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기도 하고, 백제가 웅진천도 이후 다시 강국이 됐다는 이른바 갱위강국을 선포한지 1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공주시와 문화재청이 올해 내내 갖가지 행사를 펼쳐진다고 합니다.
축하받아야 마땅하겠네요. 그러나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열었다는 무령왕릉 발굴은 최악의 졸속 발굴이었다는 비판도 받는데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에서 알아봅니다.
문=무령왕릉 발굴의 의미를 말하자면?
답=무엇보다 “내가 이 무덤의 주인공인 무령왕이요”하고 선언한 명문이 나왔으니까요. 삼국시대 고분 중에 이렇게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고분이 나온 건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무덤에서 나온 모든 유물은 연대가 분명하니까 삼국시대 유물의 연대를 편년하는 기준자료가 되었죠. 그래서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열었다고 표현하죠.
문=그렇지만 이 무령왕릉 발굴을 두고 ‘최악의 졸속발굴’이라고 비판도 나왔다죠?
답=그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발굴에 참여했던 모든 연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아비판하고 반성하는 대목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뚝딱 해치운 발굴이었기 때문이죠.
문=왜 그렇게 됐을까요?
답=50년 전 1971년 7월 5일로 되돌아가서 시간대별로 짚어보겠습니다. 그날 송산리 고분군의 아래쪽에 있는 6호분에서 한 3미터 떨어진 곳에서 배수로 공사가 한창이었어요. 그런데 인부들의 삽날이 ‘깡’ 하면서 튀었대요. 살펴보니 벽돌의 모서리를 친 거죠. 공사 중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즉각 연락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공사책임자가 이 사실을 보고했는데요. 이미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6호분이 벽돌무덤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아 뭔가 수상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공사가 중단되고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고,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학예직원들을 실무단원으로 하는 발굴단이 결성되어 현장에 급파됩니다.
문=나름 신속하게 대처했네요?
답=그렇습니다. 이틀 뒤인 7월7일 오후 3시쯤 김원룡 단장의 지시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요. 1시간쯤 파내려가자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아치형 입구를 벽돌로 가득 쌓아 막아놓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문=일제강점기에 조사된 6호분과 같은 형식의 무덤이라는 거죠?
답=그렇습니다. 그러나 6호분은 지난 방송에 말했지만 공주고보 교사였던 일본인 가루베 지온이 그랬든, 그 앞 시기 언젠가 그랬든 도굴당한 고분이었잖습니까.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무덤은 입구가 꽉막힌 채 발견되었으니 도굴없는 싱싱한 고분이었던겁니다.
문=발굴단원들이 흥분했겠네요?
답=그렇죠.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소름이 돋았답니다. 무엇보다. 흙과 벽돌로 쌓아 틀어막은 입구는 엄청나게 단단해서 작업이 지지부진했대요. 그런데 또 다른 변수가 생겼답니다. 해질녘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어느덧 호우로 변했던 건데요. 이게 큰일이었대요.
발굴하려고 무덤 입구에 구덩이를 파놓았는데 그 구덩이로 물이 쏟아져 들어가면 무덤 안으로 역류할 수 있잖습니까.
문=잘못하면 무덤 안이 침수되겠네요?
답=그렇게 되면 끝장이죠. 발굴단은 비를 흠뻑 맞은 채 쏟아져 들어오는 빗물을 밖으로 퍼내야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물을 뺄 배수구를 만들고 해서 겨우 밤 11시30분쯤 한숨 돌렸답니다.
다음날인 8일 새벽부터 발굴이 재개됐는데, 또 하나의 변수가 생겼답니다.
문=무슨 변수요?
답=문화재관리국 직원들이 공주로 급파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모 신문 기자가 “뭔가 큰 일이 일어났구나”하고 직감하고는 사진기자와 함께 무작정 공주로 내려와서 무덤발굴 소식을 알게된 겁니다. 그래서 8일 아침자로 ‘백제시대 새로운 왕릉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특종기사를 내보낸 거죠.
문=정말 큰일 난 거네요. 다른 언론사 기자들 물먹은 거잖아요?
답=그렇습니다. 1면 톱으로 물 먹었다는데 타사 기자들 어땠겠습니까. 땡감 씹은 표정으로 우르르 현장에 달려왔죠.
여기서 참 기막힌 사건이 터지는데요. 지금 같으면 말도 안되는 일인데, 어떤 기자가 현장에서 “왜 나에게 알리지 않았냐”면서 문화재관리국 과장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벌어지죠.
문=아무리 50년 전의 일이라도 그렇지 그게 말이 되는 사건입니까?
답=지금 같으면 때린 기자는 아마도 형사처벌 받지 않았을까요? 말로는 두 사람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는데요. 엄청난 낙종에 기자가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해석했죠.
