 밤중의 습격을 받아서 소수의 군졸로 필사전을 벌인 결과, 새로 모은 13척의 전함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수많은 적을 상대하여 30척의 적선을 파패시키고 용맹을 다하여 전진하니, 적들이 마침내 퇴각하여 도망쳤다.”
<백사집>은 이순신 장군이 배설로부터 배를 얻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공(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로 복귀했을 때 조선 수군이 막 패한 뒤여서 주선과 기계가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공은 단기(單騎)로 달려 경상우수사 배설을 만났는데, 이때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겨우 8척이었고, 또 녹도에서 전함 1척을 얻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이 배설에게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배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육군에 의탁해서 싸우는 게 낫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 “그 계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자 배설은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 배설은 이 때의 죄 때문에 훗날 사형 당하고 만다.
배설이 자취를 감추자 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을 불러 다짐한다.
“우리는 함께 왕명을 받았다. 의리상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화가 있을 것이다.”
장수들이 모두 감격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윽고 명량해전이 발발하던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군중에 갑작스레 명을 내렸다.
“오늘 밤, 적이 반드시 습격할 것이다. 경계를 엄중히 하라.”
▶이순신의 기묘한 작전
과연 적병이 야밤에 기습해왔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큰 소리로 “동요하지 마라”고 호통을 쳤다. 장군의 독려로 적은 포위망을 풀고 철군했다.
이순신 장군은 회군(回軍)하여 명량 앞바다로 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적선 500~600척이 바다를 온통 뒤덮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의 기묘한 전략·전술이 빛났다.
“이 때 배를 타고 피란 나온 호남의 백성들이 장군의 진영 아래 모여 있었다. 장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으로 인해 먼저 백성들의 피란선(避亂船)들로 하여금 차례로 물러가 배열하여 진을 치게 했다. 적군에게 피란선을 전선(戰船)이라 거짓으로 알게 만든 것이다. 장군은 피란선을 의병(疑兵)으로 삼은채 자신은 전함을 거느리고 맨 앞에 나가 있었다.”
장군의 작전에 현혹된 왜적들은 일제히 노를 재촉하여 명량 바다를 뒤덮었다.
“이 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나가서 항구의 여울물이 매우 급했다. 거제 현령 안위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다가 빠른 바람세를 타고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장 적진 앞에 돌진했다. 적이 사면에서 포위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돌전(突戰)했다.”
장군은 병사들을 재촉하여 안위를 엄호하도록 하면서 적선 31척을 격파했다. 적이 주춤하면서 약간 후퇴하자 장군은 노를 치면서 기세를 몰아 진격을 명령하니 승승장구했다.
“적들은 죽을 듯이 소리만 외칠뿐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 적은 군대를 죄다 거느리고 도망쳤다. 장군은 보화도(고하도·고화도)로 옮겨 진을 쳤다.”
이것이 <백사집>에 실린 명량대첩의 전말이다.
■<백호전서>
<백호전서>는 조선 중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윤휴(1617~1680)의 문집이다.
<백호전서 23집 ‘사실(事實)’에 실린 ‘통제사 이 충무공의 유사(遺事)’를 더듬어 보자.
“1597년 8월 이순신 장군이 다시 통제사가 되자 놀라며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성한 사람들은 일제히 자기 집에 이렇게 고했다.
“공(公)이 왔으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공을 따르겠다.”
장군이 보성에 이르자 따라붙은 장사가 100여 명이었다. 장군은 명령을 따르지 않은 수군절도사 배설의 남은 배 10여 척을 접수했다. 장군은 훗날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도망친 배설을 참수했다. 장군은 수백여척의 피란민 배를 허장성세로 늘어서게 한 다음 전함 10여 척을 그 앞에 배치했다. 이렇게 적을 속인 장군은 진도의 벽파정 아래서 적을 맞아 싸웠다.
▶백성들의 피란선을 전선으로 위장
중과부적으로 넓은 바다에서 교전하기 어려웠기에 벽파정 아래 좁은 목을 지키면서 형세를 이용한 것이다.
이 때 적선 300 여 척이 명량을 경유, 곧장 아군 진영으로 진격한다는 첩보가 있자 장군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방어했다,
중과부적으로 장수들이 모두 퇴각하려 했을 때 장군이 바다 한복판에 배를 머물러두고 꼼짝하지 않았다. 적들이 그것이 대장선(大將船)임을 알고는 마침내 수백 척의 배를 가지고 차츰 죄어 들어왔다. 형세가 더욱 긴박해지자 장군이 대장기로 지휘하면서 나가 싸울 것을 독려했다.
“이 때 거제 현령 안위(安衛)가 싸움을 버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장군은 뱃머리에 서서 크게 고함을 질러 ‘안위의 머리를 잘라오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안위가 이 말을 듣고 심기일전하여 적진에 돌입했다. 안위가 적과 교전하다가 배가 곧 함몰되려 할 즈음, 장군이 또 배를 돌려 그를 구해주었다.”
