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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내시도 궁궐 현판을 썼다…일제강점기 훼철된 385점 제자리 찾아보니

조선 왕비의 침전을 교태전(交泰殿)이라 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궁전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좀 얄궂지 않은가. 남편(임금)의 사랑을 얻으려는 왕비가 교태(嬌態)를 부리는 침실이라는 것인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교태(交泰)’는 <주역>에서 하늘과 땅의 사귐, 즉 양과 음의 조화를 상징한다. 임금과 왕비가 후사를 생산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교태전이라 한 것이다. 
1395년(태조 4년) 태조는 서울에 새 궁궐을 짓고 대대적인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술이 거나하게 취한 태조가 정도전(1342~1398)에게 “새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경> 구절을 외웠다.
“(임금의) 술대접에 취하고 임금의 덕에 배부르니 후왕의 앞날에 큰 복(경복·景福)을 받게 할 것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일제강점기 경복궁 등 궁궐의 훼철 이후 각지를 떠돌았던 궁궐과 전각, 궁문의 현판들의 제자리 찾기 사업을 펼쳤다. 이중 1725년(영조 1년) ‘대은원을 중수하게 된 내용을 새긴 현판’이 이색적이다. 절대 다수의 현판이 역대 임금들의 글씨와 당대 최고 명필가의 글씨를 받아 장인들이 정교하게 새겼다. 그러나 이 현판은 영조연간의 내관들인 오두흥이 수리를 맡았고, 역시 내관인 조한경과 이인재가 서문과 글씨를 각각 맡아 썼다. 내은원이 내시부와 관련된 건물이라 영조가 내시들에게 맡긴 것 같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왕비 침전은 왜 교태전일까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이름을 얻는 순간이었다. 정도전은 임금의 침전 이름을 ‘강녕전(康寧殿)’이라 지으면서도 “혼자 있을 때 나태하면 절대 강녕할 수 없다”고 신신당부했다. 임금이 즉위식 등 국가행사를 펼치고, 정사를 돌보는 건물을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 붙인 이유도 있었다. ‘임금은 아침 저녁 식사할 겨를도 없이 근면한 태도로 백성을 화락하게 만들어야 하며’(근정전) ‘깊이 생각한 연후에 비로소 정사를 펼쳐야 한다’(사정전)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궁궐이나 전각 이름을 허투루 짓지 않았다. 
한자 한자에 유교의 통치이념과 오행사상 및 풍수지리를 반영해서 지어나갔다. 경복궁과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은 물론이고 연생전, 경성전 등 궁궐 및 전각의 이름과 융문루·융무루·영추문·건춘문·신무문 등 이름이 탄생했다.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면 각 건물의 처마와 벽에 간판처럼 그 이름을 새겨 걸었다. 그것이 현판 혹은 편액이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같은 병란과 잦은 화재 등으로 불에 타거나 훼손되어 다시 걸리기를 반복했다. 무엇보다 국권피탈 즈음부터 자행된 일제의 궁궐 훼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건청궁의 정당에 걸려있던 장안당(長安堂) 현판과 명성황후가 머물다가 시해당한 ‘곤녕합’의 현판. ‘임금이 오래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이고, ‘곤위(왕비)가 평안하다’는 뜻의 ‘곤녕합’인데 끔찍한 사건을 겪었다. 건청궁은 1909년(융희 3) 철거된 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들어섰고 광복이후 한국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헐렸다. 현재의 건물은 2007년 복구된 것이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1910년 왕실사무를 담당한 궁내부가 경복궁 내 공원신축을 위한다며 전각 4000여칸을 경매했다. 이에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이른바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박람회)를 개최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면서 궁궐내 건물 15개동과 문 9곳 등이 공매된다. 이로써 19세기말 경복궁의 모습을 그린 ‘북궐도형(北闕圖形)’에 존재했던 609동의 경복궁 건물 중 해방 후 살아남은 건물은 40동뿐이었다.