아무튼 발굴 현장은 완전히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아침 신문에 특정신문에 보도되는 바람에 전국에서 기자들이 몰려오고, 현지 주민들이 ‘왕릉을 찾았다며’하고 몰려오고, 심지어는 현장을 통제해야 할 경찰까지 넋놓고 발굴을 구경하고 있었답니다.
문=완전히 라이브로 중계된 셈이네요?
답=라이브 발굴이라 해도 현장만 잘 통제했으면 좋았죠.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까 문제였죠. 어쨌거나 워낙 무덤 입구 바닥까지 파내려가는 작업이 난공사여서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발굴을 위한 정지작업이 끝났답니다. 무덤 주인공을 위한 위령제를 지낸 뒤 4시부터 무덤 입구를 틀어막은 벽돌 2장을 들어냈다는데요. 갑자기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답니다.
문=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죠?
답=그런 경우 발굴자들은 움찔하게 돼죠. 뭔가 무덤 내부에 차있던 독가스가 뿜어져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수증기는 천수백년 묵은 안 공기가 바깥의 따뜻한 공기와 만나면서 일어나는 결로현상이었습니다. 벽돌 틈으로 무덤 안쪽을 들여다보자 뿔 하나가 달린 돌짐승이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답니다. 섬뜩했답니다. 그 앞에는 돌판 두 장이 보였답니다.
문=돌짐승에 석판이면 뭔가 심상치 않은 유물 같은데요?
답=그렇습니다. 석판에 뭔가 기록을 남겨놓을 수 있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김원룡 단장과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이 말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답니다. 만약 티를 내면 현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할거니까요.
문=두 사람이 엄청 긴장했겠네요?
답=그렇습니다. 들어가보니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중국제 유물인 ‘네 귀 달린 청자 항아리’와 청동잔 등이 보였답니다. 무덤 안을 죽 훑어본 뒤에 엽전 한 꾸러미가 놓여있는 돌판으로 다가가 허리를 구부렸는데요. 심장이 멎는 듯 했답니다.
문=과연 돌판에 명문이 있었던 거죠?
답=그렇습니다. 동쪽 돌판의 첫줄에 ‘영동대장군백제사(寧東大將軍百濟斯)’의 8자가 새겨졌고, 그것은 둘째 줄의 ‘마왕연육십이세계(麻王年六十二歲癸)’로 이어졌습니다.
문=무령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없는 것 같은데요?
답=첫째 줄 마지막 글자가 ‘사’자이고, 둘째 줄 첫 번째가 ‘마왕’이거든요. 연결해보면 ‘사마왕’인거죠. 백제사에 밝은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답니다. “관장님, 사마왕입니다. 아아! 무령왕입니다.”
‘사마’는 바로 무령왕(재위 501~523)의 초명이었거든요. 석판내용을 해석하면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523년 5월7일 서거하셔서 525년 8월12일 대묘(무령왕릉)에 안장한다’는 겁니다.
문=석판이 두 장이었다면서요. 나머지 한 장에서는 어떤 명문이 있었나요?
답=다른 한 장의 앞면에는 ‘죽은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땅을 사서 무덤으로 조성했다’는 내용과 함께 중국 동전인 오수전 90매가 놓여있었습니다.
문=아무리 왕릉을 조성한다 해도 공짜가 아니다. 정상적으로 땅을 구입한거다, 뭐 이런 이야기네요?
답=그렇습니다. 토지신에게 땅을 사서 무덤을 조성했다는 거죠. 그리고 그 매지권 뒤에는 무령왕이 서거한지 3년 뒤인 526년에 서거한 왕비의 이야기를 글로 썼는데요. 왕비가 526년 돌아가신 뒤 27개월만인 529년 2월에 남편과 함께 왕릉에 묻힌다는 사실을 기록한거죠.
문=왕비의 기록은 매지권 뒤에 써놓았네요.
답=그렇습니다. 무령왕이 서거한 뒤 작성한 무령왕의 지석과 매지권을 만들었는데 3년 뒤 왕비가 서거하자 매지권의 뒷면에 왕비의 기록을 덧붙인겁니다. 말하자면 재활용한 거죠.
문=하여간에 이렇게 무덤 주인공의 이름을 확인했으니 두 사람, 흥분했겠는데요?
답=서울대 고고학과를 개설하고, ‘고고학계 태두’로 통하는 김원룡 단장이 훗날 이때를 회고했는데요.
“나는 가슴이 덜컹하고 ‘아이구’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발굴 운이 나빠서 특별히 중요한 발굴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엄청난 발굴을 해서 미쳐 날뛰다가 꿈만 여러 차례 꾸었는데 진짜로 삼국시대 명문이 눈앞에서 튀어났으니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른다”고요.
문=발굴운이 없다는 표현이 재미있네요?