안위는 역시 사력을 다해 싸웠고, 포시(대포와 화살)를 사방에서 발사하여 적병이 즐비하게 쓰러져 마침내 적을 크게 패배시켰다. 이 때 적의 맹장 마다시(馬多時·구루지마)를 사로잡아 참수하였고, 적선 30여 척을 부쉈다. 죽은 적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나머지 백성들은 포위를 풀고 도주함으로써 우리 군성(軍聲)이 다시 크게 떨쳤다.
▶‘환호성 터진 백성들의 전투구경’
멀리서 이 전투를 지켜보던 수 만의 백성들은 처음에는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있었다
“적들이 아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포성이 바다를 진동하고 검광(劍光)이 햇볕을 요동시키는 듯했다. 싸움을 구경하던 수만 명이 아군을 바라보고 통곡했다. 적들은 교대로 나가고 물러가고 하면서 온종일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적은 군대로 많은 적병을 상대하여 끝내 큰 승첩을 거두었다. 날이 저물고 전쟁이 끝난 뒤 적병들이 모조리 섬멸되고 아군의 배만 우뚝 서있어 망루(望樓)도 파손되지 않았음을 보고는, 이날 관전했던 사람들이 몹시 감탄하여 진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명량대첩의 낭보가 조정에 올라가자 선조 임금이 이순신에게 숭품(崇品)에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자가 “이순신의 작질(爵秩)이 이미 높다”고 질투했다. 때문에 선조는 제장(諸將) 이하에게만 포상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임금과 신하들이다.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은 실학자 이긍익(1736~1806)이 약 30년 동안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분류하고 원문을 그대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연려실기술> ‘선조조고사본말·이순신 진도에서 이기다’의 명량대첩 기록을 살펴보자.
“원균 부대가 패전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과 민간이 크게 놀랐다. 선조가 대책이 뭐냐고 물었지만 모두들 두려워 하여 어쩔줄 몰라했다. 이 때 경림군 원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입을 뗐다.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를 시키는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습니다.'”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에게 삼도 수군통제사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순신은 배설(1551~1599)이 12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후퇴했다는 진도 벽파정으로 달려갔다.
“1597년 9월 뇌도수(구루지마)가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진도에 도착하였는데, 이순신은 명량(鳴梁)에 머물며 진을 치고 피난선 백 여 척을 모아서 가짜로 성세를 이루었다. 적이 이르니 순신은 거짓으로 싸우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다투어 와서 덮쳐 둘러싸고 바싹 가까이 와서 싸웠다.”
이 때 갑자기 장군의 배에서 태평소를 불고 깃발이 일제히 일어나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불이 적의 여러 배에 옮겨 붙었다. 순신은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공격하니 죽는 자가 삼대 쓰러지듯 하였다. 장군은 먼저 뇌도수의 머리를 베어서 돛대 위에 걸어 놓으니 장졸들은 용기를 뽐내고 의기가 백배나 되어 달아나는 자를 쫓아서 수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없이 많았다.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 그 뒤에 적이 싸움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명량(울돌목) 전투를 말하였다. <일월록>과 <조야기문>에는 적장을 마다시(馬多時)라고 기록했다.
■<재조번방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는 조선 중기의 학자 신경(申炅·1613~1653)이 임진왜란 전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등을 정리한 책이다.
이순신은 홀로 쇠잔한 군사로 1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 앞 바다에 주둔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위태롭게 여겼지만 밤낮으로 엄히 경계하여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 장군이 갑옷 입은 채로 북을 베고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앉아서 소주를 한 잔을 마시고 모든 장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오늘밤 달빛이 매우 밝다. 왜적의 꾀가 간사스러움이 많아서 달이 없을 때라면 본래 우리를 습격하겠지만 달이 밝아도 또한 와서 습격할 듯하니, 경비를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호각을 불어 모든 배에 닻을 올리게 하고 또 모든 배에 전령하여 척후를 세우고 변을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 후에 초탐선(哨探船)이 왜적이 온다고 급히 보고하니 이순신이 호령하여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게 하였다. 이때에 달이 서산에 걸려 산그림자가 바다에 기울어 반쪽은 어두컴컴한데, 무수한 적석이 컴컴한 곳을 따라와서 우리 배에 접근하려 하였다.
이에 중군(中軍)이 화포를 놓고 고함을 지르자 모든 배가 호응하니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일시에 조총을 쏘아대어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이순신이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적이 드디어 감히 범하지 못하고 물러 달아나니 여러 장수가 모두 탄복하여 귀신같이 여겼고 이순신 또한 우수영(右水營) 명량(鳴梁) 바다 가운데로 회군하였다.