궁궐과 전각, 문이 훼철되면서 간판격인 편액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지금 복원된 궁궐에 남아있는 옛 현판은 근정전, 경회루 등이 있지만 상당수의 편액(현판)은 처량한 떠돌이 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와 그 당시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을 보면 제실박물관으로 사용했던 창경궁의 경춘전, 환경전, 명정문 행각의 각 칸(間)마다 여러 궁궐 및 전각, 문의 편액을 걸어두었다.

덕수궁(경운궁) 남쪽에 있던 정문인 인화문(仁化門)의 현판이다. 1902년(광무 6)에 정전인 중화전(中和殿)과 중화문(中和門)을 건립하기 위해 궁궐 영역을 남쪽으로 확장하면서 인화문은 철거됐다. 1902년 독일인이 인화문을 촬영한 옛 사진을 보면,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이며 네 변에 테두리를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훼철하면서 뜯어낸 편액을 버리지 않고 별도로 모아둔 것이다. 해방 후 이 편액들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서 624점이 전시로 선보이게 되었고(1963년), 이후 사정전과 천추전 등의 전각에 나누어 보관됐다. 이 과정에서도 어찐 일인지 몇몇 전·누각의 현판들이 제자리를 잃고 떠돌이 대열에 합류했다. 
현판들의 유랑은 계속됐다. 1981년 창경궁 장서각의 전적류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으로 이관된 후 빈 건물에 이듬해 700점이 넘는 현판을 다시 옮겼다. 이후에도 1986년 창덕궁 인정전 서행각으로 이사했다가 1992년 개관한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또다시 2005년 개관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전전했다. 일부 현판은 700여 점이 떠돌이 생활할 때 국립중앙박물관(경복궁 영추문·건청궁·태원전)에, 또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정조가 내린 ‘수교’ 현판)에 별도로 남아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일제강점기 경복궁 등 궁궐의 훼철 이후 각지를 떠돌았던 궁궐과 전각, 궁문의 현판들의 제자리 찾기 사업을 펼쳤다. 사진은 경복궁 근정전 권역에서 원자리를 찾은 ‘융문루(隆文樓)’와 ‘융무루(隆武樓)’ 현판.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내시가 쓴 현판도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최근 이렇게 일제강점기 이후 떠돌았던 궁궐 및 전각, 궁문의 편액(현판)을 권역별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대상 현판(398점) 가운데 97%인 385점의 제자리를 찾아주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해 궁궐 현판들의 조사결과를 수록한 <조선왕실의 현판Ⅰ>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 중인 770점의 현판 가운데 경복궁 현판 179점, 창덕궁 현판 81점, 창경궁 현판 39점, 경희궁 현판 40점, 덕수궁 현판 25점과 참고도판(34점) 등 398점을 권역별로 조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안보라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박물관 소장 현판 770점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궁궐 훼철로 철거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제자리를 파악하기 힘들었다”면서 “각종 문헌 및 공문자료를 끈질기게 추적하여 하나하나 찾아냈다”고 전했다. 김정임 학예연구관은 “현판 뒷면에 원래 걸렸던 위치가 적혀 있는 묵서(墨書)와 ‘경복궁배치도’, ‘북궐도형’, ‘동궐도’, ‘서궐도안’ 등의 도면과 회화, 유리건판, 사진 등의 시각자료를 비교하여 본래 현판이 걸려 있었던 궁궐과 건물을 추적했다”고 덧붙였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와 그 당시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을 보면 제실박물관으로 사용했던 창경궁의 경춘전, 환경전, 명정문 행각의 각 칸(間)마다 여러 궁궐 및 전각, 문의 편액을 걸어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 과정에서 경복궁 근정전 권역의 ‘융문루(隆文樓)’와 ‘융무루(隆武樓)’의 원자리를 찾아냈다. 경복궁 창건 당시(1395년) 정도전이 ‘문(文)은 태평한 정치를 이룩하는 것이요, 무(武)는 난리를 평정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사람에게 양팔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된다’면서 지은 누각 이름들이다. 정치를 펼치는데(근정·勤政),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문무(文武)를 고르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867년(고종 4년) 11월 5일 “문무관이 두 현판의 글씨를 나눠 쓰라”는 흥선대원군(1820~1898)의 명에 따라 융문루는 영의정 김병학(1821~1879년)이, 융무루는 훈련대장 신관호(1810~188년)가 각각 썼다는 기록(<경복궁영건일기>)이 있다. 박물관측은 1980년 발간자료인 <한국의 고궁>(문화재관리국)에 수록된 1958년 무렵의 사진 자료를 통해, ‘융문루’와 ‘융무루’ 현판의 원위치를 파악했다. 