답=정말 운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팠다 하면 금동제 유물이 나오는 반면에 아무리 발굴조사를 벌여도 수확이 별로 없는 고고학자도 있어요. 아무튼 무덤 내부를 돌아본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온게 오후 4시 30분이었는데, 기자들이 일순간 두 사람을 둘러쌌죠.
김원룡 단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부의 광경을 브리핑합니다.
“이것은 무령왕의 무덤입니다.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을 갖춘 완전분입니다. 중국 육조(六朝·후한 멸망후 수나라 통일까지 양쯔강 남쪽에 있었던 6개 왕조)의 ‘네 귀 달린 항아리(사이호)’ 등이 보였습니다” 라고요,
문=현장에 난리가 났겠네요?
답=그렇습니다. 백제 왕릉, 그것도 무령왕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온 첫 번째 고분이었으니까요. 또 고려 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조를 보면 “왕이 523년 5월에 서거했다”고 했는데, 무덤안에서 발견된 명문 내용이 삼국사기 기록과 정확하게 부합하잖아요.
문=삼국사기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한거네요?
답=그렇습니다. 한바탕 난리가 났죠. 사진 기자들이 “사진 좀 찍자”고 아우성쳤습니다. 자칫 통제 불능의 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 결국 “한사람씩, 한커트씩 찍자”는 것으로 타협점을 모색했습니다.
문=그러나 기자들 속성을 보면 너무 순진한 타협 같은데요?
답=가뜩이나 다른 신문에게 물먹었으니까 기자들도 사생결단이었던 거죠. 그러니 각사당 1커트 룰이 지켜지나요. 기자들은 자기 차례가 끝나도 무덤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사고가 터졌는데요. 누군가 무덤길로 들어서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깨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근접촬영을 하다가 ‘귀가 여섯개 달린 항아리(六耳壺)’ 옆에 있던 청동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렸답니다.
문=아니 이건 그야말로 큰 사건인데요?
답=지금 같으면 ‘기레기’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고 문화재 과장 뺨 때린 기자나 숟가락 부러뜨린 기자나 그냥 넘어가지 않았겠죠. 사태가 심각해지자 발굴단의 긴급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 뭐 이런 이야기가 오간 뒤에 천추의 한을 남길 결정을 해버립니다.
문=어떤 결정이었는데요?
답=사실 이때라도 기자들에게 영해를 구하든 쫓아내든 해서 현장을 보존하고 차근차근 조사해야 했는데요. 발굴단에서 “될 수 있는 한 발굴을 빨리 끝내는 편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린 겁니다.
문=그만큼 현장 상황이 급박했나보죠?
답=그래도 그렇죠. 김원룡 단장은 이 결정을 두고두고 자책하고 참회했습니다. “아무리 기자들이 흥분해서 빨리 공개하라고 졸라대도 신중했어야 하는데…. 그만 발굴단이 흥분해서 ‘졸속 발굴’을 결정했으니 얼마나 무식한 짓입니까. 그 책임은 모두 발굴단장인 저(김원룡)에게 있었습니다”라고요.
문=그래서 졸속 발굴이라는 얘기군요?
답=그렇습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밤 8~10시 사이에 무덤 내부에 대한 실측에 들어갔는데요. 발전기 전력으로 전등을 밝혔는데 웬일인지 전등이 꺼졌다가 희미해졌다를 반복했답니다. 그러니 실측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게다가 바닥에는 무너져버린 관재들이 깔려 있었으므로 넘어가기가 불가능했답니다. 그냥 밟고 갈 수밖에 없었죠. 당시 막내로 실측을 담당한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야기로는 체중이 61킬로그램이었는데, 할 수 없니 밟았는데, 다행히 나무판자가 부러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문=아무튼 현장 보존에 실패한거네요?
답=그렇습니다.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어요. 일제 카메라 1대 있었는데 플래시를 연결하는 코드를 엉뚱한 구멍에 꽂고 촬영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현장 유물 수습 사진도 제대로 찍히지 않았습니다.
문=하룻밤 사이에 발굴을 끝내라고 했으니 그런 말도 안되는 실수가 나온거겠죠?
답=그렇습니다. 그렇게 대충 실측하고 대충 사진 찍은 뒤에 밤 10시부터 다음날인 9일 아침 9시까지 11시간은 발굴단원의 스스로의 평가처럼 고고학자로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유물 싹쓸이’ 시간이었답니다. 썩어 내려앉은 널판대기를 들어내고 그 아래에 널린 유물을 모눈종이와 연필 한 자루만 가지고 와서 위치표시를 해가며 수습하기 시작했는데요. 전돌바닥과 틈새로 빽빽이 비집고 나온 잔뿌리에 유물들이 뒤엉켜 한 치 밑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요.
문=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유물을 꺼냈답니까?