“날이 밝아서 바라보니 적선 500~600척이 바다를 덮어 올라왔다.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구루지마)는 원래 수전(水戰)을 잘한다고 일컫는 자여서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순신은 적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적어서 힘으로 싸워 이기기는 어려우므로 꾀로써 격파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배를 타고 피난하던 호남 지방 사람들이 모두 순신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피란온 배로들을 이용했다. 차례차례로 물러가서 늘어세워 포진하게 하여 의병(疑兵)을 만들어 바다 가운데를 왔다 갔다 하게 했다. 장군은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바로 나왔다.
적은 이순신이 배를 정비하여 나오는 것을 보고, 각자 노를 저으며 북을 울리고 소라를 불면서 용기를 내어 곧장 나오는데 깃발과 망대(望臺)가 바다 가운데 가득하니, 우리 군사가 보고 실색하였다.
“아침 조수가 바야흐로 물러갈 때여서 항구에 물살이 거세었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는데 바람이 빨라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바로 적의 앞을 충돌하니, 적이 사면으로 에워싸므로 안위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였으나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순신이 모든 배를 독려하여 잇달아 진격하여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순신이 돛대를 치면서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서 진격하니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므로 이순신 또한 진을 보화도(寶花島)로 옮겼다. 이 때에 이순신이 이미 전사(戰士) 1000명을 얻었다.
■난중일기
▶1597년 신유일 8월 3일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그것이 곧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하동읍 두곡리)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자정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하동읍 서해량 홍수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화개면 탑리)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 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 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읍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갔다고 했다.
손인필ㆍ손응남이 와서 보고, 올감[早枾]을 가져왔다.
▶1597년 병자일 8월 18일
맑다.
회령포(대덕읍 회진리)에 갔더니 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삼고서 와 보지도 않았다.
관사에서 잤다. 전선은 단 열 척 뿐.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병선(兵船)을 모으게 했다. 또 여러 장수들에게 “전선을 거북배로 꾸며서 군세를 돋구도록 하라”고 명했다. 또 “우리들이 임금의 명령을 같이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 것이냐!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굳게 약속했다.
▶1597년 을유일 8월 27일
맑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다.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말했다.
▶1597년 병술일 8월 28일
맑다.
예상밖에 적선 여덟 척이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었다. 경상수사는 도망하려 했다.
나는 꼼짝도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잡도록 명령했다. 적선이 물러갔다.
추격하여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1597년 경인일 9월 2일
맑다.
오늘 새벽,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갔다.
▶1597년 을미일 9월 7일
바람이 그쳤다.
탐망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우리 수군을 도모하려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각 배들에게 엄중히 경계하도록 했다.
오후 4시쯤 적선 13척이 곧바로 우리 배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 공격했다. 그러자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뒤쫓아 먼 바다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흐르므로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오늘 밤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았다. 각 배에 경계태세를 갖추라고 하였다. 역시 밤 10시 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우리 배들이 겁을 먹는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린 뒤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포를 쏘았다. 그랬더니 적이 자정에 물러갔다.
▶1597년 임인일 9월 14일
맑다.
“적선 200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미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는 정탐이 있었다.
또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이 전하는데 김중걸이, 이달 6일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 김해 사람이 김중걸의 귀에다 대고 하는 말이, ‘조선 수군 10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겠다. 그리하여 여러 배들을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두 몰살한 뒤에 한강으로 올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1597년 계묘일 9월 15일
맑다.
중과부적의 군대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지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고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1597년 갑진일 9월 16일
맑다.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하여 옵니다”라고 보고했다.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3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우리 장수들이 중과부적임을 알고 후퇴해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물러나 아득히 먼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급히 저어 앞으로 돌진하면서 지자포ㆍ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댔다. 마치 나가는 게 바람과 우뢰 같았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을 쏘아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먼 바다로 물러나 있으면서 관망만 할 뿐이었다.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중군장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그 목을 베어 효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배가 뱃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차로 멀리 물러날 것이요, 적선이 점점 육박해 오면 일은 아주 낭패가 아닌가. 곧 호각을 불어서 명령 깃발을 내리고 초요기를 올렸다. 그러자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내가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그러자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다시 김응함을 불러 일렀다.
“너는 중군장의 신분으로 멀리 피해 있으면서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지만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려 한다."
그러자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했다. 그 때 적장이 배 3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안위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탔던 군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어지러이 싸우다가 탈진에 이르렀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댔다. 그러자 적선 3척이 모조리 다 전복됐다.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합세해서 적을 쏘았다.
항복해온 왜적 준사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한 자인데, 내 배 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뱃머리)로 끌어 올렸다.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라고 하였다. 나는 곧 명령을 내려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세가 일시에 크게 꺾여 버린다.
이때 우리 배들이 일제히 북을 치며 진격하면서 지자포ㆍ현자포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적선 30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렸다. 적은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실로 천행이다.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겼다
▶1597년 을사일 9월 17일
맑다.
전투 후 어외도(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300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수군이 대첩을 거둔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 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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