경희궁 ‘용비루’에 걸었던 숙종의 어필 현판인 ‘교월여촉(皎月如燭)’. ‘달이 촛불처럼 밝다’는 뜻이다. <궁궐지>에 “경희궁 용비루에 숙종의 어제시 ‘용비루’와 어필 ‘교월여촉(皎月如燭)’이 걸려 있다”는 기록이 있어 숙종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또 덕수궁의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 현판’의 원위치를 독일의 개인 소장 사진(1902년 촬영)을 통해 확인했다. 이밖에도 의궤기록을 통해 현판의 제작 방식도 새롭게 알아냈다. 예컨대 창경궁 ‘양화당(養和堂)’과 창덕궁 ‘대은원(戴恩院) 현판’과 같이 현판 제작 때 양각(오목새김)이나 음각(돋을새김)뿐만 아니라 금박을 붙이거나 나무 등으로 글자를 별도로 만들어 부착하는 방식을 썼다는 사실도 찾아냈다. 
또 창덕궁의 ‘대은원 중수 내용을 새긴 현판’은 내관이 글을 짓고 쓰기도 한 매우 희귀한 사례인 것으로 확인했다. 즉 이 현판은 1725년(영조 1년) 대은원을 중수하게 된 내용을 새겼는데 내관인 오두흥이 수리를 맡고 역시 내관인 조한경과 이인재가 글씨를 썼다. ‘대은원’은 내관들이 머물렀던 내반원 바로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마도 내시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전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관이 쓰는 건물이니 내관들이 모든 책임을 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였다. 조선시대 현판은 선조, 숙종, 영조, 정조, 고종 등 왕이 쓴 글씨와 당대 최고 명필가의 글씨를 받아 장인들이 정교하게 새겼고, 화려한 문양과 조각으로 장식했다. 왕과 왕세자의 글과 글씨는 120여 점에 달한다. 그중 영조는 오랜 재위 기간 만큼 50점에 달하는 가장 많은 어제(御製· 왕이 지은 글)와 어필(御筆·왕이 쓴 글씨) 현판을 남긴 임금이다. 
어필과 예필 현판은 작은 글씨로 어필, 예필(睿筆·왕세자가 쓴 글씨)이라고 새겼다. 존귀한 글씨임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랬으니 봉황, 칠보, 꽃 문양 등을 섬세하게 그린 테두리를 둘러 격을 높였다. 또한, 사롱(紗籠·현판에 먼지가 앉지 못하도록 덮어 씌우는 직물)으로 덮거나 여닫이 문을 달아 왕의 글과 글씨로 된 현판을 보호하기도 했다. 이처럼 현판은 건축과 서예, 공예가 접목된 기록물이자 종합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은 덕분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판 770점(조선왕조 궁중현판)‘은 지난 2018년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등재되기도 했다.
김동영 국립고궁박물관장은 “올해는 종묘·능원묘·사묘(祠廟)·수원 화성 등에 걸었던 현판도 중점적으로 조사 연구할 것”이라면서 “안료 분석 자료, 사롱 분석 결과 등을 수록한 <조선왕실의 현판Ⅱ>을 올 12월 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