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각자의 취향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겠죠. 금관이나 반가사유상, 석굴암, 불국사 등을 꼽는 분도 있을 거고, 혹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택하는 분도 있겠죠. 그런데 이러한 대표 문화유산 중에 막내라 할 수 있는 문화재가 있는데요, 바로 백제금동대향로인데요. 복제품의 몸값도 수백만원에 이른다는 금동대향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문=백제금동대향로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중 하나라는 것은 알겠는데 막내라는 이유는요?
답=예 가장 늦게 발견되었기 때문에 막내라는거죠. 금동대향로는 1993년에 우연히 발견됐으니까요. 그리고 이 금동대향로는 복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데, 실물크기로 만든 가장 비싼 것은 300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는데요. 특히 일본인들의 경우 사가는 경우가 제법이랍니다. 3만원짜리도 있는데, 워낙 아름다워서 집안에 두고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문=요즘 박물관에서 만드는 굿즈가 인기라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답=예전엔 기념품이라 했는데, 요즘은 굿즈라고 하더라구요. 예전에는 디자인도 그렇고, 쓰임새도 그렇고 해서 박물관에서 만드는 기념품들은 별로 인기가 없었는데, 요즘 일부 품목은 없어서 못판다네요.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파는 굿즈 중에는 고려청자를 모티브로 한 이어폰 케이스가 날개돋힌 듯 팔렸다 합니다. 절판되어서 다시 만들어 팔고 그랬구요.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효명세자의 야간 연회에 불을 밝힌 유리 사각등이 5차까지 완판되었다고 합니다. 예상못해서 수급에 차질을 빚기도 했는데요. 요즘도 팔린다고 하는데요. 엄청 인기였다네요.
이렇게 최근에는 현대적 감각의 굿즈를 개발해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 대향로의 경우엔 실물 그대로 만든 복제품인데도 스테디 셀러가 된 거죠.
문=하긴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백제금동대향로는 엄청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했죠?
답=그렇습니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인접한 이름없는 절터가 있었는데요. 부여군에서는 능산리고분군에 백제고분 모형을 전시해놓고 있었는데, 관광객이 많아져서 주차장을 조성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사전 작업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는데요. 그런데 1993년 12월 초까지 진행된 발굴은 악전고투였답니다. 발굴현장이 계곡쪽이어서 물이 계속 흘러 들어왔다는 겁니다. 발굴단에서는 발굴구덩이를 확보하랴, 흘러들어오는 물을 빼내랴 이중고를 겪었는데요,
문=12월이면 겨울철인데 땅이 얼면 안되는 거 아닙니까?
답=그러니까 별거 없으면 또 겨울을 공으로 보내야 했죠. 그런데 12월 12일 오후 4시 30분쯤 국립공주박물관 발굴단이 대한민국 발굴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월척을 낚습니다.
물구덩이나 다름없는 현장에서 이상한 물체가 드러났어요. 처음 보이는 것이 뚜껑 같은 것이었는데 그게 향로인 줄은 상상도 못했죠. 그러나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라는 것을 직감해서 작업을 중단했답니다. 그리고는 현장 인부들을 퇴근시켰답니다.
문=인부들까지 퇴근 시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답=보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밤사이에 도굴이라도 하면 어쩝니까.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독일인 슐레이만 부부도 결정적인 유물 발굴 때는 인부들에게 강제휴가를 준 다음에 자기들끼리 발굴한 예가 있죠.
어쨌든 박물관은 인부들을 일단 모두 귀가조치 시킨다음 학예직만 모두 모여 오후 5시쯤 작업에 들어가 전등을 밝혀 놓고 8시30분 쯤에 완벽하게 향로를 발굴했죠.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 물을 스펀지로 적셔내면서 1m20㎝ 가량의 타원형 물구덩이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뻘 같은 흙을 걷어냈답니다. 그랬더니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향로가 모습을 드러낸겁니다.
문=발굴단원들이 흥분했겠네요?
답=그렇습니다. 나중에 제가 직접 발굴한 당시 신광섭 공주박물관장한테 그때의 소감을 들어봤는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위대한 문화유산을 내 손으로 발굴해 냈다는 뿌듯한 자부심. 작업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겨울 하늘, 총총한 별들. 가슴이 얼마나 벅찬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어쨌든 조심스럽게 유물을 박물관으로 옮겨가서 흙을 닦아내는 순간 박물관 직원들이 넋을 잃었답니다. 신선이 있는가 하면, 코끼리가 있고, 동자상이 있는가 하면 도요새와 호랑이가 있는 등 숱한 진금이수(珍禽異獸)의 모습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는겁니다.
문=다양한 짐승과 인물이 표현된 거네요?
답=그렇습니다. 향로는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었구요, 뚜껑 꼭지에는 봉황인 듯 같은 새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날고 있었습니다.
뚜껑 윗부분에는 5명의 악사가 5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구요. 뚜껑 전체는 삼신산 형태의 4∼5단이었는데요. 첩첩산중의 자연세계를 표현한 거죠.
문=지난번에 말씀하신 무늬전돌에서도 산수화과 보인다고 말하셨죠?