답=잔뿌리를 가위로 잘라가며 꺼냈죠. 밤 12시가 되어 최초의 유물인 ‘귀가 여섯개 달린 항아리(육이호)’가 반출됐고. 다음으로 지석과 석수, 그리고 현실에 들어가 입구 쪽의 ‘네 귀달린 항아리(사이호)’, 동으로 만든 잔, 은장식 등을 차례차례 들어냈습니다. 썩어 주저앉은 왕과 왕비의 목관을 들어냈습니다. 왕, 왕비 모두의 금제관식이 입구 쪽 머리 근처에서 나타났답니다. 철야작업으로 내부조사를 일단 마쳐야 했기에 큰 유물만 ‘대충’ 수거하고, 나머지는 큰 삽과 빗자루로 무덤 바닥에서 퍼서 훑어내 자루에 쓸어 담았습니다.
문=예? 삽과 빗자루로 유물을 자루에 쓸어담았다구요?
답=그랬답니다. 여러달, 아니 몇 년이 걸려서라도 사진 찍고, 실측하고, 연구하면서 조심스럽게 했어야 할 작업을 하룻밤 사이에 해치워버린 겁니다.
문=그래서 도굴과 다름없는 최악의 고고학 발굴이라고 하는군요?
답=그렇습니다. 당시 하룻밤 사이의 조사를 담당했던 실무자는 물론이고 김원룡 발굴단장도 기회있을 때마다 ‘우리가 나쁜 놈들’이라고 자책했어요. 예컨대 발굴단의 막내로 조사에 참여한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두고두고 반성합니다.
“우리는, 발굴단은 심하게 말해 도굴꾼만도 못했습니다. 유물층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삽으로 긁어낸 것은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짓이었습니다.”
문=아니, 그래도 고고학을 배웠다는 전문가들인데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요?
답=변명 같지만 생각해보면 해방 이후 이렇게 큰 발굴은 경험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니 이런 엄청난 발견과 발굴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겁니다. 유물유적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보안조치가 마련되지 못했던 겁니다.
문=기자들도 졸속발굴의 책임이 컸네요?
답=물론이죠. 기자들도 발굴 취재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슨 사건 현장 취재하듯 치열한 경쟁을 했으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불행중 다행으로 이 말도 안되는 발굴을 교훈삼아 2년 뒤(1973년)의 경주 천마총 발굴은 그나마 철저한 현장관리와 보도통제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발굴현장의 ‘보안전통’은 이때부터 생겼답니다.
문=어찌 보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인 것 같네요?
답=역사적인 발굴이었던 만큼 숱한 해프닝과 여담이 인구에 회자됐는데요. 이 무령왕릉 발굴 유물들은 모두 서울로 옮겨질 운명이었습니다. 당시 공주박물관은 80여 평의 목조 단층건물이어서 많은 유물을 보관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주 읍민들은 “단 한 점이라도 서울로 가져간다면 실력으로 저지 하겠다”면서 공주박물관 앞에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조사단원과 관계관들은 테러위협을 받았으며 밤에는 박물관 뜰로 돌멩이가 날아왔답니다.
문=분위기 험악했네요?
답=그렇습니다. 그랬다가 당시 충청도 출신인 김종필 국무총리가 “서울에서 연구가 끝나면 반드시 공주 새 박물관에 이관 시키겠다”고 약속하고, 김원룡 박물관장이 가장 낡은 청동제 신발을 들고 “보다시피 이 청동신발이 중병에 걸려 있으니 서울에서 고치지 않으면 썩어 없어진다”고 설득한 뒤에야 서울로 옮겨집니다.
문=우여곡절이 많았네요?
답=한가지 더있습니다. 무령왕릉 출토품 가운데 주요 금제 유물들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여 줬는데요. 글쎄 박대통령이 유물 가운데 왕비의 팔찌를 들고는 “이게 진짜 순금이냐”며 두 손으로 휘어 보았다는 것 아닙니까. 옆에서 지켜보단 김원룡 단장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문=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절대 해서는 안될 유물 훼손인 것 같은데요?
답=그렇습니다. 어찌보면 대통령이나 고고학자나 기자들이나 누구나 고고학 조사와 문화유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었던 겁니다.
문=불과 50년 전의 일인데 정말 수백년 전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를 읽는 것 같네요?
답=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쓸어담은 유물은 108종 3000여점에 달하는데요. 그 중 국보로 지정한 유물만 12건입니다. 아무튼간에 고대사의 비밀을 담은 블랙박스는 1,450년 만에 이런 우여곡절 끝에, 숱한 교훈을 남긴 채 우리 앞에 나타난 겁니다.
문=어쨌든 올해 발굴 50주년을 맞이해서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니 무령왕 부부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겠네요?
답=그러기를 바랍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급격히 쇠퇴한 국력을 가다듬어서 무령왕 때에 “고구려를 여러차례 격파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지 1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니까 백제 무령왕 부부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할 것 같네요.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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