답=그렇습니다. 그것이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보물 343호 무늬전돌인데요. 그런 산수인물화가 금동대향로에서도 보입니다. 74곳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이 보이구요.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현실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었습니다.
문=그런데 처음에는 이 향로를 중국산으로 봤다면서요?
답=그렇습니다. 중국산이라면 한나라 때 유행한 박산로를 의미하는데요. 박산이라는 것은 중국의 전설에서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사는 산이고, 중국인들의 이상향이거든요. 왜 박산로로 봤냐면 이 발굴된 향로다 너무도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이렇게 잘 만들었다면 응당 ‘중국산’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거죠.
문=일종의 문화패배주의였던 거네요?
답=그렇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높이가 61.9센티이고 무게가 11.8킬로그램이나 되거든요. 그러나 중국 박산로를 보면 백제금동대향로처럼 정교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거든요.
그동안의 연구 끝에 나온 결론은요. 이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국 향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백제 만의 요소를 가미한 거라는데요. 특히 삼국시대 토기나 금속기 등을 보면 산이 중첩되고 봉황이 표현된 것들이 보인니다. 결국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인들의 뛰어난 예술적인 감각과 독창성이 아름다운 연꽃으로 화생했음을 만천하에 알린 걸작품이라는 겁니다.
문=이 발견 또한 엄청 뉴스거리가 됐겠네요?
답=그럼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또한번의 쾌거라 했는데요. 특히 일본 언론도 한국에서의 향로 발굴 사실을 1면 주요기사로 보도했습니다.
문=국제적으로도 중요한 발굴이었다는 거네요?
답=그렇습니다, 물론 향로는 물론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지만 전체 높이 60㎝가 넘는 이 엄청난 대형 향로가 발견된 예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 능산리 출토 향로는 분명 세계 최대의 금동향로였던거요.
문=향로는 사찰의 불전에서 향을 피우는 도구잖아요. 그런데 왜 물구덩이에서 나온거죠?
답=그게 이상하죠. 더 이상한 것은요. 나중에 보니까 향로가 놓여 있었던 사찰의 공방지 바닥에 있던 나무물통 안이었다는 겁니다.
문=그럼 물통 안에 향로를 두었다는 건데 숨겨두었다는 건가요?
답=그렇게 판단합니다. 구덩이 속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는 바로 숨막혔던 백제 멸망의 순간을 증거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백제가 멸망한 660년을 상상해보면요.
나당연합군이 불시에 이 사찰까지 밀려들어 약탈 유린이 벌어지고 스님들은 창졸간에 임금의 분신과도 같은 향로를 감추죠. 왜냐면 이 사찰은 백제 임금들의 무덤인 능산리 고분군 옆에 있으면서 고인이 된 백제 임금들의 제사에 사용된 향로였을테니까요.
문=너무 급박한 상황이라 그냥 나무물통에 던져넣은 거네요?
답=그럴 수도 있구요. 또는 스님들은 그렇게 백제가 멸망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것 같았을 겁니다. 그래서 황급히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친 것이라 볼 수 있어요.
문=그러나 예상과 달리 백제는 멸망해버리잖아요?
답=물론 3년간의 항전이 더 있었지만 어쨌든 스님들은 그 사찰로 돌아올 수 없었죠. 절은 전소되고 공방터 지붕도 무너졌을 거구요. 백제의 혼을 담은 ‘대향로’도 1300년 이상 그 속에 묻혀있었던 거구요.
문=그런 추리는 그럴듯하기는 한데 정설로 삼기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방증자료가 있어야죠.
답=있습니다. 향로가 발견된 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의 목탑지 밑에서 또 하나의 깜짝 놀랄 유물이 발견되는데요. 백제 27대 임금인 위덕왕의 누이동생의 누이동생이자 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을 담은 명문 석조사리감이 확인된 겁니다. 성왕은 불교를 백제중흥의 기반으로 삼은 임금인데요. 그러나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거든요, 그 뒤를 이은 아들 위덕왕이 비명에 간 아버지를 기리며 이 목탑을 지었을 거고, 위덕왕의 누이(성왕의 딸)가 사리를 공양한 거죠.
문=그러나 이 석조사리감 발견하고 백제멸망하고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 않습니까?
답=그렇죠. 그런데 명문 석조사리감의 발견도 중요했습니다만, 출토 양상도 의미심장했답니다. 탑의 중심기둥이 도끼 같은 흉기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고, ‘창왕’명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문=나당연합군이 벌인 짓이라는 건가요?
답=그런 추리를 할 수 있는 거죠.
문=또 하나 궁금한 것은 스님들이 그렇게 촉이 없었나요. 백제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요?
답=스님들 뿐 아니라 왠만한 백제인들은 조국이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그만큼 백제가 강대국이었거든요.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8월에는 유능한 윤충장군이 신라 낙동강 전선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던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켜 신라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문=오히려 백제가 신라를 엄청 괴롭혔네요?
답=그렇습니다. 그러나 의자왕과 백제인들이 모르고 있었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 백제의 공격에 견디다 못한 신라가 648년(백제 의자왕 8년·진덕여왕 2년) 나당 연합군 결성의 밀약을 맺었거든요. 당시 당나라 태종은 신라의 사신(김춘추·태종무열왕·654~661)를 만나 “당나라가 군대를 보내…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문=곤경에 처한 신라 입장에서는 대단한 외교적인 성과였네요?
답=물론 이 이야기 하면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면서 아주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하간에 그렇게 나당동맹을 맺었는데도 백제가 신라를 괴롭히니까 3년 뒤인 651년(의자왕 11년) 당나라 고종이 백제 의자왕에게 “만약 백제가 빼앗은 성을 신라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신라의 요청대로 왕(의자왕)과 결전을 벌일 것”이라고 협박하는 국서까지 보냅니다.
문=그런데도 백제는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던 건가봐요?
답=그렇습니다. 의자왕은 652년 당나라에 조공을 보낸 것을 빼고는 그 뒤부터 사실상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로 운명의 66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문=그러나 의자왕은 우리가 배웠듯이 처음에는 아주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하잖습니까?
답=그렇죠. 처음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통할만큼 지극한 효자였고,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강국의 위세를 떨친 분이죠. 그러나 어느덧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독재자로 변질됐으며 충신들을 쫓아냈죠. 성충(?~656)이 옥사하고 흥수(생몰년 미상)가 귀양 갔습니다. 그 빈 자리를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좌평 임자(생몰년 미상) 같은 인물로 채웠죠.
문=그렇다면 의자왕은 자만심에 빠져서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해 갑작스럽게 나라를 잃었다는 얘기네요.
답=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나당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답니다. 결국 막강한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한 겁니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도착한게 6월21일이고, 7월9일 계백장군과의 황산벌전투가 7월 9일이며, 의자왕이 도망간게 13일이고, 항복한게 18일이니까 너무 빨리 멸망하게 된거죠.
문=의자왕은 항복했지만 백제 부흥운동이 벌어졌잖습니까?
답=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백제의 멸망 연도를 660년이 아니라 663년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어요. 사실 660년 7월18일 의자왕의 항복한 위 한달 반 뒤인 9월3일 당나라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 신료 93명, 병졸 2만명을 압송하여 귀국하는데요. 대신 백제땅은 유인궤 등에게 맡겨 다스리도록 하구요. 그러나 백제는 그냥 있지 않았습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이 승려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문=아니 임금이 항복했으면 끝이 아닌가요?
답=아닙니다. 백제는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이 아닌 지방분권을 추구했던 나라였거든요. 중앙정부는 항복했지만 지방세력들은 그렇지 않은거죠. 근거지에서 암중모색하던 지방세력은 복신과 도침이 부흥군을 조직하자 대거 합세하기 시작합니다. 30살의 장군 흑치상지도 합류합니다. 이들은 의자왕의 아들이면서 왜국에 인질로 잡혀있던 부여풍을 임금으로 추대했는데요. 특히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던 임존성(충남 예산 대흥면~광시면)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다.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임존성을 지켜내자 주변의 200여개 성이 호응했다고 합니다.
문=아니 신라나 당나라나 다 됐다고 생각했을텐데 당황했겠네요?
답=그렇습니다. 심지어 사비성에 주둔하던 나·당 연합군은 부흥군에 의해 고립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662년 7월 당시 당나라군이 장악한 백제의 고토는 웅진성 정도였거든요. 오즉하면 당나라군이 철군할 생각까지 했거든요.
문=좀 더 몰아붙였다면 백제가 다시 부흥할 수도 있었겠네요?
답=그러게요. 당나라의 철군계획은 취소되었답니다. 나당 연합군은 신라에서 웅진도독부로 통하는 보급로를 가로막고 있던 백제부흥군을 격파하면서 가까스로 활로를 찾았구요. 무엇보다 663년 6월 백제부흥군을 혼란에 빠뜨린 사건이 터지는데요. 허울좋은 ‘바지임금’이던 백제의 풍왕이 부흥군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복신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죠.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인 663년 8월27일 드디어 신라와 당나라가 한편이 되고, 백제부흥군과 왜국이 또 한편이 되어 벌인 건곤일척의 국제전이 백강에서 펼쳐지는데요.
문=완전히 국제전쟁이었네요?
답=그랬죠. 이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이 백제부흥군-왜국 연합군의 전선 400척을 궤멸시키는 등 4차례 전투에서 모두 이겼답니다. 백제부흥군의 풍왕은 고구려로 달아났고, 부흥군의 최대거점인 주류성은 함락됐구요. 마지막 남은 보루였던 임존성은 한때는 부흥군의 뛰어난 장수였던 흑치상지의 배신으로 무너졌구요.
문=백제부흥운동은 3년 만에 공식적으로는 막을 내린거네요.
답=그렇습니다. 부여의 절터에 나무물통에 숨겨놓고 며칠만 기다리라는 스님들의 약속이 1300년 넘게 지켜지지 못한거죠. 백제금동대향로에는 이와같은 멸망의 스토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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